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를 통해 보는 기독교 종말론

PARTⅠ
시작하는 말
20세기를 보내고 새 천년의 21세기를 맞게 된 시점에 종말에 대한 기독교의 신앙을 재검토하는 것은 의미가 있는 일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들이 새 천년으로 세기가 바뀌는 시점에 역사의 흐름을 어느 때보다도 더 절실히 의식하기 때문일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이 시점에 세상의 종말을 들먹이며 잘못된 종말론에 미혹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인구의 급속한 증가와 과학지식의 발달로 1960년대 이전만 하더라도 사람들이 미처 예기치 못했던 환경오염의 심각성 등 여러 가지 문제들로 인애 사람들은 옛날보다 더 지구 종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종말론은 ‘종말에 있을 일’에 대한 종교적인 교리이다. 기독교신학은 종말론을 ‘개인 종말’과 ‘역사적 종말’로 구분하고 ‘개인 종말’에서는 인간의 죽음, 그리스도인의 죽음의 의미, 부활, 영생불사 등을 다루며 ‘역사적 종말’에서는 그리스도의 재림, 천년왕국, 최후의 심판, 의인이 누릴 복된 상태와 악인이 견디어야 할 형벌에 대해 논한다.1)
‘종말론’(終末論, ἔσχατος, Eschatology)은 종교의 보편적인 관심이며 종교의 출발점이기도 한데 ‘개인 종말론’에서도 기독교신앙이 다른 종교와 구별되는 점이 있기는 하나 기독교 종말론의 특이성은 기독교 역사관과 결부된 ‘역사적 종말론’일 것이다.
‘역사적 종말’ 교리는 성경이 말하는 창조의 목적 성취를 내다보는 논리적 결론이기도 하지만 기독교인에게는 종말론이 그리스도에 대한 최종단계의 교리이기도 하다. 즉 종말론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보다 역사적이며 역동적으로 인식하고 그리스도는 성육하신 하나님의 말씀일 뿐 아니라 창조에서부터 있었던 계시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작정으로 인식하며 인간의 구원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신앙내용의 최종적인 성취로 인식하고 소망한다.2)
교회역사에서 종말 신앙은 시대적인 배경이나 신앙의 유형 혹은 신학적인 견해에 따라 ‘개인 종말’과 ‘역사적 종말’ 그 어느 편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는 경향이 있었음을 발견한다. 그리고 역사의 종말에 있을 사건 중에 가장 중심이 되는 사건은 그리스도의 재림임이며 천년기(千年期, Millenium)의 여부에 대한 신학자들의 견해가 일치하지 않아 천년기에 대한 고백과 진술은 교회역사에 종말론의 쟁점이 되어 왔다.
천년기에 대한 신앙과 견해는 흔히 셋으로 분류한다. 그리스도의 재림이 천년기 전에 있다는 견해를 전(前) 천년기설(Pre-millennialism)이라 하고 천년기 후에 있다는 견해를 후(後) 천년기설(Post-millennialism)이라고 한다.
전천년설은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 휴거, 공중잔치, 유대인들의 회복, 그리스도의 천년왕국 건설과 통치를 믿는다. 후(後) 천년설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기 이전에 복음이 온 세계에 전파되고 교회가 왕성하여 황금기를 누린다는 견해이다.
전(前) 천년설이 전통적인 천년왕국 신앙(Chiliasm)이지만, 후(後) 천년설도 천년왕국 신앙의 특색을 갖고 있다. 무(無) 천년설(A-millennialism)은 천년기를 교회시대를 가리키는 상징으로 해석하며 그리스도의 영적 통치가 신자들의 마음속에 이미 시작된 것으로 보는 견해이다.3)
교회 역사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경고하신 대로 ‘시한부 종말론’과 ‘사이비 메시아 운동’이 있었다. 이런 사이비 종말론 운동은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줄뿐 아니라 기독교 신앙을 오해하게 만들고 교회의 종말신앙을 흐리게 한다. ‘시한부 종말론’이나 그리스도 사칭 사이비 메시아 운동들이 모두 열광적이며 폐쇄적 집단을 형성하는 것이 문제이다.
한국교회의 역사는 오래지 않으나 교회 안팎에는 사이비 종말신앙 운동과 스스로를 그리스도라고 사칭하는 자들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1927년 예수가 자기에게 강림(降臨)했다고 하며 예수인 양 처신한 유명화, 예수와의 영체(靈體) 교환을 실현했기 때문에 자신이 예수라고 주장하며 혼음(混淫)을 자행한 황국주, 6·25 동란 때 자신을 ‘감람나무’요 ‘동방의 의인’이라고 단언하면서 메시아라 자처하며 신도들을 천년성(千年城)으로 유인한 박태선, 자신을 재림 주라는 ‘문예수’로 처신하며 활동해 온 통일교의 문선명, 자신을 계명성(啟明星, Morning Star)이라며 그리스도로 자처한 정명석, 만민중앙교회의 이재록 등이 있다.
그밖에 ‘시한부(時限附) 종말론’으로 1951년 11월 25일이 바로 주님 재림의 날이라고 주장하며 사람들을 미혹한 이재명, 느긋하게 2023년을 재림 일자로 예언한 한에녹, 1992년 10월 28일이 주님 재림의 날이며 예수의 공중 재림과 휴거가 일어날 것이라고 매스컴을 떠들썩 하게 만들었던 이장림 등이 있다. 이장림의 경우 거짓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그의 추종자들의 기세는 꺾일 줄 모른다.
한국교회의 종말신앙은 천년왕국 신앙이 지배적인 것으로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데 그것에 대한 사실 여부도 검토하는 한편 그런 신앙의 배경 때문에 한국교회 내에서 사이비 종말신앙이 쉽게 배태될 수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시 하면서 천년왕국 신앙이 교회사에서 어떤 비중과 위치를 점하고 있는지 성경이 말하는 종말론과 교회 역사에서 논의된 종말론을 일별하여 검토해 보기로 하겠다.
1. 종말에 대한 성경의 증언
종말론이 미래에 대한 기대라는 점에서 구약성경에는 종말에 대한 말씀이 많이 있다. 구약성경은 대체로 개인적인 종말에 관해서 보다는 주로 역사적 종말론 즉 이스라엘과 열국의 미래에 관해 언급했다. 이스라엘을 택하셔서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장래를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를 떠나 약속의 땅을 바라보고 이동한다. 야곱의 축복과 요셉의 축복은 이스라엘 자손의 번영을 비는 것이었다.(창 49:8 이하, 신 33:13 이하)
전쟁과 승리, 다윗 왕국의 건설과 번영, 메시아의 약속과 기대, 유다와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에 관한 말씀이 있다. 이사야 24-27장에는 미래에 대한 묵시가 기록되어 있다. 다니엘서에는 이스라엘역사의 미래뿐만이 아니라 열방 역사의 종말과 목적에 관해 말씀하시며 그것은 곧 성취될 것으로 말씀하셨다.(요엘 1:15, 4:14)
구약에는 종말의 날을 여러 말로 표현한다. ‘여호와의 날’(사 2:12), ‘후일’(days to come, 창 49:1), ‘그날’(사 2:11)이라는 표현들이 많이 발견된다. 스바냐서에는 “그 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무와 패괴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라고 하면서 여호와가 이 땅 모든 거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임을 말씀한다.(습 1:15-18) 그러나 그 날 즉 심판의 날은 백성들을 그냥 멸절시키는 날만은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신원(伸寃)의 날’(사 61:2)이요 ‘원수 갚는 보수일’(렘 46:10)로서 슬픈 자를 위로하는 날이다.
이 같이 ‘말일’(末日) 즉 심판의 날은 또한 도움과 구원의 날이다.(사 2:2 이하) 하나님의 심판은 백성들을 멸절시키는 것이 아니고 장차 올 새 질서를 펴시는 것이다. 즉 구원, 의, 도움, 번영, 신실, 자비와 긍휼을 베푸신다. 하나님의 심판은 비단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모든 민족에게 임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구원 역시 이스라엘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미친다.(사 2:2-4) 이사야서는 하나님이 창조하실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하여 말씀한다.(사 65:17, 66:2) 하나님은 세계와 인류의 역사를 그 본래의 목적을 향하도록 인도하신다고 말씀하신다.
신구약 중간시대에는 프톨레미와 세류키드의 통치하에서 유대의 독립을 갈망하는 가운데 묵시문학이 발달하고 유대를 해방시킬 메시아를 기대하는 사상이 보편화되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도 이런 역사적 전통과 배경에서 메시아를 이방나라 로마의 압제로부터 자신들을 해방시켜 줄 구원자로 이해하고 기대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믿고 따르던 제자들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행 1:6 이하)
구약에서 예언한 메시아 율법과 선지자의 완성 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그분이 선포하신 천국복음은 종말적인 것이었다.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않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고 하는 세례 요한의 선포도 메시아의 사역이 종말론적임을 말하는 것이며 예수님 자신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막 1:15, 3:27, 마 12:28 이하, 눅 17:20)는 말씀 역시 그렇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천국비유의 대부분이 종말론적이거나 종말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이를테면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마 13:24-32, 36-43), ‘그물 비유’(마 13:47-50), ‘포도원 비유’(마 20:1-16), ‘열 처녀 비유’(마 25:1-13), ‘달란트 비유’(마 25:14-30, 눅 19:11-27), ‘돌아오는 주인의 비유’(눅 12:35-40-48), ‘임금의 잔치 비유’(마 22:2-14, 눅 14:15-24), ‘불의한 청직이 비유’(눅 16:1-13) 등은 다 종말 신앙을 교훈하고 있다.
