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본질과 사명
개혁교회의 교회론
교회의 본질과 사명

시작하는 말
아브라함 카이퍼(A. Kuyper, 1837-1920)가 “세상은 호감이 가고 교회는 그렇지 않다.”고 토로(吐露, 마음을 드러냄)한 적이 있다. 은혜(恩惠)가 없는 세상이 오히려 교회보다 바르고 선하게 살고 나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구원의 은혜를 받은 교회가 이처럼 세상을 능가하지 못한다면 교회가 이 땅에 존립(存立) 할 이유가 없지 않는가?” 이런 질문과 함께 카이퍼는 ‘일반 은혜론’(Common Grace)을 언급했다.
21세기 들어 한국교회는 지금 서양교회가 18세기 이래 겪었던 정체성(正體性, 존재의 본질)의 위기를 심각하게 겪고 있다. 서양교회는 이 위기를 성경적으로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에 급기야는 쇠퇴일로를 걷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위기를 직시(直視)하고 대처하며 지속적인 개혁을 표방하는 개혁교회의 교회론(敎會論, Ecclesiology)을 정리하려고 한다.
종교개혁이 무엇보다도 예배의 개혁이었다면 예배와 교회의 관계 밀접성은 드러난다. “하나님의 말씀이 순수하게 전파되고 경청되며 성례가 그리스도의 제정을 따라 명하신 대로 집례 되는 곳마다 교회가 있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다.”1) 이 말은 칼빈(John Calvin, 1509-1564)의 교회 정의(定義)이다. 말씀과 성례 곧 말씀과 세례와 성찬이 있는 곳이 교회라는 말이다. 우리는 이 관점에서 교회론을 전개하려고 한다.
이 정의(定義)가 우리 귀에 익숙하다보니 아주 당연한 정의요 따라서 별반 의미가 없는 것으로 여길 수 있다. 그러나 이처럼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한 단순한 정의지만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와 맞서 수많은 순교자의 피를 흘리며 싸운 결과 확인 된 ‘성경적 교회 정의’이다. 즉 역사적으로 보면 중세 후에 나왔지만 실상은 먼저 성경으로 돌아가서 당대의 부패한 교회의 현장을 거부하고 투쟁을 통하여 얻은 값진 성경신학적인 결론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교회 정의를 바로 이해하려면 당대의 형편을 알아야 하며 개혁자들의 투쟁을 살펴야 한다.
1. 종교개혁자들의 로마 가톨릭교회 비판
– 교회의 가시성(可視性)과 불가시성(不可視性) –
개혁자들은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는 교회가 아니며 마귀의 집단이라고 불렀다.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는 교황을 머리로 한 가시적(可視的)이고 제도적(制度的) 교회를 성경이 말하는 보편교회 곧 가톨릭교회(Catholic Church)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이에 반대하여 교회의 ‘영적성격’과 ‘불가시성’을 내세웠다. 사람은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참 신자를 지목(指目)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루터는 인간 교황을 머리로 삼은 가시적(可視的)이고 제도적(制度的)인 로마 가톨릭교회는 교회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즉 인간 교황을 머리로 하는 로마 가톨릭교회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며 거룩하지도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교회의 거룩함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외형적인 화려함이나 의식이 아니라 믿음과 소망과 사랑에서 나온다고 했다. 또 성경적인 올바른 설교가 교회의 진정한 표지(標識)라고 단언했다.
이처럼 성경적인 올바른 설교, 세례, 성찬이 있는 곳에 거룩한 교회가 있다.2) 로마 가톨릭교회가 비록 니케아신경(the Nicene Creed)을 따라 교회의 1)단일성(單一性), 2)거룩성, 3)보편성(普遍性), 4)사도성(使徒性) 네 속성 즉 주장한다 할지라도 참 교회가 아니라는 확신에서 개혁자들은 교회의 표지론(標識論)을 제창(提唱)했다. 참 교회의 표지(標識)로 말씀과 성례(세례와 성찬) 외에도 열쇠 권, 직분, 예배 등을 들기도 하고 때로는 사도신경, 기도, 권세 잡은 자에게 순종 등을 포함시키기도 한다.3) 이렇게 함으로써 개혁자들은 교회의 표지를 무시하는 신령주의자들까지도 경계하고 비판했다.
칼빈의 교회 정의(定義)도 이런 순서를 밟는다. 그도 루터와 마찬가지로 보이는 로마 가톨릭교회를 비판하려고 가시적(可視的) 교회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했다. 즉 가시적이고 제도적인 이 세상 교회 안에는 주님의 양(羊)과 함께 주님의 양이 아닌 자들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칼빈은 교회의 불가시성(不可視性)을 강조하면서 로마 가톨릭교회를 비판했다. 하나님은 택하신 자를 교회로 불러 구원 얻게 하시는데 이 하나님이 택하신 자를 아무도 알지 못한다.4) 또 하나님은 인간적인 확신(確信)이 아니라 말씀과 성례라는 참 교회 된 외적(外的) 표지(標識)를 주셔서 가시적 교회를 존속(存續)하게 하신다고 했다. 이 같은 칼빈의 ‘교회정의’는 ‘가시적 교회’에 대한 정의이다.
이제 종교개혁 당시의 참 교회에 대한 논쟁의 긴장을 뒤로 하고 이 글에서는 교회 표지(標識)로써 나타나는 가시적 교회에 집중하려고 한다.
루터와 칼빈 두 개혁자는 이런 가시적인 교회 표지에 근거한 교회 정의에다 ‘성도의 교제’를 더했다. 사도신경이 고백하는 ‘성도의 교제’를 내세우면서 교황, 추기경, 사제 등 위계적인 성직자 중심의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회론에 일격을 가했다.5) 이런 배경에서 칼빈의 교회 정의가 나왔다. 그런데 이 정의는 오히려 칼빈의 독창적인 연구 결과가 아니라 성경에 기초한 교회에 대한 재발견일 뿐이다. 사실 이 교회의 표지(標識)라는 말은 이제 아래에서 보겠지만 실상은 예수께서 직접 제정(制定)하신 ‘은혜의 방편(方便)’을 말한다.
종교개혁자들은 로마 가톨릭교회 내에 말씀 선포가 사라졌으며, 세례도 고대교회의 세례 이해를 부인하고 죄로 인해 세례를 상실하며 선행으로 속상(贖償, 갚아서 물어줌)을 이루어야 한다는 공로(功勞) 사상을 도입했다고 비판했다. 그래서 로마 가톨릭교회에 성지순례와 면죄부(免罪符)와 수도제도(修道制度)가 나왔으니 초대교회의 모습 중 손상되지 않은 것이 없다고 비판했다.6)
로마 가톨릭교회의 이런 모습은 ‘오직 그리스도’라는 기독교의 본질을 손상시킨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 자신을 대속(代贖)의 제물로 단번에 드렸기 때문에 그 희생의 열매(fructus)는 복음적인 설교와 거룩한 성찬의 집례로 우리의 소유가 된다.7) 이것이 복음이며 성경의 가르침이다. 이런 말씀으로 전파되는 복음이 믿음을 낳는다. 죄인은 복음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구원을 얻는다. 오직 은혜요, 오직 믿음이다. 즉 성도의 어머니인 교회가 맡은 말씀 선포(설교)와 성례로 구원을 베푸시는 삼위일체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리는 자세이다.
