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사

교리를 알면 성경이 보인다(7) 기독론과 삼위일체론

교리를 알면 성경이 보인다(7) 기독론과 삼위일체론

제3장 교회 초기의 기독론과 삼위일체론(1)

1. 속사도 교부들의 신학

복음의 증언자요, 교회의 초석(礎石)인 사도들을 이어 그리스도의 교회를 인도한 이들을 속사도(續使徒) 교부(敎父, apostolic fathers)라고 한다. 속사도 교부라는 명칭은 그들이 남긴 문서들이 사도들의 신앙과 교훈들을 그 다음 세대(世代)로 전수해 주었다는 데서 붙인 이름이다. 속사도 교부들의 사상을 알려주는 문헌(文獻)들 즉 그들의 주요한 저서 및 서신들은 아래와 같다. 여기서 저작 연대는 학자들에 따라 달리 말하고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1) 속사도 교부들의 문헌

  • 로마 클레 멘트의 첫째 편지
Clement of Rome(35-99)

클레멘트(Clement of Rome, 35-99)가 96-99년에 쓴 것으로 추정된다. 고린도교회에 편지하면서 장로와 평신도 간 분쟁(分爭)에 대해 경고한다. 내용은 율법주의적이다. 교회 역사에서 ‘장로’와 ‘(안수)집사’는 교직자(敎職者)이다. 여기서 종교개혁 이후 장로교나 장로교의 영향을 받은 교회들이 말하는 장로 또는 집사의 개념과는 다름에 유의해야 한다.

  • 헤르마스의 목자(The Shepherd of Hermas) 

140년경에 쓰인 것으로 저자는 로마에 있는 교회의 한 신자로서 비유문학 형식으로 기술했다. 주제는 회개이고 교회를 숙녀로 비유했다.

  • 이그나티우스의 7개 편지              
Ignatius of Antioch(35-107)

이그나티우스(Ignatius of Antioch, 35-107)가 100-105(?)년 사이에 쓴 것으로 추정된다. 에베소, 마그네시아(Magnesia), 트랄레스(Tialles), 로마, 필라델피아 및 서머나의 교회와 서머나의 감독 폴리캅(Polycarp)에게 보낸 편지이다. 이그나티우스는 삼위일체의 신비, 성육신, 구속, 성찬에 대해 확고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으며 감독과 교직 제도를 강조하고 로마 교구(후에 교황청)의 우위성을 말한다. 그는 실제로 감독직을 강화했으며 하나의 교회를 강조하고 결혼에 종교적 성격이 있다고 말했다.

이그나티우스는 거짓 교사를 조심하도록 경고하며 특히 가현설(假現說, Docetism)을 반박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자손이시며, 마리아에게서 나셔서 먹고 마시는 사람으로 사셨으며,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다고 강조한다.          

  • 폴리캅의 편지 
Polycarp of Smyrna, (69-155)

서머나의 감독 폴리캅(Polycarp of Smyrna, 69-155)이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이다.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믿도록 말하며, 그리스도를 높이는 길은 계명을 좇아 사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사랑 안에서 그리스도를 따라 인내와 소망 중에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면 하나님께서 영생과 그리스도와의 영원한 사귐을 상급으로 주실 것이라고 말한다. 바울 서신과 공관복음을 알고 있었던 흔적이 엿보인다.

  • 바나바의 편지

바울의 동역자 바나바가 쓴 것이라면 70년경에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지 않다면 117-138년 어간에 쓰인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 파피아스의 글

히에라폴리스의 감독 파피아스(Papias)가 125년경에 5권으로 된 ‘주의 말씀의 강해’를 썼으나 이레니우스와 유세비우스 교부의 글들에 인용된 단편만 남아 있다. 인용된 글 가운데 천년왕국에 대한 생생한 묘사와 복음서 기술의 동기에 대한 설명이 돋보인다.          

  • 클레멘트 둘째 편지

135-140년경에 쓰인 것으로 추정하는데 저자는 미상이다. 어떤 장로의 설교를 수록한 것으로 가장 오래된 설교집이라고 할 수 있다. 강한 율법주의적인 경향을 드러내고 있다.

