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사

교리를 알면 성경이 보인다(2) 교리사의 의미와 과제

객관적인 교리(敎理) 보다는 주관적인 체험(體驗)과 경건생활을 강조한 독일의 경건주의(敬虔主義, Pietism) 주창자들, (좌로부터) Philipp Jakob Spener(1635-1705), August Hermann Francke(1663-1727), Zinzendorf(1700-1760) 

제1장 교리의미(2)

3. 교회 전통과 교의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

교회 전통 곧 교의(敎義) 또는 교리(敎理)의 역사에 대한 이해는 교회사관의 유형을 그대로 따른다. 교리사(敎理史)에 대한 이해는 교회관에 따라 세 기지 유령으로 분류해 볼 수 있다.3) 즉 로마 가톨릭의 교회사 이해와 종교개혁의 교회사 이해 그리고 신령주의(spiritualism)의 교회사 이해이다.

(1) 로마 가톨릭의 교의(敎義) 이해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으로 보고 이를 역사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가톨릭교회(보편적인 우주적 교회)와 동일시하는 로마 가톨릭교회는 교회사를 그리스도 성육(成肉)의 직접적인 계속으로 보아 교회사를 예수 그리그도의 역사로 본다. 이 견해에 따르면 교회는 다만 성장하는 유기체(有機體)이고 교의는 동일성과 계속성을 지닌 채 그대로 발전하는 것이다.(로마 가톨릭교회가 한 번 확정한 교의는 수정 할 수 없다는 의미) 그러므로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공의회가 교의(敎義)로 받아들인 교리 이해는 곧 성경에 대한 올바른 권위 있는 해석으로 간주하며 그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교회의 전통은 무조건 받아들여 준수해야 하는 것이라고 여긴다.          

부연하면 로마 가톨릭교회는 교의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자의 모임으로서의 교회’의 응답으로 보기보다는 회중을 가르치는 성직단(聖職團)의 연구라고 본다. 교의는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진리임과 동시에 우리의 신앙을 위해 교회가 제의한 것이라고 말하는가 하면 교의는 교회의 공의회 또는 교황이나 추기경 회의의 결정을 통해 정의되거나 또는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사실을 통해 정의되는 진리를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4)

따라서 이러한 로마 가톨릭교회의 견해에 의하면 교회는 교리문제에 관한 한 절대 오류(誤謬)가 없으며 따라서 교회에 의해 제의(提議) 된 교의는 권위가 있을 뿐더러 어떤 경우도 변경되거나 거부될 수 없다.

(2) 신령주의자들의 교의 이해

이 같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의(敎義) 이해와 상반(相反) 되는 교의 이해는 소위 기독교 종교의 영적인 면을 중시하고 추구하는 신령주의(神靈主義, spiritualism) 자들의 교의 이해이다. 교의에 대해 신령주의적인 이해를 가진 이들은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계시의 역사성의 상관  관계를 영적으로 해석하려고 한다. 그리고 교회를 언제나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에서 이해하려고 하며 교회를 형이상학의 수직관계에서 보고 역사의 수평관계에서는 보지 않는다.

따라서 신령주의 자들은 교회의 역사적인 유산과 전통을 존중하지 않으므로 교의의 역사적인 연속성(連續性, continuity)을 인정하지 않고 단절(斷切) 또는 불연속성(discontinuity)을 서슴없이 선언한다. 다시 말하면 성경을 이해함에 있어서 역사적인 교회 공의회의 해석 즉 교의나 교회의 결정에 구애 받지 않고 각자의 주관적인 성경해석을 중시한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교의에 있어서도 주관주의와 분리주의에 빠진다.

(3) 종교개혁자들의 교의 이해

위에서 말한 두 대립되는 견해의 중용(中庸)을 취하는 이해가 곧 종교 개혁자들의 견해이다. 종교개혁자들이 교회개혁을 주창(主唱)하다 보니까 문제로 대두 된 것이 교회의 역사적인 계속성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은 로마 가톨릭의 교회에 대한 이해 즉 로마 가톨릭교회는 곧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과 일치한다고 보는 견해를 거부했다.    

