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론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1)

PART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통해 본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기독교강요 제2권 제12장 

– 그리스도는 중보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인간이 되셔야만 했다. –

1. 중보자가 하나님과 사람이 되셔야만 했던 이유

(1) 오직 참 하나님과 참사람이 되시는 분만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큰 간격에 다리가 되실 수 있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仲保者, mediator)가 참 하나님이며 참사람이어야만 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왜 이것이 중요한 일이냐고

묻는다면 간단히 말해 그것이 절대적 필요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실 할 의무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 편집자) 인간의 구원 여부가 달린 하나님의 작정(作定)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하여 지극히 자비로우신 우리 아버지는 우리를 위해 가장 좋은 것으로 작정하셨다.

그런데 우리 죄악이 마치 구름처럼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끼어 있어 우리를 천국으로부터 완전히 격리(隔離)시켰기 때문에(사 59:2) 누구든지 하나님께 속하지 않고는 화평을 회복시킬 중재자가 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누가 하나님에게 도달할 수 있는가?  

아담의 자손 중 하나인가? 결단코 그럴 수 없었다. 아담의 후손역시 누구나 그들의 조상처럼(창 3:8) 하나님을 만나는 것조차 두려워했다. 그러면 천사 중 하나인가? 아니다. 그들 역시 그들을 인도할 지도자가 필요하며 그 지도자와의 유대(紐帶)를 통해서 그들도 하나님과 떨어지지 않게 견고하게 붙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참고, 엡 1:22, 골 2:10) 

그러면 어떻게 해야만 되는가? 만일 지고(至高)의 하나님께서 우리에를 찾아오시지 않았다면 그 상황은 분명히 소망이 없었다. 왜냐면 인간 스스로는 하나님에게로 올라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해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사 7:14, 마 1:23)이 되셔야만 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그의 신성(神性)과 우리의 인성(人性)이 서로 연합되어 하나 되셨다. 우리가 그와 연합하여 하나 되지 않았다면 아무리 하나님과 가까워진대도 혹은 아무리 하나님과 충분히 친근하다 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를 소망하는 만큼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인간의 불결함과 거룩하신 하나님의 완전한 순결 사이의 불일치(不一致)가 그만큼 큰 것이었다.

혹 사람에게 조금도 오점이 없다 할지라도 그의 상태는 너무나도 비천하여 중보자 없이는 결코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사람의 상태는 어떠했는가? 사람은 그의 치명적인 타락으로 말미암아 죽음과 지옥으로 떨어질 상태였으며 많은 오점으로 더럽혀졌고 그 자신의 부패로 불결해졌으며 또한 모든 저주로 뒤덮였다.

그러므로 중보자에 관해 설명하면서 바울이 (중보자 되신) ‘그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분명히 한 것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즉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 사도 바울은 여기서 ‘사람이신’이라는 말 대신 ‘하나님이신’이라고 말할 수도 있었고 또 ‘하나님’이란 말을 생략했듯이 ‘사람’이라는 말도 생략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의 입을 통해 말씀하시는 성령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기에 적절한 순간에 가장 적합한 방법을 통해 우리 사람의 연약함을 도우셨다. 그것은 곧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우리 중의 한 사람으로 우리 가운데 중보자로 세우신 일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어디에서 중보자(仲保者)를 찾아야 하고 또 어떤 길로 그에게 나아가야만 되는지 염려하거나 좌절하지 않도록 성령께서는 중보자를 ‘사람’이라 부르시고 그렇게 말함으로써 우리의 중보자는 가까이 계시며 그 중보자는 참으로 우리와 같은 육신(肉身)이시기에 우리와 접촉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하셨다.

성령께서는 또 다른 곳에서 이와 동일한 사실을 더 상세하게 이렇게 설명하셨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體恤)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2) 우리의 중보자는 참 하나님이며 참사람이어야만 했다. 

이점은 우리가 중보자가 성취하려고 하셨던 것이 평범한 일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유의한다면 더욱더 분명해질 것이다. 중보자의 직무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를 회복시켜 주심으로 죄인의 자녀를 하나님의 자녀로 지옥의 상속자를 하늘나라 상속자로 삼으시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와 같은 사람의 아들이 되지 않으셨다면 그리고 그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몸을 취하여 자신의 것을 우리에게 내어주시며 또한 본질상 그 자신의 것을 은혜로 우리의 것으로 삼지 않으셨다면 누가 이 일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보증(保證)에 근거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사실을 신뢰하고 있다. 왜냐면 본질상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친히 우리의 몸을 취하여 자신의 몸을, 우리의 살을 취하여 자신의 살을, 우리의 뼈를 취하여 자신의 뼈를 이루시어 우리와 하나가 되셨기 때문이다.(창 2:23,24, 엡 5:29-31을 통해 중개됨) 

중보자는 자기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동시에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시기 위해 기꺼이 우리 본성을 취하셨다. 따라서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요 20:17)고 말씀하시면서 거룩한 형제 관계를 친히 자신의 입으로 선언하셨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하늘나라의 상속에 확신하게 된다. 왜냐면 천국은 하나님의 독생자에게 속해 있는데 그가 우리를 자기 형제로 삼아 주셨기 때문이다. “형제이면 또한 그와 함께 후사(後嗣)가 되기 때문이다.”(롬 8:17 칼빈 의역) 꼭 같은 이유로 우리의 구속자(救贖者)가 되실 분은 참 하나님이며 참사람이신 것이 필수적이었다.

중보자의 직무(task)는 죽음을 삼켜버리는 것이었다. 생명이 아니라면 누가 이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그의 직무는 죄(罪)를 정복하는 것이었다. 의(義)가 아니라면 누가 이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그의 직무는 세상과 공중 권세들을 멸(滅)하는 것이었다. 세상과 공중 권세보다 더 큰 능력 아니면 누가 이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생명과 의(義)와 하늘의 주권과 권세가 하나님 이외에 그 누구에게 있는가? 그러므로 우리의 지극히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우리를 구속(救贖)하려고 작정하셨을 때 그의 독생자 안에서 하나님 자신을 우리의 구속자로 삼으셨다.(참고. 롬 5:8)

(3) 참 하나님이며 참사람만이 우리 대신 순종할 수 있었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한 두 번째 요건은 바로 이것이었다. 즉 불순종함으로 잃어버린 바 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사람은 순종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으며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을 만족시킬 수 있고 죄에 대해 대신 벌을 받을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중보자 되신 주님은 참사람으로 나타나셨으며, 아담의 몸과 그 이름을 취하심으로 아담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순종했고, 하나님의 의(義)의 심판을 감당하시려고 육신을 입으셨으며,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의 대가(代價)를 친히 갚으셨다.

