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권력에 대한 국민의 복종과 저항의 정치윤리

PART Ⅱ
칼빈은 국가권력이 제정 된 법을 가지고 통치할 때 국민은 복종해야할 것을 강조했다. 그렇다면 국가권력이 전제적(專制的)으로 통치할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국민들은 복종해야 하는가 아니면 저항해야 하는가? 이에 대해 칼빈은 국가권력에 국민이 직접적으로 저항하는 것은 거부하고 ‘국민의 관원’을 통한 저항만을 동의했다. 국가권력에 대한 이 같은 칼빈의 주장은 그의 신학적 정치윤리를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주제이다. 필자는 본 글에서 칼빈의 국가권력의 권위에 대한 ‘시민 불복종’과 ‘국민의 관원을 통한 저항’의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Ⅰ. 시민의 복종과 불복종
1. 국가권력에 대한 시민의 복종
칼빈은 하나님께서 ‘집권자의 지위를 시인하시며 기뻐하신다는 것을 확언하셨을 뿐만 아니라 가장 영예로운 칭호로 장식’62)하셨다고 보았다. 이것이 가지는 속뜻은 국가권력의 권위가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졌으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대표 즉 대리자로서 행동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권세는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하며(롬 13:2), 하나님에게서 오지 않는 권세는 없다고 한다.(롬 13:1) 그뿐 아니라 주권자들은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선을 행하는 사람을 칭찬하며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집행한다고 한다.(롬 13:3,4) 칼빈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그들의 지위를 시인하신다고 언명하셨다. 따라서 세상 정권도 하나님의 소명이며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합당할 뿐 아니라 인간의 모든 생활에서 어느 소명보다도 신성하고 훨씬 더 영예롭다는 것을 아무도 의심해서는 안 된다.”(기독교강요 제4권 20장 4항)
따라서 칼빈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한 권위를 가진 국가권력을 부인하거나 배척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것을 명확히 했다. 칼빈이 이렇게 말하는 배경에는 무정부 상태를 주장하는 극단적 재세례파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로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국가나 국가권력은 결코 배타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협조적이며 보호적이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
다윗이 모든 군왕들과 관원들은 하나님의 아들에게 입 맞추라고 권고했을 때(시 2:12) 그는 그들이 그 권위를 버리고 사생활로 돌아가라고 하지 않고 그들이 받은 권력을 그리스도에게 바쳐 그리스도만이 모든 사람 위에 군림하시게 하라고 하였다. 마찬가지로 이사야는 열 왕이 교회의 양부가 되어 왕비들이 교회의 유모가 될 것이라고 약속했을 때(사 49:23), 그들의 영예를 빼앗지 않고 도리어
고귀한 칭호를 주어 하나님의 경건한 경배 자들의 수호자로 삼았다. (중략)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주목할 것은 바울이 한 말이다. 그는 디모데에게 공중 집회에서 왕들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충고한 다음에 곧 그 이유를 첨부한다.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딤전 2:2) 이런 말로 바울은 교회의 지위를 왕들의 보호에 맡겼다.(기독교강요 제4권 20장 5항)
따라서 시민들이 국가권력 즉 관리들에게 복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작정하신 섭리 가운데서 이해되어져야 하고 하나님께 대한 섬김의 차원에서 그것이 실천되어져야 한다. 그는 에베소서 6:5의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선포하였다.