2. 교회는 예배공동체이다.
(1) 신약의 교회
성경에 ‘교회’(敎會, Christian Church, ἐκκλησία)라는 말이 마태복음에 처음 나온다. 예수님이 처음으로 두 번 사용하셨고 두 번 다 마태복음에 나온다. 그리고 ‘교회’라는 말을 사용하시지 않고 거론하시는 경우가 한 번 더 나온다. 이 역시 마태복음에 기록되어 있다.
첫째, 예수님은 자기를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 16:16)라고 고백한 베드로를 향해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는 선언과 약속을 하신다.8) 여기서 ‘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 사역과 직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교회론의 기초는 기독론(基督論)이다. 동시에 이는 우리가 ‘교회’라는 말을 아주 신중하게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둘째, 형제가 범죄 할 때 권고하되 듣지 않거든 마지막으로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말씀하셨다.(마 18:17) 예수님은 여기서 교회와 권징(勸懲)의 관계를 말씀하셨다.
셋째, 예수님이 교회라고 직접 언급하시지 않았지만 내용상 교회를 말씀하시는 곳이 마태복음에 한 번 더 나온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가룟 유다가 없는 11명의 제자들을 갈릴리로 부르신다. 주님은 먼저 천지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고 선언(宣言)하신다. 이어 이 선언에 근거하여 사명(使命)을 부여하신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분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 제자들이 받은 사명은 제자 삼는 일이며 시행 세칙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막 16:15) 세례를 베풀고 가르쳐야 한다. 이것은 교회가 할 일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와 부활 직전에 제자들에게 또 다른 명령을 주셨다. 곧 성찬의 명령이다.(마 26:26-29) 마태복음에는 나오지 않지만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 22:19, 고전 11:24,25)고 당부하셨다. 성찬을 제정(制定)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이 일을 지속(持續) 하라고 명령하셨다. 제자들은 세례와 성찬을 베풀고 가르치고 고백하게 하는 방식으로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아야 한다. 이 또한 교회의 사명이다.
이제까지의 말을 요약하면 교회는 예배공동체이다.9) 은혜의 방편인 설교와 성례가 있는 곳에 예배가 있고 예배가 있는 곳에 교회가 회집한다.10)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 공동체로서 또 예배공동체인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 내면의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와 성령님의 전(殿)이다. 이런 교회가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든다.
(2) 구약의 교회
구약성경에는 교회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스데반은 설교 중에 ‘광야교회’(행 7:38, ἐκκλησίᾳ)라는 말을 썼다. 구약에서 이에 해당하는 말은 ‘총회(總會)’ 또는 ‘회중(會衆)’으로 번역되는 ‘예배의 무리’ 곧 ‘예배공동체’이다. 이 같은 ‘광야교회’의 첫 모습은 시내 산에서 계명을 받기 위하여 모인 무리를 말한다.(신 5:22) 이들은 여호와께서 직접 불러 모으신다.(레위 8:3, 신 4:10, 31:12) 곧 ‘총회’나 ‘회중’으로 불러 모으신다는 뜻이다. 그리고 율법을 주시고 말씀을 가르치시면서 순종하고 그대로 행할 것을 명령하신다.
여호수아가 에발 산에서 여인과 아이를 포함한 이스라엘 온 회중을 모아 제물을 드리고 율법을 낭독했다.(수 8:35) 바로 이런 ‘회중’이 ‘광야교회’이며 이의 본을 따라 이후에 모인 ‘회중’도 ‘광야교회’의 연속선상에서 말할 수 있다. 다윗이 성전건립 준비를 위해 재물을 바칠 때 모였던 무리도 ‘회중’이다.(대상 29:1) 성전 낙성식에 참여하여 법궤 운반에 참여한 (남성) 무리도 ‘회중’이었다.(왕상 8:14)
이스라엘은 첫 유월절을 애굽에서 지켰다. 이 유월절을 영원히 지켜야 하지만 주실 땅에 이를 때에야 이 예식을 지켜야 할 것을 말씀했다.(출 12:24,25) 그리고 자녀들이 이후에 이 유월절 제사의 의미를 물으면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죽음의 사자가 피가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은 넘어가게 하셔서 자기들을 구원하셨다는 것을 전하라고 명하셨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은 머리를 숙여 여호와를 경배했다.(출 12:27,28)
그러면 이런 이스라엘은 어떤 무리인가? 이삭은 혼인을 앞둔 야곱을 축복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어 야곱이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야곱이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실 것’(창 28:3)을 축복했다. 또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까지 축복했다.(창 28:4) 그런데 개역개정판의 창세기 28:3의 ‘여러 족속’이라는 번역에서는 빠진 부분이 있다. 즉 ‘여러 백성들의 회중’인데 무리에 해당하는 ‘회중’을 빠졌다. 그러나 하나님이 야곱에게 직접 복을 명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總會)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창 35:11,12)
이 본문에서는 ‘총회(總會)’라는 말로 원문의 ‘회중’이라는 말을 번역했다. 애굽에서 야곱이 이 복을 요셉에게도 전하는데 우리 번역에서는 ‘회중’을 또 생략했다.(창 48:4) 즉 ‘광야교회’라는 말을 사용한다면 그 출발은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은 무리이며 이 무리는 첫 유월절을 지킨 애굽의 이스라엘 자손들이며 그리고 이들은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한 대로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 곧 ‘씨’에 해당하는 ‘무리’이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면서 그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창 17:5) 이런 ‘씨’와 ‘무리’는 회중에 대한 약속과 더불어 그와 후손들에게 가나안 온 땅을 주시겠다는 땅의 약속도 포함시키셨다.(창 17:8) 이후 이스라엘의 역사에서는 특히 고난과 핍박을 당할 때에 ‘씨’와 ‘땅’을 담고 있는 아브라함과의 언약은 계속 언급될 것이다. 이 언약의 내용은 “나는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창 17:7)는 말씀이다. 즉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은 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며 이 언약을 받을 때마다 이들은 회중으로서 언약의 하나님과 교제한다.
정리하여 보자.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첫 유월절을 지키는 모습에서 예배 회중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첫 유월절을 준비하기 위해 양을 잡는 이스라엘은 회중이다.(출 12:6) 그때 ‘씨의 약속’은 이미 성취되었고 가나안 입성은 땅의 약속의 성취임과 동시에 예배의 완성을 향한 여정의 끝이기도 하다. 이처럼 출애굽기 12장은 교회를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본문이다. 즉 광야교회에는 ‘드리는’ 제사가 거의 없었으며 사실상 오직 율법과 말씀을 ‘받아’ 가르침을 베풀고 준행하는 생활을 하였다. 후에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야 유월절을 비롯한 제사가 본격적으로 예배의 주요 요소가 된다.
