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2)
PART Ⅱ
바빙크의 ‘개혁교의학 개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성경에 나타나는바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에 대해 증거 한 증거는 사도들의 설교를 통해서 발전되고 확증된다. ‘예수’라는 이름을 지닌 사람이 ‘그리스도’요 아버지의 독생자라는 고백은 우리의 경험과 우리의 모든 사고와 직접 상충이 되며 특히 우리 마음의 모든 성향과 모순되는 것이어서 성령의 깨닫고 납득하게 하시는 도움이 없이는 그 누구도 전심으로 바르게 받아들일 수가 없다.
모든 사람은 본성적으로 이 고백을 대적한다. 왜냐면 그런 고백은 사람이 자연스럽게 납득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라 고백할 수가 없고, 성령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도 예수를 저주받을 자라고 할 수가 없다.(고전 12:3) 오직 성령으로 말미암아서만 그를 구주와 왕으로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임하셔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친히 고백하시나 그는 그것으로 그친 게 아니라 그 고백이 세상에 전파되고 교회가 그 고백을 받아들이고 믿도록 계속 보살피시는 것이다. 그는 사도들을 부르사 그들을 가르치셨고 그들을 그의 말씀과 행적의 증인으로 또 그의 죽으심과 부활의 증인으로 삼으셨다.
그는 그들에게 성령을 보내셨고 성령은 그들로 예수께서 그리스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고백하도록 하셨고(마 16:16) 훗날 오순절 이후부터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그들의 눈으로 보고 듣고 손으로 만진 바를 전하는 전도자들로 사역하게 하셨다.(요일 1:1) 사도들은 사실 실질적인 증인들이 아니었다. 아버지께로서 오시는 진리의 영이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무오(無誤)하고 전능한 본래의 증인이시며 사도들은 오직 성령 안에서 성령으로 말미암는 증인들인 것이다.(요 15:26, 행 5:32)
그리고 바로 그 동일한 진리의 성령께서 사도들의 증언을 수단으로 모든 시대의 교회로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요 6:68,69)라고 고백하게 하시며 또한 그 고백 속에 교회를 보존하시는 것이다.
사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의 생애의 사건들을 정규적인 순서대로 기술(記述)하면서 대개는 아무런 단서가 없이 그냥 예수라는 이름으로만 그를 지칭하고 있다. 그들은 예수께서 베들레헴에서 나셨고, 예수께서 광야로 이끌림을 받으셨고,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셨다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팔레스타인에서 사셨고 죽으신 그 역사적인 예수가 그들의 전파(傳播) 대상인 것이다.
그리고 사도들의 서신에서도 몇 차례 예수를 그냥 그 역사적인 이름으로 지칭하는 것을 보게 된다. 예로서 바울은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라 할 수가 없다.”라고 말다.(고전 12:3) 요한은 “누구든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났다.”고 증언한다.(요일 1:5, 또 2:22, 4:20을 비교하라) 그리고 계시록에서는 예수의 믿음에 대해, 예수의 증인들과 증언에 대해 읽을 수 있다.(계 14:12, 17:6, 19:10, 20:4)
그러나 사도들의 서신서에서는 아무런 단서 없이 그냥 ‘예수’라는 이름이 쓰이는 예는 매우 드물다. 그 이름은 보통 ‘주’,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등과 연결되어 나타나며, 대개 ‘씨’, ‘주’, ‘예수 그리스도’가 그 완전한 호칭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예수’라는 이름이 홀로 사용되든 아니면 다른 명칭들과 연결되어 사용되든 간에 그것이 베들레헴에서 나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역사적 인물을 지칭하는 것이라는 의미가 언제나 거기에 담겨 있는 것이다.
신약 성경 전체는 – 복음서는 물론 서신서까지도 – 역사적 사건들의 기초 위에 서 있다. 그리스도라는 인물은 과거 많은 이들의 주장과 오늘날 사람들의 주장처럼 하나의 관념(觀念)도 아니요 인간 정신의 어떤 이상(理想)도 아니며 특정한 시기에 ‘예수’라는 사람으로 자기 자신을 드러내신 실제적인 역사적 인물인 것이다.
또 예수님 생애의 갖가지 사건들이 서신서의 배경에 스며들어 있다. 서신서들은 복음서와는 다른 목적으로 기록되었다. 그것들은 예수님 생애의 역사를 연대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생애가 인류의 구원을 위해 갖는 의의(意義)를 지적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도는 예수님 그 자신과 그의 생애를 잘 알고 있고, 그의 말씀과 행위를 친숙하게 접하였고, 그런 그들이 우리에게 이 예수야말로 그리스도시오 하나님 우편으로 올리셔서 회개와 죄 사함을 주시는 분이심을 보여 주는 것이다.(행 2:36, 5:31) 그러므로 사도들의 서신에서 예수님의 생애의 사건들이 자주 언급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들은 청중들과 독자들의 눈앞에 그리스도를 그려준다.(갈 3:1)
그들은 세례 요한이 그의 사자(使者)요 선구자였고(행 13:25, 19:4), 예수께서 유다 지파 다윗 혈통에서 나오셨으며(롬 1:3, 계 5:5, 22:16), 여자에게서 나셨고 (갈 4:4), 난지 팔일만에 할례받으셨고(롬 15:8), 나사렛에서 자라나셨으며(행 2:22, 3:6) 또한 그에게 형제들이 있다는 것(고전 9:5, 갈 1:19) 등을 강조한다. 그들은 예수께서 죄가 없으시며(고후 5:21, 히 7:26, 벧전 1:11, 2:22, 요일 3:5), 그가 친히 우리의 본이 되셨고(고전 11:1, 벧전 2:21) 또한 그가 우리에게 권위 있는 말씀을 주셨다는 것들을 말한다.(행 20:35, 고전 7:10-12)
그러나 우리에게 의미가 깊은 것은 특히 그의 죽음이다. 그래서 십자가는 사도들 설교에서 중심을 이루고 있다. 자신이 택하신 열두제자 중 하나에게 배신당하셨고(고전 11:23, 15:5), 이 세상의 관원들에게서 영광의 주로 인정받지 못하여(고전 2:8) 유대인들에게 죽임을 당하셨고(행 4:10, 5:30, 살전 2:15), 저주받은 자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갈 3:13, 골 2:14)
그러나 그가 겟세마네와 골고다에서 크나큰 고난을 당하셨으나(빌 2:6, 히 5:7,8, 12:2, 13:12) 그는 자신의 피를 쏟아부으심으로써 화목(和睦)과 영원한 의(義)를 이루셨고(롬 3:25, 5:9, 골 1:20)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다시 살리사 그의 오른편에 앉히시고, 그를 주와 그리스도요 모든 민족의 주권자요 구주로 삼으셨다.(행 2:32,33,36, 5:30,31, 롬 8:34, 고전 15:20, 빌 2:9 등)
사도들이 기독교의 역사적 사실들을 부인하거나 무시하거나 소홀히 한 게 아니고 오히려 그 역사적 사실들을 충만히 존귀하게 여겼고 그 영적 의미를 꿰뚫어 알았다는 사실은 이 몇 가지 자료만으로도 충분히 입증되고도 남는다.
그들에게서는 ‘구원(救援) 사건’과 ‘구원의 말씀’ 사이에 그 어떠한 분리나 모순의 흔적도 찾아볼 수가 없다. 과거에 그런 모순을 입증하려고 여러 사람이 애를 썼지만 모두 성공하지 못했다. ‘구원 사건’은 ‘구원의 말씀’이 현실이 된 것이요, ‘구원의 말씀’ 속에서 ‘구원 사건’이 그 진정한 구체적인 형식을 취하며, 따라서 ‘구원의 말씀’은 ‘구원 사건’에 대한 조명(照明)이요 해석(解釋)인 것이다.