내가 말한바와 같이 어떤 사람이 ‘왜 내가 그 사람에게 얽매여야 합니까? 왜 그가 내 목 위에 그의 발을 올려놓아야 합니까? 누가 그에게 나보다 더 많은 권한을 주었습니까?’라고 말할 때 이러한 모든 논쟁은 무익하고 쓸데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화평을 유지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 (중략) 주권적인 주이시고 아버지이시며 우리 위에 지배와 우월함의 권리를 가지고 계시는 우리 하나님이 그가 지명한 그러한 사람들에게 아무 대꾸 없이 순종하도록 만드실 때 우리가 순종하는 것 이외에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1)
칼빈이 이와 같은 주장을 한 배경에는 역사적인 이유가 있었다. 칼빈 당시 프랑스 정부는 모든 개신교인들을 도시를 점거한 과격한 재세례파와 꼭 같은 국가전복을 기도하는 세력으로 보고 가혹한 핍박을 했다. 이에 대해 칼빈은 개신교도들에 대한 프랑스 정부의 이 같은 핍박이 개신교를 바로 알지 못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임을 입증하기 위해서 프랑스 왕에게 변증하는 편지를 보냈고 아울러 교인들에게는 설교를 통해 때로는 서신을 통해 정부 관리들에게 복종하는 것이 성경적이고 그리스도인다운 모습임을 강조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국가권력이 부당하게 시민들을 전제적으로 탄압하고 억압하는 경우에도 시민들은 계속 복종해야 하는가? 칼빈은 이에 대해서도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세우신 관리(官吏)가 자기의 직책을 올바르게 수행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직책에 부여하신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은 악한 관리에게도 선한 관리에게 하는 것과 동일한 복종과 존경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
나는 집권자들의 인물을 논하지 않는다. 우매나 나태나 잔인성 그리고 악행이 가득한 악한 행실을 위선적인 위엄으로 은폐하거나 이 악을 덕이라고 칭찬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이 세우신 집권자의 지위 자체는 영예와 존경을 받을 만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우리는 집권자들을 높이며 그들의 지위를 존경하기 때문에 그들도 공경해야 한다.(기독교강요 제4권 20장 22항)
칼빈은 이 같은 신학적 원리에 기초하여 영국에서 뿐만 아니라 전제적(專制的)인 군왕 밑에서 생명의 위협을 당하고 있던 프랑스의 개신교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계속하여 저항하려는 것을 억제하고 복종할 것을 권면했다. 칼빈은 앵거(Angers)의 박해 받는 교회에게 보낸 편지에서 악한 관리에게 자행하는 폭력에 저항하는 문제를 그들이 심사숙고하고 있다는 것을 들었으나 그러한 시도를 포기하도록 권면했다. 칼빈은 그들이 엄청난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은 하나님의 명령에 어긋나는 것을 하도록 허용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은 자신이 통치자로 세운 사람들에게 저항하도록 그들을 무장시키지 않았다고 했다.
칼빈은 또 다른 한 편지에서 “하나님의 복음이 사람들을 선동과 소란으로 무장시켰다는 비난을 받게 하는 것보다 차라리 우리 모두가 파멸하는 것이 훨씬 더 낫다.”는 입장을 천명했다.3)
그렇다면 하나님의 계획과 의도에서 볼 때 악한 통치자가 있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칼빈은 악한 통치자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악한 통치자가 있게 된 이유는 하나님이 그들을 통해 심판하시기 위함이다. 불의하고 난폭하게 다스리는 자들은 백성의 악함을 벌하기 위해 하나님 자신이 일으키신 자들이다. 폭군까지도 하나님이 쓰시는 도구이다.” 그래서 칼빈은 이들의 명령과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해야 할 것을 주장했다. 칼빈은 또 이렇게 말했다.
예레미야 29:7에 하나님은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백성들에게 바벨론을 위해서 바벨론의 평화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셨다. 이는 침략자를 위해 기도하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이다. 다윗 역시 자기를 죽이려는 악한 왕 사울을 주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종이라고 죽이지 않았다.(삼상 24:6,11, 26:9-11)4)
우리는 항상 국가 권력자들은 하나님께 권위를 위임받아 통치하는 자들임을 생각해야 한다. 자기 재판 석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보좌라고 들은 사람들이
어찌 뻔뻔스럽게 불공정한 재판을 허락하겠는가? 하나님의 신실을 발표하는 도구로 지정된 줄 아는 입으로 어찌 감히 불공평한 판결을 내리겠는가? 요컨대 국가권력이 자기가 섬기는 하나님의 대리자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들은 모든 주의와 정성과 열성을 다하여 사람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섭리와 보호와 선과 후의와 공의를 나타내도록 노력해야 한다.(기독교강요 제4권 20장 6항)
2. 국가권력에 대한 시민의 불복종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칼빈은 국가권력이 전제적(專制的)으로 통치할 때조차도 시민들은 복종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시민들이 통치자들에게 불복종할 수 있는 경우는 전혀 없는 것인가? 칼빈에게 있어서도 국가권력에 대한 시민의 불복종의 경우는 존재한다. 그 접근에 있어서 칼빈은 책임 있는 존재로서의 통치자를 말한다.
