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강요를 통해 본 칼빈의 칭의론
칼빈 탄생 500주년기념 지상강좌(11)

제1장 로마가톨릭교회의 칭의론
1. 어거스틴 이후 로마가톨릭교회의 칭의론
초대교회 때 칭의사상이 교리화 되는 과정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만으로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했던 펠라기우스(Pelagius, 354-420)와 인간의 본성은 부패했으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 어거스틴(Augustine of Hippo, 354-430)과의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
로마가톨릭교회는 418년 카트타고 공의회에서 펠라기우스를 정죄함으로 어거스틴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즉 모든 사람이 원죄 안에 있고 죄로 인해 죽음이 왔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리고 칭의는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으로만 가능하다고 주장하였으며 인간의 공로는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로마가톨릭교회는 교회의 성례전적 관습에 신학적 정당화를 제공하고 ‘의롭다고 선언되는 것’(칭의)과 ‘의로워지는 것’(성화)의 차이를 구분하지 않은 채 이것을 칭의로 정의한 어거스틴의 사상을 받아들여 인간을 의롭게 하기 위해 제공된 은혜의 수단인 성례전적 관습들을 강조하게 되었다. 따라서 카톨릭 교회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의(義)를 이루게 하는 다양한 성례전적 관습을 도입하게 되었다. 즉 점차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기 위해 하나님과 인간이 세운 언약을 충족시켜야 하는 구원의 전제조건이 점점 늘어나고 복잡하게 되었던 것이다.
2. 종교개혁 이전 로마가톨릭교회의 칭의론
중세 스콜라철학(Scholasticism)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도 어거스틴의 입장을 따랐다. 그러나 그는 은혜를 받기 위한 준비에 있어 인간의 자유의지에 기회를 부여하였다. 즉 인간 스스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려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선행할 준비를 하는데 인간의 본성이 단지 죄로 말미암아 약해졌으므로 은혜의 도움을 받을 때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개심을 협력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영향을 받은 스콜라주의는 의롭게 됨은 하나님의 사법적인 행동이 아니라 인간의 의롭게 되는 내적인 작용이 되었고 그 결과 신앙생활의 중심이 믿음이 아니라 사랑과 선행이 되었다.
칼빈이 기독교강요 제3권 3장 25절에서 지적한 로마가톨릭교회의 행위(行爲) 중심의 공로(功勞) 사상을 통해 당시 로마가톨릭교회의 칭의관을 엿볼 수 있다. 칼빈은 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회개하는 자로서는 과거에 지은 악행을 중지하고 행위를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자신이 저지른 과실에 대해서 하나님께 보속(補贖, 죄로 인한 나쁜 결과를 보상하는 일) 해야 한다고 말한다. 곧 눈물, 금식, 헌금, 구제 등이 그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것을 가지고 주님의 노여움을 풀어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로 하나님의 의(義)에 대하여 우리가 진 빚을 갚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로 우리의 과실에 대해서 보속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로 그의 용서를 받을 만한 공로를 쌓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로마가톨릭교회의 행위 중심의 칭의관은 종교개혁 당시 로마가톨릭교회의 중심사상이 되었고, 로마가톨릭교회는 사람이 의롭게 되기 위해서는 믿음에 더하여 선행 즉 죽은 자를 위한 기도, 미사, 헌금, 면죄부 구입 등이 요구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로마가톨릭교회의 비성경적이며 왜곡된 칭의관은 루터를 중심으로 한 종교개혁이란 전환점을 갖도록 하는 배경이 되었다. 면죄부(免罪符)에 대해 칼빈은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우리의 반대자들은 보속(補贖)을 이루는 데 있어서 우리의 능력이 모자라는 부분을 면죄부(免罪符)가 보충해 준다는 식으로 떠들고 더 나아가서 면죄부를 그리스도와 순교자들의 공로들을 분배하는 것이라 정의하면서, 교황이 그의 교서를 통하여 그 공로들을 분배한다는 극단적인 망언을 서슴지 않고 있다.”