종교개혁자들은 교회가 역사적으로 존재해 왔으며 자신들 역시 지체로 속해 있는 가톨릭교회가 자신들이 생각하는 옳은 교회와는 다르다는 점을 발견하였다. 종교개혁자들은 그러한 긴장 가운데 ‘신앙하는 교회’와 ‘역사적인 교회’를 ‘보이지 않는 교회’(不可見的 敎會)와 ‘보이는 교회’(可見的 敎會)라는 개념으로 표현한다. 종교 개혁자들은 역사에서 단절(斷切) 됨이 없이 고리처럼 이어져 내려오는 조용히 신앙하며 진리를 증거 하는 이들의 교회를 합법적인 교회라고 하는 반면에 불법으로 인정된 교회는 잘못된 교회로 흑은 이단으로 단정한다. 그리고 복음 선포의 진실과 신앙의 순수성만이 교회의 계속성을 입증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복음을 이해함에 있어서는 주관적인 이해에만 의존하지 않고 교회의 역사와 전통적인 해석을 존중하는 가운데서 바른 이해에 이르려고 시도했다. 종교개혁자들은 성경만 신앙의 표준으로 심는다고 하고 성경을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교의(敎義)를 일단 성경에 비추어 이해하고 교회의 권위와 신빙성을 인정한다.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교의(敎義)는 그것이 생성(生成) 되던 당시의 시대로 소급해서 이해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교의는 필요에 따라 작성되었음을 인식하고 그것이 생성되던 역사적인 상황을 파악함으로써 교의를 바로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종교개혁의 교회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교의(敎義)를 무오(無誤)한 신앙고백으로 주장하지는 않았다. 루터를 위시하여 다른 개혁자들이 초대교회 시대의 공의회(Church Council)의 권위를 인정하였으나 ‘신앙의 보증’이 필요하기 때문이라든지 교회법적으로 혹은 신학적으로 공의회에 의미를 부여해서가 아니고 공의회의 결정이 성경과 일치하고 잘못된 이단 교리에 대하여 성경의 가르침을 변호(辯護)했다는 뜻에서 인정하였다.

루터, 츠빙글리(Ulrich Zwingli, 1484-1531), 칼빈(Johannes Calvin,1509-1564)은 이런 교회의 결정을 오류가 없는 교의(敎義)라는 의미가 아닌 신앙고백이라는 의미에서 이해했으며, 따라서 그들은 교회 공의회의 결정을 초대교회가 이해하는 대로 받아들였다. 종교개혁 시대에 여러 교회들이 형성하고 채택한 교리(敎理)를 교의(敎義)라고 부르지 않고 신앙고백(信仰告白, Confession, Bekenntnis)이라고 부른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4. ‘교의 없는 기독교’ 주장

종교개혁 이후 약 1세기 동안의 기간을 정통주의시대라고 하는데 이 시기에 개신교(改新敎) 신학자들은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항하는 한편 루터교회(Lutheran Church)와 개혁교회(Reformed church)의 신학자들은 각자가 믿는 교리(敎理)를 공고히 하고 체계화(體系化) 하는 일에 힘썼다. 그리하여 이 시대의 신학은 객관적인 교리를 강조하는 일에 힘쓴 나머지 중세기의 스콜라적(scholastic)이며 사변적(思辨的)인 신학의 경향을 띠면서 종교개혁 당시의 생동성(生動性)을 잃게 되었다.      

이 같이 교회가 객관적인 교리(敎理)를 강조하는 일에 힘쓰면서 대체로 영적인 침체에 빠지게 되자 이에 대한 반발과 반성에서 17세기 후반에 네덜란드와 독일에서는 신자 각자의 내면적인 영적 생동성을 추구하는 경건주의(敬虔主義, Pietism)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유럽대륙에서 있었던 현상이다. 정통주의적 개혁신학을 지켜 온 영국의 청교도들은 국교인 앵글리칸교회(Anglican Church,  Episcopal Church)가 더 철저하게 개혁되어야 한다고 끊임없이 주창한 까닭에 오랜 핍박을 받았지만 신앙의 생동성을 잃지 않았고 경건한 삶을 살았으며 네덜란드에서 일어난 경건주의 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슈페너(Philipp Jakob Spener, 1635-1705), 프랑케(August Hermann Francke, 1663-1727), 진젠도르프(Zinzendorf, 1700-1760)가 주도한 독일 경건주의는 중생, 회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사람이 되고 새 사람으로 사는 일 등의 교리를 강조함으로써 객관적인 교리(敎理) 보다는 주관적인 체험(體驗)과 경건생활을 강조했다. 경건주의자들은 교리를 중시하는 정통주의에 대한 반동(反動)으로 교리보다는 성경만을 중요시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교의 없는 기독교’를 주장했다.

