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자본주의 정신과 인간의 전적타락 교리
근대 자본주의 정신과 인간의 전적타락 교리
기독교의 논리는 무엇보다도 전제(前提)가 중요하다. 이것을 다른 말로 전제주의(前提主義)라고 한다. 전제가 올바르지 못하면 모든 논리에 오류가 따라온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은 사랑이다.”라고 말한다. 문장으로만 본다면 이 주장은 ‘참’이다. 그러나 여기서 ‘사랑’이라는 말의 의미를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서 이 말은 참이 될 수도 있고 거짓이 될 수도 있다.
동성애를 사랑으로 규정할 것인가? 불륜을 사랑으로 규정할 것인가? 혹은 자녀를 위해 매를 드는 것을 사랑으로 규정할 것인가? 이러한 문제들은 우리가 사랑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참이 될 수도 있고 거짓이 될 수도 있다. 이것이 전제주의다. 그러므로 먼저 이 전제를 명확하게 하지 않으면 어떤 기독교 발언도 기독교적이라 규정하기 어렵다. 코넬리우스 반틸(Cornelius Van Til, 1895-1987)도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질문이 존재 여부에 대한 질문에 선행한다.”라고 했는데 이는 정말로 타당하다.
‘시장경제’(市場經濟)에 대한 질문 역시 똑같다. 우리가 ‘시장경제’를 어떤 전제(前提)하에 보느냐에 따라 ‘막스 베버의 자본주의’에 손을 들어주거나 혹은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손을 들어주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당연히 성경의 가르침(기독교 교리)을 전제로 이 두 사상을 바라보아야 한다. *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 독일 법률가, 정치가, 정치학자), 칼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 독일 철학자, 경제학자, 역사학자, 사회학자, 정치이론가)
성경의 가르침에 비춰 이 두 가지 경제 원리를 비교해 보면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성경적인 것처럼 보인다. 왜냐면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사도행전 4장에서 각자 자기 것들을 다 팔아 모두가 공평하게 나누는 유무상통(有無相通)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반면 ‘자본주의’(資本主義)는 자본가의 착취와 억압 그리고 계급 간의 갈등을 가져오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의 선입견이나 철학적 구조만으로 막연히 바라보면 그렇게 보인다. 또 전통적인 자본주의는 그런 모습이었다. 그러나 두 경제 원리를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정반대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즉 실제 역사를 보면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추구하는 사회주의(공산주의) 국가들은 예외 없이 계급과 부의 격차 그리고 빈곤의 확대가 더 심하다는 것을 이는 역사적인 사실이기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회주의(공산주의)는 언제나 기독교 신앙에 직간접적으로 적대적 입장에 섰다.
반대로 ‘자본주의’(민주주의) 사회는 만성적인 빈곤이 극복되고 계급 간의 갈등이 점차 해소되고 있다. 비록 어떤 나라에서는 빈부 격차가 심한 경향을 보이나 ‘자본주의’(민주주의) 국가 가난한 자의 삶의 질은 ‘사회주의’(공산주의) 국가의 평균 삶의 질보다 월등하다. 무엇보다 근대 자본주의 사회는 기독교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고 친 기독교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만일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더 성경적이라면 왜 이런 반대의 결과가 나타나는 것일까?” 그 근본 이유는 바로 ‘사회주의’(공산주의)의 인간 이해에 대한 전제 때문이다. 우리가 다 잘 아는 대로 ‘사회주의’(공산주의)의 인간 이해는 ‘유물론’(唯物論)이다. 유물론은 신(神)의 존재 즉 하나님을 부인한다. 그 때문에 ‘인간의 타락’도 인정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없다고 하고 인간의 타락을 믿지 않는 ‘사회주의’(공산주의)의 이 두 가지 전제는 자연히 ‘인간의 신격화’2)라는 급진주의로 나타난다. 다시 말해 “인간은 완벽해질 수 있고 사회는 무한히 발전할 수 있다.”는 ‘사회개량론’(Meliorism)을 주장한다. 따라서 부(富)의 분배를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지 않고 인간 정부가 인간의 뜻을 따라 한다.
여기서 ‘큰 정부론’(big government theory)이 나온다. 다시 말해 인간 정부가 하나님을 대신한다. 즉 하나님 노릇을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사회주의’(공산주의) 정부의 하나님 노릇을 통해 국민의 보편적 평등을 추구한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주장을 가능하게 하는 기초에는 ‘인간의 타락’을 부정하고 인정하지 않는 데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주의자들은 “인간은 완전해질 수 있고 사회는 무한히 발전할 수 있다.”라고 하는 자신감으로 유토피아 국가와 사회 건설을 꿈꾼다. 그리고 이러한 이 신념은 ‘이데올로기’를 형성한다. 그리고 이 ‘이데올로기’를 근거로 사회주의 유혈혁명과 계급투쟁을 정당화한다. 그래서 ‘사회주의’(공산주의)가 들어가는 국가나 사회는 거의 예외 없이 내전이 일어나고 사회적 혼란이 일어난다. 이것을 칼 마르크스는 “모순이 피의 혁명을 낳는 ‘자연의 당연한 원리’이다.”라고 합리화했다.