국가 권력자들은 하나님에게 책임이 있을 뿐 아니라 시민에게도 책임을 지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에 의해 선출되어 하나님의 일을 수행한다는 점에서 하나님께 책임이 있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위임한 일들이 시민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들은 시민에게도 책임이 있다.
그렇다면 그 책임은 어떤 책임을 말하는 것인가? 하나님께 대한 책임을 말한다. 국가권력이 하나님께 대한 책임을 다하지 못할 때 그리고 시민이 하나님께 대한 책임을 다하지 못하도록 국가권력이 억압하게 될 때 그것이 곧 시민이 불복종할 수 있는 범주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 가령 국가권력자들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참된 예배에서 떠나도록 명령할 때 시민들은 “사람보다 하나님에게 복종하는 것이 마땅하다.”(행 5:29)는 말씀에 따라 국가권력의 명령에 복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국가권력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가진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기 위하여 세상의 국가권력의 명령에 불복종한다 해도 관리들의 권위는 조금도 손상되지 않기 때문이다.
칼빈은 그리스도인이 이렇게 할 경우 박해와 핍박이 따라올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나 어떠한 경우라도 하나님께 불순종 하라는 명령을 따라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칼빈은 신앙문제 만큼은 결코 어떤 타협도 용납하지 않았다. 아무리 박해를 받고 생명이 위태롭다 하더라도 국왕에게 복종함으로 참 진리를 떠나서는 안 되며 오히려 그들의 명령을 따르지 말고 명백하게 불복종 할 것을 요구했다. 그렇기 때문에 칼빈은 박해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할 수 있으면 차라리 조국을 떠나 망명할 것을 권했다.5)
그런데 칼빈이 신앙적인 영역에서 시민에게 불복종까지만 허용한다는 주장을 반박하면서 물리적인 적극적인 저항까지 인정했다는 해석이 제기되었다.
톰슨은 칼빈이 신앙문제에서 국왕 자신이 하나님께 대항을 한다면 그는 더 이상 국왕이 아니며 그런 통치자는 더 이상 복종을 받을 수 없고 그런 경우에 개인은 불복종의 차원을 넘어 적극적으로 저항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으로 해석했다. 모세가 바로에게 광야로 나가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겠다는 요구를 했을 때 그것을 거부한 바로에 대해 칼빈은 “그렇게 정당한 명령을 거부함으로써 그는 왕 중 왕으로부터 그의 합당한 영예를 박탈당하였으므로 스스로 자신의 왕의 권력과 권리를 박탈한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칼빈은 국가권력이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에 대한 복종에서 벗어나게 만든다면 권력자들은 만용을 부려 하나님과 갈등 속에 빠져 들어 가기 때문에 자신들을 아무리 스스로 높여 하나님의 영광과 권위를 축소시키려 해도 피조물인 사람에 불과하다고 선포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유일하신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고 권세를 휘두르는 국가권력은 하나님의 영광을 탈취한 것이므로 왕이라기보다는 강도라고 보았다. 따라서 칼빈은 하나님께 대적하는 통치자는 결과적으로 더 이상 시민의 복종을 받을 수 없다고 했다.6)
칼빈이 이렇게 과격하고 격렬한 언어들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국가 권력자들을 비난했지만 그렇다고 혁명을 선동하거나 무력저항을 주장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 칼빈은 다니엘의 경우를 예로 들어 다니엘이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지 못하도록 강요하는 왕에 대해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는 차원에서 왕의 명령에 불복종하는 것이지 결코 적극적인 저항을 한 것은 아니었다고 했다.7)
Ⅱ. 국민의 관원을 통한 저항