사도행전과 서신서들이 말하는 종말론의 가장 중심이 되는 부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믿음과 기대이다.(행 1:11, 3:20,21, 고전 15:23, 빌 3:20, 살전 2:19, 3:13, 4:15,16, 5:23, 살후 1:7,10, 2:1-9, 딤전 6:14, 딤후 4:1,8, 딛 2:13, 히 9:28, 벧전 1:13, 벧후 1:16, 3:4,12)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서신서의 말씀들은 물론 예수님의 말세에 대한 언급(마 24장, 25장, 막 13장)과 당신 자신의 재림에 대하여 언급하신 말씀(마 24:30-31, 25:31, 26:64, 요 14:3)에 기초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있을 사건들로는 이방인의 부르심과 모든 민족에게 복음의 전파, 이스라엘의 회심(롬 11:25,26, 고후 3:15,16), 배도(背道)와 환란(마 24:10-12, 딤후 3:1-5, 마 24:21-30), 적그리스도의 출현(마 24;23,24, 마 7:15, 막 13:21,22, 눅 17:23) 등이 있을 것을 말씀하셨으며 이들은 다 말세의 징조(徵兆)에 대한 말씀들이다.4)
2. 초대교회의 종말사상
사도시대 이후의 기독신자들의 종말신앙은 그들이 기대했던 임박한 파루시아(재림, Parousia, παρουσία)가 지연되자 다소 쇠퇴하기 시작했으며 그들은 임박한 파루시아 대신 갑작스런 재림에 대하여 말하는 한편 교회 조직 등 실제적인 생활에 대한 문제에 관심을 돌리게 되었다고 말하는 신학자들이 있다.5)
그것은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나 브레데(Wrede) 이후의 현대 신학자들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을 지나치게 종말론적으로 보려고 하며 교회에 관한 그분의 언급(마 16:16 이하)의 사실성을 의심하거나 목회서신을 바울의 저작으로 보지 않고 2세기에 쓰인 것으로 보려는 신학자들의 견해이다.
그들은 바울의 선교목적이 교회의 설립에 있었음이 사도행전(행 14:23)이나 목회 서신들뿐 아니라 그의 다른 서신들에도 잘 나타나 있으며 그 서신들이 다루는 주제 역시 다양함을 간과한다. 사도시대 이후의 교회들이 광신적인 종말신앙을 가진 자들처럼 일손을 놓고 그리스도의 재림만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하기는 사도시대 이후에 유대교의 영향으로 많은 위경(僞經)과 묵시록(黙示錄)이 나왔으며 성경에서 경계한 것처럼 잘못된 광신적인 종말론 신자들도 있었다. 대부분의 묵시록은 상징적인 언어로 되어 있다는 점과 그것이 함축하는 신학사상으로 보아 유대인들의 묵시문학에 속하는 것이었다. 도덕적인 권면과 세상의 심판과 구원을 말하고 희랍과 로마문명이 몰락할 날이 가까웠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유대인들의 묵시 문학과 유사한 것이었다.
이런 기독교의 묵시록들은 유대교의 묵시록들과 마찬가지로 성경적인 신앙의 소망만이 반영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정치적 혹은 종교적 자유가 없이 사는 백성들이 겪는 좌절과 불안정함이 반영되고 있다.
‘에스라 4서’, ‘이사야의 승천’(Ascention of Isaiah), ‘시빌린 예언서’(Sibylline Oracles)의 첫 5권 등은 본래 유대교적 문서인데 기독교적 메시지를 담아 다시 쓴 것이다. 이런 문서에는 시한부 종말론도 눈에 뜨인다. ‘사도들의 편지’(Epistola Apostolorum)는 예수 부활 이후 150년 말에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것이라고 하며, ‘시빌린 예언서’는 안토니우스 피우스(Antonius Pius, 147-161)의 통치 마지막 해에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이라고 말한다. 임박한 종말의 징조에 관해서는 복음서에 말하는 것과 비슷하게 말한다. 즉 불화, 부패, 공동체내의 거짓교리, 가정의 분란, 열국의 전쟁, 만연된 질병, 흉년, 기근, 인구의 감소 등을 말한다.6)
후기 유대교의 묵시록인 ‘바룩서’(Baruch)는 마지막이며 최악의 제국인 로마제국 시대에 즉 고난과 부정(不正)이 극에 달하는 때에 메시아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권능의 전사(戰士)인 메시아는 로마의 지도자들을 포로로 잡아 시온에 가두었다가 죽이고 왕국을 건설할 것이라고 했다. 그 왕국은 세상 끝 날까지 존속할 것이며 이스라엘을 지배하던 나라들은 칼에 죽임을 당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선민에게 항복한다는 것이다.
그 후 축복시대가 열리는데 고통, 질병, 급사(急死), 폭력과 분쟁, 궁핍, 기근이 없는 세상이 될 것이며 땅도 그 열매를 만 배나 더 생산한다는 것이다. 이 지상낙원은 영원히 혹은 수백 년 간 계속된다는 것이다. 에스라 4서는 메시아를 주로 인자(人子)로 지칭하며 이스라엘의 열 지파를 먼 이국으로부터 불러 모아 팔레스타인에 왕국을 건설할 것이며 재(再) 연합 된 이스라엘은 평화와 영광중에 번영한다는 것이다.7)
로마의 점령 하에서 총독들의 압제가 더 가중하게 되자 많은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대망하는 사상에 사로 잡혔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메시아의 임박한 출현을 믿는 믿음에서 유대인들은 자살적인 전쟁을 치렀다. 그 결과 주후 70년에 예루살렘과 성전은 완전 파괴되었다. 시몬 바르 코크바(Simon bar-Cochba)의 독립전쟁(132-135년) 역시 그런 것이었다. 132년 유대인들은 시몬을 메시아로 인정하고 그를 중심으로 정치적 독립을 쟁취하려고 전쟁을 도발했다가 로마군에게 가혹한 진압을 당했다.
그 후 수백 년 간 유대인의 여러 디아스포라 공동체에서 메시아로 자칭하는 자들이 일어났으나 이스라엘 국가의 회복을 약속하는 정도였고 종말적인 세계적 왕국건설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유럽에 흩어진 유대인들에게서는 무력봉기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다니엘서의 메시아의 오심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이제는 유대인이 아니고 기독신자들이었다.8)
속사도 교부들이나 변증가들은 종말론을 여러 기독교교리들 가운데 하나로 다루고 있음을 발견한다. 그리고 종말을 논함에 있어 개인의 종말 즉 죽음 후의 영혼의 불멸 혹은 부활, 영생에 관해 말하는 한편, 세상 종말과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대체로 모든 신학자들에게 공통적임을 발견한다.
그러나 천년왕국에 대한 신앙은 신학자에 따라 다르다. 천년왕국에 대한 신앙은 대부분의 속사도 교부들과 많은 초대 교부들에게서 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유대교적 배경을 가진 교부들 특히 소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의 글에서 천년왕국에 대한 신앙이 더 현저함을 발견한다. 바나바서(Barnabas), 파피아스(Papias), 클레멘트(Clememnt)의 첫 편지, 이그나티우스(Ignatius) 등을 비롯하여 순교자 저스틴(Justin Martyr), 이레니우스(Irenaeus), 몬타누스주의 운동에 가담한 터툴리안(Tertullian), 히폴리투스(Hipolytus) 등 여러 교부들이 천년왕국에 대한 신앙을 언급했다.
천년왕국 신앙은 요한계시록의 말씀(20:1-21:5)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데서 갖는 신앙으로 그리스도의 재림과 성도들의 부활이 있은 후에 있게 될 천년기간 동안 성도들은 지상에서 낙원의 축복된 삶을 누릴 것이며 마침내 사탄은 최종적으로 패배를 당하고 이 세상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변화될 것임을 바란다.
바나바서(Barnabas)는 창세기 2:2에 나타나는 안식일 제정을 종말론적으로 이해하면서 이 세상의 역사가 6천년으로 끝나게 될 것으로 믿으며, 제7일에 해당하는 천년 동안에 안식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많은 교부들이 이 같은 시대구분과 함께 그의 견해를 받아들였다.