이처럼 교회의 본질은 ‘예배 회중’이며 이 예배의 주요 요소는 ‘말씀’이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회중에게 ‘주시는 말씀’이었다. 그런데 그 때는 여호와께 ‘드리는’ 제사가 도무지 없었던가? 그렇지는 않다. 우리는 가인과 아벨의 제사와 노아의 제사 등을 알고 있다. 대표적으로 아브라함이 드리는 제사 곧 이삭을 바치는 제사를 예로 들어보자.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한 산에서 번제로 드리라고 명하셨다.(창 22:1ff) 이삭이 번제할 양의 재물을 물을 때 아브라함은 “어린 양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22:8)고 대답한다. 실제로 그는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다.(22:13)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심지어 번제로 바치는 제물조차도 하나님이 직접 준비하시고 ‘주신다’는 사실이다. 이삭은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다.
모리아산은 이후 ‘시온 산’이라 불리었다. 그곳에서 하늘 아버님께서 하늘의 아드님을 제물로 바치셨다. 이것이 원형이고 비록 역사적으로는 선행하여도 땅의 아버지가 땅의 아들을 바치는 것은 그림자에 불과하다. 여호와께서 어린 양을 스스로 준비하셔서 죽이셨다. 그렇다면 번제와 모든 제사 역시 이 하늘 아버님께서 준비하신 희생을 예표(豫表)하는 그림자이며 회중이 바쳐 드리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근본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제도이다.
광야교회의 회중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씨의 약속이 성취되는 과정이며, 회중은 항상 예배 회중이었다. 그런데 예배에는 ‘드리고 바치는’ 측면이 있지만 이 조차도 ‘주시고 받는’ 측면이 선행하고 주도한다는 사실이다. 회중을 살펴보니 예배가 있고 예배는 언약 관계의 확인의 자리이며 언약의 하나님께서 주시고 회중은 받으며 그리고 언약의 회중도 하나님께 받아서 다시 드리는 상호 만남과 교제의 자리였다.
이처럼 예배는 인간의 행위이지만 이 행위가 결코 인간이 하나님께 드리기만 하는 일방적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택하신 자들을 예배로 불러 주시는 예배의 주인이시다. 부름 받은 자들이 순종하여 응하면 상호 교호적(交互的) ‘주고받음’의 예배가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주시고 그리고 받으시며 인간은 먼저 받고 그리고 후에 그것을 드린다. 하나님께서 먼저 주신다는 것은 ‘구원’을 말한다.
다시 광야교회로 가보자. 여호와께서 모세를 처음 부르실 때 여호와께서 친히 내려가서 애굽 인의 손에서 자기 백성을 건져내고 약속하신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겠다고 말씀하셨다.(출 3:8) 즉 먼저 출애굽을 말한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심이다. ‘건져내다’나 ‘인도하다’는 구원을 말한다. 모세가 이들을 인도하여 낸 후에는 백성이 시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길 것이다.(출 3:12) 즉 구원(救援) 다음에 예배(禮拜)가 온다. 십계명 역시 서문에서 이 사실이 먼저 나오고 계명이 뒤 이어 나온다. 이처럼 ‘구원’과 ‘예배’는 서로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구원받은 자들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모이면 ‘회중’이 된다. 즉 교회가 된다.
출애굽 후 이스라엘이 시내 산에 도착하기 전에 예배 회중으로 나타나는 모습이 홍해를 건넌 사건에 잘 드러난다. 여기에는 ‘회중’이라는 말이 나오지는 않는다. 놀란 백성들에게 모세는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고 격려했다.(출 14:13)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의 손에서 구원하시매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경외하고 여호와와 모세를 믿었다.(출 14:30,31) 그리고 이 언약의 후손인 이스라엘 자손은 여호와께 노래한다. 구원의 응답이 곧 구원 받은 자들 성도의 찬송이다.
여호와는 힘이시고 노래시며 구원이시다.(출 15:2)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6절) “여호와여! 신(神) 중에 주와 같은 자가 누구이니까? 주와 같이 거룩함으로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가 누구니이까?”(11절) 구원하심에 주님의 능력과 영광과 위엄과 기사가 나타났다. “주의 인자하심으로 주께서 구속하신 백성을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거룩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13절) 인자(仁慈)는 언약을 기억하고 곤란을 당한 언약 백성을 불쌍히 여기시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인자(仁慈)로써 주님께서는 언약의 씨를 건져 구원하시고 언약의 땅으로 인도하심이다. 그 땅은 주의 처소로 삼기 위한 성소(聖所)이기도 하다.(17절) 노래는 “여호와께서 영원무궁 하도록 다스리이다.”(18)로 끝이 난다. 송영(頌榮)이다.
이런 구조(構造)는 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찬송에도 나타난다. 모세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일을 다 말하자 이드로는 기뻐하며 “여호와를 찬송(송축)하리로다! 너희를 애굽 사람의 손에서와 바로의 손에서 건져내시고 백성을 애굽 사람의 손아래에서 이기셨도다.”고 찬송한다.(출 18:8-10) ‘구원하다’와 ‘건져내다’는 같은 히브리어 동사이다. 구원과 승리의 소식을 들은 자도 찬송하고 경배한다.
사울을 왕으로 세우는 과정도 같은 구조를 지닌다. 먼저 출애굽의 설명한다.(삼상 10:18,19) 왕의 직분이 ‘구원’임이 나온다.(삼상 10:27, 11:3,13) 그리고 구원은 기쁨을 이룬다.(삼상 11:9) 그래서 길갈에서 그를 왕으로 삼고 화목제를 드리고 크게 기뻐하였다.(삼상 11:15) 이처럼 예배가 기쁨을 주는 것은 구원이 있기 때문이며 이는 항상 과거의 구원 사역을 기억함으로써 구원을 현재화하기 때문에 기쁨이 넘친다. 이것은 성전 건축 준비(대상 29장), 성전 봉헌(대하 6장), 여호사밧의 전쟁 승리(대하 20장), 예배를 회복시킨 히스기야의 역사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처럼 성경에는 항상 구원 다음에 예배가 나온다. 예배는 구원 역사의 재현이며 언약의 갱신이다. 시편도 마찬가지이다. 은혜를 간구한다.(시 9:12) 찬송을 전하고 구원을 기뻐한다.(시 9:13, cf. 시 13:5,6, 14:7, 21:1,5,13, 28:6-9, 35:9, 40:16, 70:4, 106:45-47, 사 25:9, 38:20, 61:10) 하나님이 ‘나의 영광’이시다!(시 3:3) 그래서 우리는 구원의 소식을 다시 듣고 예배에서 힘을 얻어 하나님의 영광을 땅 끝까지 전해야 한다.(사 49:5-13)
3. 교회는 신앙고백 공동체이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고백한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셨다. 일차적으로 ‘이 반석’은 아버지께서 주신 계시(啓示)를 받은 베드로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동참한 제자들이 반석이다.11) 즉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교회의 터이다.(엡 2:20) 이들의 가르침을 따라 교회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을 고백한다.
계시(啓示)를 받아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고백한 신앙고백 역시 ‘이 반석’이라 볼 수 있다. 이처럼 신앙고백은 하나님께로부터 계시를 받아야 고백할 수 있다.(마 16:17) 그러므로 신앙고백은 계시의 복창(復唱)이고 그 내용도 같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다. 계시(啓示)는 하나님께 속했지만 신앙고백은 우리에게 속한 것이다.