이러한 로마가톨릭교회의 행위 중심의 칭의관 문제는 루터주의와 개혁주의가 주장한 칭의(稱義)와 성화(聖化)의 구분을 무시한데서 비롯된다. 즉 루터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의 외적 신분을 변화시키는 칭의와 죄인의 내적 본질을 변화시키는 성화를 철저히 구분한 반면에 로마가톨릭교회는 이런 구분을 무시한 것이다.
칼빈도 기독교강요 제3권 11장 6절에서 오시안더(Andreas Osiander, 1498-1552)의 ‘본질적 의’를 비판하면서 오시안더가 칭의와 성화를 구별할 수 없다고 주장한데 대해 반박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의로움과 거룩함’이 되셨다는 바울의 진술(고전 1 :30)은 쓸데없이 동일한 것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바울은 우리를 위하여 값 주고 사신 구원이나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하심이나 그리스도의 은혜를 근거로 하여 우리가 거룩함과 순결함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는 논지를 전개할 때마다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것이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것과는 다른 의미라는 것을 분명하게 시사하는 것이다.”
요약하면 칭의(稱義)와 성화(聖化)를 구분하여 칭의는 하나님의 법정에서 죄인의 외부에서 일어나며, 성화는 인간의 내면적 삶에서 일어나고 일생을 통하여 전 존재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개혁주의의 입장이라면, 로마가톨릭교회는 의롭다고 선포되는 사건(칭의)과 내적 변화가(성화) 합쳐진 결과를 의롭게 됨으로 주장하였다.
이렇게 성화를 포함한 거룩한 삶의 완성을 칭의로 보면 이 칭의의 조건에 도달할 완벽한 사람이 없음으로 구원의 확신이 흔들리는 것은 당연하다. 왜냐면 확신 갖기에 필요한 만큼 자기 자신에게 완전한 의가 없는 것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로마가톨릭교회에서는 이러한 인간의 의에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기 위해 여러 가지 보속(補贖) 행위를 지킴으로 의롭게 된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제2장 기독교강요를 통해 본 칼빈의 칭의관
1. 칭의의 정의
칼빈의 칭의론을 살펴보기 위해 먼저 칭의에 대한 용어의 개념부터 살펴보자. 칼빈은 기독교강요 3권 11장 2절에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의 정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죄는 하나님 앞에서 더러운 것이고 죄인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자리가 없다. 죄가 있는 곳은 어디나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의로워진다는 의미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서가 아니라 의인으로 여겨진다는 뜻이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죄인인 인간을 의롭다고 인정해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새로운 의(義)의 기준을 정하신 것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한 의(義)인 것이다. 고후 5: 21은 우리의 의(義)가 되신 예수님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에 의하면 칭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순종을 통해 얻으신 의(義)를 우리에게 전가(轉嫁)해 우리로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아니라 의인으로 나타나게 함을 뜻하는 것이다. 칼빈에 의하면 이처럼 칭의는 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피고인의 죄를 용서하시는 법적(法的)인 행위라고 한다. 의롭지 않지만 의롭다고 여기시고 의롭다고 인정해주시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요 전적인 은혜의 역사인 것이다.
이처럼 칭의가 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칭의는 구원의 외부적 역사인 것인 반면에 구원의 내부적 역사는 성령의 사역으로 이루어지는 내부의 중생의 체험인 것이다. 이 둘은 구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 회심(悔心) 할 때 동시에 이루어지는 구원의 양면성(兩面性)을 설명하는 것이다. 아브라함 카어퍼(Abraham Kuyper, 1837-1920)도 칭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의롭게 된다는 의미는 죄인 된 인간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힘입어 하나님께 의인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의미이다. 이 말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한 가치가 전혀 없는 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죄인 된 인간이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다. 다만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로움을 나타내시고 그의 자비와 긍휼로 우리를 의롭다고 선포해 주시는 것이다.”