인류역사를 6천년으로 보는 것은 아르마(Armagh)의 대주교 아셔(James Ussher, ?-1656)가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런 견해는 종교개혁자 멜랑톤(Melanchton, 1497-1560)에게서도 볼 수 있고 기독교 역사에서 볼 수 있는 보편적인 견해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세대주의자들이 말하는 시대 구분과 천년왕국은 이미 2세기 초부터 전해 내려오던 것임을 알 수가 있다.9)
오리겐(Origen, ?-253/54)은 천년기(千年期)를 풍유적(諷諭的) 혹은 영적 의미로 해석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어거스틴(Augustinus, 354-430)은 오리겐의 영적 해석을 받아들여 천년왕국은 그리스도의 탄생에서 시작하여 교회에서 실현되는 것으로 보았다. 대다수의 초대교부들이 “이것은 나의 몸이니···”하는 주님의 성찬 제정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다시 말하면 실재론적(實在論的)으로 해석했으나 오리겐은 이를 영적으로 해석했다.
6세기까지의 희랍의 성경주석가들이 요한계시록의 주석은 피하는 편이었는데 오리겐은 요한계시록의 많은 본문을 이미 알려진 역사적인 사건에 비추어 문자적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예언의 내용보다는 기독론(基督論)에 관심을 두었다. 그리고 천년왕국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대한 성경의 종말론적 예언을 유대교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을 당치 않은 것이라고 비웃었다.10)
오리겐은 세계의 종말이 갑자기 오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오랜 세월을 지내면서 개개인에 따라 달리 점진적으로 발전하고 수정하는 단계를 거쳐 이르게 된다는 것이었다. 종말적인 성취의 과정은 이미 시작되었으나 완성의 단계는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현재와 미래 사이에서 긴장을 경험할 뿐 아니라 성도 개개인의 구원과 몸 된 교회 전체의 구원간의 긴장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통치하심이 이미 실재(實在)한다는 것이었다.
3세기 말에서 4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즉 325년의 니케아공의회 때까지 희랍 신학은 오리겐의 지대한 영향 아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지지하는 사람이든 비판하는 사람이든 전통적인 종말론을 영적으로 재해석하는 오리겐의 종말론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11) 심지어 알렉산드리아에는 그의 제자 그레고리(Gregory)를 비롯하여 메토디우스(Methodius) 등 많은 신학자들이 스승인 오리겐과는 다르게 천년왕국 사상을 피력하였다.
서방(西方)에서는 3세기 말과 4세기 초(303-313)에 있은 혹독한 핍박 하에서 사람들은 묵시론적인 종말론(Apocalyptic eschatology)에 대해 새롭게 관심을 가졌다. 빅토리누스(Victorinus), 락탄티우스(Lactantius) 등은 천년왕국에 대한 강한 희망을 표현하였다. 그러나 박해의 시대가 지나 313년 기독교가 공인되고 381년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면서부터 교회에는 그 전과 달리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교회가 제도화되고 힘 있고 번창하는 기관으로 발전하게 되면서부터 교회는 서로 다른 종말론적 신앙을 갖는 데서 오는 긴장 관계를 지양하고 양자택일하는 것으로 종말론의 신앙을 단순화하였다. 다시 말해 천년왕국 신앙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로마 가톨릭교회가 이런 과정을 취하도록 영향을 끼친 사람이 바로 어거스틴이었다.
힙포의 감독 어거스틴(Augustine, 354-430)은 오리겐 이후의 동방교회와 터툴리안 이후의 서방교회의 신학을 종합하여 자기 나름의 종말론을 개진하였다. 어거스틴의 종말론을 이해하는 데는 그의 신플라톤주의의 시간에 대한 이해가 관건이 된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영원은 오리겐이 말하는 ‘에이온’(aeons)의 끝없는 연속이 아니고 연속 혹은 연장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이며 영원은 하나님의 존재하심에 속하는 전적으로 단순하며 불변하는 현재이다.12)
시간과 영원을 구별하는 선은 피조물을 위한 것인데 그것은 전적인 형체의 변화(transformation) 즉 우리의 물질적인 실재의 변형이요 우리가 사는 세계의 변형이다. 하나님은 부활의 순간에 이 변형을 가능하게 하신다. 따라서 어거스틴에게 종말(eschaton)은 현세의 끝임과 동시에 새 시대의 시작일 뿐 아니라 역사 자체의 종말이며 영원한 안식(安息)의 시작이다. 안식이 시작되면 모든 시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쉬신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계시록 20:1-6을 해석하면서 지상에 이루어지는 왕국의 천년은 기독교의 전 시대를 상징하는 말로 이해했다. 그리고 도나투스파의 티코니우스(Tyconius, ?-380경)의 견해와 같이 천년왕국은 그리스도의 탄생에서 시작하여 교회에서 실현되는 것으로 보았다.13) 이처럼 ‘하나님의 도성’(都城, The City of God)은 현재적이면서 또 다른 한편 미래적(未來的)인 것이어서 교회와 국가가 다 같이 일정한 형태를 갖추며 구속(救贖)받은 개개인들은 하나님의 도성에서 하늘의 축복을 받는다고 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도성’을 대표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도성’ 자체는 아니고 ‘하나님의 도성’을 지향해야 하는 공동체일 뿐이다. 다시 말하면 어거스틴은 역사적인 가톨릭교회의 가견적(可見的)인 형상(形象)을 바로 이 ‘하나님의 도성’과 동일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이 말하는 ‘가톨릭교회’는 그리스도의 몸과 로마의 역사적 교회를 동일시하는 오늘날의 ‘로마 가톨릭’ 교회와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중세에 이르러서 교회가 어거스틴의 영적 이해와 그 양면성을 하나님의 나라가 곧 오늘날의 ‘로마 가톨릭교회’를 형상화한 것으로 좁혀서 이해하였다. 313년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380년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함으로 인해 교회가 이제는 박해 없는 평온한 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과 거의 때를 같이 하여 그리스도의 재림을 그림으로 보듯 좀 더 생생하게 고대하게 해 주는 천년왕국 신앙은 소위 ‘무(無) 천년설’로 대신하게 되었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어거스틴의 견해를 정통적인 교리로 받아들여 431년 에베소회의에서는 ‘천년왕국 신앙’을 미신적(迷信的) 탈선으로 정죄했다.
3. 중세의 종말 사상과 천년왕국 운동
어거스틴이 중세의 종말론에 영향을 미친 또 하나는 연옥설(燃獄說, Purgatorium)이다. 연옥설은 어거스틴이 시안(試案)으로 제안하였으며 그레고리 1세(Pope Gregory I, ?-604)가 그 기초를 설정하였다.14)
톨레도(Toledo)의 율리안(Julian)은 연옥설은 교부들의 글들과 마태복음 12:32, 고린도전서 3:12-15 말씀에 근거한다고 했다. 마태복음에 어떤 죄는 이 세상에서 사함을 받으나 다른 죄는 저 세상에서 사함을 받는다는 말씀으로 해석하며, 고린도전서의 말씀에서 연옥의 불이 태우지 못하는 금, 은, 보석을 보다 크고 완악한 대죄(大罪)로, 나무, 풀, 짚을 작고 미미한 소죄(小罪)로 해석하여 택함을 받은 자들은 연옥의 불을 통과함으로써 마침내 작은 죄(小罪)로부터 정결함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 같이 고린도전서의 말씀에 대한 전혀 문맥에도 맞지 않는 억지 해석을 연옥설의 성경적 근거로 든 사실은 희한한 일이다. 그로부터 최후의 심판이 있기 이전의 성도들의 영혼의 상태에 관해 상세한 부분까지 사변(思辨)하는 것이 신학자들의 과업의 하나가 되었다. 이를테면 사도들과 순교자들의 완전한 영혼들이 최후의 심판이 있기 이전에 천국에 영접을 받은 것인지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고 사변(思辨)했던 것이다. 이런 연옥교리는 발전하여 ‘신곡’(神曲, La Divina Commedia)을 쓴 단테에 이르러는 하나의 세계관을 형성하게 되었다.
중세교회 신학자들은 현세(現世)와 내세(來世)를 대조하는 한편 연옥을 사변함으로써 낙관적인 종말론을 피력하고 있을 때 431년의 에베소회의의 결정 등으로 말미암아 공적으로 억제를 당하게 된 ‘천년왕국 신앙’은 신학자들 세계에서 잠적하여 ‘시빌린 예언서’(Sybylline Oracles), ‘은자(隱者)의 소책자’, ‘아스클레피우스’(Asclepius) 등 비(非) 기독교 묵시록과 함께 일반 민간 사이에 유포되고 전달되면서 명맥을 잇게 되었다. 그러다가 중세에 이르러 사회적인 상황이 극도로 불안하게 되자 메시아를 사칭하는 사람들에 의해 ‘천년왕국 신앙’이 민간에 퍼지게 되었다.
