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를 알면 성경이 보인다(9) 기독론과 삼위일체론
교리를 알면 성경이 보인다(9) 기독론과 삼위일체론

제4장 교부들의 기독론과 삼위일체론(1)
1. 서방 교부들의 신학
(1) 이레니우스의 신학
전통의 효시(嚆矢) 서방 신학이라고 할 수 있는 이레니우스(Irenaeus, 142-202)는 소아시아에 살면서 폴리캅(Polycarp, 69-155)과 지면(知面)이 있었다고 하며 만년에 프랑스 리용(Lyon)의 감독이 되었다. 저서로 유명한 ‘이단에 대한 비판’(Adversus Haereses, 176-199)이 있다.
이레니우스는 그리스도의 성육(成肉, Incarnation)을 이해하는 데 있어 전기(轉起)를 마련한 신학자이다. 그리스적인 변증가들이 성육을 주로 우주론적(宇宙論的)으로 혹은 존재론적(存在論的)으로 즉 사변적(思辨的)으로 이해하려고 한 데 반하여 그는 성육을 구속(救贖)의 측면에서 이해하고 이를 강조했다. “하나님이 어떻게 즉 어떤 모양으로 사람이 되셨는가?”라는 질문보다 “하나님이 왜 사람이 되셨는가(Cur Deus homo)?”를 물었으며 ‘성경 계시’와 ‘역사적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논의했다. 이는 가장 건전한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레니우스에 따르면 기독교는 계시(啓示) 종교다. 사변적(思辨的)인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구속의 종교지 우주론적 종교가 아니라고 한다. 이레니우스는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을 강조하고 구약에서는 문제를 제기하고 신약에서는 그 해결을 보았다고 한다. 죄는 아담을 통해 세상에 들어와 인류를 멸망으로 이끌었으며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은 용서와 영생불사(永生不死)와 부활을 위한 것이며 완전한 구원을 뜻한다고 했다.
이레니우스는 하나님은 ‘한 창조자 하나님’이라고 하며 그리스 철학의 어휘를 빌려 ‘단순’하시며, ‘복합적’이 아니시고, ‘불변’하시는 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하나님은 또 성경에서 말하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며 그의 ‘본질은 사랑’이시라고 한다.
아들은 항상 아버지와 공존하시는 분이시며, 아버지와 동등하시고 종속적(從屬的, subordinate)이지만 열등(劣等, inferior)하시지 않다고 말한다. 이레니우스는 성경에 근거하여 로고스(Logos) 개념보다는 아들의 개념이 선행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로고스를 아들로 설명하고 아들을 로고스로써 설명하지 않는다.
사물이나 개념을 설명할 때 설명이 필요한 말의 개념보다는 설명을 위해 사용되는 말의 개념이 선행적이고 보편적이고 경험적이거나 쉬워서 이미 아는 개념이라고 전제한다. 설명(說明)은 이미 아는 말을 가지고 아직 모호(模糊)하거나 미지(未知)의 말을 풀어 알게 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아들은 ‘나신 분’이시며 그의 나심은 가히 인간 이성(理性)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사 53:8) 이레니우스는 ‘산출’(産出, projection)이라는 술어를 배격하고 영원한 아들은 아버지와 하나라고 한다. 삼위 하나님의 역할(기능, functions)에 관해 말하면서 기독교 이전에 있었던 하나님의 모든 나타나심(顯顯, manifestation)은 로고스(Logos)로 말미암아 된 것이라고 한다. 성령과 아들은 ‘하나님의 손’으로서 창조와 계시에서 함께 밀접히 일하신다.
사람들은 먼저 성령께로 다음은 아들에게로 그다음 아버지께로 다가간다. 아버지는 결정(決定)하시고 아들은 집행(執行)하시며 성령은 계속하신다. 성령은 특히 성화(聖化)를 위하여 교회에서 활동하신다. ‘만유 위에 계신 아버지가’, ‘만유를 통하여 말씀이’, ‘만유 안에 성령’이라고도 표현한다. 성령은 아버지로부터 아들을 통하여 주어진다고 한다. 우리말 표현으로 ‘아버지께서 성령을 아들을 통하여’ 주신다고 한다.
이레니우스는 변증가들과 달리 구약의 지혜(知慧)를 성령으로 해석한다. “영이 창조 이전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도 한다. 이레니우스는 성육(成肉, Incarnation)을 일컬어 아들의 두 번째 탄생(誕生)이라고도 한다. 성육신을 통해 하나님과 사람의 혼합(混合)과 연합(聯合, commixtio)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셨으니 이는 우리를 본질적으로 자기와 같게 만드시기 위함이라고 한다.
이레니우스는 그리스도의 참 신인(神人)의 인격(Person)을 말한다. 그러나 십자가의 고통의 실재성(實在性)을 강조하면서 고통 중에 로고스는 침묵하셨으며 단지 예수가 그 고통을 이기도록 도우셨다고 한다. 이러한 인격의 통일성을 부정하는 표현은 네스토리우스파(Nestonans)에게 길을 튼 셈이다. 말하자면 성육을 내주(內住, indwellina)로 본 것이다.