이에 대해서 조금 의심이 남아 있다 할지라도 사도들이 그들의 시대에 겪은 싸움을 통해 그것이 완전히 제거된다. 주 후 2세기나 3세기 혹은 그 이후의 시대만이 아니라 사도들의 시대에도 이미 특정한 사람들(이단들)이 나타나서 기독교의 사실들을 그저 부수적이며 일시적인 중요성 밖에는 지니지 못하는 것들로 간주하거나 아예 그것들을 완전히 무시하고 또한 관념이 주된 것이라거나 혹은 관념만으로 족하다는 식의 가르침을 퍼뜨린 예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육체적으로 무덤에서 일어났거나 일어나지 않았거나 무엇이 달라지느냐는 식으로 주장했다. 그리스도가 영으로 살아 있기만 하다면 우리의 구원이 충족히 확실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 점에 대해서 매우 달리 생각하였고 고린도전서 15장에서 그는 부활의 실재성과 의의에 대해 대단히 명확하게 증거하고 있다. 그는 성경대로 그리스도를 전파했다. 곧 아버지의 경륜(經綸)에 따라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시고 다시 살아나시며, 부활 후에 여러 제자에게 보이셨으며, 또한 그의 부활이 우리 구원의 기초요 보증이 되는 그런 그리스도를 전파한 것이다.
그리고 요한은 자신이 눈으로 보았고 손으로 만진 바 된 생명의 말씀을 선포한다는 사실을 더욱더 강조하여 진술하고 있다.(요일 1:1-3) 적그리스도는 그 ‘말씀의 성육신’을 부인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고백은 그 말씀이 역사 속에 육체로 오셨고 하나님의 아들이 물과 피로 오셨음을 믿는 데 있다.(요 1:14, 요일 3:2,3, 5:6)
서신서와 복음서에 나타나는 사도들의 설교 전체는 – 그러므로 신약 전체는 – 마리아에게 나셔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주장으로 귀결된다.(요 20:31, 요일 2:22, 4:15, 5:5)
여기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사도들 설교의 내용과 목적과 관련하여 아무런 단서 없이 그냥 ‘예수’라는 이름만을 사용하는 예가 서신서에서 매우 드물다는 점이다. 사도들은 보통 ‘예수 그리스도’나 ‘그리스도 예수’ 혹은 좀 더 충실하게 ‘주 예수 그리스도’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심지어 연대기적인 묘사를 통해서 주로 예수님에 대해서 서술하는 복음서 기자들조차도 처음 시작 부분이나 혹은 중요한 전환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완전한 이름을 사용하기도 한다.(마 1:1,18, 16:20, 막 1:1, 요 1:17, 17:3)
그들은 자기들이 쓰고 있는 그 복음의 주인이신 분이 과연 누구신가를 시사하는 방식으로 그런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행전과 서신서에서는 이런 용법이 더 확연하게 사용된다. 사도들은 그저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하나의 인간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그리스도’와 ‘주(主)’라는 용어를 첨가하여 그 사람(예수)이 과연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그들 자신의 인식을 표현하고 있다.
그들은 복음 곧 하나님의 그리스도께서 예수라는 사람 속에서 이 땅에 나타나셨다는 사실을 선포한 설교자들이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지내는 동안 점차 그를 배워 그렇게 알았다. 그리고 특히 가이사랴 빌립보에서의 그 중요한 시각 이후 “그가 누구신가?”에 대하여 하나의 서광이 비쳐왔고 그들은 모두 베드로와 함께 그가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 아들이심을 고백했다.(마 16:16)
예수께서는 이렇게 그들에게 자기 자신을 계시(啓示)하셨다. 처음에는 인자(人子, son of man)라는 이름으로 다소 감추어진 상태로 계시하셨으나 그의 생애의 마지막이 다가올수록 점점 더 분명하고도 명확하게 계시하신 것이다. 대제사장의 기도에서 그는 자기 자신을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지칭하셨다.(요 17:3)
그는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로 제시하신 것 때문에 유대인의 법정에서 신성모독의 죄명을 쓰시고 정죄를 받아 사형 언도(言渡) 받았다.(마 26:63) 그의 십자가 위의 명패에는 ‘유대인의 왕 나사렛 예수’라고 씌여졌다.(마 27:37, 요 19:19) 제자들은 이처럼 자신이 ‘메시아’라는 예수님 주장과 그에게 다가오고 있는 고난과 죽음을 도저히 소화할 수 없었던 게 사실이다.(마 16:22)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그리고 부활 이후에 그들은 십자가의 필연성과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이제 그들은 하나님이 부활을 통해서 유대인들이 이방인과 합세하여 죽인 ‘이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고 그를 높이 올리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행 2:36, 5:31)
그렇다고 해서 부활 이전에는 예수께서 아직 ‘그리스도’와 ‘주’가 아니셨고 부활 이후에 비로소 그렇게 되셨다는 뜻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전부터 이미 그리스도로 자신을 선포하셨고 그때 이미 제자들도 그를 그리스도로 시인하고 고백을 했다.(마 16:16)
그러나 부활 이전에는 그가 메시아이셨으나 종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자신의 위엄이 감추어진 모습으로 사람들 눈앞에 나타나셨었다. 그러나 부활 이후 그는 종의 모습을 제쳐두시고 창세 전에 그가 아버지와 함께 지니셨던 그 영광을 다시 취하셨고(요 17:5) 그리하여 그의 속에 거하는바 거룩의 영을 따라 권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신 것이다.(롬 1:3)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제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그에게 계시하신 후에는 그리스도를 육체를 따라서 알지 않는다고 힘있게 말할 수 있었다.(고후 5:16) 회개하기 전 그는 육체를 따라서만 그리스도를 알았고 그저 외모로만 그가 이 땅에서 취하셨던 종의 형체에 따라서만 그리스도를 판단했다. 그 당시 그는 아무런 영광도 없고 심지어 십자가에 달려 죽은 이 그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의 회심으로 모든 게 변화되었다. 이제 그는 외모로 외형적이고 일시적인 종의 형체를 따라 그리스도를 알고 판단하지 않고 영을 따라 그리스도께서 부활로 겉으로 드러내신바 그의 진정한 내적 모습에 따라서 그를 알고 판단하게 된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사도에 대해서도 똑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이전에도 그들이 그의 메시아적인 실체를 믿고 고백하게 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당시 그들의 마음으로는 메시아적인 실체와 그의 고난과 죽음을 도저히 조화시킬 수가 없었다. 그런데 부활이 이런 모순 같은 사실을 말끔히 해결해 주었다. 이제 그는 낮고 천한 이 땅에 강림하셨다가 모든 하늘보다 훨씬 높이 오르셔서 모든 일을 이루시는 그 동일하신 그리스도인 것이다.(엡 4:9)
그리스도에 대해 말씀할 때 사도들은 ‘죽으신 그리스도’와 ‘다시 사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와 ‘영광을 입으신 그리스도’를 동시에 생각했다. 그들은 그들이 전하는 복음을 얼마 전 팔레스타인에 사셨고 거기서 죽은 역사적 예수만 연관 짓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높이 오르사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으신 그 동일하신 예수와도 연관 짓는 것이다. 이를테면 그들은 과거와 직결되며 역사와 결부되는 수평선과 또한 하늘에 살아 계신 주님과 연결되는 수직선이 서로 만나는 지점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하나의 역사적 종교요 동시에 영원에서부터 비롯되어 현재를 사는 종교이기도 한 것이다. 예수의 제자들은 그의 역사적 이름을 따르는 예수인들(Jesuites)이 아니고 그의 직분의 이름을 따라서 그리스도인들(Christians)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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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이후 사도들은 설교에서 이처럼 특별한 입장을 취했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를 더 이상 그의 역사적인 이름으로만 지칭하지 않고 거의 언제나 그를 ‘예수 그리스도’나 ‘그리스도 예수’ 혹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등으로 지칭하게 되었다. 사실상 제자들 내부에서는 그리스도라는 명칭이 곧 그 직분을 뜻하는 의미를 상실하고 하나의 고유 명사의 의미를 두기 시작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라는 확신이 너무도 강하여 그를 그냥 그리스도로 불렀고 심지어 그 앞에 정관사를 붙이지 않고 그냥 그 이름으로만 부르기도 했다. 복음서에서도 이런 예가 여러 차례 나타난다.(마 8:2, 6,21, 15:22, 17:15 등) 그러나 사도들에게는 특히 바울에게는 이것이 하나의 원칙이 된다. 더 나아가 ‘예수와 그리스도’라는 두 이름이 서로 뒤바뀌어 사용되게 되며 특히 사도 바울의 경우는 그리스도의 메시아적 실체를 더욱 두드러지게 하고자 그렇게 사용하며 그리하여 그 이름이 ‘그리스도 예수’가 되었다.