초대교회 시대의 교부들이 천년왕국 신앙을 말할 때 그것은 신앙인이면 누구나 자유롭게 양자택일 할 수 있는 무해한 종말론 신앙의 하나일 뿐이었으나 기근과 가난, 질병과 역병에 시달리는 중세시대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처한 비참한 현실을 기적적으로 벗어나게 될 것이며 곧 실현될 이상(理想) 사회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에 대한 신앙이요 꿈이었다. 그러자 천년왕국 건설을 빙자하여 메시아를 사칭하는 자들이 많이 일어났으며 천년왕국 운동은 배타적이며 무력을 행사하는 소요로까지 발전했다.
12세기에서부터 16세기에 이르기까지 민간의 종말론 신앙은 폭력을 동반한 천년왕국 운동으로 발전하기를 거듭하였다. 철장을 가지고 원수를 제압하고 악인을 심판하는 일을 대행한다는 명분으로 유대인을 학살하고 성직자와 수도사를 응징하는 일을 자행하였다. 1110년경에 일어난 탄쉘름(Tanshelm) 운동, 1140년경에 일어난 유드 드 레토아(Eude de l’Etoile) 운동, 수차에 걸친 광신적인 비정규군의 십자군 운동 등 거짓 메시아 운동 혹은 적그리스도 운동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이런 운동들은 제도적인 교회가 종교재판(宗敎裁判, Inquisition)이라는 제도를 만들어 이단을 정죄하고 처형하였던 일과 대비가 되는 일이기도 하다.
종교재판은 루키우스 3세(Lucius III, 1181-1185)가 1184년에 실시한 이단에 대한 재판에 근거하여 그레고리 9세(1227-1241)가 1231년 시행하기 시작한 제도이다. 종교재판은 사람들을 산채로 화형(火刑)에 처할 뿐 아니라 시체를 파내어 불사르기도 했으며 영원한 지옥으로 보내도록 판결하기도 했다. 이런 처사와 발상은 스스로 심판하는 천사의 일을 대행한다는 천년왕국 운동자들의 처사나 발상과 별로 다름이 없었다.
13세기에 이르러 피오르(Fiore)의 요아킴(Joachim)이 새로운 예언서를 내어 요한계시록에 나타나는 사건들과 서술들을 역사에 나타나는 인물 및 사건과 맞추어 일일이 설명하려고 하였다. 이런 예언서의 영향으로 출중한 황제를 메시아로 보려는 운동이 파급되었다. 요아킴은 역사를 성부시대, 성자시대 그리고 성령시대로 구분하면서 예수의 재림과 더불어 제3의 성령시대가 시작된다는 것인데 그 해가 바로 1260년이라는 것이었다.
요아킴은 그의 묵시록을 ‘영원한 복음’(evangelium aeternum)이라고 했는데 그가 죽고 난 후 반세기만에 메시아운동은 ‘영원한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번져 나갔다. 이 메시아운동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메시아적인 황제를 대망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출중한 군주(君主)가 나타나면 메시아로 동일시하였다. 독일에서는 프레드릭 2세(Friedlich II)를 메시아로 생각하여 그가 죽고 난 후에도 부활하여 다시 올 것이라는 황당한 기대를 가졌다. 이상적인 정치를 펴서 가난한 자들에게 부와 희망을 나누어주고 성직자들을 벌할 것이라는 프레드릭 부활신앙은 15세기까지 계속되었다.15)
13세기에 일어난 프레절런트(Flagellants) 운동은 요아킴의 묵시록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또 하나의 다른 운동이었다. 그들 그룹 가운데 경미(輕微)한 죄라도 죄를 범한 사람은 무리들에게 둘러싸여 매를 맞아야 했다. 매를 맞는 사람은 고행(苦行)하는 성자로 또는 순교자로 인정을 받았다. 처음에 자학(自虐)하는 고행주의(苦行主義)에 일관하던 플레절런트 운동은 점점 혁명적이며 폭행을 동반하는 독선적 운동으로 변질되었다. 그 결과로 1348/49년 그들은 사제들을 살해하고 유대인들을 죽이는 대학살을 자행하였다.
15세기 보헤미아(Bohemia, 현 체코)는 타보르(Tabor)에서 일어난 사회평등주의(社會平等主義)를 지향하는 천년왕국 운동(Egalitarian Chiliasm)으로 인해 참화(慘禍)를 입게 되었다. 이 운동은 먼저 프라하(Prague)에서 요한 후스(Huss)의 노선을 따르는 과격파에 의하여 일어났다. 1420년 2월 10일에서 14일 사이에 모든 도시와 마을이 불로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14일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넘기자 타보르인들은 기적에 의한 불신자들의 멸망을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다고 하면서 자신들이 세상의 정화(淨化)를 위해 나서기로 했다.
타보르의 설교자들은 세상 정화(淨化)를 위해 주의 이름으로 불신자들을 죽이는 것을 피할 수 없는 의무라고 외쳤다. 그들은 먼저 죄인들을 없이하여 땅이 정결케 해야 그리스도가 오신다고 하며 그 때 신자들은 휴거하여 공중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고 다시금 타보르인들의 여러 근거지가 있는 지역의 거룩한 산 속에서 메시아의 잔치에 참예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또한 사도행전의 예루살렘교회와 같이 한다면서 재산을 공유(共有)하기도 했으나 아무도 일하지 않고 소비만 하다가 나중에는 이웃을 습격하여 약탈하는 무리로 전락하기도 하였다.
이런 광신적이며 전투적인 천년왕국 집단들이 대환란 심판의 대행자로 나서면서 제일 먼저 처치하는 대상은 언제 어디서나 마찬가지로 교직자(敎職者)와 수도사(修道寺)들이었다. 특히 당시 보헤미아의 경우 국토의 반이 교회 소유로 되어 있었다고 하니 그 이유를 알 만하다.
보헤미아에서 일어난 이런 사회 평등주의 천년왕국 운동은 인접국인 독일로 확산되었다. 1502년 스파이어(Speyer)에서 농부인 요스 프리츠(Joss Fritz)가 ‘분트슈’(Bundschuh)로 알려진 천년왕국 신앙으로 무장한 혁명적인 농민운동을 일으켰다. 관아(官衙)를 습격하여 파괴하고, 모든 세금제도를 철폐하며, 교회 재산을 주민들에게 분배하고 삼림과 수자원과 목장을 공동의 소유로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독일의 여러 지역에서 농민들의 소요가 있었다. 모두가 다 천년왕국 신앙과 결부된 것은 아니었으나 천년왕국 신앙이 깊은 고장 튜링엔(Thuringen)에서는 농민전쟁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또 이 ‘평등주의 천년왕국 사상’은 재세례파(再浸禮派, Anabaptist)에게 전수되었다. 재세례파운동은 30여 개의 여러 그룹들로 출발된 운동이었다. 공통점은 재세례를 베푼다는 점과 자기들만을 선민으로 생각하는 배타적인 성향에 ‘천년왕국 신앙’을 가졌다는 점이었다. 대다수의 재세례파들은 평화적이었으나 그중 전투적인 천년왕국 신봉자들은 중세기에 동일한 신앙을 가졌던 종파들이 저질렀던 일을 재현했다.
튜링엔 출신 재세례파 설교자 토마스 뮨쩌(Thomas Muntzer, 1488/9-1525)는 천년왕국 건설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성령을 받은 하나님의 선민들이 무력으로 천년왕국의 길을 예비해야 한다고 강변하고 악인들을 물리적으로라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일반 민중들로 구성된 하나님의 선민들이 귀족들을 포함한 불신자들을 처단하기 위해 칼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와 의무가 있음을 선언했다.16) 뮨쩌는 이 같이 설교자로서 농민봉기의 이념적 지주(支柱) 역할을 했으며 그는 1525년 농민전쟁에 직접 가담하여 농민들의 지도자 역할을 했다.
멜키오르 호프만(Melchior Hoffmann)은 환난과 이적과 기사가 있은 후 그리스도의 탄생 이후 1500년이 되는 해인 1533년이 천년왕국의 시작이라고 선언했다. 처음에는 그의 추종자들이 스트라스부르크로 모여들었으나 호프만이 투옥되자 그의 재세례파 추종자들은 뮨스터(Munster)를 새 예루살렘이라고 하면서 그리로 모여들었다. 호프만과 함께 지도자 였던 복클손(Bockelson)은 1534년 2월 8일 거리를 달리며 회개를 외치자 마지막 날이 임박한 것이라고 생각한 여자들은 흥분한 나머지 울며 땅에 엎드려져 입에 거품을 흘리기도 했다. 추종자들은 무기를 들고 봉기하여 시청과 시장(市場)을 점령하고 새 예루살렘의 건설을 추진했다.
복클손은 예루살렘의 왕으로 즉위하여 일부다처제를 실시하는 한편 신정(神政) 정치를 시행한다고 했으나 1535년 6월 25일 뮨스터 성(城)이 함락되면서 소요는 평정되었다. 재세례파의 뮨스터 소요가 평정됨으로써 십자군 시대부터 수세기에 걸쳐 꼬리를 물고 일어나 무력행사를 불사하던 광신적 천년왕국운동은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4. 종교개혁의 종말 사상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신앙의 척도를 삼아야 한다.”고 주창(主唱)한 루터와 칼빈은 그들의 종말론에서 중세교회가 오랫동안 가르쳐 온 연옥설을 배제했다. 연옥설은 성경에 근거가 없는 교리일 뿐 아니라 공로(功勞) 사상, 사자(死者)를 위한 기도, 면죄부(免罪符)의 관행과 연계되어 있는 교리이기 때문이었다. 그 점에서 종교개혁자들은 로마 가톨릭교회와 견해를 달리했으나 ‘천년왕국 신앙’을 배격한 점에서는 동일했다.
