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성경으로’,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를 주창(主唱)하며 교회 개혁과 신학의 쇄신을 도모하여 중세의 교권주의, 공로주의, 성상 숭배, 스콜라주의 및 신비주의에 가려졌던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가 전통적으로 믿어온 대로 성육(成肉)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세주로 이해하고 중보자로 높였다. 그리고 성례(聖禮)를 받으면 자동적으로 성령의 은혜를 받는다는 사상을 배격하고 성령께서 자의(自意)로 말씀과 더불어 일하시는 분으로 이해함으로써 성경의 교리와 그리스도를 더 풍성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종교개혁자들은 바울 사도의 말처럼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했다.(고전 2:2)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의롭다 함을 받는 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회복이다. 그것은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신 것을 믿는 종교개혁자들의 믿음에는 차이가 없다.
1. 루터와 칼빈의 삼위일체론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와 칼빈(John Calvin, 1509-1564)은 성경을 따라 신학을 전개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를 논하나 초대 교회의 정통적 삼위일체 교리와 기독론 교리를 견지했다. ‘니케아 삼위일체 신조’(325년)와 ‘칼케돈 신조’(451년)는 그들이 집중적으로 논의한 예수 그리스도의 직능과 칭의교리 언급에는 없으나 이 두 전통적 신조를 두 종교개혁자는 자신들의 기독론뿐 아니라 모든 신학의 근거로 확신했다.
비록 루터와 칼빈은 ‘니케아 신경’에 사용된 ‘호모우시오스’(Homoousios, same in being, 동일본질)가 성경에서 발견되는 말이 아니므로 좋아하지 않았으나 세르베투스(Michael Servetus, ?-1553)와 브란드라타(George Brandrata, 1828-1897) 등 반삼위일체론자들과 유니테리안들에 맞서 삼위일체 교리를 변증하기 위해 성경과 니케아 신경에 호소할 때는 용어가 문제 되지 않았다. 특히 칼빈은 니케아의 삼위일체 교리가 철저하게 성경에 근거한다는 것을 교부시대 이후 어느 신학자보다도 확실하게 강조했다.
루터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認識)이 ‘그리스도 안’에서와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가능하다고 말했다. 하나님은 본질상 살아 끝없이 일하시는 의지이시며 그의 창조 활동은 영원히 계속된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만물을 주관하시며, 계시지 않은 곳이 없으신 분이시다. 마귀도 하나님 권세 아래 있으나, 하나님 자신은 악의 근원자(根源者)가 아니다. 악의 근원자는 악한 자이다. 사과나무의 좋고 나쁜 것은 나무의 질에 달린 것이지 심은 자에 달린 것이 아닌 것과 같다고 예를 들어 말한다. 그러면서도 그런 질문은 어려운 것이라고 하면서 세상에 존재하는 악의 문제는 하나님의 비밀에 속한다고 말한다.
루터 신관의 특징 중 하나는 하나님을 ‘은닉(隱匿)된 하나님’(사 45:15)과 ‘계시 된 하나님’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은닉된 하나님’이라는 개념에서 루터는 인간의 강력한 죄, 죽음, 마귀를 허용하시는 그런 부분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즉 하나님에게 접근할 수 없는 면이라고 한다. ‘계시 된 하나님’은 성육(成肉) 된 하나님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이시며, 설교를 통해 자신을 나타내시며 경배를 받으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한다.
루터는 어거스틴(Augustine of Hippo, 354-430)을 따라 하나님은 삼위(三位) 안에 하나시라는 삼위일체(三位一體)를 분명히 말한다. 각 위(位)가 마치 다른 위는 계시지 않는다는 듯이 온전한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이 일하시는 데서 삼위의 각 위가 일하신다.
그런데 루터는 지적(知的)인 논리로 삼위일체를 논증하려고 하기보다는 일상의 설교에서 늘 삼위일체를 따라 말한다. 하나님 말씀이 곧 그리스도이다. 그러나 그것은 성령을 통해 효능을 발취한다고 말하거나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고 그리스도의 몸이며 성령의 전(殿)이라는 식으로 말한다.