초대교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혹은 ‘그리스도 예수’라는 이 호칭이 가장 두드러진 이름이었다. 구약에서 나타난 그 이름의 용법과 의의가 신약에서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옮겨지는 것이다. 구약에서는 ‘주’라는 이름이 계시 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이름이었다. 신약 시대에는 그 영광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났고 그리하여 이제 교회의 능력이 그의 이름 안에 있게 된 것이다.
사도들은 그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행 2:38), 말하고 가르치며(행 4:18), 앉은뱅이를 고치고(행 3:6), 죄 사함을 전했다.(행 10:43) 그러나 반대도 받고 공격도 받았다.(행 26:9) 그 이름을 고백하다가 고난도 당했다.(행 5:41) 그리고 그 이름에 호소하기도 했고(행 22:8), 그 이름을 높이기도 했다.(행 19:17)
이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교회 신앙고백의 일종의 대요(大要)였고, 교회의 믿음의 힘이요, 교회 소망의 닻이었다. 그 옛날 이스라엘이 ‘여호와’라는 이름을 영화롭게 했듯이 신약의 교회는 ‘예수그리스도’라는 이름에서 힘을 얻었다. 이 이름 속에서 ‘여호와’라는 이름이 그 충만한 계시에 이른 것이다.
신약에서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과 연결되어 나타나는 ‘주’라는 이름 역시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복음서에서는 제자들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 예수께 도움을 청하면서 여러 번 ‘주’라는 이름으로 그를 부르는 것이 나타난다. 그러한 경우 그 이름은 대개 ‘랍비’나 ‘선생’ 그 이상의 의미는 아니었다.
그러나 제자들이 이 이름을 자주 사용한 예도 나타난다.(마 14:28, 30, 26:22, 11:3, 21:15-17,21) 더욱이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의 기사들에서는 ‘예수’라는 이름이 ‘주’라는 이름과 때때로 혼용되기도 한다.(눅 1:43, 2:11, 38, 7:13,31, 10:1, 11:39, 17:6, 요 4:1, 6:23, 11:2, 20:2,13,18,25,28)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께서도 친히 그 이름을 사용하시며 자기 자신을 ‘주’라 칭하기도 하셨다.(마 7:21, 12:8,21, 22:43-45, 막 5:19, 요 13:14) 예수께서 자신을 친히 ‘주’라는 이름을 쓰실 때는 – 제자들이 그 이름을 쓸 경우도 마찬가지다 – 그저 ‘랍비’나 ‘선생’이라는 명칭에 담긴 의미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예수께 와서 도움을 청한 사람들이 ‘주’라는 이름을 무슨 의미로 사용했는지는 확실히 알 길이 없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의 의식 속에서도 교사요, 선생이요, 탁월하신 주이셨으며, 그는 서기관들의 권위를 훨씬 뛰어넘는 권위를 자기 자신에게 부여하신 것이다. 마태복음 23:1-11, 마가복음 1:22,27 등 예수께서 자신을 다른 모든 선생을 능가하는 유일한 선생으로 높이시는 구절들에서도 이미 그 정도는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예수께서 자신을 ‘안식일의 주’로 부르시며(마 12:8. 한글 개역 개정판은 ‘주인’으로 번역하고 있다.) 또 자기 자신을 ‘다윗의 자손’이요 동시에 ‘다윗의 주’라고 부르신 데에서(마 22:43-45), 그런 사실이 가장 선명하게 표현되고 있다. 이런 주장들에는 그 자신이 바로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고 그의 권능을 함께 공유하시며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는 메시라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마 21:4,5, 13:35, 24:42 이하, 25:34 이하)
주라는 이름에 이러한 깊은 의미가 배어 있게 된 것은 부분적으로는 구약의 ‘여호와’(יהוה)와 ‘아도나이’(אֲדֹנָי)라는 이름이 신약에서 주(主)를 뜻하는 헬라어 ‘퀴리오스’(Κύριος)로 번역되었고 그 단어가 그리스도께도 적용되게 된 사실에 기인한다고 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누구신지를 더 분명하게 설명해가시고 그리하여 제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계시가 어떤 것인지를 점점 더 명확하게 깨달아가면서 ‘주’라는 명칭이 점점 더 풍성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하나님에 대해 말씀하는 구약의 본문들이 신약에서 전혀 주저함 없이 그리스도께 적용되었다. 마가복음 1:3에서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라는 이사야의 본문을 세례 요한의 사역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고 그에게서 성취되는 것으로 본다. 그리스도 안에서 ‘주’(主)이신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백성에게로 임하신 것이다. 그리고 제자들은 예수를 ‘주’로 고백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자신을 계시하셨고 ‘주님’이셨다는 것을 더욱더 분명하게 표현한 것이다.
예수님의 지상 생애 동안 이런 고백은 도마에게서 그 절정에 이르렀다. 그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발 앞에 엎드려 “나의 주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다.(요 20:28) 그리하여 부활 이후에 ‘주’라는 이름은 제자들 사이에서 예수를 지칭하는 통상적인 이름이 된다.
사도행전과 서신서에서 특히 바울 서신에서 그 이름이 계속해서 나타나는 걸 보게 된다. 때로는 ‘주’라는 이름만 사용하기도 하나 대개는 다른 호칭들과 함께 ‘주 예수’, 혹은 ‘주 예수 그리스도’, 혹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 혹은 ‘우리 주요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등의 표현이 사용된다.
‘주’라는 이 이름을 사용함으로써 신자들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낮아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순종으로 주요 주권자(主權者)로 높아지셨고(행 2:35, 5:31),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며(행 2:34) 만유의 주가 되심을(행 10:36) 표현하는 것이다. 그는 우선 자기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의 주이시며(행 20:28) 더 나아가 모든 피조물의 주로서 장차 심판자로 오셔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것이다.(행 10:42, 17:31)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시요 주이신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행 2:21, 고전 1:2) ‘그리스도인’이라는 건 곧 하나님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것을 입으로 고백하고 마음으로 믿는 자라는 것을 뜻한다.(롬 10:9, 고전 12:3, 빌 2:11)
설교의 내용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가 ‘주’시라는 것이다.(고후 4:5) 기독교의 본질이 이 고백 속에 완전히 농축되어 있기에 바울의 저작에서는 ‘주’라는 이름을 거의 성부와 성령과 구별하여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고유명사처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에게는 만물의 주인이신 성부 하나님이 계시고 또한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있는 분이요, 또 그로 말미암아 한 분 성령이 계시니 이는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각양 은사를 주시는 분이시다.(고전 8:6; 12:11)
바울의 기록에서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성부’를 지칭하는데 전용되는 이름이듯이 ‘주’라는 이름은 그리스도를 지칭하는데 전용되는 이름인 것이다. 그리하여 사도의 축복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교회에 있기를 기도하고 있다.(고후 13:13) 하나님이라는 한 이름이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 안에서 스스로 해석되고 있다.(마 2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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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들의 증언대로 그리스도가 그렇게 높은 위치를 차지하신다면 온갖 신적(神的) 속성들과 사역들이 그에게 돌려진다는 것이며 심지어 신성(神性)이 그에게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것이 전혀 무리가 아니다. 성경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에게서 접하는 인물은 과연 독특한 인물이다.
한편으로 그는 분명 사람이시다. 그는 육체가 되셨고 육체로 오셨다.(요 1:14, 요일 4:2,3) 그는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을 취하셨다.(름 8:3) 그는 육신으로는 조상들에게서 나셨고(롬 9:5), 아브라함의 자손이요(갈 3:16), 유다로부터 나셨고(히 7:14),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다.(롬 1:3) 그는 여자에게서 나셨고(갈 4:4), 혈과 육에 속하셨으며(히 2:14), 영혼(마 27:50, 마 26:38)과 몸이 있으셨고(벧전 2:24), 충만하고도 참된 의미에서 사람이셨다.