요약하면 오직 하나님만이 죽음을 맛보실 수 있고 사람으로서는 죽음을 정복할 수 없으므로 그리스도는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인성(人性)과 신성(神性)을 결합하여 인성의 연약함을 죽음에 내어주시고 신성의 권능으로 죽음과 더불어 싸워 우리를 위해 승리를 얻으려 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게서 그의 신성이나 인성을 빼앗으려는 자는 그의 위엄과 영광을 축소 시키거나 혹은 그의 선하심을 희미하게 만들려고 한다. 한편으로 그들은 똑같이 자신들이 믿음을 약화(弱化)시키고 전복시킨 사람들에게 나쁜 일을 행하는데 그 이유는 믿음은 이 성육신에 기초하지 않게 되면 굳게 서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우리가 소망했던 그 구속자(救贖者, 메시아)는 하나님이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약속하신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어야만 했다. 이 사실로부터 경건한 자들은 또 다른 유익들을 얻고 있다. 그가 다윗과 아브라함에게서 태어났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더욱더 그가 하나님 말씀의 약속대로 기다리던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우리는 앞에서 설명한 바를 특별히 굳게 붙잡아야 한다. 즉 그리스도와 우리가 같은 인성(人性)을 가진 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과 교제할 수 있다는 보증이며 또 우리 육신을 입으신 그는 죽음과 죄를 정복하심으로써 그 승리와 개선(凱旋)이 우리의 것이 되게 하셨다는 것이다. 즉 그는 우리에게서 받으신 자기 몸을 하나님께 희생(犧牲) 제물로 드리신 그 속죄(贖罪) 행위로 우리의 허물을 다 깨끗이 씻어주시고 아버지의 의로우신 진노를 진정시키셨다.

2. 성육신 교리 반론에 대한 대답

(4) 그리스도께서 성육신(成肉身)하신 유일한 목적은 우리의        구속(救贖)이었다.

이 문제를 부지런히 유의하여 숙고(熟考)한 사람이라면 경솔하게 이상한 걸 추구하는 자를 매혹 시키는 공허한 사변(思辨)들을 쉽게 뿌리칠 수 있을 것이다. 궤변자들의 공허한 사변은 그리스도께서는 인류를 구속할 필요가 없었을지라도 역시 사람이 되셔야만 한다는 것이다.

물론 나는 본래의 창조 질서와 타락하지 않은 인류 본성의 상태에서도 그리스도께서는 천사들과 사람들의 머리로서 그들 위에 계셨다는 것을 인정한다. 이런 이유로 바울은 그리스도를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골 1:15)라고 불렀다.

그러나 모든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속자(救贖者)가 되시기 위해 육신을 입으셨다고 선포하기 때문에 다른 이유나 목적을 상상하는 것은 주제넘은 일이 될 것이다. 우리는 왜 그리스도가 처음부터 약속되었는지를 잘 알고 있다. 그것은 곧 타락한 세계를 회복시키고 잃어버린 바 된 인간들을 구원하시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믿는 자들에게 소망을 주시기 위해 율법하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이 희생 제물로 표현되었는데 그 소망은 곧 그들의 죄 때문에 행해진 속죄(贖罪)를 통해 그들과 화해하시고 난 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한없는 은혜를 베푸시리라는 것이었다.

율법이 아직 선포되지 않았던 시대에도 결코 중보자가 피 없이는 약속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인류의 죄를 깨끗하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에 의해 작정이 되셨다고 추론한다. 왜냐면 피를 흘리는 것은 속죄의 표지(標識)이기 때문이다.(참고, 히 9:22) 그래서 선지자들은 메시아를 선포할 때에 그가 장차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화목하게 하는 자가 될 것이고 약속했다. 이에 대한 모든 증언 가운데 이사야가 한 말만 가지고도 충분할 것이다.

“그는 ‥‥ 백성의 허물 때문에 하나님의 손에 맞았으며 ‥‥ 평화의 징계가 그에게 임하였으며”(사 53:4,5, 칼빈 의역) 또한 그는 대제사장이 되어 하나님께 자신을 제물로 드리셨다.(히 9:11,12) 또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다른 사람들이 나음을 입게 되었으며’ 모든 사람이 그릇된 길로 행하고 양과 같이 흩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에게 고통의 짐을 지워 ‘모든 사람의 죄악을 담당하게’(사 55:5,6, 칼빈 의역) 하셨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비천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에 의해 중보자가 되셨다고 믿기 때문에 누구든지 이 한계를 벗어나게 되면 어리석은 호기심에 깊이 빠지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셨을 때 그는 자신이 왜 이 땅에 오셨는지 말씀하셨는데 그가 오신 목적은 하나님을 그의 진노(震怒)에서 진정시키심으로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 옮기시기 위한 것이었다. 사도들은 이 사실을 증거했다. 사도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요 1:14)고 증거 했는데 그 전에 먼저 인류의 배반(背叛)에 대해 말했다.(요 1:9-11) 그러나 우리는 특별히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신의 직무에 대해 말씀하신 그 말씀에 유의해야 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왔나니 듣는 자는 살게 되리라.”(요 5:25, 칼빈 의역)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요 11:25)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마 9:12) 이처럼 모든 성경 구절들을 다 인용하려면 끝이 없을 것이다.

사도들은 한결같이 이 신앙의 근원(根源)으로 돌아갈 것을 촉구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사람을 화목 시키려고 오시지 않았다면 그의 제사장직 영예는 없었을 것이다. 왜냐면 제사장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중개하는 중재자(仲裁者)로 세움을 받기 때문이다.(히 5:1) 만일 그가 이 같은 우리의 제사장이 되시지 않았다면 그는 우리의 의(義)가 되실 수 없다. 왜냐면 그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 돌리지 않도록 우리를 위한 희생 제물이 되시기 때문이다.(고후 5:19) 

끝으로 만일 그가 성육신하시지 않았다면 성경이 그를 부르는 모든 칭호(稱號)도 다 잃어버리게 되실 것이다. 또 바울이 언급한 내용 즉 “율법이 할 수 없는 일 즉 우리를 위하여 율법의 요구를 이루게 하는 일을 하게 하시려고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셨다.” (롬 8:3,4, 칼빈 의역)는 것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바울이 다른 곳에서 언급한 ‘이 거울에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의 무한한 사랑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속자로 오셨을 때 “사람들에게 ‥‥ 나타났다.”(참고, 말 2:11)고 가르치는 것도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다.