‘편견 없이 본 교회와 이단 역사’(Unparteiische Kirchen-und Ketzerhistorie, 1714)를 쓴 경건주의 교회사가 아놀드(Gottfried Arnold, 1666-1714)는 이런 사상을 가진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초대교회는 이상적이었으나 교회는 역사와 더불어 점점 타락하게 되었다고 본다. 이런 교리관(敎理觀)과 교회관은 전통적이며 제도적인 교회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 여러 운동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런 부정적이며 분리주의적인 교회관은 경건주의 신앙을 전수 받은 부흥주의 신앙을 통해 한국교회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진젠도르프가 주도하던 경건주의자들 즉 모라비안(Moravian)들의 영향으로 영국에서는 교회직제를 부인한 플리머스 형제교회(Plymouth Brethren Church)가 생겼고 일본의 우치무라 간조(内村鑑三, 1861-1930, 사진)에게서 비롯된 일본의 무교회주의(無敎會主義)는 플리머스 형제들과 퀘이커들(Quakers)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들이 가진 교회관과 비슷한 교회관을 가지고 있다. 일제(日帝) 시대 때부터 활동한 일본어를 해독하는 한국의 많은 목사들도 우치무라의 저서나 그의 제자 구로사키 고오키치(黑崎 幸吉, 1886-1970)의 주석을 통해 분리주의적인 교회관의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경건주의와 거의 동시대에 일어난 계몽주의(啓蒙主義, Enlightenment) 신학자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경건주의 자들과는 다른 시각에서 ‘교의(敎義) 없는 기독교’를 주창하였다. 계몽사조의 대표적인 신학자 레싱(Gotthold Ephraim Lessing, 1729-1781)이나 제믈러(Johann Salomo Semler, 1725-1791) 등은 성경을 비판하는 견지에서 ‘교의(敎義) 없는 기독교’를 말하면서 기독교의 생성(生成)을 밝히는 기독교에 대한 역사적인 연구를 주창(主唱)했다. 그리고 계몽주의 신학자들은 합리주의(合理主義, Rationalism)에 근거하여 기독교의 교의(敎義)가 자신들이 생각하는 본래의 기독교 종교의 가르침에서 왜곡(歪曲)되었다고 보고 ‘교의(敎義) 없는 기독교 본래(本來)의 기독교’를 추구한다고 선언했다.

이 같이 경건주의 자들이나 신령주의 자들은 성경만 존중하느라고 ‘교의(敎義) 없는 기독교’를 말하는 반면에 계몽주의 신학자나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성경의 정경성(正經性)을 부인할 뿐 아니라 교의(敎義)와 교회의 전통(傳統)을 거부하면서 ‘교의(敎義) 없는 기독교’를 말한다.

5. 성경과 교의(敎義)

성경에 대하여 비판적인 견해를 가진 합리주의자들뿐 아니라 성경에 충실하려는 경건주의와 신령주의 신자들도 ‘교의 없는 기독교’를 원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전술한 바와 같다. 신령적적인 신앙을 가진 이들이 성경에 충실하려고 하면서도 기독교의 교의(敎義)를 소홀히 생각하는 이유는 로제(Bernhard Lohse, 1928-1997)가 지적한 바와 같이 성경과 교의의 기능과 역할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5)   

  • 성경(聖經)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인격에 호소하는 반면에 교의(敎義)는 이를 본체론적인(ontological) 개념으로 정의하며, 사람들은 성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경륜(經綸)에 대한 선포를 전인격적으로 접하게 되는 반면 교의(敎義)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정의(定義)하려는 시도(試圖)로 보일 뿐이다.
  • 성경(聖經)은 우리 사람들에게 죄의 세력이 우리의 일거일동을 실제로 지배한다는 것을 일깨워 주며 죄의 세력에서 해방을 받아 구원을 얻도록 복음을 선포하는데 비해 교의(敎義)는 이런 선포의 직접성을 순수한 교리로 객관화 한다.
  • 성경(聖經)은 사람 앞에 거울이 되어 자기의 참 모습을 인식하도록 하는데 비해 교의(敎義)는 이 거울을 한편으로 치우고 중립적인 입장에서 관찰하도록 한다. 그러나 중립적인 입장은 결코 지속될 수가 없다.
  • 성경(聖經)은 말씀하시는 하나님과 그 말씀을 대하는 우리 인간을 너와 나의 관계로 인식하게 하지만 교의(敎義)는 양자를 다 3인칭으로 객관화하여 인식하게 한다.