  • 디다케(Didache)

12사도의 교훈이라는 디다케(Didache)는 교리문답 자를 위한 교회의 안내서로서 초대교회 시대의 예전(禮典, liturgy)이 담겨 있다. 제1부에는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에 관하여, 제2부에는 예배와 교회생활의 규칙에 관하여 말한다. 1873년에 발견된 문서로서 100년경에 쓰인 것으로 본다. 하르낙은 이를 120-165년에 쓰였다고 추정한다.

  • 베드로의 설교

110-130년에 쓰인 것으로 단편만 남아 있다. 베드로의 이름을 빌려 쓴 차명서(借名書, pseudonym)이다.

(2) 속사도 교부들의 신학사상

교리(敎理)의 표준은 구약성경이라고 알고 있으며 그리스도 중심의 특별한 해석학적 방법을 적용하는데 이런 해석 방법은 사도들에게서 유래한 것으로 신약성경에서 발견된다.

   ⓵ 성경(聖經觀)

속사도 교부들은 구약성경 전체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절대적 권위로 인정했다. 저스틴(Justin Martyr, 100-165)은 구약이 유대교의 경전이기보다는 기독교의 경전이라고 주장하며 구약을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계시로 인정한다. 바나바에 의하면 유대인에게는 계시(啓示)가 없다고 한다. 구약의 모든 제사(제사직과 희생제물)는 기독교 공동체를 위한 전형(典型)으로 즉 예표(豫表)로 간주하였다.            

신약에서 ‘예수의 말씀’을 권위 있는 말씀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별로 인용한 흔적은 없다. ‘사도들의 교훈’이 그 다음으로 권위를 가진 것으로 보며 사도들의 교혼이 무오(無誤)하다고 주장한다. 당시 13개의 바울 서신과 4복음서가 알려져 있었다. 정경화(正經化)에 대한 견해는 영지주의자들의 반대를 받았으나 교회 자체의 필요에 따라 그런 견해가 피력되었다. 신약성경의 정경화를 시도(始睹)한 영지주의자 마르키온(Marcion)의 견해가 초대교회의 정경화를 위한 촉진제가 되었다.

   ⓶ 신관(神觀)

속사도교부들이 표현한 하나님에 대한 교리는 산발적(散發的)이었다. 체계 있는 서술을 하기에는 아직 시기상조였던 것 같다. 이교(異敎)의 다신교(多神敎) 신앙에 반대하여 유일신교(唯一神敎)를 주창(主唱)하였다. ‘헤르마스의 책’은 다음과 같은 명령문으로 시작한다. “무엇보다도 우선 한 분 하나님을 믿어라. 그는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운행(運行)을 정해 놓으신 자이시며, 없는 가운데서 만물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포용하시지만 그 자신은 사람이 파악할 수 없는 자이시다.”

삼위(三位) 하나님에 관하여 클레멘트의 첫 편지는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을 말한다. 성부는 농장주로 성자는 종으로 성령은 사람으로 비유하여 묘사한다. 그러나 성령을 실체(實體, hypostasis)로 이해했는지는 의문이며 성령을 인격적(人格的)인 하나님으로 이해한 흔적이 없다. 성령을 ‘인격적 하나님’으로 이해하기 시작한 것은 4세기 중반부터이다.

   ⓷ 기독론(基督論)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은 기정사실로 전제(前提)하고 있다. 이그나티우스는 그리스도를 ‘우리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말했다. ‘클레멘트의 둘째 편지’의 설교에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산 자와 죽은 자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같이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를 구원하신 주 그리스도는 먼저 영(靈)이시오 그 다음으로 육(肉)이시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에 대해 ‘디다케’는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의 택하신 자’라고 말하고 ‘바나바서’에는 ‘그리스도는 선재(先在)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육(肉)으로 나타나신 주님이시며 장래의 심판자’라고 말한다. 헤르마스는 선재하신 그리스도와 성령을 동일시(同一視)한다. 즉 성령이 몸에 거하고자 오셨는데 몸은 그의 동반자라고 한다.  