이디오피아의 내시(內侍)가 세례를 청하자 빌립은 “당신이 마음을 온전히 하여 믿으면 가합니다.”라고 했고, 내시는 “나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믿습니다.”(행 8:37)라고 고백했다. 내시는 베드로가 한 고백을 믿음으로 고백했다. 이에 빌립은 그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 사건 직후 그곳 각 회당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는 고백을 전파했다.(행 9:20) 베드로의 고백 내용은 이후에도 이처럼 계속되었다. 로마 가톨릭교회와는 달리 우리는 사도 베드로의 계승(繼承)이 아니라 ‘사도적인 신앙고백’의 계승을 말한다.
한글 개역과 개역개정판은 고백을 시인(是認)과 증언(證言)이라는 말로도 번역하고 있기 때문에 그 중요성을 밝히 드러내지 못한다. 성도의 삶은 세상이라는 법정 앞에서 인자(人子)를 시인(是認)하여야 하는 증인(證人)의 삶이다.(눅 12:8) 고백은 이런 식의 법률적 의미를 지닌다.
유대인들은 “예수는 그리스도다.”라고 시인(是認)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했다.(요 8:22, 12:42) 이처럼 기독교의 신앙고백은 기본적으로 기독론이다. 이런 시인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요 12:43, 5:44) 바울은 총독 벨릭스 앞에서 유대인들이 이단(異端)이라고 하는 도(道)를 따라 조상의 하나님을 섬겼다고 고백한다.(행 24:14) 바울 사도는 믿음의 말씀을 전했다.(롬 10:8) 그 믿음의 말씀을 들은 사람은 믿고 고백해야 한다.(롬 10:9)
이처럼 ‘믿음’과 ‘고백’은 동행(同行) 한다.(고후 4:13) 구원을 얻는 것은 복음서에 나오는 고백(시인)이 지닌 종말론적 차원과 같다. 구원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이름을 고백한다.(히 13:15, ‘증언’으로 번역) 고백은 기독론의 증언(證言)이며 부인(否認)은 이런 교회의 전통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신 것을 고백하는 자마다 하나님께 속하였다.(요일 4:2) 누구든지 예수님을 하나님의 이들이라 시인(是認) 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한다.(요일 4:15)
예수님도 빌라도 앞에서 고백하셨다.(딤전 6:13, 내용은 막 14:62, 15:2) 거짓 증인들이나 제자들의 부인(否認)과는 대조적인 자기 시인(是認)이다. ‘선한 증언’은 자신을 그리스도라 말씀하셨고 그래서 이후 고백의 본을 보이신 것이다.(막 14:62, 마 10:32, 눅 12:8) 디모데전서 6:12에는 증언과 고백이 함께 나온다. 공개적으로 시인하는 것이다. 그 원형은 예수님이시요, 그 마지막은 순교였다.(딤전 6:13)12) 따라서 구속력을 지닌 고백이다.
이런 고백은 때때로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 나온다.(마 16:16, 요 1:19-34, 행 8:37) 개인적인 고백은 개인의 차원을 넘어 공동체의 고백이 된다. 그리고 고백은 굉장한 힘을 지니며 핍박을 이기게 한다.(고전 12:3) 이런 고백의 내용은 고린도전서 8:5,6에 분명하게 나온다. 구체적으로 그 내용은 그리스도의 부활(復活)과 승귀(昇貴)이다.(롬 10:9, 빌 2:11) 이 고백 역시 기독론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처럼 성도의 모든 고백의 배후(背後)에는 충성된 증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다.
복음 전파(傳播)나 교리(敎理, dogma) 또한 고백과 증거 행위이다. 바로 역사적 사건을 지시하며 기독론의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화(神話)나 허탄한 얘기(딤전 1:4, 4:7)로 결코 떨어질 수 없다. 전통주의나 주지주의(主知主義)는 이런 역사와는 무관하다. 고백은 곧 참여이며 삼위와의 참여를 뜻한다. 이 고백은 신조(信條, creed) 형태로 행해진다. 가장 대표적인 신조가 사도신경(使徒信經)이다. 한국 장로교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 이렇게 세 가지 신조를 채택했다. 목사와 장로와 집사 임직(任職) 서약에도 이 세 신조에 대한 질문이 들어 있다.
4. 은혜의 방편
은혜의 방편(方便) 곧 말씀과 성례(聖禮)가 있는 ‘공동예배’로 이루어진 공동체가 교회이다. 공예배(共禮拜)는 공동(共同) 예배(禮拜)를 줄인 표현이다. ‘공동예배’에는 남녀노소 모든 성도들이 다 함께 참여하여야 한다. 그리고 ‘공동예배’의 예배 자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은 방편들을 통해 주시는 은혜를 받는다.
(1) 말씀
종교개혁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미사(Missa) 위주’의 중세의 예배 관행을 ‘말씀 위주’의 예배로 바꾸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이다.(롬 10:17) 사도들은 말씀을 두루 전하기 시작하였고(막 16:20), 성령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행 4:31)
루터를 위시한 종교개혁자들은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하면서 ‘성례’와 함께 ‘설교’를 으뜸이 되는 은혜의 방편이라고 고백했다. 설교를 통해 전파하는 내용은 무엇인가? 세례 요한과 예수님은 회개와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到來)를 전했다.(마 3:2; 4:17) 사도들도 회개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을 것과 사죄와 성령님의 선물과 하나님의 나라를 전했다.(행 2:38, 8:12, 16:31 등) 그러나 더 엄밀하게 말하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이 말씀의 핵심 내용이다. 성경이 말하는 바를 한 마디로 말한다면 삼위일체 하나님이다.13)
설교자가 성령 충만하여 말씀을 전해야 한다면 듣는 자들도 성령 충만해야 선포된 말씀을 깨달을 수 있다. 부활하신 주님은 자기를 가리켜 기록한 구약의 말씀을 다 가르치시고 난 다음 미련하고 더디 믿는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셨다.(눅 24:45) 그러나 오순절 이후로는 마음을 여시고 성경을 깨닫게 하시는 이는 성령님이시다. 주께서 리디아의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셨다.(행 16:14)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성령님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신다.(고전 2:12) 그러므로 설교자나 회중은 말씀을 깨닫기 위해 성령님의 도우심을 기도해야 한다. 이 때문에 특히 공예배의 설교 전에 성령께서 설교자 위에 임하시고 회중도 성령님의 감동을 받도록 간구하는 기도를 드린다. 성령님은 성부의 말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통해 우리를 조명하시고 인도하시며 깨닫게 하시는 성령님을 통해 역사 해 주시도록 골방에 들어가 무릎을 꿇고 겸손히 진지하게 기도해야 한다.14)
따라서 목사는 설교에 전력투구(全力投球)해야 하며 회중 역시 목사가 전하는 그 말씀을 열심히 경청(傾聽)하고 순종해야 한다. 적법하게 청빙 받은 설교자가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할 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며 신자들은 그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야 한다.15) “우리가 그리스도를 오직 복음을 통해서만 즐길 수 있기 때문에 교회는 가르치는 목사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믿으며 적법하게 청빙을 받아 자기들의 직무를 신실하게 수행하는 목사를 존중하며 공손하게 경청해야 한다.”16)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 역사에서 보듯이 말씀이 약해지거나 말씀을 무시하면 단지 성례만 남게 되면서 오히려 해악(害惡)을 끼친다. 선포되어 귀로 듣는 말씀이 강력하지 못하면 눈에 보이는 말씀인 성례가 오히려 예배를 혼란시킨다. 그래서 종교개혁은 화려한 제단은 물론 심지어 사제(司祭)들로 구성된 찬양대도 없애 버리고 설교 강단만 우뚝 세웠다.