그러므로 전통주의나 교파교회의 신조(信條)에 근거하여 교의(敎義)의 권위를 무조건 내세워도 안 될 뿐 아니라 그렇다고 성경만 따른다고  ‘교의(敎義) 없는 기독교’를 신봉하는 것도 옳지 않다. 교의를 무시하는 신앙은 신앙의 방향을 가늠하지 못하며 신앙의 근거와 입장을 상실하는 맹목의 신앙에 빠질 위험이 있다. 또 우리는 교의의 권위를 내세우기 전에 종교 개혁자들을 따라 먼저 성경에 비추어 교의를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성경 말씀에서 개인적으로 새로운 것을 깨달았을 때는 교의(敎義) 즉 역사적인 교회와 교부들 및 신학자들의 해석을 참작하여 성경 이해의 타당성을 검토해야 한다.      

이처럼 교의(敎義)는 성경 이해의 잣대(canon)이지만 교의 그 자체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교의는 그것이 언제나 성경의 말씀을 옳게 드러내는 한에서 권위가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종교개혁의 전통을 따르는 우리가 성경을 옳게 이하하려면 교의를 존중하고 연구하고 참조해야 한다. 그리고 교의를 옳게 이해하기 위해 교의의 생성과 발전에 대한 역사적인 이해도 도모해야 한다.(*) 글쓴 이 / 김영재 교수(서울대 종교학과, 영국 Clifton Theological College 수학, 독일 Wuppertal Kirchliche Hochschule 수학, 총신신대원 편목, 독일 Phi1ipps Universitat zu Marburg에서 신학박사, 독일 포이딩겐 독일인교회, 미국의 미네소타와 아틀란타의 한인교회 목회, 서울대 강사, 총신대 신학대학원의 교수,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역사신학 교수 역임, 저서: Der Protestantismus in Korea und die calvinistische Tradition, Peter D Lang, Frankfurt am Maln, 1981. 외 다수의 저서와 역서) 출처: 김영재 저 ‘기독교 교리사’ (서울, 합신대학원 출판부), 2009. < 다음에 계속 >  

  < 미주 >

3) Gehard Ebeling, ‘Wort Gottes und Tradition’: Vandenhoeck Ruprecht, 1964) 19.

4) A. DenefFe, SJ., ‘Dogrma, Wort und Begriff’, in Scholastik 6. 1931. 531; Berhard Lohse의 책, 12에서 재인용.

5) Lohse, 앞의 책, 11 이하.

  • 경건주의(Pietism) : 17세기에 형성된 유럽 개신교회의 종교운동이다.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유럽사회는 정치, 경제, 문화에서도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의 대립으로 구분되었다. 이 상황에서 대부분이 기독교인이었던 유럽사회에서 교인이 교리적으로 어디에 속하는지에 대한 질문은 매우 첨예화하였다. 로마 가톨릭교회와 개신교교회의 대립은 점차 개신교회에도 교리 강조에 중점을 두게 되었고 제도 중심화 과정을 겪게 하였다. 이런 개신교회의 제도 중심화와 교리 중심화에 대한 반성이 나타났고 이 반성은 독일 개신교회인 루터교회의 내부에서 경건(敬虔) 운동이 발생하여 점차 전 유럽의 개신교회로 퍼져갔다
  • 퀘이커(Quake) : 17,18세기 영국 교회는 종교개혁을 통하여 교황 권으로부터 해방되어 성경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장하는 작업을 마치기에는 성경해석이 다양했다. 유럽대륙에서는 이런 혼란을 막기 위해 신앙고백서를 작성했다는 것을 참고하여 영국교회는 ‘39개조’(1571년)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648년)를 작성하여 성경의 권위를 수호하려 했다. 그러나 영국 내에서 다양해지는 신앙생활을 막을 수는 없었다. 성공회(聖公會)에 들어가지 않고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주장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는데 그 대표적인 교파가 조지 폭스(George Fox, 1624-1691)에 의해 시작 된 퀘이커 교도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