요컨대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육신을 취하려고 의도하셨고 아버지께로부터 이 명령을 받으셨던 이유에 대해 성경이 유일하게 제시하고 있는 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아버지의 진노를 진정시키시기 위해 희생 제물이 되셨다는 것이다.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 또 그의 이름으로 ‥‥ 회개가 ‥‥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눅 24: 46,47)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요 10:17,15,18)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요 3:14) 

또 다른 구절에서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때를 면케 하옵소서 ‥‥ 그러나 이를 위하여 이때 내가 왔나이다. 아버지여! 당신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요 12:27,28과 12:23의 융합)라고 자신이 왜 육신을 입으셨는지 분명히 밝히셨다. 즉 그는 우리의 죄를 없이 하는 희생의 제물과 속죄의 제물이 되시기 위함이었다. 같은 의미로 제사장 사가랴도 그리스도는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빛을 비추시고’(눅 1:79) 족장들에게 약속하신 바대로 그가 이 땅에 오셨다고 선포했다.  

우리는 이 모든 말씀이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 언급된 것임을 잘 알고 있다. 그 하나님의 아들은 바울이 다른 곳에서 증언했듯이 ‘그의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춰져 있는’(골 2:3) 분이다. 또 바울은 그를 떠나서는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고전 2:2)고 그분을 자랑했다.

(5) 아담이 범죄 하지 않았어도 그리스도께서 역시 사람이 되셨을까?

만일 누군가가 반론(反論)을 제기하기를 이 모든 일 중에 그 어느 것도 이미 구원받은 자들을 향해 “그리스도께서 – 물론 그는 정죄 받은 사람들을 구속하셨지만 – 사람의 육신(肉身)을 취하심으로써 그의 사랑을 나타내시는 것을 방해하지 못한다.”라고 주장했다고 가정을 해보자.

이에 대한 내 답변은 간단하다. 즉 성령께서는 이 두 가지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作定)에 의해 서로 연결되었다고 선언하셨기 때문에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속자와 우리의 본성을 함께 나누신 분이 되셨는지에 대해서 더 알아보려고 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

왜냐면 하나님의 불변적인 규례에 만족하지 않고 어떤 것을 그 이상 알려는 욕구에 사로잡힌 자는 우리가 구속받는 대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신 그리스도에 만족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보내심을 받은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할 뿐 아니라 고차원 예정(豫定)의 신비에까지 올라가서 인간 본성의 모든 방종과 경솔한 호기심을 적절하게 억제하고 있다.

‘아버지께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엡 1:4)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며’(엡 1:4,5) ‘그의 사랑하시는 아들 안에서’ 우리를 받아 주셨으며(엡 1:6)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 그의 피로 말미암아 ‥‥ 구속 ‥‥ 을 받았다.’(엡 1:7) 

여기에서는 아담의 타락이 분명히 시간상으로 하나님의 작정보다 앞선 것으로 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인류의 비참함을 치유해 주시기 위해 모든 시대에 앞서 작정하셨다는 걸 나타내 보여 준다.

만일 우리의 반대자들이 “하나님의 이런 계획은 그가 예견하셨던(예지예정) 인간의 파멸에 좌우된 것이었다.”라고 이의를 제기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래도 나는 이것에 대해 충분히 답변할 수 있다. 즉 하나님이 그의 은밀하신 작정에 의해 정하신 것 그 이상의 것을 묻거나 알려고 하는 자들은 모두가 한가지로 불경건의 무례함으로 어떤 새로운 종류의 그리스도를 만들어내려고 덤벼든다는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참된 직무에 대해 논의한 후에 에베소 교인들에게 깨닫게 하는 영(靈)을 주사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 즉 ‘모든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게 되기를 원한다고 기도했다.(엡 3:18,19) 이것은 곧 그리스도가 언급될 때마다 우리가 적어도 그리스도로 인한 화목의 은혜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그가 의도적으로 우리의 마음에 울타리를 치신 것과 같다.

그러므로 바울이 증거 한 바로는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고 했는데 이것은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말씀이기 때문에(딤전 1:15) 나는 기꺼이 이 말씀에 동의한다. 그리고 바울 사도는 또 다른 곳에서 지금 복음에 계시 된 은혜는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가르쳤는데 나는 끝까지 이 말씀 안에 항상 머물려고 결심한다.

그런데 오시안더(Andreas Osiander, 1498-1552)는 이같이 온전한 말씀에 부당하게 항의하고 있다. 이전에 몇 사람들이 간단히 언급했던 이 문제에 대해 그가 오늘에 와서 새삼스럽게 또다시 재론하고 있는 것은 실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만일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고 오시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자들을 비난하고 있는 데 그 이유는 성경의 그 어떤 증언도 이런 공상에 대해 반박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사람은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를 통해 얻은 구속에 대해 언급하고 나서 “어리석은 변론을 피하라.”(딛 3:9)고 우리에게 현재도 명하고 있는데도 왜곡된 호기심(好奇心)에 굴레에 채워져 있지 않은 사람처럼 말하고 있다.

또 어떤 미친 사람들은 자신들의 미련한 방식으로 재치 있는 것처럼 나타내 보이려고 “하나님의 아들이 나귀의 본성을 취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라는 미친 생각을 지꺼리기도 한다. 경건한 사람들은 모두 당연히 이런 해괴(駭怪)한 가증스러운 생각을 싫어하나 그들은 성경 어디에도 특별히 이런 말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는 구실을 붙이고 있다.

오시안더의 이 같은 말도 안 되는 이런 변명에 대해 반박하건대 “그렇다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외에는’(고전 2:2) 아무것도 소중한 것도 없고 알 만한 가치가 없다고 말한 바울이 나귀가 구원의 창시자임을 인정했다는 것인가?” 사도 바울은 성경 다른 곳에서 그의 아버지의 영원한 계획에 의해 그리스도께서 만물들을 함께 모으시는 머리로 임명되셨다(엡 1:10, 참고. 1:22)고 전파했는데 하나님은 결코 구속의 직무를 위임받지 않은 또 다른 머리를 인정하시지 않을 것이다.