종교개혁자들은 초대교회 신앙을 본받는 것을 이상(理想)으로 하였으나 ‘천년왕국 신앙’이 초대 교부들 모두가 다 지지한 전통은 아닐 뿐더러 중세의 ‘천년왕국 신앙’에는 이교적인 종말론이 뒤섞여 있었으며 또한 그러한 신앙으로 말미암아 야기된 가공할 일들이 연출되었기 때문에 ‘천년왕국 신앙’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말했던 것이다.
루터는 성경에서 유래한 묵시록의 전통을 존중하면서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한 시대에 살고 있음을 믿으며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 하는 등 말세의 징조를 들어 말했다. 그러나 ‘천년왕국 신앙’은 배격했다. 그는 죽은 자의 부활이 있기 이전에 거룩한 자들과 경건한 자들만이 세상적인 나라를 향유하며 불신자들을 멸절시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고 역사가 존속하는 한 하나님의 사역은 다 드러나지 않는 것이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고난 가운데 살며 그리스도의 적과 싸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부활의 실제 세계를 현재로는 다만 믿음과 소망에서만 도달할 수 있으며 우리의 삶의 특징이 십자가이므로 역사 안에 있는 왕국에서 세상적인 즐거움을 누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 거부하였다.17)
멜랑톤(Melanchton)이 작성했으며 1530년 루터교의 신앙고백서로 채택된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는 천년왕국설을 유대인의 견해라고 하여 배격했다. “우리는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을 심판하시기 위하여 마지막 날에 오셔서 신자와 선택된 사람에게는 영생과 영원한 기쁨을 주시되 불경한 사람들과 악마에게는 지옥과 영원한 벌을 주시기 위하여 오실 것을 가르친다. 그러므로 악마와 정죄된 사람들이 영원한 고통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가르치는 재세례파는 배격되어야 한다. 또한 어떤 유대인들의 견해가(천년왕국을 말함) 지금도 나타나서 죽은 사람들의 부활에 앞서서 신도들과 경건한 사람들이 세상의 왕국을 소유하여 불경한 사람들을 다 진멸할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을 배격해야 한다.”18)
칼빈은 ‘천년왕국 신앙’을 ‘광신자들의 겁주는 말’(horrendum dictu delirium)이라고 하면서 거부했다. 그리스도의 다스리심이 천년으로 한정될 수는 없다는 것이었으며,19) 루터가 말한 바와 마찬가지로 영광 가운데 주님께서 심판 주로 오시면 이 세상은 끝나고 새 하늘과 새 땅의 세계로 들어가는데 다시금 현세의 연장을 바란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는 것이었다.20)
전천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는 초대교부들 가운데 다수가 ‘천년왕국’ 신앙을 가졌다는 점을 가지고 호소했다. 그러나 초대교부들의 성경이해가 성경의 진리에는 미치지 못함을 우리는 교리사 연구를 통해 알 수 있다. 삼위일체 교리와 기독론 교리를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충분히 이해하여 교의화(敎義化)하기까지는 여러 세기가 걸렸다.
초대교부들에게서는 바울의 신학에서 볼 수 있는 ‘칭의교리’를 발견할 수 없는 것도 교부들의 기독교 진리이해가 성경이 가르치는 교리에 미치지 못했음을 잘 말해준다. 초대교회의 교부들의 종말론에는 마지막 심판 날에 있을 상벌을 말하면서 현세에서의 도덕적인 생활을 강조하는 율법주의적인 색채가 농후한데 반해 ‘칭의교리’를 재발견하여 강조한 종교개혁자들은 은혜의 교리를 말한 어거스틴과 같이 천년왕국 신앙을 부정적으로 말한 사실이 우연한 일은 아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어거스틴의 신학적인 전통을 재 발굴하여 계승한 것으로 말하는데 종말론에 관해서도 역시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중세 교회가 ‘칭의교리’와는 멀리 ‘율법주의 공로사상’에 더 깊이 빠지면서 즉 기독교를 일반종교와 구별하게 해 주는 가장 기본적인 특성을 잃음으로 말미암아 교회에는 이교적(異敎的)인 관행이 범람하게 되어 부패하게 되었으며 가난과 무지 속에 사는 백성들은 미신적(迷信的)이며 광신적(狂信的)인 신앙에 버려둠을 당했다. 이런 배경에서 루터교회와 개혁주의교회가 다 같이 무천년설을 교회의 공적신앙으로 지지해 왔다.21)
5. 종교개혁 이후의 종말론
종교개혁 이후 100년의 기간이 유럽에서는 정통주의가 지배한 시대였다. 로마 가톨릭에 대항하여 개신교 신학은 교리를 더 확고히 하고 체계화하던 시대였다. 종말론은 정통주의 교리의 핵심은 아니었으나 정통주의 신학은 그런 대로 종말론에 많은 관심을 나타냈다.
고전적이며 조화의 미를 추구하는 바로크(Baroque) 시대 사람들은 세상을 좋아했으며 세상에 애착을 두다 보니 세상의 덧없음에 대한 불안감에서 그만큼 종말에 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신학은 세속생활에 위협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영원하고 변함이 없는 삶을 추구하는 것이 순례자의 생활의 목표임을 가르쳤다.
후기 스콜라주의(Spatscholastismus) 시대라고도 일컫는 정통주의(正統主義, Orthodoxy) 시대의 종말론적인 관심은 중세 스콜라주의의 경우와 같이 역사적인 종말보다는 개인적 종말에 있었다. 죽음은 곧 몸과 영혼의 분리를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그것은 또한 죄의 결과인 것으로 말했다. 따라서 신학은 죽음 후에 영혼이 어디서 어떻게 사는가를 사변(思辨)했다. 대부분의 정통주의 신학자들은 사람이 죽을 때 몸만 죽는 것이고 영혼은 불멸하는 것이기 때문에 계속 사는 것이라고 믿었다.22)
루터도 최후의 날이 임박한 것으로 말했는데 루터교회는 이러한 견해를 오랫동안 견지했다. 17세기 초에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세상이 곧 끝날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이 언제냐 하는 문제를 두고 논쟁했다.
그러나 이성적(理性的) 종교를 추구한 계몽주의(啓蒙主義) 자들은 과거를 퇴보적인 것으로 봄과 동시에 계몽사조의 이론에 따라 추상적인 미래에 대한 기대를 가졌다. 즉 인간이 점점 더 차원이 높은 계몽의 상태로 보다 이상적인 인간성을 지향하는 인류의 끝없는 발전을 성취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그 시대에서 이룩해야 할 역사적 과업은 인간 교육에 있는 것으로 보았다. 즉 미래의 이상 사회는 지상에 있는 완전한 윤리적 공동체인 이상 국가에 살도록 사람들을 교육하는 것이었다.
거기서는 모든 인간이 그들의 모든 도덕을 발전시킴으로써 영원한 평화에 기여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인간은 자연을 따라 완성에 이르며 그 안에서 본래적인 종말(Eschaton)에 도달한다는 것이었다. 계몽신학자들은 이런 상황에 맞추어 도덕적인 종말론을 개진했다.23)
계몽사상과 거의 같은 시대에 일어난 경건주의(敬虔主義, Pietism)는 정통주의에 대한 반발에서 나온 사상이요 운동이지만 세상 끝 날이 언제 올 것이냐 하는 사변은 그대로 물려받아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경건주의자들의 종말론은 신학자에 따라 특색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그들의 종말론 사상은 모두가 현세에서 새 사람이 되는 것과 중생 그리고 현재를 기독교적인 승리를 위해 힘쓰는 일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경건주의는 정통주의나 계몽주의와는 대조적으로 대체로 개인적인 종말보다는 역사적인 종말에 더 관심을 표명했으며 천년왕국에 대한 신앙을 가졌었다.
경건주의의 탄생에 기초를 놓은 요한 아른트(Johann Arndt, 1555-1621)는 경건은 영원 속에 장차 이루어지는 완성을 지향하는 것이라고 하여 현재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함을 가르쳤다. 뷰르템베르크(Wurtemberg)의 경건주의의 선구자 안드레(Johann Valentin Andreae, 1586-1654)는 아른트의 종말론을 그대로 받아들여 사람을 새롭게 하는 천국의 현재성을 개인적인 차원에서 사회적인 차원으로 넓혀 말하고, 기독교사회(Societas Christiana) 건설을 역설하면서 인간사회에서 영원한 삶을 미리 준비하는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었다. 즉 천년왕국은 인간의 실제적인 변화를 통해 먼저 역사 안에서 시작된다는 것이었다.
