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

기독교와 공산주의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하였느니라.”하시니,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하였느니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하시니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르되 “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하였느니라.”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마 4:1-11)

시작하는 말 

우리 민족이 일제(日帝) 치하(治下)로부터 1945년 8·15 해방(解放) 이후 대한(大韓) 사상계(思想界)에 있어서 가장 요원화세(燎原火勢 무서운 기세로 퍼져 나가는 세력)로 일어난 사상(思想)은 공산주의(共産主義) 사상입니다.

최근에는 신(新) 민주주의니 진보적(進步的) 민주주의니 하고 개명(改名) 하여 뭇사람의 뇌수(腦髓)를 혼미(昏迷)하게 할 뿐 아니라, 지금(1947년) 38선으로 말미암아 이국(異國)처럼 된 북한(北韓)에 있어서 정치, 사회는 공산주의(共産主義) 일색(一色)으로 되어 버렸고, 교회는 참으로 억울한 박해(迫害)를 당하고 있습니다.  

현상(現狀)이 이에 이르렀으므로 내가 ‘기독교와 공산주의’라는 주제로 기독 신자(信者)의 입장에서 이 사상을 검토(檢討), 비판(批判)함으로써 이 혼돈(渾沌)한 현 사상계에서 우리 신자들이 걸어 나가야 할 노선(路線)을 명확히 파악하여 위로는 하나님께 영광(榮光)을 돌리고 아래로는 모든 동포에게 참된 길을 주자는 것입니다.

봉독한 성경 본문을 보면 “…주리시더니”, “시험하는 자가”, “…이 돌을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는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사실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인류가 다 당하는 경험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첫째, ‘주린 대중’ 즉 노동자, 농민, 소시민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하루의 양식(糧食)도 찾지 못하고 굶주리고 있고 둘째, ‘시험하는 자’가 있는데 이는 대중이 주릴 때에 반드시 찾아옵니다. 셋째,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시험입니다.

이 시험의 요지(要旨)는 부당(不當)한 수단(手段)으로라도 “어서 먹어라. 먹어야 산다. 먹고야 볼 것이 아니냐?”하는 것입니다. 밀을 가지고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하면 시험이 아닙니다.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데 시험의 핵심(核心)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주린 인류가 당하는 이 큰 시험을 인류의 대표로서 완전히 이기셨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는 진리로 마귀를 물리치셨습니다. 이 진리의 뜻은 물론 사람은 먹어야 삽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저 먹고만 사는 짐승이 아니고 하나님의 형상(形像)대로 지음을 입은 사람인즉 곧 영혼(靈魂)의 소유자이므로 육신(肉身)만 살기 위해 영적 생활을 희생(犧牲)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사회 개조(改造)니 혁명(革命)이니 운운하는 이들의 실수는 대개 이 점에 있습니다. 대중(大衆)이 경제적 해결을 위해 몰두(沒頭)하는 중에 사람은 단순히 먹고만 사는 동물 이상(以上)이라는 것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와 공산주의’와의 관계를 말씀드리기 전에 먼저 마음에 분명히 기억할 것은 본래 종교 특히 기독교는 사회의 그 어떤 제도(制度)도 초월(超越)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영적 생활에 관계되고, 이 영적 방법을 윤택케 하는 것이 그 주요 사명이지 인간의 사회생활 특히 경제생활을 지도(指導)하거나 계몽(啓蒙)하는 것이 본래의 목적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회의 사상이라도 단순히 사회문제 경제문제만 국한되고 그 범위를 넘지 않는다면 이론적으로 종교와 사회사상 사이에 마찰(摩擦) 될 것도 없고 충돌(衝突) 될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못하여 기독교도 영적 방면이 그 주요 세계이나 인간 생활 전체에 그 영향을 주고 사회사상도 어떤 것은 사회문제에만 국한하지 않고 그 범위를 넘어서 어떤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철학을 배경으로 하고 선전(宣傳)하며 또는 종교를 곡해(曲解)하여 무리한 간섭과 박해를 가하는 데서 마찰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공산주의도 노농계급(勞農階級) 해방운동(解放運動)이고 기독교도 노농계급에게 복음과 해방을 주는 종교인데 항상 서로 반대(反對)하는 지경(地境)에 있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이렇게 된 책임은 양편에 다 있다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제정(帝政) 러시아에 있어서 희랍정교회(Church of Greece)가 귀족 또는 정부와 결탁하였던 실패에 책임이 있고, 공산당 사상과 그 운동자들이 종교에 대해 무지하여 무리한 박해를 가행(加行)한 것에 책임이 있습니다.

공산당 사회사상인 공산주의는 대체 어떤 것입니까? 

이에 대한 항간(巷間)의 관찰을 살펴보니 사람들이 공산주의(共産主義)를 이렇게만 알고 있습니다.