하르낙, 바우르, 로프스는 이를 가리켜 양자론(養子論, Adoptionist)의 견해라고 말한다. 이러한 견해를 이일신론(二一神論, Binitarianism)이라고도 한다. 헤르마스가 성자와 성령 양자(兩者)를 동일시한 것은 인정하나 헤르마스를 양자론자라고 보지 않는 견해도 있다. 여하튼 하나님의 아들을 역사 이전부터 계시는 영원하신 존재로 본 것은 분명하다고 말한다.

이그나티우스(Ignatius)는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의 진정한 연합(henosis of pneumaand sarx)을 말하며, 이 신적(神的)인 속성(屬性)과 인적(人的)인 속성(屬性)이 교회 안에서 계속 된다고 했다. 그리스도는 계시하는 로고스(Logos)이며 아들로서 아버지보다 낮은 분이라고 한다.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계실 때에만 그러했다는 뜻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리스도는 선재(先在)하시며 시간적인 아들이지만 비(非) 탄생하신 분이라고 했다. 그리스도를 불러 ‘우리의 하나님, 사람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이라고도 했다. 하나님은 그의 실체에서는 구별됨이 없는 단자(單者, Monad)이시지만 아들과 성령은 단지 하나님 아버지의 자기 계시 형태 혹은 양식으로 계시의 과정에서 구별될 수 있을 뿐이라고 한다. 양태론적(樣態論的) 삼위일체론과 비슷하게 말한다.

  ⓸ 구원관(救援觀)

속사도 교부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은사(恩賜)에 대해 즐겨 말했다. 죄 용서는 그러한 은사 중 하나이다. 가장 중요한 은사는 ‘진리에 대한 지식’이며 이는 ‘영원한 생명’이라고 했다. 클레멘트의 설교에 보면 그리스도는 구속자(救贖者)요 불멸(不滅)의 머리이시므로 그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진리와 하늘의 생명을 계시하셨다고 한다. 그리스도를 모범으로 그리고 선생으로 말하며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과 선생이신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것을 구원에 관련시켜 말한다.

이런 견해는 구원의 신학이 결여된 도덕주의에 머물러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클레멘트의 첫째 편지’에서 그리스도를 회개의 은혜를 설교하는 설교자 이상으로 말하고 있는 점을 발견하기 어렵다. 그리스도의 은사를 ‘새 율법’(nova lex)의 계시로 간주하는 대목에 이르면 율법주의적인 경향으로 기울어져 있음이 확연히 드러난다. 그리스도를 모범자요, 선생으로 보는 견해는 2,3세기의 교부들에게서도 볼 수 있다.

   ⓹ 교회관(敎會觀)

로마의 클레멘트는 교회를 가리켜 성도들의 모임, 그리스도의 양떼, 하나님 자신의 소유라고 말하고 교회의 선재성(先在性)을 인정한다. 헤르마스 역시 만물창조 이전에 교회가 있었다고 하며, 교회는 창조의 진정한 목표라고 한다.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는 몸(肉)과 영(靈)의 관계와 같다고 하며 교회는 본질상 ‘하나’(catholic)이며 ‘거룩한 것’이라고 한다. 이그나티우스는 그리스도와 믿는 자의 인격적 결합을 감독과 교회의 관계에 비유하며 감독은 교회의 구심점으로 이단을 막아내는 보루(堡壘)라고 한다. 교회의 분열을 경계하고 감독을 따르기를 그리스도가 아버지를 따르듯 해야 하며 장로에게 복종하고 (안수)집사를 존경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나 이 말이 곧 위계질서(位階秩序) 제도 즉 교회 계급주의(階級主義), hierarchy)를 지향하는 말은 아니라고 이해했다. 교회는 지역적인 공동체이기보다는 전 세계에 미치는 보편적인 제도이며 영원한 이상적 존재인 동시에 현실적 존재라고 했다.