경건주의의 창시자 슈페너(Philipp Jakob Spener, 1635-1705)는 이런 사상을 이어 받으면서 천년왕국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가 천년왕국 신앙을 받아들인 것은 생동성이 있고 실천적인 신앙을 가지려는 열심 및 교회 생활의 개선에 대한 열망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장래의 역사 속에 영광으로 나타난다는 데 대한 소망은 슈페너에게 있어서 현재에서 열심히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일하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었다.24)
경건주의의 대표적인 성경학자 벵겔(Johann Albrecht Bengel, 1687-1752)은 많은 사람들이 신학 전체를 죽는 일에 두고 있음을 비판하고 그리스도인이 죄를 벗어나 은혜로 들어오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며 은혜로 들어왔으면 죽음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의 나타나심을 기대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강조하면서 기독교를 ‘죽음의 예술’로 격하시켜서는 안 된다고 관심을 역사적인 종말론에다 돌리도록 했다.25)
벵겔은 특히 ‘천년왕국’을 강조하고 있다. 벵겔은 정통주의 신학의 영감설을 따라 성경을 ‘하나님의 책’이라고 하면서 성경에서 우리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므로 의미가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벵겔은 요한계시록에는 역사의 종말에 이르기까지 시대 별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이 정밀하게 기록되어 있어 우리는 계시록을 통해 전체 세계 역사와 세계의 설계도를 한 눈에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벵겔은 계시록에 나오는 숫자의 비밀을 알려고 애썼으며 그것을 나머지 다른 성경책에서 보는 숫자와 연결하여 이해하려고 했다.
그는 요한계시록 20:2의 천년왕국의 시작은 멀지 않은 것으로 말하고 약간 불확실한 대로 1836년 6월 18일에 시작된다고 추정했다. 벵겔의 이런 종말사상과 역사의 상세한 부분까지 계시록에서 읽을 수 있다는 생각은 부흥운동을 거쳐 오늘의 한국교회 신자들에게 이르기까지 많은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벵겔은 계시록 20장 서두에 언급된 천년왕국과 계시록 20:4-6에 언급된 천년왕국을 구별했다.
즉 둘째 천년왕국은 첫째 천년왕국이 지상에서 끝나고 사탄이 다시 놓임을 받을 것이며 부활한 순교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서 다스리신다는 것이다. 그 동안 땅 위에 있는 사람들은 다시금 해이해지고 자기의 안전을 도모한다는 것이다.(비교, 마 24:37 이하, 눅 18:8) 둘째 천년왕국이 끝날 때 그리스도의 지상 재림이 있을 것이며 죽은 자들이 부활하게 되고 최후의 심판이 있을 것이며 세상은 끝나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한 삶이 신작된다는 것이었다.
이 같은 벵겔의 천년왕국 신앙은 18세기와 19세기에 일어난 부흥주의 신학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19세기에는 성경을 문서화하는 자유주의운동이 만연되었으므로 부흥주의는 이에 대항하여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는 나머지 성경을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이해하려는 성경 문자주의(Biblicism)의 경향을 띄게 되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20장의 천년기에 관한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천년왕국설이 더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경건주의 신학은 ‘중생’과 ‘새 사람이 되는 일’과 ‘성령 충만한 새 생활’을 역설하며 역사적인 종말론을 강조하는 등 긍정적인 면을 가지고 있었으나 열정적이지만 주관적인 신앙을 가지는 것과 성경 문자주의의 경향을 보이는 것이라든지 천년왕국 신앙을 강조하는 일 등 재세례파와 같이 신령주의(Spiritualism)의 전통을 계승한 신앙운동이었다.
17세기에 일어난 또 다른 종말론 신앙은 화란의 개혁주의 신학자들을 중심으로 하여 일어난 후천년설이다. 계약신학자로 알려진 콕케이우스(Coccejus), 알팅(Alting), 브라켈(Brakel) 등이 후천년설을 주장했다. 역사의 종말과 교회의 과업을 긍정적이며 낙관적으로 본 후천년설의 종말론은 사회개혁과 칼빈주의 문화건설을 주창한 19세기 화란의 소위 신(新) 칼빈주의 사상과 운동을 자라게 한 토양을 조성하는 데 한 몫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또 ‘언덕 위의 도성’ 건설을 지향한 뉴잉글랜드의 청교도들도 후천년 종말 사상을 피력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코튼(John Cotten)이었는데,26) 그가 뉴잉글랜드가 그리스도의 천년왕국이 이루어질 바로 그 곳으로 믿은 것이라든지, 마사추세츠의 법이 천년왕국을 위한 적절한 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점과 교회회원의 자격으로 회심의 체험을 강조한 점 등은 종교개혁 당시에 사회개혁과 천년왕국 건설을 꿈꾸었던 재세례파들의 천년왕국 신앙(Chiliasm)과 본질적으로 별다름이 없었다.
재세례파들은 그들의 신념과 생존을 위해 기존의 반대세력 및 권력과 투쟁하는 과정에서 반사회적인 혹은 혁명적인 그룹으로 낙인이 찍혔으나 뉴잉글랜드의 청교도들은 신대륙의 황무지에서 자유롭게 그들의 신념을 따라 천년왕국 건설을 위해 매진할 수 있었으며 새롭게 전개되는 역사의 주역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재세례파들 가운데 더러는 메시아운동으로 빠진 반면에 청교도들은 건전한 교회운동을 한 점은 물론 이와는 다르다.
계몽주의의 전통을 따라 역사적인 비평으로 성경을 비판하는 합리주의 신학자들은 성경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성을 의심하므로 그들의 종말론은 일반적인 개인의 종말론에 머물렀으며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기대 같은 것은 아예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 혹은 성육(成肉)에 회의(懷疑)를 가진 자들에게서 재림신앙은 기대할 수 없는 법이다. 이를테면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가 예수를 종말론과 결부시켜 논했으나 성경에 근거한 사실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에 대한 자의식(自意識)을 논했으며 그는 우리의 현재에 대한 관심은 결여한 채로 묵시적인 교의를 논했다.27)
자유주의 신학을 배격하고 이를 극복하려했던 변증 신학자들은 신학 방법으로 변증법을 적용함으로써 신앙을 종말론적으로 규정한다. 말씀의 신학에의 복귀를 선언하고 그 작업에 종사한다고 한 칼 바르트는 역사비판을 극복하려던 나머지 역사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실재적인 역사(die wirkliche Geschichte)를 오히려 지양(止揚)했다.28)
마틴 캐러(Martin Kahler)가 이미 ‘Historie’와 ‘Geschichte’를 구분했으며 프란쯔 오버벡(Franz Overbeck)은 ‘Geschichte’와 ‘Urgeschichte’를 구분했는데 바르트는 ‘Geschichte’에서 ‘Urgeshcichte’ 및 ‘Ubergeschichte’를 구분했다. 바르트의 ‘Urgeschichte’는 ‘초역사적 개념’(ubergeschichtliche Begriff)과 ‘비역사적 개념’(ungeschichtliche Begriff)을 포괄한다.29) 그리고 ‘비역사적인’(ungeschichtliche) 것은 무시간적(zeitlos)인 것으로 이해했다.
바르트는 영원(永遠)과 시간(時間)을 거의 접촉할 수 없는 것으로 구분하는 변증법적 사고에서 종말론을 실존적인 삶을 위한 도전의 상징이라고 하는가 하면, 파루시아(재림)를 대망하는 것은 우리의 매일의 삶의 장을 있는 그대로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함으로써 인간이 파루시아를 시간 안에 실제로 있게 될 것으로 대망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看過)했다.30)
불트만(Rudolf Bultmann)은 파루시아(재림)에 대한 대망은 인간으로 하여금 결단하도록 촉구하는 실존적인 현실(Aktualitat)이면서 동시에 역사적인 시간에 확고히 정박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변증법적으로 해방되는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바르트와 비슷한 생각을 전개한다.31)
소위 현대 신학자들 역시 종말론을 다루며 기독교를 종말론적인 종교라고 정의하기까지 하지만 그들은 역사에 대한 이해가 우리와 다르며 따라서 역사적 종말에 대한 이해도 그리스도의 파루시아에 대한 개념도 달라 실재적이기보다는 관념적인 개념이 될 수밖에 없다.
6. 한국교회의 종말론
기독교 종말론을 논하는 목적이 우리의 종말신앙을 재검토하며 정리하기 위한 것이므로 한국교회의 종말론을 생각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은 19세기 영적 각성운동 시기에 선교적 소명을 받은 선교사들을 통해 복음을 받았으므로 그들이 가진 보수적인 신앙과 함께 전천년설 종말 신앙을 전수 받았다.32) 그 결과 초기 한국교회의 설교의 중요한 주제는 회개, 중생, 구원이었으며 구원과 직결해 내세적인 종말신앙을 강조했다. 내세 지향적 신앙으로 전(前) 천년기설을 믿는 종말신앙은 일제의 핍박 하에서 많은 성도들이 환난을 이기는 데 큰 힘이 되었다.