이것은 분명히 성경이 말하는 사도행전 4장의 각자 소유를 서로 유무상통(有無相通)하여 재물이 있는 자나 없는 자나 다 같이 함께 누리는 공산사회(共産社會)가 전혀 아니다.
이와는 반대로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에 주창된 자본주의 정신은 인간의 전적인 타락을 전제로 경제활동을 바라본다. 그 때문에 인간은 본성적으로 ‘돈 욕심’이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직시하며 경제를 논한. 그뿐만 아니라 베버는 인간이 부지런하게 사는 것보다는 편안함을 더 추구하는 존재라는 사실도 직시한다.
그러하기에 인간은 성과급을 통해 생산성을 향상시키고 더 많은 부를 축적하도록 독려하더라도 편리함(게으름)을 더 추구한다고 한다. 사람이란 ‘적게 일하는 것이 돈을 더 많이 버는 것보다 더 매력적인 것’으로 인식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본성으로 본다면 인간은 필요 이상으로 사회를 번영하게 할 의지가 없다. 베버는 이런 인간의 한계를 신앙교육을 통해서 극복해야 한다고 보았다. 신앙교육으로 노동 자체를 ‘소명’으로 여기게 될 때 인간의 타락한 본성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흥미롭게도 스코틀랜드의 철학자 아담 스미스(Adam Smith, 1723-1790, Scottish economist, philosopher)는 ‘인간의 타락’을 전제로 자본주의 경제 발전과 ‘공감’(共感, sympathy)을 연결했다. 아담 스미스가 말하는 ‘공감’은 인간이 부(富)를 축적하려는 타락한 본성보다 더 강력한 ‘쾌락’(快樂)이다. 이는 마치 막스 베버가 ‘부의 독점’에 대한 타락한 본성보다 ‘적게 일하는’ 쾌락의 열망과 흡사하다. 아담 스미스는 이것을 ‘상호적 공감의 쾌락’이라고 부른다.
이 ‘상호 공감의 쾌락에 대한 열망’은 자본주의에서 부(富)의 재분배가 가능하게 하는 하나님 섭리의 도구가 된다. 무슨 말이냐 하면 자신의 재물을 이웃과 나누고 이웃이 그것으로 기뻐하고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서 인간은 자기의 행복처럼 ‘공감하는 쾌락’을 맛본다는 말이다. 이것을 통해 약육강식 생존경쟁의 사회로 전락하기 쉬운 인간사회가 ‘공감’에 의해 인간다운 질서를 유지한다. 아담 스미스는 이것을 ‘조물주의 위대한 계율’이라고 했다. 스미스가 말한 ‘조물주의 위대한 계율’이란 물론 ‘하나님께서 사람의 심령에 주신 하나님의 형상’을 말하는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공감’이 그냥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인간은 가만히 놔두면 자동으로 약육강식 생존경쟁의 짐승이 되고 만다. ‘공감’을 통해 사회의 질서가 유지되려면 지속적인 신앙교육을 통해 ‘하나님의 위대한 계율’을 인식시킴으로 이기심을 극복하게 해야 한다. 이런 ‘공감적 행동’이 이기심을 극복하게 하는 것은 ‘공감’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쾌락 때문이다. 이 쾌락은 막스 베버의 직업을 소명으로 여기고 금욕적으로 추구하는 태도와 관련을 맺는다.
이렇게 ‘공감’은 금욕적으로 부를 축적하는 프로테스탄트들이 그 부를 사회에 환원하는 쾌락을 느끼게 한다. 이 쾌락은 다시 말해 신앙의 실천이 주는 쾌락이다. 성령님이 주시는 쾌락이다. 성령님은 이 기쁨을 통해서 사도행전 4장에 나타난 부의 재분배가 가능하게 하신다.
이런 모습이 훨씬 더 성경적인 경제관이 아닌가? 왜냐면 사도행전에서 유무상통 된 재산들은 사유재산(私有財産)을 성령의 감동으로 자발적으로 재분배된 것이기 때문이다. 칼빈에 의해 시작된 근대 자본주의 정신은 이러한 사도행전 4장의 경제 구조를 설명해준다. 물론 모든 사람이 개신교인이 될 수는 없다. 또 모든 개신교인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그 때문에 근대 자본주의 속에서도 천민자본주의 태도로 부를 축적하고 억압하며 계급을 형성하는 사람들도 있다.
설사 우리의 현실이 그럴지라도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런 두 가지 양태를 구분해서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근대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성경적 가르침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글쓴 이 / 김민호 목사(인천 회복의교회 담임, 대한예수교장로회 대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