그는 어린아이로서 자라셨고, 지혜와 키가 자라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셨다.(눅 2:40,52) 그는 주리셨고 목마름을 느끼셨으며, 슬퍼하셨고 기뻐하셨으며, 감동하고 분노를 발하기도 하셨다.(마 4:2, 요 11:35, 19:28 등) 그는 스스로 율법 아래 계셨고 죽기까지 율법에 복종하셨다.(갈 4:4, 빌 2:8, 히 5:8, 10:7,9) 그는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으며 무덤에 장사 지낸 바 되셨다. 그는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었고 사람들이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으셨다. 그는 멸시를 받으셨고,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艱苦)를 많이 겪었고 질고(疾苦)를 아는 분이셨다.(사 53:2,3)
그러나 그러함도 불구하고 이분은 모든 사람과는 구별되고 그들보다 높이 계시는 분이셨다. 그의 인성(人性)에 따라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되셨으며, 평생토록 온갖 시험에도 불구하고 죄가 없는 분이셨고, 죽은 후에 다시 살아나셔서 하늘로 올리신 것은 물론 자신을 낮추사 종의 형체를 지니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신 그 같은 주체가 그 같은 분이 그 같은 ‘나’가 그의 성육신과 낮아지심이 있기 훨씬 전부터 다른 존재 형식으로 이미 존재하고 계셨다.
그때 그는 하나님의 본체로 존재하셨으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시지 않았다.(빌 2:6) 부활과 승천(昇天) 시에 그는 창세 전에 아버지와 함께 지니셨던 그 영광을 다시 받으신 것뿐이다.(요 17:5) 그는 하나님 자신과 마찬가지로 영원하시며 태초(太初)에 이미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요 1:1, 요일 1:1)
그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시다.(계 22:13) 그는 편재(遍在)하시므로 땅에 두루 행하실지라도 동시에 하늘에서 아버지 품에 계시며(요 1:18, 3:13), 영화롭게 되신 후에도 그의 교회와 함께 남아 계셔서 모든 일을 이루시며(마 28:20, 엡 1:23, 4:10), 변함이 없으시고 신실하시며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시며(히 13:8), 그는 전지(全知)하셔서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시며(행 1:24, 7:59, 16:13, 롬 10:13),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분이시며.(행 1:24이 본문이 성부를 지칭하는 것이 아닐 경우) 그는 전능하셔서 모든 것이 그에게 굴복하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그에게 주어져 있는바 만왕의 왕이시다.(마 28:18, 고전 15:27, 엡 1:22, 계 1:4, 19:16)
그는 이런 모든 신적 속성들을 소유하심은 물론 신적인 사역들도 공유하신다. 성부와 성령과 더불어 그는 만물의 창조자시다.(요 1:3, 골 1:5) 그는 모든 피조물의 처음 난 자요 근본이요 머리이시다.(골 1:15, 계 3:14) 그는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만물들이 그의 안에서 그로 말미암아 계속 서 있도록 하신다.(히 1:3, 골 1:17) 또한 무엇보다도 그는 만물을 보존하시고 화목시키시고 회복시키시며 자기 자신을 머리로 하여 하나로 모으신다. 그러므로 그는 특히 세상의 구주라는 이름을 취하신다.
구약에서는 ‘구주’ 혹은 ‘구속자’라는 이름이 하나님께 적용되었으나(사 43:3,11, 45:15, 렘 14:8, 호 13:4) 신약에서는 성부는 물론 성자께서도 이 이름을 취하신다. 어떤 때는 하나님께 사용되며(딤전 1:11, 2:3, 딛 1:3, 2:10) 또 어떤 때는 그리스도께 사용된다.(딤후 1:10, 딛 1:4, 2:13, 3:6, 벧후 1:11, 2:20, 3:18) 때로는 그 명칭이 하나님을 지칭하는지 그리스도를 지칭하는지가 분명치 않을 경우도 있다.(딛 2:13, 벧후 1:1)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전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효력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 모든 사실은 성부와 성자 사이의 하나 됨(a unity)을,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하나 됨을 지적해 주는데 이런 하나 됨은 창조주와 그의 피조물 사이에는 결단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물론 유한하며 제한적이며 또한 시간 속에서 존재하기 시작한 인간의 본성을 취하셨으나 그리스도 그 자신은 성경에서 피조물 쪽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 서 계신 것이다.
그는 하나님 속성들을 지니셨고 그의 사역에 참여하신다. 그는 꼭 같은 신적 본성을 지니신 것이다. 이 점은 그리스도께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세 가지 명칭이 붙여진다는 사실에서 특별히 분명하게 표현되고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 형상이요 하나님 영광의 광채이고 그의 본체 형상이다.(고후 4:4, 골 1:15, 히 1:3)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눈에 보이게 나타나신 것이다. 고로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보는 자는 아버지를 보는 것이다.(요 14:9) 하나님이 누구시며 어떤 분이신지를 알기를 원하면 그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스도의 어떠하심이 곧 아버지의 어떠하심인 것이다.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는 하나님 말씀이다.(요 1:1, 계 19:13) 성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자신을 – 그의 지혜, 그의 뜻, 그의 속성들, 그의 전 존재를 – 완전히 표현하셨다. 그는 그리스도께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다.(요 5:26) 인류와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의 뜻을 알기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말을 들어야 한다.(마 17:5)
마지막으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혹은 요한이 아무런 다른 단서 없이 묘사하는 대로 아들이시다.(요일 2:22 이하 히 1:1,8) 그는 성부께서 기뻐하시며 사랑하시는 유일한 독생자이시다.(마 3:17, 17:5, 요 1:14, 롬 8:32, 엡 1:6, 골 1:13)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자 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한다. 그를 영접하는 자는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지기 때문이다.(요 1:12)
성경은 또한 그에게 신적인 이름을 허용함으로써 성경의 이러한 증거 위에 결정적으로 면류관을 씌워 놓는다. 도마는 그가 승천하시기 전에 이미 그를 주(主)시며 하나님으로 고백한 바 있다.(요 20:28) 요한은 그가 말씀으로서 태초(太初)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스스로 하나님이셨던 그분을 증거 하고 있다.
바울은 그가 육신으로는 조상들에게서 나셨으나 그의 본체로는 무엇보다도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심을 선포하고 있다.(롬 9:5) 히브리서는 그가 천사들보다 높이 계시며 하나님이 친히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부르시는 분이심을 진술하고 있다.(히 1:8,9) 베드로는 그를 우리의 하나님이요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라 칭하고 있다.(벧후 1:1)
마태복음 28:19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세례 명령에서나 사도들의 축복 기도에서는(고후 13:13, 벧전 1:2, 계 1:4-6) 그리스도께서 성부와 성령과 동일 선상에 서 계신다. 신격의 이름과 본체 그 속성과 사역들이 성부에게서는 물론 성자에게서도 (물론 성령에게도) 인정되고 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 – 바로 이 반석(磐石) 위에 교회가 세워져 있는 것이다.
교회는 처음부터 이처럼 전적으로 독특한 그리스도의 의(義)가 모든 신자에게 확고했다. 그들은 모두 그를 그의 가르침과 삶으로 구원과 죄 사함과 영생을 이루신 분으로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그의 오른편으로 올리신 분으로 또한 곧 다시 오셔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심판자로 고백했다. 사도들의 서신서에서 그에게 사용된 같은 이름들이 초기 기독교 저작들에서도 그에게 사용되고 있다. 초기의 기도들과 찬송들에서 그를 그런 이름들로 칭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 모두가 한 분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과 그들이 그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과 또 하나님의 사랑을 그들에게 확실히 베푸신 한 주님이 계신다는 것과 또 그들 모두로 새 생명 안에서 행하게 하시는 한 분 성령께서 계신다는 것을 분명히 인정하였다. 마태복음 28:19의 세례의 명령이 사도 시대 말기부터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는 데 이 명령이야말로 그런 확신의 보편성을 보여 주는 증거인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이 고백의 내용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온갖 종류의 견해의 차이들이 드러나게 되었다. 과거에 유대교나 이교 세계에서 교육을 받았고 또한 대부분 전혀 교육을 받지 못한 시골 교회의 회윈으로서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생각 속에 온전히 수용할 수 있는 처지가 못 되었다. 그들은 온갖 종류의 사상의 조류들이 교차하는 그런 사회 속에서 살고 있었고 그리하여 그들은 계속해서 온갖 유혹과 오류에 노출되어 있었다.