(2) 성례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는 성례 특히 성찬을 ‘보이는 말씀’이라고 했다.17) 그도 은혜의 방편을 ‘말씀’ 위주로 이해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성례는 성례를 제정하신 분이 그 성례에 임재하고 계신다는 표이다. 성례는 제정의 말씀, 세례는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고, 성찬은 “이것은 내 몸이요 피니라.”는 말씀과 함께 효력을 발생한다.
- 세례
말씀 선포는 믿음을 일으키며 세례(洗禮, Baptism)로 인도한다. 세례는 선포된 말씀의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짐(聯合)이다. 세례는 예수님과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남이다.(롬 6:3 이하)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우리도 다시 살아난다.(골 2:12) 예수님을 고백한 자만이 믿음으로 그리스도에 접(椄) 붙여지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이 모든 일은 성령님께서 행하시는 일이다.
고대교회는 세례를 아주 중시했다. 먼저 학습자(學習者)로 등록을 해야 하는데 십계명의 각 계명을 따라 금하는 직업을 가진 자는 직업부터 버려야 했다. 학습 기간은 3년이었고 진보한 자는 사순절에 학습 내용을 복습하고 1-2주간 정도 금식했다. 주로 부활절 전날 저녁에 세례를 받는데 교회당 입구에서 서쪽을 향하여 장로의 선창(先唱)을 따라 사단(Satan)을 네 차례 부인(否認)하고 저주했다. 그리고 집사와 함께 세례조(洗禮槽)로 내려가 몸을 물에 담그고 세례를 받는데 “성부를 믿습니까?”라는 질문에 수세 자는 “믿습니다.”라고 대답하면 물에 완전히 잠기게 했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물 밖으로 나오면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을 뜻한다. 다시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성령님을 믿습니까?”라는 질문에 “믿습니다.”라고 대답하고 각각 물에 담그고 밖으로 나온다. 나오면 젖과 꿀을 첫 음식으로 받는다.
세례의 물은 동시에 홍해나 요단강을 건너 온 곳 가나안을 상징한다. 또 세례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성례(聖禮)이다. 세례는 옛사람은 죽고 새 사람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그래서 세례 교인은 새로운 피조물이며(고후 5:17),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고 함께 하늘에 앉아 있다.(엡 2:5) 그래서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빌 3:20) 우리는 죽었고 우리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으니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아야 한다.(골 3:2,3)
세례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소유가 된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이며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자기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해야 한다.(벧전 2:9) 세례로 우리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은 예수님의 권세를 곳곳에서 전하고 가나안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 성령님의 역사로 우리는 산 제물이 되었다.(롬 12:1) 이처럼 성도의 삶과 문화적 사명은 세례로부터 나온다.
- 성찬
성찬(聖餐, Holy Communion)은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진 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누리는 식탁교제(食卓交際)다. 말씀은 우리를 세례로 인도하고 세례는 다시 우리를 성찬으로 인도한다. 예수님은 잡히시기 전날 밤 성찬을 제정(制定)하셨다.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분은 승천하시기 직전에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즉 예수님은 부재(不在)한 분이 아니라 성령으로 성찬에 영적(靈的)으로 임재(臨齋)하시고 우리와 함께하시며 교제하신다.
세례로 그리스도와 연합(聯合)한 자는 성찬에서 그분의 모든 은덕을 받아 누린다. 떡과 잔에는 예수님의 보혈과 십자가, 부활과 승천, 재림과 어린양의 혼인잔치(계 19:9)가 다 약속되어 있다. 성찬에서 우리는 떡과 포도주의 겉만 바라보지 말고 그 가운데 계신 십자가와 부활과 재림의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고대교회의 예배는 ‘말씀과 성찬’ 두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어린이와 학습자 그리고 낙심 자는 첫 부분인 ‘말씀예배’에만 참석했다. 둘째 부분인 ‘성찬예배’에는 오직 세례 교인들만 참석했다. 집사는 성찬상이 차려진 별도 장소의 문간에 서서 참석할 수 없는 자를 돌려보냈다. 성찬에 합당하지 않은 자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이처럼 교회는 초기부터 성찬을 거룩하게 지켰다. 이 같은 거룩한 성찬을 지키기 위해 성도들은 항상 자신을 돌아보았다.
이 같이 교인들의 삶을 살피고 성찬의 거룩성을 지키는 책무를 맡은 직분이 장로의 직분이었다. 이것은 단순히 종교행위가 아니라 자기 피로써 교회를 사신 성자 하나님의 몸인 교회를 거룩하게 하려는 교회의 믿음의 순종이었다. 세례로 예수님과 함께 부활한 예배 자는 성찬에서 예수님을 먹고 마신다. 그렇게 먹고 마신 예수님이 삶의 동력이시다. 옛 언약 백성은 요단강을 건너 젖과 꿀을 받아먹었지만 우리는 예수님을 받아먹고 마셔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
(3) 교회의 직분과 교회당
교회의 직분은 예배에서 나왔다. 목사는 말씀과 성례를 맡았다. 장로는 말씀이 교인들의 삶에서 실천되는지를 살피고 성례의 거룩성을 살핀다. 집사는 세례에서 수세 자를 도우며 성찬상의 순수성을 지키는 일을 하였다. 이 같이 직분이 다 예배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곧 직분을 다루는 교회정치는 예배에서 나온다.
직분은 주인을 섬기는 종(從)의 신분을 말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직분자들은 직분을 맡기신 주님의 종이다. 이 주님은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고 말씀하셨다.(눅 22:27) 종의 모양으로 오신 주님(빌 2:7)을 바로 섬기는 주의 종은 사람을 진정으로 섬길 수 있다.(롬15:2,3) 바울은 자신을 ‘모든 사람의 종’으로 삼았다.(고전 9:19)
교회 건축도 예배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고대교회의 예배당은 크게 보아 세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예배당은 주로 직사각형 형태이었고 세례조가 중심에 있다.18) 말씀만을 듣는 교인과 성찬에 참여하는 교인으로 나누이는데 그 분리(分離) 기준은 세례이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인데 교회당은 그 몸을 형상화하였다. 교회당 안에는 세례조와 성찬상이 있었고 같은 건물이라도 바깥인 현관에 학습자와 낙심자들을 위한 별도의 공간이 있었다. 세례를 받은 자들만이 예배의 자리에 참석할 수 있었다. 이것을 알면 집회(集會)와 예배(禮拜)는 쉽게 구분(區分) 된다.