루터와 달리 칼빈은 보다 지적(知的)으로 신론에 접근했다. 우리의 정신 속에 하나님에 대한 직관(直觀) 다시 말해 종교의 씨앗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칼빈은 우주 속에 계시(啓示) 된 하나님에 관하여 말하고 하나님은 자신을 우주 속에 나타내셨으나 인간은 죄로 눈이 어두워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이 성경에 당신 자신을 계시하신다고 했다. 이렇게 계시 된 말씀에서 하나님을 창조주 하나님으로 그리고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인식한다.
루터는 구원론적인 관심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께 접근하는 반면에 칼빈은 보다 인식론적으로 창조주 하나님께서 계시를 주셨으나 우매하여 깨닫지 못한 인간에게 말씀을 주시고 중보자 아들을 주시는 구원의 하나님으로 알고 접근한다.
신론에 대한 이러한 루터와 칼빈의 이해 차이는 루터교회 신앙고백이나 요리문답과 개혁교회 신앙고백서나 요리문답에 그대로 잘 반영되어 있다. 루터교회는 인간의 죄와 구원과 구속에 대한 고백과 문답에서 시작하는 반면에 개혁교회는 성경과 하나님과 하나님의 작정과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는 고백과 문답으로 시작한다.
이런 루터적인 경향은 경건주의, 부흥주의, 복음주의로 전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유니테리언(Unitarian)들 즉 반(反)삼위일체론자들은 성경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부인하고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성령이 인격적인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부인한다. 그들은 다른 말로 하면 초대교회 시대의 단일신론자(單一神論者)들의 후예이다.
반(反)삼위일체 운동은 재세례파(Anabaptism) 가운데 상당히 널리 피져 있었다. 1550년에는 베니스에서 반삼위일체론을 지지하는 재세례파 대표 60명이 모여 수련회를 열기도 했다. 그들은 이탈리아에서 계속 회합을 가질 수 없게 되자 스위스 남부로 자리로 옮겨 거기서 칼빈의 교회를 비판하는 등 칼빈을 자극했다.
1553년 세르베투스(Michael Servetus, ?-1553)가 처형된 후 폴란드와 지벤뷔르겐(Sieben-burgen) 등지에서 수많은 반(反)삼위일체론 자들이 모임을 가졌다. 그들의 지도자인 파우스토 소시누스(Faustus Socinus, 1539-1604)는 1578년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De Jesu Christo Salvatore)라는 책을 썼으며, 1579년 폴란드로 가서 라코우(Rakow)에 유니데리안(Unitarian) 교회를 세웠다. 1605년 그의 제자들은 그의 사상을 담은 ‘라코우 요리문답서’를 내놓았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그들은 예수회의 탄압을 받았다. 1638년 라코우 학교는 파괴되었고 1658년에 아르미니안과 같은 종파 소시니안(Socinians)은 폴란드에서 추방되어 일부는 지벤뷔르겐으로 다른 일부는 네덜란드로 가서 아르미니안파나 메도나이트와 합류했다.
소시누스는 성경이 진리의 유일한 자료이지만 오류(誤謬)와 비본질적인 게 포함되어 있다고 하며 이성(理性)과 상식에 배치되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삼위일체 교리,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그의 속죄 사역을 부정하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소시누스의 사상이 16세기와 17세기에는 별로 영향을 미치지 못했지만 18세기 이후 일어난 자유주의 신학에는 많은 영향을 미쳤다.
2. 루터의 기독론
(1) 루터의 ‘그리스도 인격’에 대한 이해
루터는 자기 기독론을 위해 빌립보 2:5-11을 본문으로 택했다. 성육을 하시기 이전 계시에 관해 관심 두기보다는 종의 형상을 입은 예수에 초점을 둔다. 다시 말하면 요한복음 1:1의 로고스에 관한 말씀을 사변하기보다는 당장 구원과 관계가 있는 예수님에 관심을 기울였다.
루터는 ‘삼위일체교리’와 ‘기독론교리’를 기독론적이며 구원론적인 관점에서 보았다. “예수 그리스도는 계시 된 하나님이시고,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주님이시다.”라고 그는 고백한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사역을 통해 우리 대신 죄를 맡아 지시고 우리 인간들을 위해 하나님의 의(義)가 계시 되도록 율법 아래 스스로 죄인이 되셨다.”