요약하면 성도가 죄 사함을 받고 의롭게 됨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지한다. 칼빈에게 있어서 칭의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죄 있는 인간을 용서해주시고 의롭다고 받아주시는 것이다. 칼빈은 바울의 말을 인용하여 이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다. “우리가 스스로는 의롭지 않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의로운 자로 인정을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 13:38,39)
이와 같은 칭의의 개념은 구원의 내적인 역사인 중생 때부터 일생동안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성화와는 구별되는 것이다. 칼빈은 중생과 성화의 구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칭의의 은혜가 물론 중생과 서로 구별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생과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죄의 자국이 의인에게도 언제나 남아 있다는 것은 경험으로도 매우 잘 알 수 있는 사실이므로 그 의인들의 칭의는 새 생명으로 변화되는 것과는 매우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새 생명으로 변화시키는 일은 하나님께서 그의 택한 자들 속에서 시작하시고 삶의 전 과정을 거쳐서 점진적으로 때로는 아주 더디게 이루어 가시므로 만일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다면 그들은 언제나 죽음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2. 칼빈의 칭의관
칼빈은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먼저 율법을 설명한다. 칼빈은 계명을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대로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자기 자신을 위해 몸부림치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훌륭하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다고 했다. 즉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는 전폭적으로 순종하는 마음과 영혼과 의지를 요구한다고 했다.
그러나 로마가톨릭은 이런 율법이 너무 지키기 어렵다는 이유로 율법의 일부만 지키는 것을 자기 의로 여기고 나머지는 보속과 공덕의 행위로 보충하면서 의롭게 된다고 주장했다.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 초판에서 행위 중심의 로마가톨릭교회를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로마가톨릭교회의 신봉자들은 인간이 연약하여 모든 율법을 다 지킬 수 없음을 인정한다. 그들은 율법은 너무나 무거운 짐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행위의 공로를 통해 완전하고도 궁극적인 의를 획득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부분적으로 율법을 지켰으며 그 점에 관한 한 자신들이 의롭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부족한 것은 보속과 공덕의 행위에 의해 보충된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즉 로마가톨릭교회는 인간의 노력과 공덕이 구원의 근거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칼빈은 율법을 지킴에 있어 인간의 전적인 타락과 무능을 강조하며 칭의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주장함으로 로마가톨릭의 칭의관을 반박한다. 여기서는 칼빈의 칭의관을 1)율법의 역할, 2)인간의 전적인 타락, 3)오직 은혜, 4)오직 예수, 5)오직 믿음, 6)성화, 7)칭의와 예정, 8)칭의와 하나님 영광 순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 율법의 역할
율법은 그 자체로는 완전한 것이고 거룩한 것이다.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한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다. 즉 율법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줌으로써 그것은 각 사람의 불의를 책망하며 그의 죄를 깨닫게 해준다. 로마서 3:20은 율법의 역할에 이렇게 설명한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칼빈은 또한 거룩한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인간은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는 자신의 한계를 깨닫게 된다고 주장한다.
(2) 인간의 전적인 타락
칼빈은 “만일 사람이 자연적 은사에 따라 판단 받는다면 머리 꼭대기에서 발끝까지 그에게 선한 의지하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죄의 성품을 타고난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선을 행할 능력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의는 너무나 완전하기 때문에 타락한 인간이 도저히 도달할 수 없음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의 의가 너무나 완전하기 때문에 어떤 더러움에 의해서도 오염되지 않은 완전한 것 외에는 하나님에 의해 용납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인식되지 않는 곳에서는 하나님의 의가 멸시를 당한다. (중략) 그리하여 우리의 의는 연약함이며, 우리의 강직함은 오염이며, 우리의 영광은 불명예일 뿐인 것이다. 우리에게서 나올 수 있는 최선의 것도 여전히 우리의 육체의 어떤 부정에 의해 얼룩지고 더러워져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불순물이 섞여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만일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이 율법만 바라본다면 낙심하고 당황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냐면 갈라디아서 3:10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 모두 율법에 의해 정죄 되고 저주받기 때문이다. 우리가 모든 율법을 다 지키다가도 한 가지를 범하면 우리는 저주 아래 있는 것이다. 야고보도 같은 의견을 말하고 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약 2 :20) 따라서 인간 스스로는 도저히 이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고 하나님의 의에 도달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칼빈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전 인류가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 아래 있다. 그리고 그것에서 해방되기 위해 율법의 권세에서 떠나는 것 즉 율법의 굴레에서 놓임을 받아 자유롭게 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며 구원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있다.