5.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인 교회19)
성경에는 교회에 대한 다양한 묘사와 명칭들이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양떼(벧전 5:2), 하나님의 밭과 집(고전 3:9), 하나님의 성전(고전 3:16, 딤전 3:15), 선한 목자의 양떼(요 10:21, 15장), 그리스도의 신부(요 3:29, 계 21:9),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엡 2:22, 요 14:23), 진리의 기둥과 터(딤전 3:15), 하나님의 이스라엘(갈 6:16), 하나님의 교회(살전 2:14) 등으로 다양하게 묘사되고 있다.
이 명칭들은 교회를 사회적 측면에서 접근하여 교회의 실재와 본질을 상대화하지 않는다. 도리어 이 명칭들은 거의 예외 없이 교회를 삼위의 사역 측면에서 보려고 한다. 성부는 택하시고 성자는 모으시고 성령은 거룩하게 하신다.(엡 1:13, 4:4-6) 이처럼 교회라는 하나의 일을 중심으로 삼위 하나님은 스스로 한 하나님이심을 증거 하신다.
(1) 하나님 백성인 교회
구약의 이스라엘은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이었다.(신 7:6 이하)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얻기 위하여 그들의 조상들에게 언약을 주시고 그들을 애굽에서 구속하셨다.(출 19:5,6, 레 26:12, 겔 37:27) 이 백성이 예배의 방식으로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를 드리기 위하여 회집하면 총회 또는 회중이 된다.(시 5:22, 왕상 8:22, 느 8:2, 시 40:9,10 등) 그런데 그 언약 백성과 회중은 이후 역사에서 축소된다. 이스라엘의 민족적 선택은 ‘남은 자’의 선택으로 축소되고(사 10:20-22, 호 1:9,10 등), 그것은 다시 여호와의 종으로 축소된다.(사 42:1 등) 그리고 이 종으로 인하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새 이스라엘이 다시 회집된다.
새 이스라엘은 옛 이스라엘의 약속을 다시 받는다.(고후 6:16, 출 19:5,6은 벧후 2:9에서 교회에 그대로 적용) 원래는 하나님 백성이 아니었으나(호 1:9) 이제는 백성이다. 호세아 1:10이 이렇게 성취되었다.(롬 9:25,26 참고) 이제는 경계선(엡 2:14)이 제거되었다.(행 15:14) 구속(救贖) 곧 그리스도의 피가 이 일을 이루었다.(엡 2:14, 갈 3:28 이하)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저들의 죄에서 구원하시려고 오셨다.(마 1:21)
구속사적으로는 이스라엘이 교회에 선행한다.(롬 1:16) 그런데 참 이스라엘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다. 그들이 바로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의 후예들이다.(갈 3:29) 또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고 이스라엘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에 접(椄) 부쳐졌다.
(2)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주님은 교회를 자기의 피로 사셨다.(행 20:28)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시요 교회는 그의 몸이다.(엡 1:22, 5:23, 골 1:18) 이는 특히 성례전적으로 잘 묘사된다. 세례는 그리스도에게 접(椄) 부쳐졌다는 것을 의미하고 성찬은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증거 한다.(고전 10:16) 성찬 제정 시에 “이것은 내 몸이니라.”(마 26:26)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회중과 그리스도의 동일시(同一視)는 아니다. 그야말로 자기의 몸을 속죄(贖罪) 제물로 드리심이다.
성찬 참여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으로 하나 됨을 보여준다.(고전 10:17) 많은 지체들은 다양성을 지니면서도 연합됨이 표현된다.(골 2:19) 여기에는 차별(差別)이나 상하(上下)가 없다. 그러므로 각자의 은사와 능력으로 몸인 교회를 섬겨야 한다. 여기에 성장(成長)의 의미가 있다. 마디마다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향해 자라난다.(엡 4:15) 각 지체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나아가야 한다.(엡 4:13) 이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움으로 이루어지는 신앙과 사랑의 성장이다.(골 1:24)
물론 섬김으로도 나타나야 한다.(막 10:45) 즉 교회는 머리인 그리스도께 순종함으로 성장한다. 머리와 그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교회에는 성장이 아닌 타락만 있을 뿐이다. 성장은 역사적 성장이며 결국 교회가 말씀으로 세계를 정복하는 것이다. 에베소서와 골로새서는 그리스도 한분만이 교회 회중 보다 높으며 교회 회중은 그에게 종속(從屬) 되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스도는 자기의 교회를 유지한다.(엡 5:23,25) 즉 자기를 주셔서 물로 씻고 말씀으로 깨끗하며 거룩하게 하셨다.(엡 5:25,27) 그로부터 교회는 신적 성장력을 얻는다.(골 2:19, 엡 4:16)
나아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는 만유의 주님이시다.(엡 1:21, 골 1:1-18) 그는 교회를 다스리시나 그의 지배의 폭은 훨씬 더 넓다. 그는 교회와 세계의 머리시다. 여기서 교회가 세계와 가진 관계가 나타난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는 권세로써 교회의 사명 수행을 지원하신다. 이 덕분에 교회는 세상 속에서 세상에 침몰하지 않으면서 세상을 섬겨야 한다.(마 28:18 이하, 요 17:11,16)
(3) 성령님의 전(殿)인 교회
구약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 백성 곁에 함께 사신다.(민 5:4, 35:34, 출 25:8, 29:45, 사 8:18, 슥 8:3) 이제는 교회가 하나님의 처소(엡 2:22)이며, 성령 하나님이 거하신다.(고전 3:16) 그러므로 교회는 영적 피조물이다.(고전 3:16,17, 6:19, 고후 6:16, 엡 2:17-22, 벧전 2:4-7) 성령은 교회로 하여금 살고 생장(生長)하며 사역(事役)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령을 부릴 수 없다. 우리의 죄와 거부에도 불구하고 성령은 교회 중에 사신다.
성령이 오시면 은사(恩賜)를 동반하시며 은사들을 통해 교회를 세우신다. 그러므로 교회는 은사 공동체이다. 성령 안에서 모든 은사들은 그리스도와 연결된다. 그런데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봉사(奉仕)를 위해 모든 성도에게 주어지는 일반적인 현상이다. 고린도전서 12:4-6에서는 은사가 봉사로 바뀌고, 로마서 11:29와 고린도전서 7:7,17에서는 소명(召命)과도 교체된다. 봉사의 전제가 되는 것이 은사요, 소명이다. 각자에게 주어진 은사가 신약교회 질서의 기본 원리이다.
성령의 열매가 개인의 성화(聖化)와 연관되어 있다면(갈 5:22 이하), 은사는 교회의 건설(建設)을 지향한다.(고전 14:12, 엡 4:12,13) 그러므로 사랑은 모두가 추구해야 할 최고의 은사이다.(고전 13장) 사랑을 따라 구해야 하며(고전 14:1), 그렇게 하면 덕을 세우고(고전 14:12), 화평이 있을 것이다.(고전 14:33) 은사는 한 주님을 순종하고 서로서로 사랑으로 봉사함을 뜻한다.(엡 2:21,22) 특별히 성령께서 직분 자들을 세우시므로(행 20:28), 직분 자는 위에서 온 은사에 속한다.(엡 4:11,12) 그러므로 교회는 성령님을 지배하거나 장악할 수 없다.