(6) 하나님 형상에 대한 오시안더의 견해

오시안더가 자랑하는 원리는 전혀 보잘것없는 것이다. 그는 주장하기를 사람은 장차 오실 메시아의 모본(模本)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 형상(形像)대로 창조되었는데 이는 아버지께서 이미 육신으로 옷 입히시기로 작정하신 분(그리스도)과 사람이 일치하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는 것이다. 이에 근거하여 오시안더는 추론하기를 “만일 아담이 그의 본래의 의로운 상태로부터 타락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는 역시 사람이 되셨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건전한 판단력을 지닌 모든 사람은 이것이 얼마나 경솔하고 어설픈 말인지 다 알고 있다.

한편 오시안더는 자신이 맨 처음으로 이같이 아담의 진짜 하나님 형상이 무엇인지 알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또 하나님의 영광이 아담에게 주어진 특별한 은사에서 빛났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본질적으로 처음부터 아담 안에 거하셨다고 생각하고 있다.

나는 아담이 하나님과 접목이 되어 있는 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었다는 걸 인정한다. 이것은 인간의 가장 최고 참된 존엄성이다. 그러나 나는 이 형상이 하나님께서 아담을 모든 피조물 위에 뛰어나도록 구별하셨던 탁월성의 표지들에서만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모든 사람은 한결같이 그때도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셨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따라서 아담에게 새겨진 탁월성은 전적으로 그가 독생자를 통해 그의 창조주의 영광에 접근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창 1:27) 그리고 창조주 자신은 그 자신의 영광이 하나님 형상의 사람을 통해 거울처럼 나타나 보이기를 원하셨다.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로 인해 이 같은 영예의 정도(程度)까지 올라서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덧붙여 하나님의 아들 자신이 천사들과 사람들의 공통적인 머리이셨다고 말하려고 한다. 이같이 사람에게 부여된 위엄(威嚴)은 천사들에게도 있었다. 천사들이 ‘하나님 자녀’로 불린다는 것(시 82:6)을 들으면 그들이 그들의 아버지와 같은 어떤 특질을 부여받았다는 걸 부인한다는 것은 합당치 않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이 천사들과 사람들에게서 나타나고 두 본성에서 드러나게 되기를 원하신다면 오시안더가 천사들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 밑에 놓여 있었다고 하는 것은 무식하게 지껄이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면 천사들이 하나님을 닮지 않았다면 계속해서 하나님을 직접 뵙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바울은 이와 비슷하게 가르치기를 사람이 천사들과 합하여 한 머리 아래에서 서로 밀접하게 붙어 있어야만 “하나님의 형상을 좇아 ‥‥ 새사람을 입게 된다.”(골 3:10)고 했다.

요약하면 우리가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다면 주께서 우리를 하늘로 영접하실 때 천사의 형태를 취하게 될 것이며(마 22:30) 우리의 궁극적인 행복이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의 형상의 첫 번째 모형이 사람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었다는 오시안더의 추론이 허용된다면 누구든지 같은 이유로 하나님의 형상이 천사들에게도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천사의 본성을 취하셔야만 했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7) 오시안더에 대해 일일이 반박함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아들의 성육신에 대한 확고부동한 결정이 없었다면, 하나님은 거짓말쟁이로 인정될 수 있다는 오시안더의 걱정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 아담이 끝까지 순전한 상태로 타락하지 않았다면 그는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과 같았을 것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나 천사가 될 필요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다른 걱정도 근거가 없는 어리석은 것이다. 인간을 창조하시기 전에 하나님의 요지부동한 계획에 따라 그리스도가 속죄 주로서가 아니라 처음 사람으로서 태어나시기로 되지 않았다면, 그리스도는 그의 특권적 지위에서 떨어졌으리라고 한다. 그리스도는 멸망한 인류를 구해야 한다는 역사적 우연이 없었다면 태어나시지 않았을 것이며 이것은 그가 아담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런 걱정 역시 근거 없고 어리석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는 죄 이외에는 모든 점에 있어서 우리와 같이 되셨다고 성경은 분명히 가르치고 있는 데(히 4:15) 오시안더는 왜 이 사실에 대해 두려워 떨고 있는 것일까?

누가도 서슴지 않고 그리스도를 아담의 후손이라고 인정한다.(눅 3:38) 또 아담의 후손들을 그리스도가 멸망에서 구출하도록 그의 인간 상태가 결정되어 있는 게 아니라면 바울이 그리스도를 둘째 아담이라고(고전 15:47) 부르는 그 이유를 나는 알고 싶다. 그리스도가 창조 이전에 오셨다면 그는 첫째 아담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함에도 오시안더는 사람인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마음에 미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그를 모형으로 삼아 인류가 창조된 것이라고 분별없이 선언한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를 ‘둘째 아담’이라고 부름으로써 아담의 타락 사건 즉 자연을 회복할 필요성의 원인이 된 이 타락 사건을 사람의 처음 창조와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얻는 회복 사이에 둔다. 그러면 바로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은 사람이 되시려고 나셨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오시안더는 서툴고 부적합한 추리로 아담이 그대로 의로운 상태로 남아 있었더라면 그는 그리스도의 형상이 아니라 자신의 형상이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대답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육신을 취하시지 않았더라도 하나님의 형상이 그의 몸과 영혼에서 빛났을 것이라고 말이다. 이 형상의 광채가 있기에 그리스도가 만유의 머리이시며 만유의 수위(首位)를 점유하신다는 것이 항상 명백하다.

그래서 우리는 오시안더가 퍼뜨리는 무익한 궤변을 배제한다. 아담의 죄가 없었더라도 하나님이 아들에게 육신을 입히기로 결정하시지 않았다면 천사들에게는 이 두령이 없었을 것이라고 하는 그의 주장은 궤변이다.

그런데 정신이 건전한 사람이라면 아무도 인정하지 않을 일에 오시안더는 경솔하게 달라붙는다. 그리스도는 사람이 아니고는 천사들에 대한 수위권이 없을 것이며, 천사들은 그를 지도자로서 반기지 않을 것이라고 오시안더는 주장한다. 그러나 옳은 추리는 바울의 말에서 곧 나온다.