  • 네 것 내 것 없이 누구나 다 같이 먹고 같이 입고 같이 사는 것이다.
  • 일은 조금하고도 넉넉하게 살고, 교육은 나라에서 시켜주니까 받을 수 있고, 병나면 치료비 없이 약값을 받지 않고 고쳐준다.
  •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한 만큼 받는다.(부하린의 공산주의 ABC에서)
  • 사회 계급을 타파하고 남녀평등을 주창(主唱)하는 것이다.

이것은 유토피아(utopia, 이상향) 관념(觀念)이고 공산주의(共産主義)가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공산주의라고 혼돈(混沌)해 버렸습니다. 이 유토피아 관념은 공산주의에서 비로소 생긴 것이 아니고, 고대 희랍 철학에서도 또 성경에서도 많이 찾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즉 구약에 기록된 이사야의 메시아 왕국관념, 신약에는 요한의 묵시 중에 보여진 기독교의 천년세계, 토마스 모어(Sir Thomas More, 1478-1535, 영국)의 유토피아 그 외 뭇 성자나 이상주의(理想主義) 자들은 이상(理想)보다 더 찬란한 유토피아의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 이 유토피아를 지구상에 실현하려고 실험해 본 일도 있습니다. 기독교 사상(史上)에 보이는 초대 기독교 수도원 또는 현재의 가정(家庭)이라는 것이 일종의 그것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공통한 인류의 이상(理想)이요, 공산주의자들만의 전용물이 아닙니다. 요컨대 문제는 “유토피아 관념이 좋으냐? 나쁘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도달하는 “그 길이 어느 길이 바르냐?”하는 방법론에 있는 것입니다. 그 길에는 다음과 같은 길들이 있습니다.

  • 기독교가 가르치는 길,
  • 사회주의(社會主義) 자들이 말하는 길,
  • 기독교 사회주의자들이 제창(提唱)하는 길,
  • 플라톤의 ‘공화국론’(共和國論, Republic)에 기록된 길,
  • 공산주의(共産主義) 자들의 주장하며 부르짖는 길

그러면 공산주의자들의 길은 어떠한 길인가를 기독교적 입장에서 검토하기 전에 공산주의의 의의(意義)를 밝히기로 하겠습니다.

사회주의(社會主義, socialism)니 공산주의(共産主義, communism)니 하는 말은 모두 산업혁명(産業革命, Industrial Revolution, 1760-1820, 영국) 이후 19세기 초엽에 생긴 말인데, 그 연원(淵源)은 1826년 프랑스 사상가인 하시엘(Alexandre Hatier, 1856-1928, 프랑스)이 ‘사회주의’란 말을 그의 잡지에 처음 사용했고, ‘공산주의’란 말은 그 해에 영국의 사상가 오웬(Robert Owen, 1771-1858, 영국)이 처음 사용했습니다. 지금 ‘공산주의’라고 번역되는 ‘communism’은 공공부락(公共部落), 공유주의(共有主義)의 뜻을 가졌으니 공산주의란 말은 경제적 술어이고 정치적 술어가 아닙니다.  

그런 것이 근래에 와서 공산주의란 말을 사회주의(社會主義)란 말과 거의 동일한 의미로 사용해 왔고 또 극히 광범위한 다양(多樣)의 의미로 사용해 왔습니다. 어떤 사회주의 사전에 사회주의의 정의를 36개의 다른 의미로 기록했는데, 그 외에도 사회민주주의(社會民主主義), 무정부주의, 집산주의(集産主義), 기독교 사회주의 등 복잡한 사회사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 원인은 자본주의의 발전으로 부르주아(자본가)와 프롤레타리아(무산계급) 계급의 간격이 커짐에 따라 어떻게 하면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지위를 향상케 할까 함에 있는 것입니다.

이때에 독일에는 칼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 독일), 영국에는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 독일)가 일어나서 1848년에 소위 ‘공산당선언’(The Communist Manifesto, 1848)을 발표했는데 여기에서 공산주의의 핵심을 발견할 수 있게 되었고, 금일의 공산주의란 말은 이 마르크스주의(Marxism)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주의란 무엇입니까? 

마르크스주의(Marxism)란 마르크스의 사회철학(社會哲學)인 ‘변증법적 유물론(辨證法的唯物論, dialectical materialism)’과 ‘유물사관(唯物史觀)’에 의한 것인데 “사회변혁은 물질적 생산력의 발전과 소비관계로 이루어지는 것이다.”라고 주장하며 다른 요소(要素)는 전혀 무시하는 태도를 간파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이상(理想)은 자본계급(資本階級, 부르주아)을 타파하고 무산계급(無産階級, 프롤레타리아)을 향상(向上) 시키는 것인데 이것은 생산(生産)과 소비(消費)를 국유화(國有化)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유물론적 사회철학을 가진 그들이 유물론에 중독되어 인간 생활에 있어서 물질(物質) 이상의 것에 대한 감상력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종교, 도덕, 예술에 대하여 전혀 몰이해(沒理解)합니다.