(4) 삼위일체 하나님의 동역자로서의 교회
교회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함께 이루시는 업적이다. 이런 삼위일체론적인 교회 이해는 진정으로 구원사적이며 구체적인 교회 이해이기도 하다. 교회는 삼위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교회는 은사이면서도 동시에 사명이라는 것이 더욱 분명해진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향한 은혜의 공급처로 지명하신 구체적인 공동체이다. 특히 교회 직분 자들은 하나님의 동역자이다.(고전 3:9, 고후 6:1) 직분 자는 그리스도의 사신이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하여 권면하신다.(고후 5:20) 그러면 교회는 삼위 하나님의 일터이고 동시에 직분자의 일터이다. 이런 교회는 다시 세상을 향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의 동역자(同役者)와 사신(使臣)이 되어 대변한다. 이 얼마나 엄청난 사명인가!
6.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의 관문이다
교회의 궁극적 목표는 부활하신 주님의 권세가 하늘과 땅 전부에 미친다는 것을 선포하고 구현하여 하나님께서 만유의 주이심을 선포하고 찬양함에 있다. 주님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신 이후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이 나라는 이미 임하였다. 교회는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을 향하여 예배 자들을 훈련시킨다. 직분 자의 일터는 교회이고 교인의 일터는 세상이다. 세례조(洗禮槽)에서 세상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부활한 예배 자는 ‘가나안’(곧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기 위하여 파송을 받는다.
세례로써 그리스도의 몸에 접(椄) 붙여지고 하나님의 백성과 성령님의 성전(聖殿)이 되고 성찬에서 예수님을 먹고 마셔 지속적으로 그분의 힘을 공급받는 예배 공동체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다. 그러면 예배 자는 예수님의 모든 권세를 세상에서 확립하려고 투쟁한다. 아침마다 “주의 나라가 임하게 하여 주옵시며!”(마 6:10)를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룩하려고 싸우는 예배자를 훈련(訓練)하고 파송(派送)하는 교회가 세상의 소망이다.
교회는 전도도 하고 성도들이 더불어 사귀면서 건강한 인간관계를 형성하게 돕기도 한다. 전도하여 세례교인으로 만들고 성찬에 참여하는 온전한 예배자가 되게 하는 것이다. ‘세례교인 만들기’는 이중적인 의미를 지닌다.
첫째, 교회는 사람들을 세례로 인도해야 한다. 일차적인 ‘세례교인 만들기’이다. 교회는 ‘고백공동체’이며 ‘예배공동체’이다. 교회는 죄인들이 죄인임을 깨닫고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도록 인도해야 한다. 설교는 천하(天下) 사람 중에 구원 받을 만한 이름은 예수님 밖에 없음을 선포해야 한다.
둘째, 세례의 성례를 통과한 세례자를 계속 주께서 ‘분부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마 28:29) 해야 한다. 즉 세상에서 세례 교인답게 살아가도록 지속적으로 가르쳐야 한다. 교회는 말씀과 성찬으로 이 두 번째 ‘세례교인 만들기’에도 진력해야 한다. 세례로 그리스도의 몸에 접(椄) 붙여진 교인들은 교회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훈련 받는다. 여기에 기독교 문화나 세계관의 근거가 있다. 매주일 세례교인으로 훈련받는 참 예배 자가 교회와 예배의 자리를 떠나 세상으로 나아가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바꿀 수 있다.
이 같이 이중적인 의미를 지닌 ‘세례교인 만들기’는 일차적으로 목사와 장로의 책임이다. 예배에서 은혜를 받고 예수님을 먹고 마신 힘으로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과 군사(軍士)로 살아가는 동력(動力)을 소유한다. 따라서 예배는 하나님 나라의 군사를 양성하는 훈련소이기도 하다.
7. 세상 속의 교회와 교인
교회와 교인은 ‘산 위에 있는 동네’(마 5:14) 이다. 교회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다. 교회가 지닌 고백의 사명을 말한다. 세상 앞에 착한 행실을 보임으로 세상이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해야 한다.(마 5:16) 그렇지 않으면 아무 쓸 데 없어 밖에 버려져 세상에게 밟힐 뿐이다.(마 5:13)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시어 독생자를 주셨다.(요 3:16) 그러나 세상은 그를 영접하지 않았다.(요 1:11) 오히려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미움을 받았다.(요 15:18, 17:14) 이처럼 세상은 하나님과 독생자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이중성(二重性)을 지닌다.
세상의 이중성이 예수님에게는 고난으로 나타났다. 세상은 예수님을 미워한다. 그 이유는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하시기 때문이다.(요 7:7) 여기에서 증언은 위에서 말한 고백이다. 고백은 고난을 고난은 순교를 동반하였고 순교는 세상을 사랑함의 결정체였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심에는 십자가가 이미 포함되어 있었다.
세상은 교회에도 이중적이다. 세상 속에 교회가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요 17:14)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예수님도 제자들과 교회를 세상에 보내셨다.(요 17:18) 이것은 양을 이리떼 가운데 보냄과 같다.(마 10:16) 교회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보내시고 사랑하심과 같이 자기들을 사랑하심을 세상에 보여주어야 한다.(요 17:23) 곧 예수께서 성부 하나님을 세상에 보여주셨듯이 교회와 교인은 세상에게 예수님을 보여주면서 성부를 알게 해야 한다.
그럼에도 교회는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요일 2:15) 오히려 핍박을 받아야 한다. 그때에 성부의 성령께서 말씀하실 것이요, 교회와 교인은 예수님 때문에 세상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마 10:20,22)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고난을 받으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한다.(마 5:11,12)
이런 교훈을 따라 세상 속에 있는 개혁교회는 세상을 등지지 않고 전도하고 세상을 개혁하려고 한다. 세례 명령을 따라 부활하신 예수님의 권세를 세상 도처에 선포하고 확정하려고 최선을 다한다. 먹든지 마시든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목표로 삼는다.(고전 10:31) 이처럼 개혁주의 문화관은 적극적이며 건설적이다.
그런데 기독교 문화관은 주체를 분명하게 제시할 필요가 있다. 교회가 세상 속에 있어야 하지만 교회가 세상이 하는 일과 같은 일을 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면 교회가 세상에 속할 위험이 지척에 다가온다. 교회는 세상의 악을 지적하기 위해 세상에 속해서는 안 된다. 교회는 세상 속에 교회를 파송하는 것이 아니라 교인을 파송한다. 교회는 교인을 하나님 나라의 군사로 훈련시켜 세상에 파송하고 교인은 군사로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
세상과 사회를 변화시켜야 하는 교회와 교인이 오히려 비난과 불신(不信)을 받고 있는 현실은 마치 요나를 향한 선장의 질책과도 같다.(욘 1:6) 그러나 이런 비난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조롱하게 하는 큰 죄악이다. 교회는 예배를 회복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군사를 훈련시켜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명을 제대로 감당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의 주인이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교회를 내치실 것이다.