첫째,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이므로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골 1:15)이다. 이것은 그가 창조되었거나 창조물 중의 하나로 계산되셔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처음에 가장 아름답게 장식되었던 그 완전 상태의 세계는 그 이외에 다른 기원(起源)이 없었기 때문이다.

둘째, 사람이 되신 그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골 1:18)였다. 사도는 짧은 한 구절에서 두 가지 점을 생각하게 만든다. ⑴ 만물이 아들로 말미암아 창조되어 그가 천사들을 지배하시게 되었으며(골 1:16), ⑵ 우리 구속자가 되시기 위해 그는 사람이 되셨다고 한다‘(참조, 골 1:14)

오시안더는 만일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아니셨다면 사람들은 그를 자신들의 왕으로 모시지 않았을 것이라고 함으로써 같은 무지를 나타내 주고 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 – 그가 비록 인간의 육신을 취하지 않으셨다고 할지라도 – 천사들과 사람들을 그의 하늘의 영광과 생명의 교제 가운데로 모아들이시고 친히 만물 위에 우위권을 행사하지 않으셨다면 계속 존재하지 않을 것처럼 말하는 것과도 같다!

그러나 오시안더는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시지 않았다면 교회는 머리를 가질 수 없었을 것이라는 그릇된 원리 때문에 언제나 속임 당하고 있든지 아니면 자신을 속이고 있다. 천사들은 그리스도의 머리 되심을 즐겁게 누리고 있는데 어째서 그리스도는 자신의 신적 권능으로 사람들을 지배하실 수 없다는 것인가! 그리고 자신의 영의 은밀한 능력으로 그 자신의 몸처럼 그들을 일깨우시고 양육시키시며 하늘에 모아들이신 이후에는 천사들과 똑같이 생명을 누리게 하지 못하실 이유가 어디에 있다는 것인가!

오시안더는 지금까지 내가 반박한 그의 이런 하찮은 것을 가장 견고한 말씀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는 자기 자신 생각에 도취 되어 아무것도 아닌 것을 어리석게 찬양하고 있다. 그리고 후에 그는 더욱 확고한 증거라고 생각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즉 그것은 ‘아담의 예언’이라는 것인데 아담은 자기 아내를 보았을 때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 2:23)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시안더는 이 말이 예언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하고 있는가? 그것은 마태복음에서 그리스도께서 같은 말씀을 하나님께서 하신 것으로 돌리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마치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 말씀하신 것은 어떤 예언이 포함된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오시안더로 하여금 그 창시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분명히 유래된 율법의 몇몇 규정들에서 예언들을 찾아보도록 해보자. 그뿐 아니라 만일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문자적 의미에 제한시키셨다면 그는 미숙하고 세속적일 것이다.(마 19:4-6) 

여기서 그리스도는 자신이 교회에 은혜로 베푸셨던 신비적인 연합에 대해서가 아니라 결혼의 정절에 대해 논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남편과 아내가 한 몸이라고 하신 것은 불가분리(不可分離)의 결속 관계를 그 누구도 깨뜨리려고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주님이 가르치시기 위함이다.

만일 오시안더가 이같이 단순한 의미를 부정한다면 그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말씀을 더 세밀하게 해석하심으로써 그의 제자들을 신비 가운데로 인도하지 않으신 것에 대해 비난하도록 내버려 두자.

바울의 언급도 오시안더의 망상을 지지하고 있지 않다.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살 중의 살이라고 말하고(엡 5:30-) 즉시 ‘이것은 비밀’이라고 덧붙였다.(엡 5:32) 바울은 아담이 한 말의 의미를 밝히려고 하지 않고 결혼의 모습과 방법을 통해 그리스도와 우리를 하나로 묶는 거룩한 연합을 제시하려고 했다.  

그 말 자체가 이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하면서 교정 방식으로 결혼의 규칙과 그리스도와 교회의 영적 연합을 구별하고 있다.

이같이 오시안더의 어리석은 주장은 곧 사라져 버리고 만다. 그리고 나는 이 허튼소리를 갖고 더 논한다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믿는다. 왜냐면 이같이 짤막한 반박만으로도 그 모든 것의 허무함이 드러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건전한 진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온전히 충분하게 양육시키고도 남는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 4:4.5)

기독교강요 제2권 제13장 

– 그리스도는 인간 육신의 참 본질을 취하셨다. –

1. 고대 이단들에 대한 답변

(1) 그리스도의 참된 인성에 대한 증거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은 분명하고 확고한 증거들에 의해 다른 곳에서 입증된 바 있다. 따라서 내가 오해하지 않는 한 여기에서 다시 논의하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일은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으신 그리스도가 어떻게 중보자의 직무를 수행하셨는지 살피는 일이다.

실제로 그리스도 인성의 순전성(純全性)이 오래전에 이미 마니교도(Manichaeism)와 마르키온파(Marcionism)에 의해 부인된 바 있다. 마르키온파는 그리스도의 몸을 단순한 현현(顯現)에 지나지 않는다고 상상했지만 마니교도들은 그리스도가 천적(天的) 육신을 부여받았다고 공상했다.  

그러나 성경의 수많은 증거는 이 둘을 모두 부인한다. 왜냐면 그리스도는 하늘의 후손이나 유령에게가 아니라 아브라함과 야곱의 씨에게 축복이 주어지게 될 것이라고 약속되어 있기 때문이다.(창 12:3, 17:2,7, 18:18, 26:4) 또 영원한 보좌가 공중의 사람이 아니라 다윗의 후손과 그 허리에서 난 자에게 약속되어 있다(시 45:6, 132:11)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나타나셨을 때 그를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마 1:1)이라 불렸다. 이것은 공중에서 창조되어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나셨기 때문이 아니라 바울의 해석에 의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기 때문이다.(롬 1:3) 이와 비슷한 다른 구절에서 그리스도는 유대인에게서 나셨다고 했다.(롬 9:5)

이런 이유로 주님 자신도 ‘사람’(人)이라는 이름에 만족하시지 않고 자신을 ‘사람의 아들’(人子)이라 부르셨는데 이것은 자신이 참으로 인간의 씨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는 것을 보다 분명하게 설명하시려는 것을 뜻한다. 성령께서는 종종 이 명백한 사실을 여러 모양으로 여러 번 단순하게 말씀하셨는데 누가 감히 속임수를 써서 이를 심각하게 왜곡할 만큼 뻔뻔스러울 줄 상상이나 했겠는가?

