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역사적 성육신(聖誕)

시작하는 말
어린 학생들에게는 자연스럽게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이 다른 역사적 사실들과 같이 일어난 것으로 가르쳐주어야 한다. 마리아에게 수태된 것의 역사성, 그 뒤 다른 아이들과 같이 어머니 자궁 속에서 10개월 동안 자라나신 일 그리고 베들레헴에서의 출산 등을 모두 역사적인 사실로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이때 이와 함께 잘못된 정보가 같이 전달되지 않도록 하는 일에 유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후에 부모님과 교사들이 가르친 것 가운데 잘못된 요소가 있는 것을 알고 올바로 가르친 것까지 의문시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녀들에게 소위 ‘경건한 허구’’를 섞어 가르치게 되면 후에 의심이 몰려올 때 모든 것이 거부되기 쉽다. 이런 것들 가운데 유의해야 할 몇 가지 대표적인 것들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생각할 수 있다.
1. 성육신의 역사성과 독특성
(1) 아기 예수의 탄생 연대
예수님이 언제 탄생하셨는지 우리는 정확한 연대를 모른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성경은 대강의 기간을 제시하고 있지 정확한 연대를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2) 아기 예수의 탄생 일자
더구나 우리는 주께서 어느 날 탄생하셨는지 모른다. 그러므로 언제 그가 탄생하셨는지를 추론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초기 기독교 역사가의 한 사람인 아프리카누스(Sextus Julius Africanus, 180-250)에 의해 221년에 처음으로(부정확하게) 예수 탄생 기념일로 언급된 12월 25일은 로마 교회에서 이교시절에 로마인들이 ‘패할 수 없는 태양의 탄생일’(the birthday of the undefeated sun)이라고 부르며 기념하던 태양신 축제를 대신하여 ‘의의 태양’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념하기 위해 그렇게 정하고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해 온 것이다. 그러므로 어린아이들에게 12월 25일이 예수님의 생일인 것과 같은 그런 인상을 주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3) 천사의 성별(性別)
또한 마리아에게 수태 고지를 한 천사 ‘가브리엘’(눅 1:26-38)과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때 목자들에게 나타난 ‘주의 사자’(눅 2:9) 그리고 그 후에 나타난 수많은 천군과 천사들이 여자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 것은 아니다. 가브리엘의 경우 그의 이름과 당시 상황을 염두에 둘 때 남자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성경에 이상 중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 천사가 직접 나타난 경우에는 날개를 달고 나타난 적이 없었다는 것에 유의해서 가르쳐야 한다.
칼빈은 “그렇다면 왜 천사가 날개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이 성경이 묘사하고 있느냐?”하는 문제에 답하면서 “이것은 우리의 이해력 정도에 맞추어 표현한 것으로 신속히 도울 수 있도록 항상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라고 설명했다.
(4) 목자들과 동방박사들의 아기 예수 방문 시기
또 천사들이 나타나 선포한 그리스도 탄생의 소식을 듣고 목자들이 가서 구유에 누인 아기를 확인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눅 2:15-20)과 동방의 박사들이 예수님이 계신 곳에 찾아와 예물을 드린 사건(마 2:1-12)은 시간적인 간격이 있었음 분명하게 말해 주어야 한다.
또 몇 명의 동방 박사가 왔는지 성경은 명확히 말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그 숫자를 셋으로 강조하는 것도 자제해야 한다. 그리고 6세기 이후에 나타나기 시작하여 8세기에 이르러는 상당 보편적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진 동방 박사들의 이름(Caspar, Melchior, Barthasar)을 마치 성경에 있는 것처럼 가르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어릴 때부터 성육신과 관련된 사실들을 성경대로 분명하게 가르치다가 초등부 고학년부터는 그 시기나 앞으로 다가오는 역사적 회의를 극복할 수 있는 교육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만 중고등부 시절이나 대학시절에 몰려올 수 있는 성육신에 대한 회의를 미리 극복할 수 있도록 일종의 예방적인 대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성육신에 대한 회의를 갖기 시작할 때 가르치려면 이미 늦기 때문에 그보다 한 발 앞서 성육신과 관련 된 역사성과 독특성을 미리 잘 가르쳐야 할 것이다.