(3) 오직 은혜(Sola Gratia)
우리의 전적 타락과 율법을 지키는 데 있어서 무능함 때문에 칼빈은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는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어떤 가치나 우리에게서 나오는 어떤 것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만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따라서 이 은혜 위에 우리는 우리의 모든 소망을 세우고 깊이 뿌리박아야 하며, 우리의 행위에 어떤 기대를 하거나 그것으로부터 도움을 구해서도 안 된다.”고 강조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신의 무능을 아시기 때문에 은혜로 우리에게 당신의 의이신 예수님을 보내신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서 깊은 절망을 하지 않고는 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기 어려운 것이다.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해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9)
이처럼 칭의는 우리의 행위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한 하나님의 선물로써 우리는 자랑할 게 없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롬 11:6) 칼빈은 “우리의 모든 자신감이 완전히 꺾이고 그 대신 그분의 선하심을 의지하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고 획득하게 되며 우리의 공로를 잊고 그리스도의 선물을 받아들이게 된다.”고 함으로 로마가톨릭의 공로 사상을 반박했다.
(4) 오직 예수(Soli Christo)
인간의 전적 타락으로 인해 인간의 자력 구원이 불가능하여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인류의 구원을 위해 다른 의를 세우셨다. 요한복음 3:16에 잘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신 것이다. 이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의(義)이신 것이다. 칼빈이 주장하는 하나님의 의(義)에 대해 가장 잘 나타내주는 말씀은 고린도 후서 5:21이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니니라.”
또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때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롬 3:21-26)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셨고 그를 통하여 우리 죄인들이 의롭게 되는 길을 열어놓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의 의(義)이신 것이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신 것이다. 고린도전서 1:30은 이 사실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너희는 하나님께로 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었으니”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와 그의 보혈의 능력을 의지하는 자 만이 참으로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칭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칼빈은 로마가톨릭의 면죄부 판매가 그리스도 보혈의 피를 욕되게 한다고 반박하고 있다.
“이런 짓들은 그리스도의 피를 욕되게 하는 짓이요 사탄의 조롱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의 은혜에서 떠나게 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에서 떠나게 하며, 참된 구원의 길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피가 죄 용서와 화목과 보속을 위하여 충족하다는 것을 부인하면서 마치 그 피의 능력이 모자라고 말라버려 없어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다른 무엇으로 공급하고 채워야 한다고 떠드는데, 이보다 그리스도의 피를 더 욕되게 하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중략) 사도 요한은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요일 1 :7)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로마가톨릭교회는 면죄부를 사면 순교자들의 피가 면죄부 구매자의 죄를 깨끗하게 한다고 한다.”
(5) 오직 믿음(Sola Fide)
하나님께서 은혜로 준비해주신 이 구원의 은혜를 누리는 길은 믿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길밖에 없다. 바울은 로마서 1:17에서 이렇게 믿음을 강조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점에 대해 칼빈은 “율법은 양심을 짓누르고 속박하여 저주하고 정죄했다.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비를 붙잡을 때 우리는 이 자유 즉 율법의 종속으로부터 해방을 얻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죄의 용서를 확신하게 되는 것은 믿음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했고 또 “우리의 자비로우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복음의 약속들은 우리에게 무슨 선행이나 공로가 있어서가 아니고 그분의 아버지로서의 선하심에서 나온 것인데(롬 10 :20), 그 조건은 그의 기쁘신 뜻에서 나온 위대한 선물을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뿐이다.”라고 구원에 있어서 우리의 믿음을 강조했다. 그리고 칼빈은 로마서 4:4,5을 설명하며 “보수(報酬)를 요구할 만한 행위가 없는 경우에만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義)가 있다는 것과 또 공로가 없이 오직 은혜로써 의가 베풀어지는 경우에만 믿음이 의로 여겨진다.”고 강조했다.