심지어 사도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도 갖가지 이단적인 교사들이 교회에 들어와 그 확고한 믿음을 뒤틀어 버리려 했던 사실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골로새에는 그리스도의 위격과 사역을 왜곡시키고 복음을 하나의 새로운 율법으로 바꾸어 버린 자들이 있었다.(골 2:3 이하, 16 이하) 고린도에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오용하여 그 어떠한 법에도 매이지 않으려 하는 일단의 자유주의자들이 일어나기도 했다.(고전 6:12, 8:1)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여 그의 인성의 순결함을 해치는 특정한 자칭 선지자라 하는 자들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기도 했다.(요일 2:18 이하 4:1 이하 5:5 이하)
속사도 시대(Post-apostolic period)에도 그런 사정이 계속되었다. 사실 주 후 2세기부터 오류와 이단들이 다양해졌고 교회에 그 세력을 골고루 퍼뜨렸다. 그리스도의 진정한 인성(人性)과 그의 초자연적 탄생과 그의 부활과 승천을 믿으면서도 그리스도의 신성(神注)을 그저 이례적으로 성령의 은사와 권세를 많이 받은 것 정도로밖에는 인식하지 않는 자들이 있었다. 그리스도에게 그의 종교적 도덕적 사명을 완수하도록 그의 세례 시에 그런 은사와 권세가 그에게 주어진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이런 운동의 추종자들은 하나님과 세상의 관계에 대한 이신론적(理神論的, deistic)이며 유대교 사고의 영향을 받은 자들이었다. 그들로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은사와 능력을 공유하는 정도 이상의 친밀한 관계는 생각조차 불가능한 것이었다. 따라서 예수님은 과연 풍성한 능력을 부여받은 분이요 종교적 천재이기는 하나 그는 여전히 사람이었고 사람으로 남아 있었다.
하편 과거 이교 세계에서 자라난 다른 사람들은 그와 달리 다신론적(多神論的)인 관념에 이끌리고 있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내적 본성대로는 모든 신적 존재들 가운데 하나요, 어떠면 그중 최고의 존재이심을 아주 잘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로서는 그런 신적이며 순결한 존재가 물질적이요 육체적인 본성을 취할 수 있었다는 것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리스도의 진정한 인성(人性)을 희생시키고 그가 이 땅에서 행하신 모습은 구약에서 천사들에 대해 자주 보도하는 것처럼 그저 일시적이요 또한 그저 겉모양일 뿐이었다는 식으로 주장했다.
이 두 가지 사조(思潮), 이 두 가지 운동이 오늘날까지도 계속되어오고 있다. 한때는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에 밀려 그의 신성(神性)이 희생당하였고 또 다른 때는 그리스도의 신성에 밀려 그의 인성이 희생당하기도 했다. 사실 때문에 관념을 희생시키거나 관념 때문에 사실을 희생시키는 극단론자들이 언제나 존재해왔다. 그들은 신성과 인성의 통일성(統一性)과 조화(調和)를 납득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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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기독교 교회는 처음부터 전혀 다른 근거 위에 서 있었고, 그리스도의 위격(位格) 안에서 하나님과 사람의 가장 친밀하며 가장 심오하다. 따라서 전적으로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연합의 교통을 고백했다. 가장 초기에는 교회의 대표자들이 때때로 이를 어색한 방식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그들은 먼저 실체에 대해 어느 정도 명확한 개념(槪念)을 형성한 후 그 개념을 명확한 언어로 표현하는 일을 위해 씨름해야 했다. 이로 인해 교회가 그 기반에서 밀려나지는 않았다. 오히려 교회는 양극단을 피하고 그리스도의 위격(位格)에 관한 사도들의 가르침을 굳게 붙잡았다.
그러나 한 위격의 존재가 신적 본성을 공유하면서도 동시에 진정한 사람이라면 그것에 대해 명확한 정의를 하고자 하는 노력이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또 그 위격의 존재가 신격과 세상에 대해 어떤 식으로 관계하는지 명확한 설명이 있어야 했다. 그런데 이런 노력을 하게 되자 오류와 이단의 모습이 또다시 명확히 드러났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하나이심 – 이는 기독교의 근본 진리이다 – 에 대해 하나님의 존재가 성부의 위격과 완전히 겹치고(coterminous) 완전히 일치함으로(coincident) 따라서 그리스도에게는 신격의 여지가 남아 있지 않게 된다는 식으로 이해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는 신격의 범위 밖으로 밀려났고 사람과 동일 선상에 위치하게 되었다.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는 점진적인 전환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했기 때문에 그들은 아리우스(Arius, 250/256-336)와 더불어 시간과 지위에 있어 그는 온 세상을 초월하셨고 존귀와 위치에 있어 온 세상보다 우월하신 분이셨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는 피조물로 남아 있게 된다. 그가 존재하지 않은 때가 있었고 그는 다른 피조물처럼 시간 속에서 하나님에 의해 존재하게 된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나님의 하나 되심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의 위격을 그에게 합당한 존귀의 위치에 올리려 하다 보면 또 다른 오류(樣態論, modalism)에 – 그 가장 두드러진 주창자인 사벨리우스(Sabellius, 3세기 인물)의 이름을 딴 오류(Sabellianism) – 빠지기가 쉽다.
그의 주장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는 신격의 존재 속에 담겨 있는 외형적인 실체들이 아니고 한 분이신 신적 존재가 역사의 과정을 따라 – 구약에서와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 동안과 오순절 이후에 – 순차적으로 자기 자신을 드러내시는 형식들이요 현현(顯現)들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거나 반대로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인하는 이 두 가지 이단들을 따르는 추종자들이 교회 역사에 줄곧 있어왔다. 소위 그로닝겐 신학(Groningen Theologie)은 본질적으로 아리우스의 가르침을 새롭게 한 것이요 또 현대신학(Modern Theology)은 처음부터 사벨리우스의 길을 따라온 것이다.
이 모든 이단을 물리치고 교회가 올바른 길을 취하는 데에는 많은 기도와 많은 갈등이 필요했고 그 각 이단이 여러 가지 양상으로 수정되고 뒤섞여졌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위대한 사람들의 – 이들은 사고력과 경건에 있어도 탁월한 사람들로서 교부(敎父, fathers of the church)들이라 불렸다 – 지도력 덕분에 교회는 사도들의 가르침에 충실한 상태로 남아 있게 되었다.
주 후 325년 니케아 공의회(First Council of Nicaea, 325)에서 교회는 가시적이고 불가시적인 만물의 창조자이시며 전능하신 한 분 ‘성부 하나님’과 성부로 말미암아 즉 하나님의 존재로부터 독생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의 하나님이시오, 빛의 빛이시오, 참 하나님의 참 하나님이시오, 지으심 받지 않고 나셨으며, 성부와 본질이 동일하시며, 하늘과 땅의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음을 받은 한 분 ‘성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믿는 믿음을 고백했다.
이러한 니케아 공의회의 결과가 지극히 의미 있는 것이긴 했으나 그것이 이단들과의 교리 논쟁을 종식 시키지는 못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니케아 신조(the Nicene Creed, 325)는 새로운 의문들과 다른 대답들이 생겨나는 기회를 제공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존재와 사람의 세계에 대해 가지신 관계가 이제 그의 위격(位格) 안에서 그가 두 가지를 공유한다는 의미로 결정되었고 따라서 그가 그 위격 안에서 하나님이요 동시에 사람이라는 것이 확립되었으나 그 한 위격 속의 이 두 가지 본성 사이의 관계의 본질의 문제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 문제에 대해서 갖가지 답변들이 제시되었다.
네스토리우스(Nestorius, 386-450)는 만일 그리스도에게 ‘두 본성’이 있었다면 거기에는 또한 ‘두 인격’이 ‘두 자아’(自我)가 있어야 했고, 그 두 인격이나 두 자아는 남녀의 결혼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그런 식의 도덕적인 결속으로만 하나가 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또 유터케스(Eutyches, 378-456)는 인격과 본성이 하나라는 전제에서 출발하여 만일 그리스도 안에 오직 한 인격이나 한 자아밖에 없다면 그 두 본성은 함께 뒤섞이고 혼합되었을 수밖에 없으며 그렇게 뒤섞임으로 말미암아 오로지 하나의 본성이 하나의 신인(神人)의 본성이 나오게 되었을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네스토리우스의 경우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본성의 구별을 유지하느라 인격의 단일성을 무시해 버렸고, 유터케스의 경우는 인격의 단일성을 유지하느라 그리스도의 본성 구별을 무시해 버린 것이다. 그러나 길고도 격렬한 논쟁 끝에 교회는 드디어 이 문제를 종결지었다.
주 후 451년 칼케돈 공의회(the Council of Chalcedon, 451)에서 교회는 이렇게 진술했다. “그리스도의 한 인격이 두 본성으로 되어 있으며, 그 두 본성은 변하지도 않고 혼합되지도 않으며(이는 유터케스 논지를 반박한 것), 분리되지도 않고 나뉘지도 않으며(이는 네스토리우스 논지를 반박한 것), 그 두 본성은 서로 병행하여 존재하며, 한 인격 속에서 하나를 이루고 있다.”