2. 성육신의 종말론적 성격
성육신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 측면이 성육신의 종말론적 성격이다. 그러나 성육신에 대한 신약성경의 가르침과 그 의미를 깊이 생각 해 보면 이런 측면을 놓치는 것은 핵심이 빠진 것이며 성육신을 이해하는 가장 근본적인 틀과 무대를 무시하는 것이 된다. 성자 하나님이 성육신 하신 것이 어떻게 구약성경이 약속한 종말론적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인지를 잘 생각해야 한다.
가브리엘로부터 수태고지를 받은 마리아는 이렇게 예언적인 찬양을 한다.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중략)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손으로 보내셨도다.”(눅 1:48-53)
이는 구약성경이 말한 종말의 때에 여호와께서 행하실 일에 대해 언약하신 말씀들을 열거한 것이기에 결과적으로 마리아의 이 찬가는 일종의 종말론적 구원이 이르렀음을 선언하는 찬송인 것이다. 또한 천사가 말하는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 2:10,11) 선언도 결국 종말론적 메시아의 임함에 대한 좋은 소식인 것이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눅 2:30-32)라고 찬송한 시므온의 찬송도 이런 종말론적 의식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 하니라.”(눅 2:38)는 안나의 말도 ‘예루살렘의 구속됨’이라는 종말론적 구원에 대한 의미가 함의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되어 진 모든 것은 구약성경에 예언 된 종말의 때가 이르렀음을 보여 주는 것들이다. 그는 종말을 그 안에 가지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따라서 종말론적 메시아로 오신 그 안에 있는 모든 날들은 모두 다 종말론적인 날들이다.
3. 구속 사건의 토대로서 성육신의 의미
성육신은 그 자체가 모든 구속(救贖)을 함의하고 있는 것은 아니며 구속 사건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성육신은 구속 사건이 일어날 수 있는 토대가 되는 사건이었다. 즉 성육신은 십자가와 부활의 근거와 토대가 되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성육신이 구속 사건은 아니나 그러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없이는 구속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성육신은 매우 중요한 구속사적 사건이다. 즉 성육신은 구약성경이 준비한 구속 사건을 마무리하고 인류의 역사 가운데서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는 구속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구속사적 사건의 하나인 것이다. 성육신에서 이점이 분명하게 가르쳐 질 때 바로서 성육신과 구속의 관계가 잘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4. 성육신에 비추어 본 기독교적 실재론
성육신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인간의 영혼과 몸 모두 중요하게 여기신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육신의 빛에서 인간의 전인성(全人性)을 강조하고 기독교적 일원론의 의미를 잘 깨닫고 잘 가르쳐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독교는 영지주의(靈知主義, Gnosticism)처럼 영혼만 강조하는 종교가 아니다. 몸은 물질적인 것이라 더럽고 무가치 하고 영혼만 가치 있는 것으로 강조했던 영지주의에 맞서 많은 교부들이 대항하여 싸웠고 오래 전에 영지주의는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우리는 영혼 구원만 강조하는 기독교에서 전인 기독교로 전환해야 한다. 몸과 영혼 모두를 귀히 여기며 영육(靈肉) 이원론(二元論, dualism)을 극복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영육 이원론을 포함하여 세상이 말하는 모든 종류의 이원론을 극복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이 세상이 말하는 일원론(一元論, Monism)도 극복해야 한다.
그런 입장을 기독교 일원론(Christian monism)이라고도 할 수 있고 또 기독교적 이원론(Christian dualism)이라고도 할 수 있다. 기독교적 이원론은 상대적 이원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인간이 몸과 영혼의 두 실체로 구성되었음을 말하면서도(온건한 이원론), 그러나 그 둘이 이 세상에 있을 때는 거의 나눠질 수 없음을 말하는 ‘영육통일체’(psycho-somatic unity)를 강조하는 입장과 또한 하나님께서 궁극적 실재이신데 그가 자신 밖으로 이 세상을 자유롭게 창조하셔서 참으로 존재하게 하셨다는 이층적 실재론(two-layer theory of reality)을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리하여 이 세상은 결코 하나님 안에 있다고 할 수 없고 그 어떤 종류의 만유재신론(panentheism)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이원론적이나 그래도 이 세상이 모두 다 하나님의 통제 하에 있고 하나님의 궁극적 영광만이 모든 것 위에 모든 것이 되신다는 의미에서 기독교적 일원론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이 세상에 대한 내재를 온전히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의 온전한 초월을 강조하는 그런 의미의 이원론적 일원론이 기독교적 실재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가르침이 제대로 가르쳐질 때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온전한 의미가 잘 드러나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5. 성육신에 비추어 본 구속된 인간
마지막으로 성육신의 빛에서 우리는 구속된 인간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가르쳐야 한다. 타락하여 하나님의 형상이 손상 된 죄인들을 십자가의 구속으로 중생시키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킴으로 하나님의 참 형상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계속해서 본받아 가고 따라가도록 하는 것에 우리의 기독교 교육의 목표가 있다.