속사도 교부들의 종말론(終末論)은 마지막 장에서 따로 논하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속사도 교부들의 가르침에는 독창성(獨創性)과 깊이가 떨어지며 교훈이 빈약한 편이고 명확성이 결여되어 있다. 그들은 구전(口傳)으로 혹은 문서로 전수를 받은 성경 말씀의 구절들을 반복해서 언급하고 있으나 신학의 체계를 갖추려한 시도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럼에도 중요성을 들자면 신약의 정경성(正經性)과 완전성(完全性)을 증거 하였으며 신약성경과 2세기의 변증가들의 사색적인 저작을 교리적으로 서로 연결시키는 교량(橋梁) 역할을 다하였다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가 유의할 점은 기독교 교리가 주변의 종교나 사상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거나 역사의 흐름과 함께 점점 진화하듯이 발전한 것으로는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속사도들이 신약성경의 정경성과 완전성을 증언했기 때문만 아니라 신약성경과 속사도의 가르침 사이에 큰 간극(間隙)이 있음도 발견하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삼위일체 하나님의 교리에 대한 이해가 속사도에게서는 분명하지 못하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칭의(稱義) 교리에 관한 언급이 전혀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사도들이 쓴 글 즉 성경과 성경이 가르치는 교리에 대한 속사도 교부들의 이해 사이에 있는 틈을 실감할 수 있다. 칭의(稱義) 교리만 하더라도 그것은 성경이 구원을 가르치는 중요한 교리이며 루터가 말한 바와 같이 기독교 진리가 일반 종교와 다른 점을 드러내는 교리임에도 불구하고 속사도 교부들이 칭의 교리를 깨닫지 못한 것은 그 교리가 너무나 특이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종교적이어서 신(神)을 찾고 구원을 갈구(渴求)하지만 구원 문제를 두고는 공로주의(功勞主義)로 접근했다. 즉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선(善)을 행해야 하고 공로(功勞)를 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성경을 깊이 그리고 옳게 이해하지 않고서는 구원에 대한 공로주의 이해를 벗어나지 못한다. 속사도 교부들은 말하자면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의 교리를 미처 깨닫지 못하고 구원에 대한 일반 종교적인 이해에 머물렀던 것이다.

그런데 칭의(稱義) 교리는 놀랍게도 중세를 거쳐 종교개혁 시대에 이르러서야 올바로 깨닫게 되었음을 본다. 그러고 보면 기독교 교리의 역사는 역사의 흐름과 함께 점진적으로 발전하였다기보다는 전(前) 시대의 교리적인 지식을 거점으로 성경의 진리를 보다 새롭고 풍부하게 발견해 온 역사임을 알 수 있다. 하르낙은 교리의 역사가기독교 교리의 헬레니즘화 과정이라고 말한다. 기독교의 성장기를 두고 본다면 그것이 사실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가 하는 말은 기독교의 생성기와 성장기를 구분하지 않고 하는 말이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교리의 역사는 기독교 교리의 헬레니즘화 과정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그리스적인 견해나 편견뿐 아니라 주변의 종교적인 견해를 제거하고 성경의 진리를 발견하고 드러내는 과정이었으며 그것을 지향해야 하는 것이 교리사의 과제이다.

(3) 초대교회 안팎의 이단종파

2세기에 와서 교회는 기독교 교리를 외부와 내부에서 일어나는 공격과 시련에 대항하여 변증(辨證)하고 보전(保全)해야만 했다. 즉 외부로부터는 로마제국의 황제들과 권력자들이 간헐적으로 기독교의 생존을 위협하고 교회를 핍박했으며, 루키안(Lucian), 포르피리(Porphyry), 켈수스(Celsus)와 같은 당시의 예리한 사상가들은 기독교 교리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공격했다.            

그런가 하면 안으로는 성경을 잘못 해석하고 왜곡하는 이단(異端)들이 일어났다. 유대교적인 에비온파(Ebionites)와 이교적인 영지주의자(Gnostics)들이 대표적이다. 이 두 종파는 서로대조를 이룬다. 영자주의는 앞에서 이미 소개했으므로 여기서는 에비온주의만 소개하기로 한다.