1. 누가 ‘국민의 관원’인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거만한 왕과 국가권력은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전복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편에서 국가권력의 권위를 무시하거나 침범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국가권력이 가장 무가치한 사람들이며 악행을 다해서 자기들의 권위를 더럽힌다고 하더라도 그 권위는 하나님의 지극히 중대한 명령으로 확립되었으며 존중할 만한 위엄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난폭한 독재를 처벌하는 것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라면 우리는 그 일이 우리에게 맡겨지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기독교강요 제4권 20장 31항)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기독교강요 4권 20장 31항에서 계속하여 하나님께로부터 그 권위를 인정받고 국가제도 안에서 합법적으로 통치자를 견제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 즉 국민의 관원에 대해서 기대감을 가지고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만일 지금 임금들의 전횡을 억제할 목적으로 임명된 국민의 관리들이 있다면 예컨대 고대 스파르타 왕들에 대립한 감독관(ephor), 로마 집정관들에 대립한 호민관(tribute), 아테네의 원로원에 대립한 지방장관(demarch) (중략) 나는 그들이 왕들의 횡포한 방종에 대하여 그 직책대로 항거하는 것을 금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들이 미천한 일반 대중에 대한 군주들의 폭정을 못 본 체한다면 나는 그들의 이 위선을 극악한 배신행위라고 선언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국민의 자유를 보호하는 자로 임명된 줄을 알면서도 그 자유를 배반하는 부정직한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기독교강요 제4권 20장 31항)
그렇다면 칼빈이 말하는 ‘국민의 관원’은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가? 칼빈은 모든 관리들이 하나님에 의해 임명된다는 믿음에서 이들 역시 하나님에 의해 임명되었다고 말했으나 실제적인 실례로서는 고대와 중세의 역사적인 사례들을 제시하였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그가 교육받은 인문주의에서 나온 것으로 보는 것이 타탕할 것이다.
칼빈은 이미 ‘세네카 관용론 주석’에서 스파르타의 감독관을 언급했고 통치권의 전제적인 운용을 억제하는 고대의 관리들을 잘 알고 있었으며 당시의 삼부회(threeestates)가 그러한 역할을 하기를 기대하고 있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부회는 중세의 왕권의 무리한 요구를 견제하는 역할을 하였으므로 칼빈은 이러한 역사적 사례의 관직 내지 제도들이 수행했던 역할을 ‘국민의 관원’이 감당할 것을 요구했다.8)
‘국민의 관원’에 대한 칼빈의 이런 기술에 대해 바론은 “칼빈은 개혁자 부쳐가 이끌어냈던 동일한 정치적 결론을 이끌어 냈다.”고 평가했다. 부쳐는 ‘하위 관원’을 하나님에 의해 임명되어 시민의 자유를 보호하는 직책으로 보았는데 바론은 부쳐의 ‘하위 관원’에 의한 저항 이론이 칼빈의 ‘국민의 관원’에 의한 저항 이론으로 발전되었다고 보았다.
이에 대해 스키너는 부쳐의 ‘하위 관원’과 칼빈의 ‘국민의 관원’은 엄격히 구별되는 것으로서 ‘하위 관원’은 백성에 의해서 선출되는 반면‘국민의 관원’은 하나님의 의해 임명된다고 보았다. 하지만 스키너의 주장은 칼빈이 선거문제를 명시하지 않고 두 가지 용어를 엄격하게 구별하여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설득력이 약하다.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국민의 관원’이 백성에 의해 선출된다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에 의해서 임명된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그가 사례로 제시한 그리스, 스파르타, 로마의 관리들이 매년 시민들에 의해 선출되어 국가권력이 전제적으로 흐르는 것을 견제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들이 가지는 기능을 강조하면서 그들이 선출된 관리들이라는 것을 암시적으로 드러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9)
2. 국가권력에 대한 ‘국민의 관원’을 통한 저항
칼빈은 ‘국민의 관원’의 역할이 국왕의 전횡(專橫, 권세를 혼자 쥐고 제 마음대로 함)을 억제하고 저항해야 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였는데 구체적으로 저항할 수 있는 근거와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국민의 관원’도 국왕 등의 국가권력자들과 동일하게 하나님에 의해 지명되어 하나님의 주권으로부터 파생된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데에 있었다. 그것은 곧 ‘국민의 관원’들도 국왕의 권위와 동등하게 거룩한 기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면 칼빈이 ‘국민의 관원’에 의한 저항의 방법으로 구체적으로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가? ‘국민의 관원’이 국왕의 전횡을 막고 국민의 자유를 보호해야 한다고 할 때 여기서 말하는 자유는 무엇을 말하는가? 여기서 칼빈이 말하는 자유는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의 자유를 의미한다. 