이에 대한 증거를 더 모으려고 한다면 다른 증거들도 손쉽게 찾을 수 있다. 이들이 왜곡한 것 중 하나는 바울이 언급한 것이다. 즉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셨다.”(갈 4:4) 고 하는 구절이다.

또 그리스도가 주림과 목마름 추위 등 우리와 같은 본성의 연약함을 지니셨다는 걸 보여 주는 다른 증거들이 있다. 이 많은 증거 가운데서 우리 마음에 참된 확신하도록 교육하는 것들을 택해야 한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그는 천사에 관심이 없어 그들의 본성을 취하지 않으시고(히 2:16) 오히려 우리의 본성을 취하셨는데 이는 혈(血)과 육(肉)을 지니사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를 없이 하려고”(히 2:14)라는 말씀이다. 또 다른 구절에 보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결되었기에 그의 형제로 간주 된다.(참고. 히 2:11) 

그 외에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히 2:17)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히 4:15) 등 여러 구절이 있다.

우리가 조금 앞에서 언급한 것도 이 요점과 연관된다. 즉 바울이 분명히 선포했듯이 세상 죄(罪)는 우리의 육신 안에서 속해야만 한다는 것이다.(롬 8:3) 분명히 이런 이유로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에게 부여하셨던 것은 무엇이든지 우리의 것이 되는데 그 이유는 그가 우리의 머리가 되시며 ‘그에게서 온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하나로 자라기 때문이다.(엡 4:16)

그렇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성령을 그에게 한량없이 주신’(요 1:16) 것은 ‘우리가 다 그의 충분한 데서 받으려’(요 1:16) 한다는 진술들은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의 본질(本質)에 있어서 어떤 우연한 은사에 의해 풍성하게 된다는 것처럼 더 어리석은 생각은 없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그리스도 자신도 다른 곳에서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요 17:19)라고 말씀하셨다.  

(2) 그리스도의 참된 인성을 부인하는 자들을 논박함

그리스도의 참된 인성(人性)을 부인하는 자들은 자신들의 오류를 견고히 하기 위하여 여러 구절을 심하게 왜곡하여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내가 이미 입증한 여러 내용을 반대하기 위해 여러 가지 하찮은 궤변들을 제시하나 그 가운데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했다.

마르키온(Marcion, 85-160)은 상상하기를 그리스도께서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빌 2:7,8)는 바울의 말을 근거하여 그가 사람의 몸 대신에 환상(幻像)을 입으셨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서 바울이 의도한 바를 전적으로 간과했다. 즉 바울은 여기에서 그리스도께서 어떤 종류의 몸을 취하셨는지를 가르치려고 의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건 그리스도께서는 당연히 그의 신성(神性)을 나타내 보이실 수도 있었으나 자신을 단지 낮고 멸시받는 사람(人性)으로 나타내셨다는 것이다. 즉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모본(模本)을 보임으로써 우리로 복종(服從)하도록 권고하기 위해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셨고 자신의 영광을 직접 세상에 드러내실 수도 있었으나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시고 자진하여 자신을 비우셨다는 것이다.

그는 종(從)의 형상을 취하셨으며 그런 비천함에 만족하셨고 그의 신성이 ‘육신을 취함’으로 감추어지는 것을 허락하셨다.(참고, 빌 2:5-7) 여기서 바울은 실제로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나타나셨는지가 아니라 그가 어떻게 행동하셨는가를 가르치고 있다.

본문 전체에서 우리가 쉽게 추론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비워 참으로 인간적인 본성을 취하셨다는 것이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셨다.’(빌 2:8)는 말이 잠시 신적 영광이 비치지 않고 낮고 비참한 상태에 있는 인간의 모양만이 나타났다는 뜻이 아니고 그 무엇인가?

“그리스도께서는 ‥‥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벧전 3:18)라고 한 베드로의 말도 인성을 지니신 하나님의 아들이 연약하지 않으셨다면 무의미할 것이다. 바울은 이 점을 더욱 명백하게 설명하기를 “그리스도께서는 육신의 연약함을 따라 고난을 받으셨으니”(고후 13:4)라고 단언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신 후에 새로운 영광을 얻으셨다고 명백하게 언급되어 있다. 여기에 그의 높아지심이 있다. 인간의 몸과 영혼을 부여받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이같이 높아지는 일이 있을 수 없다.

마니(Mani, 216-274)는 그리스도를 ‘공중의 몸’을 입으셨다고 꾸며냈는데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고전 15:47)고 성경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사도가 말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의 천상적 본질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부어 주셔서 우리를 일깨워 주시는 영적인 힘이다.

그런데 우리가 살펴본 대로 베드로와 바울은 그 힘을 그리스도의 육체와 분리시켰다. 오히려 정통파 가운데서 폭넓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그리스도의 육신에 관한 교리는 이 구절에서 큰 도움을 받고 있다. 왜냐면 만일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은 하나의 육체의 본성을 지니지 않으셨다면 바울이 다음과 같이 열정적으로 추구한 논증은 무의미하게 되고 말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으면 우리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할 것이요, 우리가 부활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도 부활하시지 않았으리라.”(고전 15:12-20, 요약)

고대 마니교도나 오늘날 그 제자들이 아무리 (이 증거를) 교묘한 술책으로 회피하려고 노력하나 결코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약속되셨다는 의미에서만 ‘인자’(人子)라고 불리신다는 어리석은 말은 비열한 회피(回避)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면 히브리어 숙어로 참된 사람은 ‘사람의 아들’(人子)로 불린다는 게 명백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의심할 여지 없이 자신의 모국어로 이 용어를 보존하셨다.  

또 ‘아담의 아들’에 대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이해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더 자세히 논할 필요도 없이 사도들이 그리스도에게 적용하고 있는 시편 8편의 말씀으로 충분할 것이다. “사람이 무엇이 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人子)가 무엇이 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시 8:4, 히 2:6)

그리스도의 참된 인간성(人間性)은 이 인자(人子)라는 말로 표현되고 있다. 왜냐면 그가 즉각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아버지에게서 직접 태어나지 않으셨으나 그의 기원은 아담에게서 비롯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내가 이미 인용한 다음의 구절은 아무 쓸모가 없게 될 것이다.