루터는 또 451년 ‘칼케돈 공의회’(Council of Chalcedon)에서 기독론 교의를 두고 말하게 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상호교관(相互交灌) 교리에 근거하여 편재설(遍在說)을 주장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은 상호 교관(敎觀)하므로 부활 승천하신 예수의 신성과 인성이 어디든지 같이 계신다고 한다.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만일 내가 그리스도의 인성만이 날 위해 고난당하셨다고 믿는다면 그리스도는 내게는 좋지 않은 구세주일 뿐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자신도 구세주를 필요로 하는 존재일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성과 인성은 한 인격(one Person)이기 때문에 성경도 이러한 인격의 통일성을 위해 인성이 경험하는 모든 것을 신성에다 돌리며 또 그것이 진리 안에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셨다는 말은 바로 그리스도 그분(person)이 고난을 받고 죽으셨음을 말한다. 그의 인격이야말로 참 하나님이심을 시인해야 하며 하나님의 아들이 고난당하셨다고 말하는 게 옳다. 설사 신성은 고난당하시지 않았다고 어느 정도 말할 수 있다 하더라도 인성을 가지셨으면서도 하나님이신 인격이 고난을 받으신 것이다.”
루터는 칼빈의 소위 ‘분리 기독론’(Trennungs-Christologie)에 대항해 강한 반론을 제기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어떤 한 장소에 신성과 인성의 인격으로 계실 수 없다면 그리고 다른 곳에서는 인성이 배제된 인격으로 계신다면 그는 부족한 그리스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럴 수 없다고 한다. “하나님이 나와 같이하신다고 한다면 그의 인성도 나와 같이하심을 인정해야 한다.”라고 했다.
그리스도의 양성(兩性)은 구별된다. 그러나 상호교관(相互交灌)은 연결이다. 즉 그리스도의 인격은 하나의 인격(eine Person)이지 둘이 아니다. 이 인격은 곧 하나님이오 사람이시다. 그러므로 어떤 이는 루터가 단성론적 알렉산드리아 신학이 말하는 가현설 색채를 떤 기독론과 양태론(樣態論)에 기울어지는 경향이라고 평하나 유의해야 할 바는 루터의 기독론 표현이 객관적이며 사변적인 기독론이 아니라 실존적이며 인격적이며 구원론이면서 찬양과 영광을 돌리는 기독론에 머물려고 한다는 점이다.
그리스 신학과 동방 신학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주제로 하였다. 그럼으로써 인간이 그리스도의 성찬의 몸을 통해 죽음과 허무로부터 구원을 얻는다고 한다. 즉 그리스도께서 성육(成肉)하시고 부활하셔서 신적(神的) 불사(不死)를 우리 인간을 위해 가져다주신 이로 이해한다.
그런가 하면 서방의 라틴 신학에서는 안셀무스(Anselm of Canterbury, 1033-1109)의 ‘보상 기독론’에서 보듯이 그리스도께서 법적으로 우리의 죄 값을 치르시는 이로 이해한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인을 사하시는 모범적인 그리스도로 이해한다. 다시 말하면 ‘법적인 모방 기독론’을 말한다.
이에 반해 루터는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진정으로 내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하나님 자신에 대한 기독론적이며 구원론적인 질문을 던진다. 신적인 것도 아니고 불멸의 것에 대한 것도 아니며, 법적인 보상설의 신적인 중요성에 관해 묻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격적으로 취급하시는 일에 관하여 묻는다.
그래서 루터는 기독론이 곧 구원론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는 무엇보다도 먼저 그의 사역(事役)을 통해서만 옳게 파악할 수 있다. 나는 그의 사역을 이렇게 이해한다. 그의 사역은 나를 위하여 있었던 것으로 들음에서 난 믿음 안에서 나를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 계시 된 하나님의 완전한 행사이다.” 인격(Person)과 사역(works)의 통일성 속에서 즉 중보자와 중보자 직의 통일성 속에 신앙인은 아버지와 아들 즉 하나님 아버지와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하나이심(unio)과 통일성(unitas)을 인식한다.
즉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은 따로 보거나 나중에 생각하여 연결 짓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면서 루터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하나님의 사역으로 이해한다. 즉 그리스도는 하나님 자신이라고 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 자신이 로고스 안에서 인간이 되신 바로 그분이시다. 그래서 그는 탄생에서 죽을 때까지 인성 안에서 일하시는 이로 참으로 현존하시는 분이시다.