그것은 ‘기독교강요’ 4권 20장 32항에서 백성들도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국왕에게 불복종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볼 때 이러한 판단은 정당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국민의 관원’이 국왕의 전제(專制)와 전횡(專橫)을 억제하여 국민의 자유를 보호해야 된다고 칼빈이 말한 것은 결국 국민들이 하나님을 올바르게 섬길 있는 자유를 보장하라는 요구이다. 그러므로 칼빈의 정치윤리를 규제하고 있는 것이 ‘신앙의 순수성’의 보존이라고 한 코크의 주장은 정확한 것이다. ‘신앙의 순수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경우에는 당연히 정치권력에 복종해야 하고 반대로 ‘신앙의 순수성’을 유지할 수 없을 경우는 불복종해야 하고 ‘국민의 관원’들은 저항해야 하는데 이러한 모든 활동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다.10)
이미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칼빈은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어떠한 박해를 받더라도 인내하면서 견디도록 요구하였고 그들의 적극적인 저항행동을 억제하려고 계속 노력했다. 그러면 칼빈의 ‘국민의 관원’에 의한 전제 왕권의 억제와 견제라는 그의 주장이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가? ‘기독교강요’ 1536년 초판에서부터 칼빈은 삼부회가 아마도 이러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견해를 표명했고 그러한 입장은 최종판까지 변화가 없었다.
프랑스에서 칼빈주의 세력이 확대되면서 그들에 대한 박해는 심해져갔고 이러한 상황에서 칼빈이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당연히 삼부회의 소집에 의해 프랑스의 정국 상황을 변화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는 삼부회(assembling of States)의 소집과 함께 당시 왕족들 가운데서 개신교 신앙을 수용했던 사람들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당시 왕실 가문에서 그러한 인물로는 나바르의 왕과 꽁데가 있었다. 귀족으로는 꼴리니 장군이 있었다. 당시 프랑스의 왕가였던 발로와(Valoise) 가문 다음으로 왕이 될 수 있는 부르봉 가문 출신인 안트완 드 부르봉(Antoine de Broubons)은 공주인 쟌 달브레(Jeanned’ Albret)와의 결혼을 통해 혈통인 군주인 나바르의 왕이 되었다. 칼빈은 특별히 나바르의 왕의 개혁에 대한 지원에 상당히 관심을 기울였고 그리하여 삼부회에서 그의 역할을 통한 돌파구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래서 칼빈은 삼부회가 열릴 때마다 나바르 왕을 통해서 개신교를 심하게 핍박하고 있던 당시의 국왕 앙리 2세(HenryⅡ세, 1547-1559)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핍박을 중단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는 1557년 12월에 왕이 크리스마스 이전에 신분제 의회를 소집했으므로 자신은 나바르 왕을 활동하도록 격려할 것이라고 베자에게 편지했다. 그는 나바르 왕에게 편지를 써서 “전하, 아주 많은 참된 신자들의 탄식과 한숨이 있음을 들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도움 요청에 부응할 용기를 가지셔야 하며 힘이 미치시는 한 그들을 구해야 합니다. 현재의 이 삼부회는 다른 어떤 때보다 좋은 기회를 제공할 것입니다.”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나바르 왕은 이 삼부회에 참석하지 않았다.11)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에게는 삼부회가 중요했다. 왜냐하면 그가 삼부회를 통해 개신교인들을 핍박하는 전제주의 국가권력을 견제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Ⅲ. 한국교회에 드리는 제언
“그리스도인은 국가권력에 대하여 복종해야 하는가? 저항해야 하는가?”의 문제는 국가제도가 존속하는 한 끊임없는 도전들을 우리에게 줄 것이다. 긍정적인 면에서 국가권력에 대한 복종과 저항의 문제는 더 발전된 국가를 지향할 수도 있다. 하지만 부정적인 면에서 그 반대의 결과를 가져 올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권력에 대한 복종과 저항의 문제는 보다 현명하게 다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필자는 칼빈의 국가권력에 대한 복종과 저항의 문제를 정리하면서 여러 가지 새로운 신학적 관점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기독교인들이 살아가는 데 있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필자는 국가권력에 대한 복종과 저항의 관점에서 한국교회에 몇 가지의 제안을 하고자 한다. 이 제안들은 지금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정치적인 현상을 염두에 둔 것들이다.