즉 그리스도께서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그 자녀들을 자기 자신에게로 모아들여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하기 위함이다.(히 2:14) 이 말씀에서 그리스도는 분명히 우리와 같은 본성을 지니신 동료와 동참자로 선언되고 있다.

이런 의미로 그는 역시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히 2:11 상)라고 말했다. 문맥상으로 이 표현은 본성을 공유한 것을 언급한 것이다. 왜냐면 곧바로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히 2:11 하)라는 구절을 덧붙였기 때문이다.

그가 이전에 믿는 자들을 하나님에게서 났다고 말했는데 이같이 크게 존귀하게 여김을 받는 자들을 부끄러워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의 무한한 은혜로 낮고 비천한 사람들과 결합하시는 그 일로 “그는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셨다.”(히 2:11하)고 말한 것이다.

더욱이 그들은 반론을 제기하기를 이런 식으로 불경건한 자들도 그리스도의 형제가 될 수 있을 것이라 한다. 그러나 이런 반론은 근거가 없다. 왜냐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혈과 육으로 나는 것이 아니라(참고. 요 1:13) 믿음을 통해 성령으로 나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육신만으로는 ‘형제 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

이처럼 사도는 오직 믿는 자들만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영예를 얻는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믿지 않는 자들이 같은 근원에서 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신 것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시기 위함이라고 우리가 말할 때 이러한 표현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면 믿음이 중간에 개입해야 성령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에 영적으로 접붙여 주시기 때문이다.

또 그들은 ‘맏아들’이라는 표현에 대해 서투른 논쟁을 불러일으키려 한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형제 중의 맏아들’(롬 8:29)이 되기 위해 맨 처음에 아담에게서 태어나셔야만 했다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맏아들’은 연령(年齡)에 관해서가 아니라 영예와 숭고한 권세의 정도에 관해 언급한 것이다.

그들은 또 그리스도께서 천사가 아닌 인간의 본성을 취하시지 않았는데(히 2:16) 이는 그가 인류를 은혜 속으로 받아들이셨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떠들고 있으나 이것은 별로 설득력이 없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부여해 주신 영예를 높이려고 우리를 천사들과 비교하며 이런 점에 있어서 우리를 천사들보다 더 귀히 여기신다고 말했다.  

만일 우리가 모세의 증언 즉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깨뜨릴 것이라(창 3:15)는 걸 세심하게 따져 본다면 이에 대한 논쟁은 완전히 해결될 것이다. 왜냐면 거기 있는 진술은 그리스도뿐만 아니라 전체 인류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승리를 얻어야만 하기에 하나님께서는 일반적 용어로 ‘여자의 후손’이 마귀를 이길 것을 선언하셨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인류에게서 나셔야만 했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하와에게 이 말씀을 하신 것은 그녀로 절망에 빠지지 않고 소망을 갖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2. 그리스도는 인간 혈통과 참 인간성 소유

(3) 동정녀 마리아를 통한 그리스도의 혈통 : 불합리성이 드러남

우리의 대적자들은 그리스도가 아브라함의 씨요 다윗의 허리에서 난 열매라는 증언들을 어리석고 사악하게 풍유(諷諭)로 얽어맨다. 만일 ‘씨’라는 단어가 풍유적으로 사용된 것이라면 바울은 아브라함의 자손들 가운데서 구속자들은 많이 있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 한 분뿐이라고 분명하면서도 솔직하게 말했을 때(갈 3:16) 이 점에 대해 계속 침묵을 지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리신 것은 다만 그가 약속되었다가 마침내 자신의 때가 되어 나타나셨기 때문이라고(롬 1:3) 주장하는데 그것은 한낱 허튼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면서 곧바로 ‘육신으로는’이라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그는 분명히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을 지칭하는 것임을 보여 준다.

그리하여 로마서 9장에서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나서 별도로 ‘육신으로 하면’ 유대인의 후손이라고 단언을 했다.(롬 9:5) 

그런데 만일 그가 참으로 ‘다윗의 씨’로 태어나지 않으셨다면 그를 ‘태중의 아이’라고 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 아닌가?.(참고. 눅 1:42) 그리고 “네 몸의 소생을 네 왕위에 둘지라.”(참고. 시 132:11, 삼하 7:12, 행 2:30)는 이 약속은 어떻게 된 것인가?    

그런데 그들은 마태복음에 있는 그리스도의 족보에 대해서도 궤변적인 논리를 펴고 있다. 마태는 마리아가 아닌 요셉의 조상들을 열거했다.(마 1:16) 마태는 당시에 잘 알려진 일을 언급했기 때문에 요셉이 다윗의 씨에서 나왔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마리아가 요셉과 같은 가문에서 나왔다는 것은 너무나도 분명했기 때문이다.

누가는 이 사실에 대해 더욱 강조하면서 그리스도가 마련하신 구원은 모든 인류에게 공통적임을 가르쳤다. 왜냐면 구원의 창시자이신 그리스도는 우리 모두의 공통적인 조상인 아담에게서 태어나셨기 때문이다.(눅 3:38) 

그리스도께서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셔야만 그가 다윗의 자손이시라는 사실을 족보를 통해 추측할 수 있다는 걸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신(新) 마르키온파는 자신들의 오류를 감추기 위해 – 즉 그리스도께서는 무(無)로부터 그의 몸을 취하셨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 여자에게는 ‘씨가 없다’고 거만하게 주장한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자연의 원리까지 뒤집어 버리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신학적인 문제는 아니며 또한 그들이 제시하는 이유도 너무 하찮은 것이어서 별 어려움 없이 반박될 수 있다. 따라서 나는 철학과 의학에 속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으려고 한다. 단지 그들이 성경을 인용하여 반론을 제기하는 것에 대해 반박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들에 의하면 아론과 여호야다는 유다 지파에서 아내를 택했는데(출 6:23, 대하 22:11) 만일 여자들이 ‘출생의 씨’를 가지고 있다면 지파들 사이를 구분하는 것은 매우 혼란스러웠을 것이라고 한다. 이 해결책은 모든 족보에도 폭넓게 적용된다. 성경에서 사람들의 이름을 열거할 때는 종종 남자들의 이름만 기록되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여자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해야만 하는가?