알트하우스(P. Althaus)는 루터의 이런 사상을 가리켜 기독론적이며 구원론적인 신고난설(神否難說, Deipassianismus, 참조 성부고난설, Patripassianismus)이라고 묘사한다. 루터가 말하는 건 증보자 안에 있는 양성(兩性)을 두고 형이상학적으로 논하는 하나(Einheit)가 아니고 중보자의 인격과 사역이라는 하나 속에서 나를 위하시는 아버지와 아들의 인격적인 하나가 하나님께서 설명하시는 말씀을 통해 신앙의 확신을 불러일으킨다고 한다.
기독교 역사의 초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교회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심을 강조한 나머지 가현설(假現說)의 경향을 나타내기 일쑤였는데 루터는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시라고 강조하는 만큼 또한 참사람이심을 강조한다. 반신반인(半神半人)이 아니고 온전한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온전한 사람이시라고 강조한다.
루터는 논리적인 정통주의가 우리의 구원에 불가결하다거나 또 구원에 대한 확신을 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인성 속에 계시를 통해 현존하신다는 것이 구원에 불가결하고 확신을 주는 인식이라고 한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그분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 하나님도 알지 못한다.”
루터는 전통적으로 믿어온 양성(兩性) 교리를 구원론적이고 실존적이며 실제적인 것으로서 즉 삶에 필수적이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당신 자신을 인격으로 나타내시되 사람들이 중보적(仲保的) 인격 안에서(그의 사역 안에서) 말씀을 통해, 믿음을 통해, 신뢰를 통해 구원받는 것임을 깨닫도록 나타내신다고 한다.
루터는 전통적인 이해를 따라 하나님의 말씀의 신적인 인격(persona divina)을 본질적으로 신성과 동일시 하는 가운데 신적인 인격이 인간적인 인격(persona humana)을 포용한 것이 아니고 인성(naura humana)을 포용한 것이라고 이해했다.
(2) 루터의 그리스도 직분에 대한 이해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자유’(The Freedom of Christian, 1520)에서 피력하는 바와 같이 예수의 직분에 대해 칼빈과는 다르게 접근한다. 칼빈은 그리스도를 그분의 사역에서 출발하여 인격에 접근함으로 이해하는 반면 루터는 그리스도의 인격에서 출발하여 그의 사역을 인격과 함께 종합적으로 이해한다.
루터는 예수그리스도를 표상(表象)이요, 징표(徵標)로 이해함과 동시에 모범자요 구원자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그의 기독론은 그리스도를 모범으로 삼는 기독론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신앙의 모범이 되는 분이시지만 그는 신앙의 중재자라고 한다.
그리스도의 중요한 직임은 은혜와 죄 사하심을 가르치시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하며 율법을 설교하는 일인데 가장 중요한 일은 인간을 구속하시는 일이다. 즉 사람을 죄와 죽음과 마귀와 율법에서 벗어나게 하는 일이다.
그는 스스로 죄를 짐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진정시키시며 그리스도 자신의 사랑과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의(義)가 우리 사람들에게 미치도록 하신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죽음을 감수하고 죽음을 극복하신 최선의 제사장이시며 또한 우리의 왕이시다. 그러므로 그는 영원히 통치하신다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왕과 제사장이라는 이 두 직능은 전통적으로 ‘그리스도’라는 칭호에서부터 이해했는데 선지자 직은 왕과 제사장의 두 직분에 근거하여 말할 수 있다고 루터는 이해한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선지자 직은 왕과 제사장직과는 좀 다른 사역으로 간주한다.
3. 칼빈의 기독론
칼빈의 ‘기독교강요’ 1559년 판은 4권으로 되어 있다. 창조, 구원, 성화, 종말론을 포함한 교회론으로 구분이 된다. 즉 ‘신론’(神論)에서는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관하여 논하고 ‘하나님 아들과 칭의’(稱義)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식하는 일에 관하여, ‘성령과 성화’(聖化)에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어떻게 받게 되며 그럼으로써 우리가 성장하여 어떤 열매를 맺을 것이며 어떤 결과에 달할 것인가에 대해 그리고 ‘구원의 수단’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그리스도와 연합하도록 인도하시며 그 안에 거하도록 하시는 외적인 수단과 도우심에 관하여 논한다.