1. 국가의 통치를 바르게 인식하고 교육해야 한다.
이것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가 요소가 반드시 충족되어야 하리라고 본다.
(1) 국가의 통치에 관한 기독교인의 오해와 불신을 풀어야 한다.
사실 한국교회의 많은 강단에서 목회자들은 회중을 대상으로 소위 ‘세상’에 대한 ‘악’의 요소들을 증거 한다. 필자가 보기에 목회자들은 의도성이 없이 영적인 의미로 ‘세상’을 말하나 회중들은 이를 받아들일 때 공간적인 의미에서 ‘세상’을 이해하는 것 같다. 그래서 필자가 보기에 이러한 영향으로 기독교인은 교회 이외의 곳에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발견하려 하지 않는 것 같다. 이런 현상은 세상뿐 아니라 국가나 국가통치도 예외가 아니다. 지금도 국가나 국가통치에 대해서 적대적이지는 않을 지라도 이분법적으로 보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있다.
기독교인들에게 국가의 통치가 정말로 중요한가? 기독교인들에게는 영적통치만 중요하지 않은가? 칼빈은 분명히 사람은 이중통치 즉 영적통치와 국가의 통치 하에 있음을 말했다. 그리고 칼빈은 영적통치와 국가의 통치가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세워진 것으로 서로 대립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렇다고 본다면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적통치와 국가의 통치는 구별이 되면서 동시에 각각의 통치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해야 한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에 있어 국가나 국가의 통치는 중요한 신앙의 토양이어야 한다.
(2) 국가의 통치에 관한 교회와 학교의 커리큘럼이 필요하다.
은연중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국가 통치의 영역에서 기독교인들이 일익을 담당해 주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그러한 기대에 부흥할 만큼 국가의 통치에 관한 기독교교육의 기반이 튼튼한가? 교회와 기독교학교는 교육커리큘럼은 어떤가? 사실 여러모로 지식기반이 미약하다. 국가통치에 관한 성경적이며 신학적인 지식기반은 무엇인가? 사실 영적통치와는 다르게 국가통치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교육과 지식기반이 충실해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가통치 영역에서 기독교인의 비중을 논한다는 것은 무리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 국가통치에 관한 기독교교육의 부재에서 국가통치에서의 기독교인의 비중을 논한다는 점에서 무리이고,
- 그러한 환경에서 성장한 기독교인들이 국가통치에서 제대로 그 역할을 기대한다는 점에서 무리이다. 이것은 국가통치에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통치를 바라보는 기독교인의 성실하지 못한 태도를 자각하자는 것이다.
그렇다고 본다면 교회와 기독교학교의 교육현장에서 국가통치에 관한 교육커리큘럼이 전문적으로 개발되어야 하고 영적통치와 국가통치에 대한 구별과 상호보완적인 것들에 대해서도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모든 기독교인은 영적통치를 받으며 살기도 하지만 필연적으로 국가의 통치도 받으며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하루속히 국가통치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기반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그것은 반드시 성경적이고 신학적이어야 한다. 칼빈의 표현을 빌리자면 “어리석은 혼돈을 피하고 그리스도의 영적인 왕국과 세속적인 지배권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려주어야 한다.” 이제 우리는 국가의 통치를 바르게 이해하여 그 안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발견해야 한다.
2. 국가권력과 그리스도인
본질적인 차원에서 국가권력의 강제력 행사는 당연한 권리이며 기독교인의 복종은 당연한 의무이다. 이것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요소가 반드시 충족되어야 하리라고 본다.
(1) 국가권력의 강제력 행사는 적절하게 사용되어야 한다.
칼빈에 따르면 국가권력이 강제력을 행사하는 경우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크게 보았을 때 나님의 정의가 방해받을 때와 국가와 국가권력의 권위가 위협받을 때이다. 가령 재세례파처럼 국가를 전복하려고 시도한 것은 국가와 국가권력의 권위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왜 칼빈이 재세례파들을 싫어했는지 알 수 있다.
(2) 국가권력의 권위는 먼저 그리스도인에 의해 세워져야 한다.