8. 중단 없는 개혁
개혁교회 전통에는 자신과 세상을 철저하게 개혁하려는 중단 없는 계속적인 개혁(semper reformanda)의 의지(意志)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성경 말씀을 따라 하나님 중심으로 교회와 세상을 회복하려는 의지이다. 우리 또한 이런 계속적인 개혁과 회복에 착념해야 할 것이다.
교회의 교회다움은 예배에 있다. 계속적인 개혁은 설교와 세례와 성찬의 회복을 말한다. 그래야 교회가 개혁될 것이다. 설교는 하나님 중심의 신학이어야 한다. 설교의 회복은 교회 개혁의 제일 중요한 과제이다. 그래야 성례도 회복될 것이다.
한국교회는 성례를 경시(輕視)하고 무시(無視)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 세례에서 옛사람을 확실히 죽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례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나아가 성찬도 회복해야 한다. 세례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새 사람이 된 예배 자가 성찬에서 그분을 먹고 마시어 예수님을 삶의 원동력으로 삼으면 성령님의 능력으로 예수님의 편지와 향기가 되어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예배의 회복이 기초가 되어야 교리와 교회정치도 바르게 회복될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반(半) 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 구원에 있어 하나님과 인간의 협력을 주장)와 아르미니안주(Arminianism, 인간의 전적 타락 부인)의는 교리와 삶의 모든 영역에서 끊임없이 극성을 부린다.20)
마치는 말
교회사의 흐름에서 한국교회만큼 이단이나 사이비 교설(敎說)이 많이 등장한 경우도 흔치 않다. 성령운동이나 종말론적 이설(異說)이 주류를 이룬다. 굳이 이단이 아니라 하더라도 목회 현장을 미혹하면서 교회를 어지럽히는 주의와 주장이 하루가 멀다 하고 생겨난다. 그만큼 한국교회는 교리적 바탕이 허약하다는 증거이다.
성경대로 예배를 회복하고 성경으로 돌아가야 교리와 목회 현장의 혼란도 개혁하고 바르게 회복할 수 있다. 교회정치 역시 예배에 기초한 올바른 직분 이해와 수행으로만 바로 세울 수 있다. 한국교회 안에는 직분 자들 간의 갈등 특히 목사와 장로의 갈등이 어느 때보다 더 심각한 양상을 띠고 있다. 예배에서 섬기는 직분의 본래 모습을 회복하면 이런 갈등은 곧 해결될 것이다.
궁극적으로 계속적 개혁은 세상 속에서 교회와 교인의 삶으로 바로 구현되어야 한다. 왜 교회와 교인이 세상의 비난을 받는가? 교회답지 못하고 교인답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른 힘이 아니라 예배의 회복으로 은혜를 받고 은혜로 예수님의 모습을 담아낼 때 교회는 세상을 변화시키며 교인은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계속적 개혁은 개혁교회의 정체성이다. 그러나 이것은 특권이기 전에 사명이다. 핍박과 고난의 길로만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는 그분 선생께서 먼저 이 길을 가셨으니 그 분의 제자인 교회와 교인이 이 고난을 어찌 피하랴! 고난 중에 얻는 계속적 개혁이 개혁교회의 사명이기에 이는 더할 수 없는 특권이다.(*) 글쓴 이 / 유해무 교수(고려신학대학원 교의학, 화란 캄펜개혁교회 신학대학원 Ph.D.)
< 미 주 >
1) 칼빈, 「기독교강요」, 4,1,9; cf. 4,1,19.
2) Luther, WA, 7,720,32-721,15.
3) Luther, WA, 51,479,4-485,24.
4)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도 같은 관점에서 교회의 불가시성을 말한다. “공교회 또는 보편적 교회는 볼 수 없는데, 머리인 그리스도 아래 하나로 모였고, 모이고, 모일 모든 택자들로 이루어지며…”, 25장 1절. 그렇지만 이미 말씀의 사역으로 믿음이 생기며 말씀과 성례의 시행과 기도로 믿음은 커지며 강화된다고 말한다, 14장 1절. 그리고 26장은 성도의 교제를, 27-29장은 성례를 다룬다.
5) Luther, WA, 2,743,7ff; 칼빈, 「기독교강요」, 4,1,3; “교회는 복음이 올바르게 가르쳐지고 성례가 올바르게 집례 되는 성도들의 회중이다”, 아우구스부르크 고백서(1530) 7장.
6) Luther, WA, 51,487,9ff; WA, 4,5,8-10.
7) 칼빈, 「기독교강요」, 4,18,3.
8) 구약에서는 교회가 나오지 않으며, 구약의 언약 백성을 지칭하여 “광야교회”(행 7:38)라는 표현 이 단 한 차례 나온다.
9)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공동체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계속적인 하나님의 말씀이 정확하게 선포되어야 하고, 성례를 올바르게 집행하여야 하고 권징을 정당하게 시행함으로 그 정통성이 유지되어야 한다.”, “예배지침”, 제 1조.
10) 특히 성찬과 교회의 밀접한 관계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전 11장 18절과 20절에는 ‘함께 모인다’는 말이 나온다. 18절에는 교회에 함께 모이며, 20절에서는 한 자리에 함께 모인다. 우리 번역에는 ‘한 자리에’가 빠져 있다. 각 절의 후반부는 부정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럼에도 성찬과 교회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11) J. van Bruggen, Matteus: het evangelie voor Israel (Kampen: Kok, 1990), 311.
12) 예수님은 ‘충성된 증인’이시다(계 1:5). 그런데 이 증인이라는 말에서 ‘순교자’라는 말이 왔다. 충성된 증인 예수님은 첫 순교자이시다!
13) 칼빈, 「기독교강요」, 1,13,5.
14) Luther, WA, 50,659,5-21.
15) 제 2 스위스 고백서(1566) 1장 4절.
16) 칼빈이 초안한 것으로 알려진 불란서신앙고백서(1559)의 제 25조이다.
17) Augustinus, Contra Faustum Manichaeum, XIX,16, PL 42, 357.
18) 여기서 ‘조(槽)’는 ‘구유 조’이며, 욕조(浴槽) 등에서 사용한다.
19) Cf. 유해무, 「개혁교의학」 (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7), 547-552.
20) “심령부흥이나 교회부흥을 지향하는 교회는 감리교회와 성결교회는 물론 칼빈주의 교회까지도 신학적으로는 보수파 칼빈주의의 수정파인 18세기의 아르미니안주의 신학으로 넘어간 것이다. 이 부흥신학은 구원의 주체적 체험 획득과 그것을 위한 인간의 자유의지의 동원과 그 효과를 신학적으로 인정하는 소위 신인협동설인 것이다. 그러므로 부흥주의적인, 경건주의적인 신앙 체질을 가진 한국 개신교회들은 교파는 달라도 결국은 한 가지 신학, 즉 아르미니안주의의 신도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장식, 「한국교회백년」 (서울: 한국기독교문화진흥원, 1987), 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