이레니우스는 가현설(假現說)과 영지주의에 반대하여 그리스도께서 신인(神人)이시라고 주장했다. 하나님과 인간의 필요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신인의 인격 구조를 가지신 것은 필연적이라고 본다. 이레니우스는 에베소서 1:10 ‘아나케팔라이오시그’(ἀνακεφαλαιώσί)라는 단어로 그의 사상의 중요한 일면을 표현한다. 영어로 ‘recapitulation’ 또는 ‘reintegration’이라고 번역하는데 ‘반복하다’, ‘통일하다’, ‘종합 완성하다’는 뜻이다.
즉 그리스도로 말하면 그의 인격 안에서 ‘두 다른 요소’가 하나로 종합된다고 하며 우주의 본래적 이데아(idea)를 충분히 완성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이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그들을 회복하시며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완전하게 하신다고 한다. 아담의 불순종에 반하여 그리스도의 순종은 구속을 가져온다고 하며 그리스도의 고난과 공로의 피가 우리를 구속한다는 점을 충분히 말한다.
(2) 터툴리안의 신학
터툴리안(Tertullian, 160-220)은 160년경 카르타고(Carthage)에서 출생하여 220년경 사망했다. 그는 첫 라틴 교부(Latin Fathers)였다. 그의 글은 열정적이며 예리하고 신랄하다. 그는 그리스어로도 글을 썼다. 202년경 몬타누스교도(Montanist)로 개종했으며 로마의 기독교를 멸시했다. 많은 저술이 있으나 대부분 짧은 글이다.
반(反) 영지주의적이며 오리겐과 비교하면 그의 사상은 덜 사변적이고 현실주의적이다. 오리겐에 비해 그는 영(靈)과 육체(肉體)가 함께 생겼다고 주장한다. 그는 법률가였으며 삼위일체와 성육(成肉)에 관한 주요한 저서로 ‘프락세아스 비판’(Adversus Praxeam)과 ‘그리스도의 육체’(De Came Christi)가 있다. 그는 히폴리투스(Hippolytus)와 이레니우스 사상을 따랐다.
터툴리안은 하나님은 한 실체(實體, one substance, substantia)요, 하나님은 지고(至高)의 존재이며, 지고의 존재는 유일(唯一)하다고 한다. 삼위(三位)의 하나이심(unity)은 수적(數的, arithmetic) 개념이기보다는 행정적(administrative) 개념이라고 말을 한다. 하르낙(Adolf von Harnack, 1851-1930)은 터툴리안이 법률가였었기 때문에 실체(substantial)와 인격(personal)이라는 말을 사용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소유물 혹은 재산(property)의 뜻을 가진 실체가 인격 즉 법적인 인격들(legal parties)에 의하여 공유(共有)된다는 뜻에서 말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즉 양자가 한 실체를 가진다고 하면 그것은 또 하나의 실체적 존재를 전제하는 말이 된다. 그러나 터툴리안은 ‘그들은 한 실체이다.’(They are one substance.)라고 했지 ‘그들은 한 실체를 가진다.’(They have one substance.)고 하지 않았다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하나님은 삼위(三位, three persons)라고 한다. ‘persona’라는 말에는 얼굴 또는 가면(mask), 연극의 배역(role in play), 배우(the actor), 개인(an individual), 갑(甲) 을(乙)로 표기되는 법적 권리 또는 의무를 행사하는 자라는 의미가 있다.
본질적으로 삼위의 구별을 말하기보다는 활동하심에서 혹은 경륜적(經綸的, economically)으로 구별되며, 삼위의 경륜(οἰκονομία)이 하나임(unity)을 유지한다고 한다. 이 경륜은 하나님의 신성(神性, the Godhead)의 내적인 조직(組織)이며, 삼위 즉 세 분이 하나임을 삼위일체(三位一體, trinitas, trinity)라고 하는데 이 말을 터툴리안이 최초로 사용했다. 그리고 삼위(三位)의 순서는 성부, 성자, 성령의 순이고 삼위는 분할(分割)할 수 없는 복수(複數)며 ‘unum’(하나)이지 ‘unus’(한 분)가 아니라고 한다.
또 삼위일체는 유래(由來)한 것이라고 말을 한다. 이것은 로고스(Logos) 교리에 근거한 것으로 하나님은 그 안에 항상 그의 이상(理想)을 가지고 있는데 이 이성이 창조(創造) 사역을 하기 위해 말씀(Logos)으로 사출(射出) 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한편 터툴리안은 실체들(hypostases)의 영원한 구별을 보여 주기 위해 ‘뿌리’, ‘줄기’, ‘열매’, ‘샘’, ‘시내’, ‘강’, ‘해’, ‘빛’, ‘열’ 등의 예를 든다.