이것이 왜 당연한가? 그것은 국가권력의 권위가 하나님에게서 왔다는 것에서 당연한 의무이다. 따라서 기독교인은 법을 지키는 것에 모범이 되어야 한다. 이것을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기독교인이 법을 지키는 행위는 법의 집행자로서 국가권력에게 복종한다는 표시이며 기독교인이 국가권력에 대한 복종한다는 것은 그 권위의 주관자로서 하나님께 대한 복종의 표시이다.
3. 국가권력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책임
국민의 관원을 통한 저항이 제대로 이루어 지지 않을 경우 한국교회의 선지자적 역할은 필연적이다. 이것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가 반드시 충족되어야 하리라고 본다.
(1) 국민의 관원들이 자신들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할 수도 있다.
대한민국 정치의 특징은 의회정치라고 볼 수 있다. 의회정치는 국민이 직접 뽑은 대표자 즉 국회의원으로 하여금 의회(국회)라는 의결 기구를 통해 국민을 위한 각종 법안이나 정책들을 수립하고 정부(국가권력)를 견제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국민의 관원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지금의 국회의원이라고 볼 수가 있는 데 그들은 합법적인 저항의 방법을 통해 국민의 뜻을 수렴해서 국가권력에게 알리고 견제한다.
지금 한국사회에서 촛불집회와 같은 현상은 국민의 관원(국회의원)의 역할의 부재에서 오는 것이라 하겠다. 왜냐하면 촛불집회의 성격이 관원(국회의원)을 배제하고 국가권력에 대해서 직접 저항하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이 직접 국가권력에게 저항하는 형태는 정당정치 의회정치의 위기를 가져온다. 국민이 직접 국가권력에 저항하는 형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점에서 위험요소를 가지고 있다.
- 국민이 직접 국가권력에 저항하는 형태는 처음과는 다르게 시간이 흐르면서 폭력적으로 변질될 수도 있다.
- 그러나 폭력을 제어할 장치가 스스로에게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교회는 평화와 화해의 방법으로 선지자적 소명을 감당해야 한다. 국민이 직접 국가권력에 저항하는 형태는 폭력적으로 변질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그 교회는 방향을 정해서 선지자적인 목소리를 내어야 한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선지자적인 목소리를 내어야 하는가? 그 대상은 누구인가?
(2) 국가권력자들에게 선지자적인 목소리를 내어야 한다.
교회는 국가 권력자들에게 물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섬기고 있는지? 현재의 국민에 대한 강제력 행사는 본질적으로 합당한지? 만약 그렇지 않다면 교회는 선지자적 목소리를 내어야 한다.
(3) 국민의 관원인 국회의원들에게 선지자적 목소리를 내어야 한다.
교회는 국회의원들이 자신들의 역할을 다하지 않으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말해 주어야 하고 그들이 왜 존재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선지자적 목소리를 내여야 한다.
(4) 국민들에게 선지자적인 목소리를 내어야 한다.
국민이 국가권력에 직접 저항하는 것의 위험요소를 말해주어야 한다. 의도하지 않았을지라도 국민이 직접 국가권력에게 저항하는 형태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취지가 변질되는 경우가 많다. 특별히 폭력적으로 변질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이제 한국교회는 국민들이 본질을 놓치지 않고 평화와 화해의 방법을 선택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글쓴 이 / 주규문(장로회신학대학교 대학원 신학과), 출처 / 주규문 석사학위(Th.M) 논문, 2008년, 편집자 주 / 본 글은 주규문 석사학위 논문 일부를 발췌한 것입니다.
< 미 주 >
1) Sermon Eph,6:5-9, Sermonon The Epistle to the Ephesians(The Banneror Truth
Trust,1973), pp.637-638.
2) 이은선, ‘칼빈의 신학적 정치윤리’, 196-197쪽.
3) 이은선, ‘칼빈의 신학적 정치윤리’, 199쪽.
4) 전진은, ‘칼빈과 재세례파의 교회론 연구’, 82쪽.
5) 이은선, ‘칼빈의 신학적 정치윤리’, 201-202쪽.
6) 위의 책, 203-204쪽.
7) 위의 책, 206쪽.
8) 이은선, ‘칼빈의 신학적 정치윤리’, 208-209쪽.
9) 위의 책, 211쪽.
10) 위의 책, 214쪽.
11) 위의 책, 217-21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