‘기독교강요’ 제2권에서는 4단계로 인간과 죄, 율법, 구약, 그리스도와 그의 구속 사역(II, 12-17)에 관해 논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구속 사역에 관한 장에서는 6가지로 말하고 있다.
첫째,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하신 목적이 영원 전부터 정하신 중보자의 직분을 감당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을 먼저 강조하고,
둘째, 그리스도께서 그의 육체를 하늘에서부터 가져오셨다는 재세례파의 메노 시몬스(Menno Simons, 1496-1561)의 가현설적인 가르침에 반대하며 그리스도의 인간적인 육체의 참 성질에 관해 논한다.
셋째, 중보자의 한 인격이 어떻게 양성(兩性)을 지니는가 하는 문제를 논하면서 세르베투스, 블란드라타 등에 반대하여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들이심은 마리아에게서 태어날 때부터가 아니고 영원 전부터라고 하는 것을 강조한다.
넷째, 우리를 위한(pro nobis)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으로서 중보자의 삼직(三職)을 논한다. 그리스도의 선지자, 제사장, 왕의 삼직은 루터나 다른 개혁자들과 달리 칼빈에게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접근이다.
다섯째, 기독론 고백의 구원론적 실제에 관해 즉 중보자의 죽음, 부활과 승천에 관하여 논하고,
여섯째, 공로(功勞)의 개념이 엄밀하게 본래적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직분에 부합하는 것인지에 관하여 논한다.
칼빈은 아담이 죄를 범하지 않았더라면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지 않으셨을 것이라는 루터파 신학자 오시안더(Andreas Osiander, 1489-1552)의 논의를 거부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경륜에서 설명하려고 한다.
칼빈은 성육에 대한 오시안더나 들스스코주스의 사변적인 논의를 거부하고 성육신을 구원 역사적으로 다시 말하면 아담으로부터 죄가 있게 되었다는 점과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는다는 인간론적이며 구원론적인 관점에서 파악한다. 그것은 곧 하나님 이해와 예정론(豫定論, Predestination)으로 돌아가 이해하는 것이다.
초기에 칼빈은 즉 1536년 판 ‘기독교강요’에서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순종을 안셀무스(Anselm of Canterbury, 1033-1109)의 보상 기독론을 따라 이해하였다. 즉 그리스도의 죽음은 형벌로 이해할 뿐 아니라 우리를 위한 충분한 보상 행위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후에 1543년 판에서는 그리스도의 삼직을 파악하는 데서 이해한다. 그리스도 인성의 의미는 안셀무스식으로 볼 수 있으나 그리스도 신성의 의미는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of Alexandria, 296-373)의 ‘말씀의 성육’으로 이해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루터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하나의 인격을 이루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전통적으로 견지해 온 ‘속성의 교관(敎觀)’을 그리스도를 이해하는 근거로 삼고 있으나 칼빈은 하나님의 구원 경륜(經綸)에 호소하여 그리스도의 삼직(三職)에 근거를 둔다.
중보자의 직분을 두고 말할 때는 그리스도의 신성이나 인성을 나누어 강조할 수 없다고 한다. 칼빈이 그리스도의 양성은 혼합되거나 분리될 수 없다고 하는 점에서는 ‘칼케돈의 신조’를 따라 말한 것이나 양성은 그리스도의 중보자 직에 비추어 이해해야 한다는 말은 ‘칼케돈 신조’(451년)를 넘어서 덧붙여 말하는 것이다.
칼빈은 성육신하신 ‘영원하신 말씀’이나 양성(兩性)의 실체적인 연합으로 이루어진 신적인 인격에 관해 말하기보다는 분리해서 생각할 수가 없는 중보자 예수그리스도와 그의 중보자로서 직분에 관하여 훨씬 더 많이 언급한다.
루터는 그리스도의 직분론(職分論)에서 기독론을 전개한 적이 없으나 멜란히톤(Philip Melanchthon, 1497-1560)은 그리스도를 중보자(仲保者), 구속자(救贖者), 구세주(救世主), 왕, 제사장, 목자 등 여러 직명을 들어 말한다. 그러나 칼빈은 중보자의 사역에 관해 구약에서 말하는 세 직분을 언급하면서 말한다.