(6) 성화(聖化, Sanctification)
칭의에 있어서 선행의 추구를 정죄하는 것은 선행을 폐기한다는 로마가톨릭의 비난에 대해 칼빈은 선행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는 선한 행실들이 하나님 의로부터 온 것이며 하나님 덕분이라고 주장한다. 즉 우리가 선행을 신뢰하거나 자랑하거나 우리의 구원을 선행의 공로로 돌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선한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시며, 우리에게서 선이 나올 수 없다고 성경은 말한다.(막 1 :17)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영접할 때 우리는 예수님과 연합한 것이 되는 것이다. 그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연합되어 한 몸이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의(義)가 우리의 의(義)가 되었다. 그리고 성령의 은사들을 통해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고 다스리시며 그를 통해 우리 육신의 정욕들을 날마다 더욱 소멸되어가는 것이다. 즉 거듭난 사람은 자신이 선행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으로 성화되어 가는 것이다. 또한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 제3권 3장 14절에서 성화는 점진적으로 진행된다고 주장했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정결케 하셨으나 우리가 육체에 있는 한 우리는 죄를 지을 가능성이 있는 연약한 상태에 있다. 이처럼 우리가 완전함에 이르기는 아직 멀기 때문에 우리는 매일 진보해야하고 우리의 잘못과 연약함을 이겨내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 바울 자신도 자신의 영혼과 육체의 투쟁을 솔직히 고백하고 있다.”(롬 7:7,8) 이렇게 칼빈은 성화가 칭의 후에 점진적으로 오는 과정임을 밝힘으로 로마가톨릭이 칭의의 조건으로 행위를 강조하는 잘못을 분명히 지적한 것이다. 즉 선행은 구원을 위한 조건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의 증거이며 열매인 것이다.
또 칼빈에 있어서 성화는 발전적인 성화이며, 완전한 성화는 종말론적이라 하겠다. 김상복 박사도 “성화는 의롭다고 인정받은 죄인이 매일매일 거룩함 안에서 성장하여 의롭게 되어가는 과정이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완전한 성화는 죽는 순간에 이루어지며 그것은 영화롭게 된다는 말이다.”라고 했다. 정성구 박사도 아브라함 카어퍼의 말을 인용해서 중생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 과정에서 일어난다고 강조한다. “중생은 영적 생활을 즉각 주는 것이라면 성화는 하나님의 거룩함에 서서히 그리고 점진적으로 이루어 가시는 것이다. 그런데 성화는 인간이 보완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성도들의 심령에 거룩한 기질을 창조하듯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지는 것이다.”
(7) 칭의와 예정(豫定, Predestination)
칼빈의 칭의교리를 논할 때 칭의와 예정의 관계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면 칭의는 전적인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로마서 8:30은 이렇게 말한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 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주권적 의지로 의롭게 될 자를 영원 전에 미리 결정하셨다는 것이다. 미리 정하신 자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의롭게 하신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의롭다고 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할 때 그의 은혜의 위대함에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예정론이 개혁교회의 주된 특색으로 삼기보다는 그것을 하나님 중심사상 또는 하나님의 주권 사상의 필요 불가결한 표현으로 보았다. 하나님의 모든 은혜는 인간의 의(義)나 공로를 보시지 않고 하나님의 강권적인 뜻으로부터 흘러나온다고 했다. 정성구 박사는 ‘종교개혁과 칼빈’ 강의를 통해 “칼빈은 이 칭의 교리만이 하나님의 영광을 손상시키지 않고 그대로 유지할 수 있다고 했다. 인간의 협력이나 인간의 공로를 내세우는 사상은 어느 것을 막론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끌어내리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강조한다. 이처럼 개혁주의의 칭의교리는 하나님 중심 사상 즉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하나님의 영광을 기초로 하고 있다.
(8) 칭의와 하나님 영광(榮光)
칼빈은 로마서 3:26 “이때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을 설명하며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의를 베푸시는 목적이 바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임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조금이라도 자기의 의(義)를 자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빼앗는 행위라고 로마가톨릭의 공덕 사상과 보속 행위를 비판했다. 즉 조금이라도 자기 자신의 것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을 대적하여 일어서는 것이며 또한 그의 영광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이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칭의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것으로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요 은혜의 역사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보혈의 공로를 통해서 우리를 의롭다고 칭해주시는 것임으로 인간 쪽에서 할 것이라고 는 아무것도 없다.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이처럼 칭의교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기초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의롭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것을 영접하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영광 돌리며 그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글쓴 이 / 아브라함 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