터툴리안은 말하기를 하나님 아버지는 실체(實體, substantia)의 전체이고 아들은 그 실체에서 유래(由來)했으며 실체(또는 본질)의 일부라고 한다.(Pater totasubstantia, filius derivatio et partia totius) 그리고 탄생한 말씀은 초월하신 하나님의 나타나심(顯現)의 수단이라고 한다. 이러한 표현에서 우리는 아들이 아버지보다 열등하다는 종속설(從屬說)의 흔적을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모든 속성(屬性)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며 아버지께로 돌아갈 것이므로 성질(性質, nature)에서 열등하다고 한다.
그는 “성령은 말씀(Logos) 속에 내재(內在) 해 있고 성부 안에 말씀으로 내재하며 오순절에 부어지셨다.” “성령은 아들을 통해 아버지에게서 유래한다.”고 말한다. 이 말은 나중에 나온 서방교회의 신앙고백이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나오신다.”고 한 표현과 대조를 이룬다. 따라서 삼위일체는 ‘위계질서’(位階秩序, hierarchy)라고 말한다.
터툴리안은 성육(成肉)의 목적은 인간 구속(救贖)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이레니우스의 참 신인의 연한(bomo deo mixtus)의 교리를 따른다. 그리스도는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이라는 양성(兩性)의 한 인격(one person with two natures)이라고 한다. “우리는 한 인격 안에 혼돈되지 않으면서 연합하고 있는 두 성질을 본다.”(Videmus duplicem statum, non confusum sed conjunctum교 una persona)고 하며, 육(肉, caro)과 영(靈, spritus)이 혼합되어 제3의 실체가 되었다는 말은 거부한다.” 그는 또 “하나님의 아들은 죽었다.”면서 또 “아들이 하나님으로는 고난을 당치 않았다.”는 가현설(假現說)을 거부한다.
터툴리안은 성자(聖子)의 아들이심(son-ship)에 대한 사상을 체계화하였다. 그런데 그의 삼위일체 교리에 따르면 삼위일체가 우연적(偶然的, contingent)이지 필연적(必然的, necessary)인 것이 아니라고 한다. 죄(罪)와 은총(恩寵)에 대해서도 터툴리안은 서방교회의 표준이 되었다. 원죄론(原罪論), 죄의 유전(遺傳) 그리고 인간의 자유의지(自由意志)를 강조했다. ‘삼위일체’라는 말을 비롯한 많은 신학용어를 만들어 공헌하였으나 그에게도 니케아(Nicaea) 신조(信條) 이전의 신학자로서 한계(限界)가 있다.
(3) 노바티안 신학
터툴리안의 사상은 노바티안(Novatian, 250년 로마 감독)의 ‘삼위일체론’(De Trinitate)에 의해 서방에 널리 알려졌다. 노바티안은 터툴리안보다는 오히려 아들과 성령의 성부 종속성(從屬性)을 더 강하게 말하고 있으나 터툴리안보다 교리 설명에서 발전적인 것은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경륜적(經綸的, economically)으로 구별(區別)되는 것이 아니고 창세 이전(以前)에 나셔서 아버지와 구별되는 인격이시라고 강조한 사실이다.
(4) 히폴리투스 신학
히폴리투스(Hippolytus)는 주후 220년경에 로마에서 활동했다. 그리고 그는 동방(東方)과 서방(西方)을 연결한 사람이다. 그의 신관(神觀)은 플라톤주의적이며 로고스에 대한 논의는 변증가들과 유사하다.
성육(成肉)과 구속론(救贖論)은 이레니우스와 같다. “하나님은 복수로 존재하셨다.” 로고스(Logos)가 하나님 안에 내재해 있다가 창조 시에 사출(射出)되었다고 하며 성육(成肉)까지는 진정한 아들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나 두 하나님이 아니고 두 위(位)라고 한다. 그리고 그는 삼위일체의 하나이심(unity)은 경륜적(經綸的)이라고 한다. 히폴리투스는 로고스의 영원성은 부인(否認)하지 않으나 로고스가 아들로서 시간(時間) 안에 시작되었다고 한다.(*) 글쓴 이 / 김영재 교수(서울대 종교학과, 영국 Clifton Theological College 수학, 독일 Wuppertal Kirchliche Hochschule 수학, 총신신대원 편목, 독일 Phi1ipps Universitat zu Marburg에서 신학박사, 독일 포이딩겐 독일인교회, 미국의 미네소타와 아틀란타의 한인교회 목회, 서울대 강사, 총신대 신학대학원의 교수,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역사신학 교수 역임, 저서: Der Protestantismus in Korea und die calvinistische Tradition, Peter D Lang, Frankfurt am Maln, 1981. 외 다수의 저서와 역서) 출처: 김영재 저 ‘기독교 교리사’ (서울, 합신대학원 출판부), 2009.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