그러므로 성육신에 근거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어떠하심을 구체적으로 배우고 그를 따라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그리스도께서 참된 인성을 가지셨음을 강조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를 강조하기 위해 루터는 다음과 같이 설교한 일이 있다. “그분은 영처럼 나부끼지 않았으며 사람들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또 여러분과 저처럼 그분은 눈, 코, 입, 귀, 손발이 다 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젖을 먹고 자랐으며 모친은 다른 아이들을 양육하듯이 그분을 양육했습니다.”
루터가 이렇게 말할 때 그리스도의 신성을 무시한 것이 아니며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하는 말로 한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본받아 갈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는 것이다. 우리는 칼빈, 워필드, 도날드 맥클라우드처럼 그리스도께서 죄 없는 인간으로 감정을 가지셨다는 것을 증거하며 본받아 가도록 해야 한다.
구속된 인간은 그리스도께서 그리하셨듯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온전히 하나님의 영광만을 목적하여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라고 하신 주님의 기도처럼 그 뜻을 이 땅에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또한 구속된 인간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어 그리스도적 품성을 온전히 드러내는 인간이다. 그런 뜻에서 구속된 인간은 이 세상에서 별개로 외딴 곳에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인간이다. 구속된 인간은 이 세상의 모든 피조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잘 알아서 그것을 구현하며 살아가는 인간이다.
6. 성육신과 삼위일체 하나님
마지막으로 성육신을 가르친 결과로 모든 학생들이 예수님을 바로 이해하게 되었다면 반드시 예수님에 대한 바른 경배에로 나아가는 일이 나타나야 할 것이다. 성육신에 대한 가르침은 결국 예수님 경배로 나타난다. 아기 예수가 탄생했을 때 그 지경의 목자들이 가서 그에게 경배했듯이 또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성경대로 바로 알고 믿어 그와 인격적 관계가 회복 된 후에는 도마가 그를 하나님으로 고백하며 “나의 주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나이다.”(요 20:28)라고 그에게 경배했듯이 우리들도 예수님을 바르게 고백하고 그에게 예배하는 길로 나아가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무엇보다도 “예수님께 대한 예배이다.”라고 말한 맥클라우드 교수의 말은 매우 옳은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바르게 예배한다는 것은 예수님만 예배하고 그만 높이는 유니테리언(unitarian, 삼위일체 교리 부정, 성자의 신성 부정, 성부의 신성만 인정)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결국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와 삼위일체 하나님께 대한 경배 그리고 삼위일체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을 낳게 되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전반적 분위기를 볼 때 우리가 심각하게 다시 한 번 생각해야 것들은 다음과 같다.
- 우리는 예수님을 바르게 이해한 터에서 예배 때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 참으로 예배하는가?
- 우리는 그 예배를 성자의 구속 공로에 의존하여 감당하려 하므로 실질상 성령님 안에서의 예배를 하고 있는가?
- 그렇게 중요한 일이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성경에 내신 지침에 따라서 즉 진리 안에서 예배하는가?
성육신 교육 후 반드시 이러한 질문을 하고 이에 대한 솔직한 대답을 해야만 하는 이유는 우리가 성육신에 대해 과연 제대로 교육을 하였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결국 우리의 예배가 삼위일체 하나님께 드리는 온전한 예배로 나타나는가에 의해서 평가되기 때문이다.(*) 글쓴 이 / 이승구 교수(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출처 / 월드뷰 2015년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