이 결정으로 말미암아 – 6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First Council of Constantinople, 681)에서 한 가지 세부적인 요점과 관련하여 확충되고 완성되는데 – 드디어 그리스도의 위격(位格)에 대한 오랜 논쟁이 종식되게 되었다. 이런 논쟁들 속에서 교회는 기독교의 본질과 기독교 신앙의 기독론의 절대적인 성격을 보존했고 그리하여 기독교 자체의 독립성을 보존한 것이다.
5
물론 니케아 신조와 칼케돈의 신앙고백이 절대적이며 무오(無吳)하다는 주장을 제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교회와 그 신학이 사용해온 위격, 본성, 본체의 단일성 등의 용어들은 성경에는 없는 것들로 오랫동안 기독교가 이 구원의 신비에 대해 성찰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들이다. 사방에서 그리고 교회 안과 밖에서 이단들이 끼어들었기 때문에 교회로서는 이러한 성찰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교회의 고백과 신학의 언어에서 사용되는 그 모든 표현과 진술들은 의도된 것이 아니라 교회가 대면한 그 구원의 신비를 해명하기 위해 오히려 그 신비를 약화하거나 부인(否認)하는 자들을 대적하여 그 신비를 순결하게 해를 받지 않은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 의도된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 되시는 말씀(요 1:1)의 성육신(成肉身)은 우리가 해결해야만 하거나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말씀 속에서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방식대로 감사하며 고백해야 하는 하나의 놀라운 실제인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이해할 때에 교회가 니케아와 칼케돈에서 확정한 그 고백은 큰 가치가 있다.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 이 두 본성의 교리를 무시하여 다른 단어들과 문구들로 대치시키려 하는 사람들이 과거에도 많았고 지금도 많다.
그들은 처음에는 “씨가 이 교리에 동의하든 하지 않든 과연 정말 달라지는 게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하며 이 인간 이성(理性)으로 이해할 수 없는 어색한 고백보다 훨씬 높고 고귀한 자리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우리가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교리부정론)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 사람들도 자기들이 받아들이는 그리스도를 묘사하기 위해서 자기들 스스로 단어들과 용어들을 도입하기 시작한다. 이처럼 우리가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기 위해서는 교리적 표현이 필요한 이런 상황을 아무도 피할 수 없다. 왜냐면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바를 소유한다고 주장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소유한다는 것이나 그와 교제를 누린다는 것이나 우리가 그의 것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그런 믿음을 입으로 고백하고 이런저런 단어나 용어나 표현이나 묘사를 사용해서 발설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교리적 신앙고백은 필연적인 것이다.
그런데 정통 교회가 고백하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두 본성의 교리를 공격하는 자들의 용어들이 도리어 그 가치나 효과 면에서 훨씬 더 빈약했으며 또한 그들이 성경이 우리에게 해명해주는 대로의 성육신의 사실을 부당하게 처리하는 경우가 오히려 더 많았다는 걸 교회 역사가 가르쳐 주고 있다.
현대에 들어서도 예를 들어 두 본성 교리를 불합리성의 극치로 여기고서 자기들의 마음속에 전혀 다른 그리스도를 그리는 자들이 많다. 그리스도를 모든 사람과 구별 짓고 그를 모든 사람 위로 높이 올려 주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그들도 부인 못 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는 이 신적인 요소를 그들은 신적인 본성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지 않고 그리스도에게 탁월하게 부여된 하나의 신적 은사 혹은 힘으로 본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에게 신적인 면과 인간적인 면이 있다고 말하기도 하고 혹은 그를 두 가지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고도 하고 혹은 그가 낮아지심과 높아지심의 두 가지 계속되는 처지에서 살았다고도 하며 혹은 그가 비록 인간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그의 나라를 세움으로써 하나님 계시의 비범하고도 완전한 통로가 되었고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가치를 그에게 부여하게 된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아무런 편견이 없이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이런 이야기들이 교회에서 제기된 언어들을 여러 가지로 수정한 것들임은 물론 동시에 모든 시대의 교회가 사도들이 고백한 증언을 기초로 하여 견지한 그리스도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제시하는 것이라는 느낌을 누구나 받을 것이다.
신적 은사와 능력은 어떤 의미에서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다. 선하고 완전한 모든 선물이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에게서 내려온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예를 들어서 선지자들이 아무리 비범한 은사를 소유했다 할지라도 그 은사 때문에 선지자들이 인간의 범위를 넘어서는 데에까지 높이 올려지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선지자와 사도들 역시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만일 자유주의자들의 말대로 그리스도께서 비범한 은사와 능력을 받으신 것에 불과하다면 그는 인간 이상의 존재일 수가 없으며 그렇게 되면 그에게서 말씀이 성육신하신 사실 같은 것은 있을 수가 없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그가 부활과 승천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존재로 높이 올려지셨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가치와 존귀를 얻게 되셨다고 주장하지만 그린 주장도 타당성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은 서로 ‘정도(程度)의 차이’가 아니라 ‘본질(本質)의 차이’로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 사이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이며 피조물은 그 존재의 본질상 절대로 창조주가 되는 법이 없고 우리 인간에게 창조주의 가치와 존귀를 지니는 법도 없다. 피조물은 절대적으로 창조주에게 의존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몇몇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위격에 관한 이런 새로운 주장들을 교회와 성경의 가르침과 비교한 후 결국 교회의 가르침이 성경의 가르침을 가장 정당하게 대하고 있다는 정직한 결론에 이르렀다는 것은 참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스도가 한 위격 속에서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사람이셨다는 기독교의 가르침은 이교도(異敎徒) 철학의 산물이 아니고 사도적 증거에 근거하는 것이다.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친히 하나님이시며(요 1:1) 하나님의 본체(本體)시오 하나님과 동등 됨을 부당히 여기지 않으셨고(빌 2:6) 친히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光彩)시요 그의 본체의 형상이신 그분이(히 1:3) 때가 차매 육체가 되시고(요 1:14) 여자에게서 나시고(갈 4:4) 자기를 낮추사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는 사실은(빌 2:7) 분명 인간 이성(理性)으로는 이해 불가한 ‘구원의 신비’가 아닐 수 없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셨고 하나님이시며 영원토록 하나님이시다. 그는 성부도 성령도 아니셨고 성자이셨으며 아버지의 사랑하시는 독생 하신 아들이셨다. 그리고 때가 차매 사람이 되신 것은 하나님의 본체도 성부도 성령도 아니었고 성자 자신이었다. 그리고 그가 사람이 되사 사람으로서 이 땅에 다니실 때 심지어 겟세마네에서 고뇌(苦惱)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실 때도 그는 여전히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독생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물론 사도의 말처럼 하나님의 본체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자기를 비우신 건 사실이다.(빌 2:6,7) 그러나 몇몇 사람들의 생각처럼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실 때 낮아지심의 상태에서 그의 신성을 스스로 완전히 또는 부분적으로 버리시고 그의 신적 속성들을 옆으로 제쳐두셨다가 후에 높아지심의 상태에서 점차 그것들을 다시 취하셨다는 식으로 본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왜냐면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부인(否認)하실 수 없고(딤후 2:13) 또 그 자신이 불변(不變)하시는 분으로서 모든 생성(生成)과 변화를 무한히 초월하여 계시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 아니다. 그가 본래 자신의 모습이 아니었던 모습이셨을 때도 그는 여전히 그의 모습 그대로 아버지의 독생자로 남아 계신 것이다.