아니다. 여자들이 ‘남자들’이라는 말 속에 포함된다는 것은 어린아이들도 알고 있다! 여자들이 남편들에게 자녀를 낳아준다고 말하는 것은 가족의 성씨(姓氏)는 언제나 남자들 성(姓)이 사용되기 때문이다. 자녀들은 그 아버지의 지위에 따라 존귀하게 혹은 비천하게 간주가 된다는 사실에서 남성의 우위성이 드러난다.

그러나 법률가들은 노예인 경우는 그와 반대로 자손은 태(胎)를 따른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사실에 근거하여 우리는 어머니의 씨에서 자손이 생겨난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면 어머니들을 ‘생산자들’이라고 부르는 것이 오랫동안 여러 국가의 공통적인 습관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법과도 일치하는데 만일 그렇지 않다면 외삼촌과 그 조카딸을 근친 관계로 보고 결혼을 금지하는 것이 잘못된 일이 되고 말 것이다. 또 아버지만 다르고 어머니는 같은 남매가 결혼하는 것도 정당한 게 됐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자에게 수동적 힘이 주어진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남자나 여자에게 똑같이 수동적 힘이 주어진다고 대답하고 싶다. 왜냐면 그리스도는 여자에 의해 나시지 않고 여자에게서 나셨다고 했기 때문이다.(갈 4:4) 

그런데 그 부류 중 어떤 자는 염치없이 악의적으로 묻기를 “그러면 우리가 말하고 있는 것이 처녀의 월경 씨에서 생겨났다는 뜻이냐?”라고 한다. 오히려 나는 그들에게 “그렇다면 그리스도가 그 어머니의 피와 결합 되지 않았느냐?”라고 되물을 것이며 그들은 이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마태의 말에서 쉽사리 추론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는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으므로 그녀의 씨에서 생산되신 것이며 이것은 보아스가 라합에게서 태어났다고 말하는 것(마 1:5)과 비슷한 출생을 의미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태는 여기에서 동정녀를 그리스도께서 나온 통로로 묘사하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그녀를 통해 다윗의 후손에게서 태어나셨다고 진술함으로써 이 놀라운 출생 방법을 보통의 방법과 구별했다. 이삭은 아브라함에게서 솔로몬은 다윗에게서 그리고 요셉은 야곱에게서 난 것과 같은 방식으로 그리스도께서도 그의 어머니의 씨에서 나셨다고 언급되었다. 왜냐면 복음서 기자는 자신의 말들을 그렇게 배열했기 때문이다.

그의 목적은 그리스도께서 다윗에게서 기원이 되셨다는 것을 입증하는 데 있었으므로 그는 이 한 가지 사실 즉 그리스도는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다는 것에 만족했다. 이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마태는 마리아가 요셉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것으로 취급했음이 분명하다.

(4) 죄가 없으신 참사람 그러나 영원하신 하나님!

그들은 여러 가지 어리석은 말들로 우리를 내리누르려고 하지만 그것은 모든 유치한 훼방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만일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에게서 나셨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께 수치스럽고 불명예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왜냐면 아담의 후손은 모두 예외 없이 죄 아래 놓여 있다는 공통적인 규칙에서 그리스도만이 제외될 수 없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바울이 쓴 비교를 읽어보면 이 난제는 쉽게 제거된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 그와 같이 한 사람의 의로 말미암아 은혜가 넘쳤느니라.”(롬 5:12,18,15, 칼빈 의역) 바울의 다른 비교도 이와 일치한다.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고전 15:47) 사도는 또 다른 구절에서도 같은 사실을 말했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요구를 이루게 하시려고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롬 8:3,4)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같이 사도는 그리스도와 보통 사람을 분명히 구별하여 그리스도는 참사람으로 허물과 부패가 없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유치하게 지껄이기를 “만일 그리스도께서 아무런 오점도 없고 성령의 은밀한 역사를 통해 마리아의 씨에서 태어나셨다면 여자의 씨는 불결하지 않고 오직 남자의 씨만 불결한 것이 냐?”라고 반박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아무런 오점도 없으셨다고 한 것은 남자와 동침하지 않은 그의 어머니에게서 태어나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성령에 의해 거룩하게 되어 아담의 타락이 있기 전에 있었을 그러한 순수하고 더럽혀지지 않은 상태로 출생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 확실한 사실로 남아 있다. 즉 성경이 그리스도의 순결(純潔)에 대해 우리의 주의를 촉구할 때는 언제든지 그의 참된 인성에 대해 하는 말로 이해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왜냐면 하나님은 순수하시다고 하는 말은 우리가 굳이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또 요한복음 17장에서 말하고 있는 성화(聖化)도 신성(神性)에 대해 하는 말이 아니다.(요 17:19) 물른 그 어떤 오염도 그리스도에게 미치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아담의 씨가 이중적이라고 상상하지는 않는다. 왜냐면 사람의 출생은 그 자체가 불결하거나 사악한 것이 아니고 단지 타락으로부터 비롯된 우발적인 특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완전함을 회복하셔야 할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공통적인 부패를 면하셨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들은 또한 만일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면 그는 세상적인 몸이라는 좁은 감옥 안에 갇힌 것이라는 어리석은 추측을 우리 앞에 제시한다. 그러나 이것은 경솔한 행동에 지나지 않는다. 측량할 수 없는 본질을 지닌 말씀이 인간의 본성과 연합하여 한 인격이 되셨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가 그 안에 갇혀 있다고 상상하지는 않는다.

여기에 놀라운 일이 있다. 즉 하나님의 아들은 하늘로부터 내려오셨으나 하늘을 떠나지 않으시고 동정녀의 태중에서 태어나시고 이 땅 위에서 사시고 십자가 위에 달리시기를 원하셨다. 그렇지만 그는 계속 태초부터 행하셨던 것처럼 연제나 끈임이 없이 세상을 가득 채우셨다.(*) 

글쓴이 / 존 칼빈(John Calvin, 1509-1564), 출처 : ‘기독교강요(최종판)’ 존 칼빈 지음, 고영민 옮김 (서울: 기독교문사), 2012. 제2권 제12장, 제13장. pp. 395-422. ㈜ 본지 편집 편의을 따라 본문의 미주와 원어는 모두 생략했음(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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