칼빈은 ‘기독교강요’ 첫판과 ‘제네바 교리문답서’에는 그리스도의 삼직 가운데 왕직을 먼저 들고 있으나, 1559년 판에서는 두 번째로 들어 말한다. 1545년 이후부터는 선지자 직을 첫 번째로 다루고 있다. 그런가 하면 제사장직은 언제나 왕직 다음으로 들어 말한다. 그러나 정통주의에서 그리고 역사에서는 일반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선지자 직을 먼저 들고 그다음에 제사장직 그리고 끝에 왕직의 순서로 논한다.
칼빈은 중보자의 신성과 인성의 양성(兩性) 개념이나 양성이 하나를 이루고 있다고 하는 개념을 추상적으로 이해하기보다는 구원 역사적으로 직분의 개념을 통해 구체적으로 이해하려고 한다. 즉 칼빈은 구약의 선지자, 왕, 제사장의 직분을 따라 그리스도의 삼직(三職)을 이해하되 그리스도의 신성은 이미 율법 안에 현존하셨던 것으로 이해하며, 창조의 중보자로서 하나님의 영원한 로고스의 인격과 구원의 중보자로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우연적(contineent) 인격을 구분하여 본다.
그리스도를 ‘창조의 중보자’와 ‘구원의 중보자’로 구별해서 보는 견해는 성령론에서도 볼 수 있다. 즉 온 우주의 창조와의 관련하여 볼 수 있는 섭리자(攝理者)로서 또 성령과 예정의 특별한 섭리자로서 성령으로 구별해 본다. 그리고 이런 구별은 더 나아가 인간을 창세기 1장에서 보여 주는 피조물로서 인간과 중보자를 통해 다시 말하면 성령으로 중생한 구원받은 인간으로 구별해 보는 데까지 부연한다.
루터는 그리스도의 선지자적 직능을 제사장 직능에 포함 시켜 본 데 반해 칼빈은 이를 따로 본다. 칼빈은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시고 기도하시고 말씀 선포하신 일을 선지자 직능에 속한 것으로 보며, 선지자적 직능은 그의 지상 사역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열려진 은혜의 시대에도 수행하시는 직능으로 이해한다.(기독교강요 II, 15,16)
그리스도와 그의 가르침 안에서 모든 선지자의 예언이 성취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성령으로 영감 된 성경 말씀의 증거와 그 말씀을 듣는 자들로 신앙을 고백하게 하는 성령의 역사가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선지자적 말씀전파와 행하심의 연장이라고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사장 직능을 현재도 수행하시듯이 선지자의 직능도 계속 수행하신다는 이야기다.
이같이 칼빈의 기독론에서 두드러진 특징은 그리스도의 직능(職能)을 인식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의 사역을 예정 아래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칼빈의 합리적 사고는 특히 기독론 중에서 ‘그리스도께서 지옥에 내려가신 것’에 대한 해석에서 잘 드러난다. 그리스도께서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건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는 말씀인데 우리 번역에는 제외된 부분이다.
칼빈은 여러 가지 설을 소개한 후에 자신은 심리학적으로 이해하려고 한다. 즉 예수의 십자가상에서 당한 영혼의 고난이 곧 지옥이라고 하며, 이 영혼의 고난이 곧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으신 것이라고 이해한다. 칼빈은 그리스도께서 이 고통을 반드시 겪어야 하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이 고통을 견디지 못하셨다면 그는 단지 육체를 구원하는 구원자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II, 16, 12) 칼빈은 기독론을 그리스도의 직능에서부터 접근하나 그리스도의 특별한 존재에 대하여 거듭 논하고 강조하며 또한 기독론의 전통을 따라 기독론을 구원론적으로 이해한다.(*)
글쓴이 / 김영재 교수(서울대 종교학과, 영국 Clifton Theological College 수학, 독일 Wuppertal Kirchliche Hochschule 수학, 총신신대원 편목, 독일 Phi1ipps Universitat zu Marburg에서 신학박사, 독일 포이딩겐 독일인교회, 미국의 미네소타와 아틀란타의 한인교회 목회, 서울대 강사, 총신대 신학대학원의 교수,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역사신학 교수 역임, 저서: Der Protestantismus in Korea und die calvinistische Tradition, Peter D Lang, Frankfurt am Maln, 1981. 외 다수의 저서와 역서) 출처: 김영재 저 ‘기독교 교리사’ (서울, 합신대학원 출판부), 2009.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