사도의 그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을 무명의 존재로(of no reputation) 만드사 하나님의 본체이신 그가 사람과 종(從)의 형체를 취하셨다는 의미이다. 이를 다음과 같이 단순하게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성육신 이전 그리스도는 본체와 속성에 있어서 아버지와 동등하셨을 뿐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형체를 지니셨다. 그는 하나님처럼 보였고 그의 영광의 광채요 그의 본체의 형상이었다. 만일 누구든지 그를 볼 수 있었다면 곧바로 그를 하나님으로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성육신에서 이런 상태가 바뀌었다. 그때 그가 사람의 모양과 종의 형체를 취하신 것이다. 이제는 누가 그를 보든지 믿음의 눈으로 보지 않는 이상 그에게서 아버지의 독생자를 볼 수가 없게 되었다. 그가 자신의 신적인 모양과 광채가 가려졌기 때문이다. 그는 종의 형체 뒤에 자신의 신성을 감추셨고 이 땅에서 우리와 똑같이 되셨고 우리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둘째로 성육신은 그 자신의 모습 그대로 남아 계셨던 그가 또한 그 이전의 모습이 아닌 모습이 되셨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 시간 속의 어느 시점에 역사의 어느 구체적인 순간에 즉 성령께서 마리아에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그녀를 덮으신 그 시각에(눅 1:35) 그가 그렇게 되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성육신은 그 이전에 예비 되었던 일이었다. 성육신을 올바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성자의 발생(發生, generation)과 세상의 창조가 말씀의 성육신을 예비하는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발생과 창조에 이미 성육신이 포함되어 있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성경은 언제나 성자의 성육신을 죄로부터 구속하는 일과 구원을 이루는 일과 연관 짓기 때문이다.(마 1:21, 요 3:16, 롬 8:3, 갈 4:4,5)
그러나 발생과 창조는 특히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신 사실은 하나님이 – 절대적인 의미에서는 신적 존재 내부에서 그리고 상대적인 의미에서는 그 외부에서도 – 공유(共有)할 수 있는(sharable) 분이라는 걸 가르쳐 준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의 성육신 역시 가능성이 전혀 없어지고 만다.
하나님의 성육신을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자는 동시에 세상의 창조와 성자의 발생도 부인하게 된다. 그리고 창조와 발생을 인정하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이 인간 본성을 입고 성육신하신 사실을 원리적으로 반대할 수가 없는 것이다. 좀 더 깊이 보면 말씀의 성육신은 타락 직후 시작되어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계속되었고 마리아의 축복에서 그 절정에 이르는 계시 속에서 예비 되었다 할 것이다.
구약 전체는 하나님께서 때가 찰 때 사람 안에서 영구히 거하시기 위해 사람에게 끊임없이 더 가까이 나아가시는 역사인 것이다. 마리아에게서 인성을 취하신 하나님 아들이 이미 영원 전부터 아들의 위격으로 존재하셨었으므로 마리아의 몸에 그가 잉태되신 일은 육체의 뜻이나 사람의 뜻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덮으시는 역사로 말미암아 된 것이다.
성육신이 성육신 이전의 계시와 연관되며 그 계시를 완성 시켜 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성육신 자체는 자연의 산물도 인간의 산물도 아니다. 그 일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이요 최고의 계시인 것이다.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이 아버지요 또한 마리아를 능력으로 덮으신 분이 성령이듯이 우리의 혈과 육을 취하신 건 바로 아들 자신이었다.(히 2:14) 즉 성육신은 아들 자신 일이었다. 그 일에 관해 그는 수동적이 아니었고 능동적으로 그 자신 뜻과 그 자신의 행위로 육체가 되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육체의 뜻과 사람의 뜻을 제쳐두시고 성령의 능력의 덮으심을 통하여 마리아의 태에 자기 자신을 위한 인성을 예비하신 것이다. 그 인성은 그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인성은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지니고 임하신 것도 아니요 말하자면 외부로부터 마리아의 몸속에 집어넣으신 것도 아니다.
재새례파들(Anabaptists)은 그리스도 안의 인성이 무죄(無罪)하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그렇게 가르친다. 그러나 그런 입장은 사실 고대의 영지주의(靈知主義, gnostim)의 예를 좇아 육체와 물질 그 자체가 죄악이라는 이원론 사상에 근거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성육신에 있어도 창조의 선하심과 물질의 신적 기원을 굳게 가르치고 있다.
그리스도는 마리아에게서(from Mary) 그의 인성을 취하셨다.(마 1:20, 눅 2:7, 갈 4:4) 육체에 관한 한 그는 다윗과 조상들에게서 나셨다.(행 2:30, 롬 1:3, 9:5) 그러므로 그에게 있는 이 본성은 참되고도 완전한 인간 본성이요 우리와 모든 점에서 같되 다만 죄가 없을 뿐이다.(히 2:14,17, 4:15)
그리스도께는 그 어떠한 인간적인 것도 낯설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걸 부인(否認)하는 것은 바로 적(敵) 그리스도의 시초인 것이다.(요일 2:22) 그리스도의 인성이 마리아에게서 잉태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 인성은 그 전이나 그 이후나 결코 그리스도와 분리된 상태로 존재하지 않았다.
마리아에게 잉태된 씨와 그녀에게서 난 어린아이가 처음에는 독자적으로 자라나 사람이 한 인격이 한 자아가 되었고 그다음 그리스도께서 그를 취하셔서 자기와 하나가 되게 하신 것도 아니다. 이런 이단을 지지하는 자들이 초기에도 나중에도 있었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에 대해서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다. 마리아의 몸에 잉태된 거룩한 존재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셨고 처음부터 그 이름을 지니셨다.(눅 1:35) 말씀이 후에 인간을 자기에게 취한 것이 아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이다.(요 1:14)
그러므로 기독교 교회는 그 고백 중에 말하기를 성자가 인간의 인격(人格, human person)을 취하신 게 아니라 인간의 본성(本性, human nature)을 취한 것이라고 한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두 본성과 한 인격이 유지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는 – 이것은 이와 관련해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세 번째 논지이기도 한데 – 그리스도께서 말씀이셨고 그가 육체가 되셨으며 육체를 따라서는 조상들에게서 나셨으나 그의 본체에 따라서는 그는 영원토록 찬양받으실 하나님이심을 성경이 지극히 분명하게 진술하고 있지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여전히 그 그리스도 안에서 한 인격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탄생한 아기는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라는 이름을 취한다.(사 9:6) 다윗의 자손(子孫)은 동시에 다윗의 주(主)시다. 내려오신(성육신) 자가 바로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승천하신) 자이다.(엡 4:10) 육체에 따라서 조상들에게 나신 그가 바로 그의 본질에 따라서는 만물 위에 계셔서 영원토록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다.(롬 9:5)
땅에서 두루 다니실지라도 그는 하늘에 계셨고 거기에 남아 계셨으며 아버지의 품 안에 계셨다.(요 1:18, 3:13) 시간 속에서 나셨고 시간 속에서 사셨으나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브라함보다 먼저 계신 분이셨다.(롬 8:58) 신성의 충만하심이 그의 속에 육체로 거하시는 것이다.(골 2:9) 요컨대 신적이며 인간적인 속성들과 사역들이, 영원과 시간이 편재하심과 제한되심이, 창조자의 전능함과 피조물의 연약함이 동일한 한 주체와 동일한 한 분에게 돌려지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리스도 안의 두 본성의 연합은 두 인격의 연합일 수가 없다. 두 인격이 사랑으로 말미암아 서로 무한히 친밀하게 연합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들이 한 인격이나 한 자아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사실상 사랑이란 두 인격을 시사하며 오로지 신비한 윤리적 연합만을 가져올 뿐이다.
만일 하나님의 아들과 인간 본성의 연합이 이런 성격의 것이라면 그 연합은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들의 특히 하나님과 그의 자녀들의 연합과 본질 면에서 차이가 없고 다만 정도 면에서만 차이가 있다 말할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유일무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계신다. 그는 모종의 도덕적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사람과 연합시키거나 기존의 인간적인 존재를 자기 교제 속으로 취하신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하여 마리아의 몸속에 인간 본성을 예비하사 자신이 인간이 되셨고 종이 되신 것이다.
인간이 어떤 한 삶의 처지에서 다른 삶의 처지로 옮아갈 수 있고 동시에 혹은 연이어서 두 가지 서로 다른 삶의 처지에서 살 수 있는 것처럼 비유컨대 하나님의 형체로 계셨던 그리스도께서도 종의 형체로 이 땅에서 활동하신 것이다.
그의 성육신 안에서 이루어진 연합은 두 인격 사이의 도덕적인 연합이 아니라 한 인격 내에서 두 본성의 연합이었다. 남녀가 아무리 사랑으로 친밀하게 서로 연합되어 있다 해도 그들은 여전히 두 인격체로 남아 있다. 하나님과 사람도 아무리 지극히 친밀한 사랑으로 연합된다할 지라도 본질상 서로 다른 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친히 하나님이셨던 말씀이나 사람이나 똑같이 동일한 주체인 것이다. 이것은 유일무이하며 유례가 없고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인 것이다. 그리고 모든 지혜의 시작과 끝이 바로 이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이러한 연합 속에서 그리스도는 그의 인격의 단일성 가운데서 두 본성에 합당한 모든 속성과 능력을 발취하신다.