신구약 성경 전권(全卷)을 주석한 박윤선(朴允善) 목사가 제일 먼저 탈고해 출판한 책이 ‘요한계시록’ 주석이었다는 사실이나 1920/30년대에 최봉석(崔鳳奭) 목사가 ‘예수 천당!’ 구호로 복음을 전했다는 일화(逸話) 역시 당시의 한국교회의 신앙이 내세적 종말론으로 결정(結晶)되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개신교와 개혁주의의 전통적인 신앙이 무천년설을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같이 한국교회는 종말 신앙과 특히 요한계시록에 관심을 가지면서부터 천년왕국설을 신봉해 왔다.33)
한국장로교의 경우 1907년 대부흥 때부터 부흥사로 활약한 길선주(吉善宙) 목사를 위시한 많은 부흥사들이 사경회와 부흥회에서 요한계시록 사경(査經)을 단골 주제로 삼았다. 특히 그는 ‘주 재림에 대한 연구’라는 주제로 말세론(末世論)을 강론하고 무천년설과 후천년설을 강력하게 비판하는 한편 전천년설을 주장하며 가르쳤다. 길선주 목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한 세계의 종말을 ‘영적 세계의 전제이며 복음의 승리요 교회의 결론’으로 보았다.34) 길선주목사의 부흥사경회를 통해 설파한 전천년설 종말 신앙은 한국 장로교 내에 널리 파급되었다.
평양신학교 조직신학 교수였던 레이놀즈(W.D. Reynolds)는 전천년설을 가르쳤다.35) 1930년대 초부터 평양신학교 교수로 재직한 박형룡(朴亨龍)은 그의 ‘조직신학’을 벌코프 책을 주로 참고하여 저술했음에도 불구하고 천년왕국에 대한 견해는 무천년설을 주장한 벌코프를 따르지 않고 역사적 전천년설을 따르고 있다. 박형룡은 “대한 예수교 장로회의 신학적 전통은 역사적 천년기 전(前) 재림론이다.”36)라고 하면서 평양신학교의 전통을 따랐다. 주경신학자로 개혁주의 전통에 충실하려고 한 박윤선 목사 역시 같은 견해를 가르쳤다. 개혁주의적인 보수주의 신학을 대표하는 독보적인 두 신학자가 모두 전천년설 신앙을 견지(堅持)했기 때문에 그것이 더욱 한국교회와 한국 장로교회의 전통이 된 것이다.
1920년대의 세대주의(世代主義) 사상을 가진 선교사들이 들어온 이후부터는 ‘세대주의 전천년설’이 부흥사들을 통해 유포되었으며, 역사적 전천년설은 세대주의적인 전천년설로 채색되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종말론에 관한 한 전천년설이어야 하고 무천년설을 지지하는 사람은 이단시되거나 신(新) 신학자로 인정될 정도였다.
그러나 장로교의 두 원로 교수의 다음 세대 신학자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무천년설을 피력하기 시작했다. 보수적 장로교회 역시 점차로 개혁주의 교회의 전통인 이 무천년 종말관을 수용하게 되었다. 박형룡을 이어 1970년대 조직신학 교수였던 합동신학교 신복윤(申福潤) 교수는 무천년기 신앙을 말한다. 반면 차영배(車榮培)와 박아론(朴雅論)은 박형룡 신학의 종말론 전통을 계승하여 전천년기 신앙을 견지하고 있다. 1986년 이상근, 곽선희, 림인식, 박창환, 한철하, 김형태, 이종성, 한완석 등 여러 목사들이 기초한 것을 통합 측 장로교회가 내놓은 신앙고백서는 제10장 제4항에서 무천년설을 공적인 견해로 채택하고 있다.37)
보수적인 장로교 신학교에 속한 젊은 세대의 교수들은 미국의 웨스트민스터와 칼빈신학교의 가르침을 따라 주로 무천년기 신앙을 말한다.38) 그러나 성결교, 침례교, 오순절파 신학자들과 목사들은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에 충실한 편이다. 현재까지 출판된 요한계시록 강해서나 주석서를 보면 아직도 전천년설을 지지하는 편이 다수임을 발견한다.39)
그리고 주목할 만한 것은 민중신학의 기수인 감신의 서남동 교수가 기독교의 종말론을 역사적인 지평에서 이해하려는 자유주의적인 입장에서 무천년 신앙을 비판하고 교회 역사에 있었던 천년왕국에 대한 신앙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는 점이다. 그는 신국(神國)은 피안적(彼岸的)이고 궁극적인 것에 대한 상징인데 반해 천년왕국은 차안적(此岸的)이며 준(準) 궁극적인 것에 대한 상징이라는 것이며 이 역사와 사회가 새로워지는 데로 이행되는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신국(神國)은 개인 인격의 구원을 보장하지만 천년왕국은 사회적, 집단적 인간 구원에 대한 보장이라 하고 신국은 타력적인 구원을 전제하는 것으로 지배자들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이용되지만 천년왕국은 보다 자력적인 구원에 기울어지는 것이므로 민중의 갈망에 대한 상징이라는 것이다.40) 그의 이 같은 지론은 중세시대 천년왕국 신봉자들이 그들의 정치 사회적인 자유와 평등을 천년왕국 운동으로 구현하려던 역사적 사실을 정치신학의 견지에서 정당화하고 미화하는 견해이다.
맺는 말
기독교 종말론에서 ‘개인 종말론’은 중세교회와 로마가톨릭교회가 연옥설(煉獄說)을 주장하고 합리주의 신학자들이 회의론(懷疑論)을 편 것 외에는 별로 다른 이론들이 없다. 그러나 ‘역사적 종말론’을 두고는 천년기 해석에서 여러 견해들로 분분함을 보게 된다.
천년왕국 신앙은 요한계시록 20:1-6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믿는 신앙이다. 전(前) 천년기를 믿는 신앙은 후(後) 천년기를 믿는 신앙보다 요한계시록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면에서 더 철저하다. 이와 달리 후 천년기 신앙은 그리스도의 왕적 통치를 영적으로 해석하여 복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며 성령으로 다스림을 받는 교회가 왕성하게 되는 것으로 믿는다. 반면 전 천년기 신앙은 그리스도께서 심판주로 철장으로 세상을 다스릴 것이라는 말씀을 문자적으로 믿고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할 것을 믿는다. 중세 말기와 종교개혁 당시의 천년왕국 신앙 자들은 이런 믿음 때문에 폭력과 무력행사를 마다하지 않았다.
만일 요한계시록의 상징적 언어로 기술된 말씀들을 역사의 인물이나 사건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면 수많은 다른 해석들이 나오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의 시기를 점치려는 유혹에 빠진다. 전천년기적 천년왕국 신앙이 지배적인 환경에서 시한부 종말론 자들과 거짓 메시아들이 많이 나타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무천년설 신앙은 천년기를 영적으로 해석한다. 예를 들어 요한계시록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등의 상징적인 언어로 가득하다는 점에 근거하여 영적해석의 타당성을 주장한다. 무천년설 신앙은 재림하시는 그리스도를 성도들이 맞이함과 동시에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게 된다고 가르치므로 무천년설 신앙이 지배적인 환경에는 천년왕국 건설을 빙자하여 패쇄적인 집단을 조성하거나 집단의 교주 즉 거짓 메시아가 운신할 여지가 없어진다.
그러나 역사적 종말론보다는 개인적인 종말론에 관심을 가지고 안주하며 교회생활에 정체를 안겨 주는 중세 스콜라적 종말론이나 계몽신학이나 자유주의적 및 현대주의 종말론에 대비(對比)가 될 수 있는 종말 신앙은 천년왕국 신앙이다. 17세기 이후 침체되고 잠든 교회를 깨우친 경건주의와 부흥운동의 종말론 신앙은 ‘천년왕국 신앙’이었음을 우리가 상기할 필요가 있다.
‘개인 종말론’은 개인의 구원 문제와 결부되지만 ‘역사적 종말론’은 역사에 대한 관심을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어떤 종말론 신앙이든지 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참으로 믿고 기대하는 신앙은 위기의식을 갖게 되기 때문에 위축되거나 세상을 향해 소극적인 삶을 살거나 자신의 구원을 위해 소위 시온 성을 찾아 도피하는 신앙일 수는 없다.
기독교의 종말신앙은 역사의식을 갖고 항상 깨어 주님의 재림을 고대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며 그리스도의 증인이요 사회의 건전한 시민으로서 교회와 이웃을 위해 나누고 봉사하며 성실하게 사는 신앙이다.(*) 글쓴 이 / 김영재 교수(서울대 종교학과, 영국 Clifton Theological College 수학, 독일 Wuppertal KirchlicheHochschule 수학, 총신신대원 편목, 독일 Phi1ipps Universitat zu Marburg에서 신학박사, 독일 포이딩겐 독일인 교회, 미국의 미네소타와 아틀란타의 한인교회 목회, 서울대 강사, 총신대 신학대학원의 교수,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역사신학 교수 역임, 저서: Der Protestantismus in Korea und die calvinistische Tradition, Peter D Lang, Frankfurt am Maln, 1981. 외 다수의 저서와 역서)
< 미주 >
1) L. Berkhof, Systematic Theology, The Banner of Truth Trust, 1958, 659-738
2) Brian E. Daley. S. J., The hope of the Early Church,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1, p.2
3) 신복윤, 無千年期說, 神學正論, 제11권 1호, 1993.4., 245~257쪽 참조.