  • 에비온주의(Ebionism)

에비온주의는 사이비(似而非) 베드로(Pseudo-Petrine) 노선을 따르는 기독교화한 유대주의로서 그리스도는 사람인데 하나님의 양자(養子)가 되었다는 양자설(養子說)을 주장하고 이와 반대 입장을 취하는 영지주의는 사이비 (似而非) 바울적인(Pseudo-Pauline) 경향을 띤 이교주의로서 신(神)이 그리스도에게서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났다는 가현설(假現說)을 말하고 사변적(思辨的)이며 영적(靈的, pneumatic) 그리스도관을 말한다. 이 두 종파의 견해는 모든 잘못된 기독론의 전형(全形)이다.

에비온파는 기독교적 유대인의 종파로 보통 바리새적인 에비온파와 에센적(Essene) 에비온파로 구분된다. 바리새적인 에비온파는 나사렛파(Nazarenes)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바울을 배교자(背敎者)로 보고 할례를 주장한다.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부인하며 예수는 단지 메시아로 지명(指命) 된 사람이라고 한다. 그리스도는 율법을 엄수한 점에서 다른 사람들과는 구별(區別)되고 그의 율법적 경건(敬虔) 때문에 메시아로 택함을 받았다고 한다. 예수는 세례를 받으실 때 이 사실을 의식했으며 선지자와 교사의 직분을 다할 수 있도록 성결(聖潔)함을 받았다고 한다.

또 이들은 극단적인 천년 왕국설을 주장하는 것이 특이하다. 에센적 에비온파는 바리새적 에비온파에 비해 이교적 색채가 더 농후하다. 사이비(似而非) ‘클레멘트서’의 글과 엘카사이의 책에서 그들의 사상을 알 수 있다. 이 종파를 엘카사이의 이름을 따라 엘카사이(Elchasai 혹은 Ekai)라고 부른다. 이들은 또 신지론적((神知論的, theosophic) 사색(思索)과 금욕주의(禁慾主義)가 특징이며 원시적이고 보편적인 종교를 주창한다.

게다가 그들의 신앙에는 점성술(占星術)의 미신도 섞여 있다.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이상적인 아담의 성육신으로 본다.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아 케린투스(Cerinthus)는 지고(至高)의 신(神)과 창조자를 구분하고 예수와 그리스도를 구분한다. 그리스도가 세례 시에 내려와 메시아로 택함을 받았다고 하는데 양자설(養子說)을 말하기는 바리새적인 에비온파와 마찬가지이다.  

에비온파들은 양자설을 주장하므로 오리겐(Origenes Admantius, 185-254)이 지적하듯이 하나님의 아들을 로고스와 동일시(同一視) 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성령과 동일시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클레멘타인’(Clementines)이라는 이름을 붙인 여러 책에서는 유대교적 영지주의 사상이 혼합되어 나타나는 것을 더 명백히 알 수 있다.

그들은 또 마귀와 그리스도가 하나님 안에 있는 변화(變化, iponn)에서 솟아났다고 하며 신(神)은 그리스의 신화(神話)에서처럼 몸(肉體)을 가졌다고 한다. 그들은 그래서 마태복음의 일부를 제외한 복음서를 모두 배척한다.(*) 글쓴 이 / 김영재 교수(서울대 종교학과, 영국 Clifton Theological College 수학, 독일 Wuppertal Kirchliche Hochschule 수학, 총신신대원 편목, 독일 Phi1ipps Universitat zu Marburg에서 신학박사, 독일 포이딩겐 독일인교회, 미국의 미네소타와 아틀란타의 한인교회 목회, 서울대 강사, 총신대 신학대학원의 교수,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역사신학 교수 역임, 저서: Der Protestantismus in Korea und die calvinistische Tradition, Peter D Lang, Frankfurt am Maln, 1981. 외 다수의 저서와 역서) 출처: 김영재 저 ‘기독교 교리사’ (서울, 합신대학원 출판부), 2009.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