어떤 이들은 두 본성의 연합을 이보다 더 강하고 긴밀하게 하고자 그 두 본성이 성육신 직후에 하나의 신인적(神人的) 본성으로 혼합되었다거나 혹은 신성이 그 특징들을 스스로 버리고 인성의 한계로 자신을 낮추었다거나 혹은 인성이 그 속성을 버리고 신성의 속성(그 속성 전부가 여기에 해당이 되든 혹은 그중 전능하심, 편재하심, 전지하심, 생명을 주시는 능력 등만 해당이 되든지 간에)을 받아들였다는 식으로 가르치기도 한다.
그러나 개혁주의의 신앙고백은 그처럼 두 본성이 하나로 혼합된다는 가르침이나 본성끼리 속성들을 교류시킨다는 가르침을 언제나 반박해왔고 거부해왔다. 두 본성을 그렇게 보면 결국 그 둘이 서로 뒤섞이고 혼합되는 결과가 발생하며 그렇게 되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를 부인하는 범신론적인 사고가 나타나고 마는 것이다.
그 두 본성과 그 속성들과 능력들 사이에 긴밀한 관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관계는 인격의 단일성 속에서 생겨나는 그런 관계다. 그보다 더 강하고 더 깊고 더 긴밀한 연합은 도저히 생각조차 불가능하다. 말하자면 – 이는 그저 비유로 설명하기 위한 것이지 둘을 동일시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 영혼과 육체가 한 인격 속에 연합하여 있으나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본질과 속성에서 서로 구별되는 것처럼 그리스도에게서도 동일한 인격이 두 본성의 주체인 것이다.
영혼과 육체가 서로 다르다는 것이 한 인간 속에서 나타나는 그 둘의 내적인 연합의 전제요 조건인 것처럼 신성과 인성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는 그 두 본성의 연합의 조건이요 근거인 것이다. 두 본성을 하나로 혼합시키고 속성을 서로 교류시키는 것은 더 친밀한 관계를 이루는 게 아니라 서로 뒤섞고 혼합시켜 사실상 그리스도 안에 있는 충만을 무력하게 만드는 것이다.
신성 일부가 제거되든지 혹은 인성 일부가 제거되든지 아니면 두 본성 모두 약화 되어 그리스도 안에 신성의 충만(充滿)이 육체로 거하신다는 성경의 말씀(골 2:9, 1:19)이 흐려지고 마는 것이다. 두 본성이 서로 구별되고 그 속성들을 서로 교류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격을 섬기도록 사용하여야만 그런 충만이 유지되는 것이다.
그래야만 언제나 부요하신 동일한 그리스도께서 낮아지심에서나 높아지심에서나 동일하게 두 본성의 속성들과 능력들을 발취하시며 그리하여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사역과 구별되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의 사역과는 구별되는바 중보자의 사역으로서 세계 역사상 유일무이한 위치를 차지하는 그 사역들을 행하실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상과 인성 이 두 본성의 교리를 통해서 우리는 성경이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해 말씀하는 모든 내용과 또한 성경이 그에게 돌리는 모든 내용을 정당하게 취급하는 이점을 얻게 된다.
그렇게 되면 한편으로는 그가 영원하신 한 분 하나님의 아들로, 성부 성령과 더불어 만물을 지으시고 지탱시키시고 다스리시는 분으로(요 1:3, 골 1:15,16, 히 1:2) 남아 계시며 그리하여 언제나 우리의 예배의 대상이 되신다. 그는 사도들의 시대에도 이미 예배의 대상이셨다.(요 14:13, 행 7:59, 9:13, 22:16, 롬 10:12,13, 빌 2:9, 히 1:6) 그때에도 그러하셨으니 지금도 마찬가지로 그의 모든 제자가 믿고 신뢰해야 할 대상이시다.(요 14:1, 17:3, 롬 14:29, 고후 5:15, 엡 3:12, 5:23, 골 1:27)
그러나 그가 참되신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렇게 될 수도 없고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될 것이다.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마 4:10)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신앙적으로 예배하는 근거는 오직 그의 신성에 있으므로 이것을 부인하면서도 그를 예배할 걸 주장하는 사람은 피조물을 신격화시키는 죄와 우상숭배의 죄를 범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성은 하나의 추상적(抽象的)인 교리가 아니고 교회의 생활을 위하여 가장 중요한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리스도께서는 참되고 완전한 사람이 되시며 죄를 제외한 모든 점에서 우리와 같이 되셨다. 그는 어린아이이셨고 소년이셨으며 성인이셨고 지혜가 자라며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사랑스러워 가셨다.(눅 2:40,52)
신성의 속성들이 인성에 속해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주장하듯 그저 겉모양으로만 그렇게 보인 것이 아니고 그가 진실로 그렇게 되신 것이다. 그리스도께 점진적인 발전이 있었고 육체와 영혼의 능력과 또한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스러워 가신 면에서 성장이 있었다. 이는 참사람 이시라는 증거이다.
성령의 은사들이 그에게 한꺼번에 모두 다 주어진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점점 많이 주어진 것이다. 그가 배우셔야 할 것들도 있었고 처음에는 모르셨던 것도 있었다.(마 13:32, 행 1:7) 그가 죄를 지을 수 없는 존재 상태를 소유하고 계셨으나 그의 연약한 인성 때문에 유혹과 고난과 죽임을 당하실 가능성이 그에게 있었다.
이 땅에 계시는 동안 그는 자신의 인성에 따라서는 하늘에 계시지 않았고 따라서 그 역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행하셨다. 그는 싸우셨고 고난도 당하셨으며 그 모든 일에서 하나님 말씀과 약속을 확고히 붙드셨다.
그러하여 그는 친히 받으신 고난을 통하여 순종함을 배우셨고 계속해서 순종 가운데 자신을 세우셨으며 그리하여 스스로 거룩하게 하셨다.(요 17:19, 히 5:8,9) 그리고 동시에 이로써 우리에게 모범을 남기셨고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신 것이다.(히 5:9)(*) 글쓴 이 / 헤르만 바이크(Herman Bavinck, 1854-1921) 출처 : ‘개혁교의학 개요’ 헤르만 바빙크 지음, 원광연 옮김, (서울: 크리스천 다이제스트), 2004. pp. 380-406.
< 그리스도 안에 성취 된 메시아 예언 >
예언성구 | 예언주제 | 성취성구 |
창 3:15 | 1. 여자의 후손 | 갈 4:4 |
창 12:2,3 | 2. 아브라함의 씨 | 마 1:1 |
창 49:10 | 3. 유다의 홀 | 눅 3:33 |
사 9:7 | 4. 다윗의 자손 | 눅 1:32,33 |
단 9:25 | 5. 예수 탄생시기 | 눅 2:1,2 |
미 5:2 | 6. 베들레헴에서 탄생 | 눅 2:4-7 |
호 11:1 | 7. 이집트로 피신 | 마 2:14,15 |
사 9:1,2 | 8. 예수의 갈릴리사역 | 마 4:13-17 |
사 61:1,2 | 9. 상처 받은 자 치유 | 눅 4:18,19 |
사 53:3 | 10. 유대인에게 버림받음 | 요 1:11 |
시 110:4 | 11. 멜기세댁반차 제사장 | 히 5:5,6 |
슥 11:12,13 | 12. 은 30에 팔림 | 마 26:15, 27:5-7 |
사 53:12 | 13. 참혹한 희생 | 막 15:27,28 |
시 69:21 | 14. 초에 저린 쓸개를 줌 | 마 27:34 |
시 22:18 | 15. 그의 옷을 나눔 | 마 27:35 |
시 34:20 | 16. 뼈가 부러지지 않음 | 요 19:32,33,36 |
슥 12:10 | 17. 옆구리를 찔림 | 요 19:34 |
사 53:9 | 18. 부자의 묘에 장사 | 마 27:57-60 |
시 49:15 | 19.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 | 막 16:6,7 |
시 68:18 | 20. 하늘에 오르심 | 막 16:19 |
출처 / 이인석, 채천식 공저, ‘Charts of Systematic Theology’(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10) p.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