4) 신복윤, 재림 전에 있을 대사건들, 神學正論, 제11권 1호, 226~244쪽 참조.
5) Peter Muller-Goldkuhle, Post-Bibilical Evelopments in Eschatological Thought, in: The Problem of Eschatology ed. by Edward Schillerbecks & Boniface willems, Paulist Press, New York, 1969.
6) B. Daley, 앞의 책, p.7-9.
7) 졸고, 기독교 종말론에 대한 역사적 고찰 – 천년왕국 신앙을 중심으로, 초대교회부터 종교개혁까지- 성경과신학, 제 13권, 1993.04 119-146.
8) Norman Cohn, The Pursuit of the Millennium, Essential Books, New York 1957. HarperTorchbook, 1961, p. 6.
9) 같은 책, p.11-13.
10) Origen, Principiis, 2.II.2, Comm. in Matt 17:35-49; Brian E. Daley, S.J., 앞의 책, p.60.
11) Brian E. Daley, S.J., 앞의 책.
12) 브라이언 E. 데일리, 어거스틴의 종말론, 神學正論, 11권 1호, 1993, 4월호. 193-225쪽; Brian E. Daley, 앞의 책, pp. 131-150의 번역.
13) Augustinus, De Civitatis Dei, 20.7.; Brian E. Daley, 앞의 책. pp. 127f.
14) Jaroslav Pelikan, The Christian Tradition 3, The Growth of Medieval Theology(600-1300),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Chicago and London, 1978, p.33
15) Norman Cohn, 앞의 책 p.112.
16) 같은 책, p.239, p.244.
17) Erhard Kunz, Protestantische Eschatologie von der Reformation bis zur Aufklarung, Freiburg·Basel·Wien 1980, S. 15f.
18)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 제17조; 李章植, 基督敎信條史, 컨콜디아사 1979, 41쪽; W.J. 그리어/ 명종남 역, 재림과 천년왕국, 새순출판사, 1987, 42쪽. 29
19) CR, 80, p.167; Erhard Kunz, 위의 책, S.37.
20) 기독교강요, III, 25, 5.
21) 칼빈을 위시한, 바빙크, 카이퍼, 워필드 등 유수한 개혁주의자들과 대다수의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천년기를 영적으로 해석하는 소위 무천년설을 취하고 있다. 그것은 루터를 위시한 루터교 신학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를테면 ‘미조리 대회 루터교회’(Missouri Synod Lutheran Church), 한국의 보수적인 장로교와 교류를 하고 있는 ‘기독 개혁교회’(Christian Reformed Church), ‘정통 장로교회’(Orthodox Presbyterian Church)에서는 무천년설을 공식 견해로 받아들이고 있다. (박윤선, 요한계시록주석, 235쪽)
22) Peter Muller-Goldkuhle, Die Eschatologie in der Dogmatik des 19. Jahrhunderts, Ludgerus – Verlag Hubert Wingen, Essen 1966, 9.
23) 같은 책, p.26.
24) Erhard Kunz, 앞의 책, S. 75.
25) E. Stahlin, Die Verkundigung des Reiches Gottes in der Kirche Jesu Christi IV(Basel 1957), S. 373; Erhard Kunz, 앞의 책, S.83에서 재인용.
26) 오덕교, 존 코튼의 그리스도의 천년왕국에 대한 이해, 神學正論, 제9권1호, 1991년 7월호, 141-177.
27) D. Folke Holmstrom, Das eschatologische Denken der Gegenwart, drei Etappen der theologischen Entwicklung des zwanzigsten Jahrhunderts, ubersetzt in Deusch von Lic harald Kruska,, Verlag C. Berelsmann Gutersloh, 1936, p.247.
28) 같은 책, 233.
29) 같은 책, 230 이하.
30) 같은 책, 240, 241.
31) 같은 책 247.
32) 졸고, 한국교회 종말론, 神學正論, 제11권 1호 1993.04 261-287
33) 박윤선, 요한계시록주석, 235쪽.
34) 심창섭, 한국교회사에 나타난 종말사상, 목회와 신학, 1990년 4월호, 44쪽
35) 박형룡박사 저작전집 VII, 278쪽.
36) 같은 책.
37) 대한예수교장로교 헌법, 1987, 180쪽; “하나님의 나라는 인류 역사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그 안에 보이지 않는 형태로 임재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육체를 입고 세상에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는 역사 안에 보이는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다(마 3:2, 4:7). 하나님의 나라는 지상에 교회가 형성됨에 따라 교회와 함께 성장하게 된다(마 13:31-33, 막 4:30-32, 눅 13:18, 17:21). 세상의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여 모든 존재에 대한 심판이 있은 다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어 성도들과 함께 영속된다(고후 5:1, 계 21:1-7).”
38) 신성종, 요한계시록 강해, 1983, 132쪽.
39) 전천년설을 지지하는 주석 혹은 강해서로는 박윤선, 성경주석 요한계시록, 영음사 1955; 조용기, 요한계시록강해, 영산출판사 1976; 이병규, 요한계시록, 성광문화사 1978; 이종우, 요한계시록 (해석), 성광문화사 1979; 유인식, 요한계시록 강화, 성광문화사 1982; 조성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규정문화사 1982; 김시원, 재림공부해설, 성광문화사 1983 등이 있으며, 번역서로는 찰스 C. 라이리, 전천년설 신앙, 보이스사 1989 등이 있다. 무천년설을 말하는 것으로는 김승곤, 요한계시록 강해, 정음출판사 1968; 신성종, 요한계시록 강해, 도서출판 엠마오 1983; 이순한, 요한계시록 강해, 한국기독교 교육연구원 1985 등이 있고, 번역서로는 W.J.그리어/명종남역, 재림과 천년왕국, 새순출판사 1987년 등이 있다. 로버트 지. 클파우스 편집/권호덕 옮김, 千年 王國, 성광문화사 1980,은 죠오지 엘돈 래드의 역사적 전천년기설, 헤르만 에이 호이트의 세대주의적 전천년기설, 로레인 뵈트너의 후천년기설, 안토니 에이 후크마의 무천년기설이 있다.
40) 서남동, 두 이야기의 합류, 民衆과 韓國神學, 한국신학연구소 1982, 249
천년왕국설 비교표
후천년설 | 세대주의적 전천년설 | 역사주의적 전천년설 | 무천년설 | |
천년왕국 | 주님의 지상적 통치가 아닌 성령사역과 복음 확장을 통한 황금기를 맞아 교회 영적 번영의 의와 평화의 시기. | 보통 천년기는 문자적 일천년이나 정해진 일정 기간을 가리키며 이때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지상에서 왕 노릇 함. | 천년은 실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초림부터 재림 때까지의 기간을 말함. | |
재림시기 | 천년왕국 후에 그리스도의 재림 | 천년왕국 이전에 그리스도의 재림. | 복음시대 후에 그리스도의 재림 | |
재림회수 | 1회 | 2회(1차 환란 전 그리스도 공중 재림과 성도들 휴거, 2차 환란 후 그리스도와 성도들의 지상 재림하여 천년왕국 이룸) | 1회 | 1회 |
부 활 | 그리스도 재림 때 전 인류의 부활 | 3회(환란 전 그리스도 공중 재림 시 성도의 부활, 환란 때 죽은 순교자들의 부활, 천년왕국 끝에 모든 자가 부활) | 2회(그리스도 재림 때 성도들의 부활, 천년왕국 끝에 모든 자가 부활) | 2회(그리스도 영접과 거듭남의 부활, 그리스도 재림 때 모든 육체의 부활) |
과 정 | 대환란(악 감소 선 증가)-천년왕국-그리스도 재림-모두 부활-최후심판-신천신지 | 그리스도 공중 재림-성도 들 휴거-대환란-그리스도 지상 재림-천년왕국-최후심판-신천신지 | 대환란-그리스도 재림-성도들 부활 휴거-천년왕국-최후심판-신천신지 |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모든 자 부활-최후심판-신천신지 |
신학자 | A.H. Strong, L. Bottner, R. Campbell, R.L. Dnbney | J.N. Darby, Blackstone, W.B. Riley, J.M. Gray, R.A. Torrey, | H. Alford, G.E. Ladd,R. Mounce, L. Morris, J.A. Bengel, A.C. Gaebelein | M. Wilcock, A. Kuyper, H. Bavinck, W. Hendriksen, G. Vos, J. Murray, L. Berkhof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