우리는 그들의 종교관이 얼마나 피상적이요, 맹목적인가 함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들의 견해에 의하면 “종교는 자본주의의 결과로 생겨진 생활고(生活苦)에서 도피하기 위하여 생겼다. 그러므로 종교는 아편과 같다. 노동자로 하여금 곤란한 현실에 무감각하게 만들어버린다. 또 자본가의 양심을 마비케 한다. 그러므로 자본주의가 없어지고 생활고가 없어지면 종교는 필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두 가지 큰 과오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종교가 생활고로 인하여 생겼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종교가 생활고에 허덕이는 인간을 위안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의 원인은 아닌 것입니다. 종교의 근원을 사회적으로 설명하면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 종교는 인간의 환난의 시기뿐만 아니고 행복할 때에도 즐거움과 감사의 정으로 신(神)을 예배하게 됩니다.
  • 인간은 도덕적 동물로 선(善)을 탐구하며 양심적 생활을 동경하는 중에서 신(神)을 예배하게 됩니다.
  • 또 인간이 인간문제 우주문제를 해결코자 하는 중에 즉 인생의 의의(意義)를 발견하고자 하는 데서 종교가 생겼고,
  • 인간생활을 각 방면에 풍부히 하겠다고 하는 데서 종교가 생긴 것입니다.

둘째, 모든 인생의 괴로움이 사회 상태나 경제 상태로 기인한다는 말도 잘못입니다.

모든 인생의 괴로움을 일반적으로 설명하면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 어떤 괴로움은 천연적으로 옵니다. 병사, 천변, 지재, 등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인생은 아무래도 고난 속에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 경제적 이유 이외에 자기의 죄로 인하여 오는 고통이 많습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에도 불구하고 종교를 공산주의자들은 그렇게 피상적(皮相的)으로 간주함은 유물론적 철학에 중독 된 까닭입니다.

그들은 또한 인류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 하여 노동대중(勞動大衆)에게 계급의식(階級意識)을 고취하여 정권(政權)을 획득할 것이라고 주창(主唱)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계급의식만이 있을 뿐이요, 민족(民族)이란 관념(觀念)은 없습니다. 동일한 민족일지라도 다른 계급이면 적(敵)이요, 다른 민족이지만 동일 계급이면 그들이 사용하는 말을 빌려 ‘동무’입니다. 민족적 독립(獨立)보다 자기 계급의 정권(政權) 획득이면 그만입니다.  

현상(現狀)을 보아 대한(大韓) 내의 좌익분자(左翼分子)들이 대한(大韓) 국호(國號)를 ‘인민공화국(人民共和國)’이라고 부르짖고, 장차 ‘소련 연방’가입 운운 설도 이러한 계급 사상에 근거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를 계급투쟁(階級鬪爭)의 기록의 연결이라고만 보는 것은 큰 과오(過誤)입니다. 생물계에나 인류의 역사를 보아 생존경쟁(生存競爭)이나 계급투쟁뿐 아니라, 상부상조(相扶相助)와 협조의 현상을 또한 볼 수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더욱이 대한(大韓)에 있어서 계급투쟁을 고취함은 거의 무의미하고 우리 민족에게 큰 화(禍)를 미치게 하는 것입니다. 그 까닭은 대한(大韓)에는 대지주(大地主) 자본가들이 다 일본인이었는데 지금 그들은 다 쫓겨 갔습니다.

이제 신(新) 정부가 수립되고 재산을 공정히 처리한다면 대한(大韓)의 노농문제는 자연히 해결될 것입니다. 현재 각 정당의 어느 정강(政綱 정치 강령)을 보든지 대기업은 국가의 경영으로 하고 토지는 농민에게 분양하자는 조목이 있습니다.(이 설교는 1947년에 한 것이다. – 편집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급의식을 고취하여 민족 분열(分裂)을 기도(企圖)하며 민생의 긴급한 문제인 생활필수품 생산을 지연하게 함은 무슨 이유입니까? 금일의 소련도 슬라브 족속 중심의 국가이거늘 하물며 민족통일이 대한 독립의 절대 조건인 금일(今日)에 있어서 이 마르크스식 계급투쟁에 중독된 사회운동자들이야말로 대한민족의 반역자(叛逆者)라고 아니할 수 없을 것입니다. 금일이야말로 우리 민족은 그리스도의 뜨거운 사랑을 가지고 애(愛)의 단결을 할 때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의 투쟁을 통한 혁명사상

다음은 공산주의자들의 이 투쟁(鬪爭)을 통한 혁명사상(革命思想)을 생각하건대 물론 기독교에서도 때로는 혁명을 시인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부득이한 경우에 만입니다. 할 수 있으면 혁명을 피하고 여론(與論)과 의회(議會)를 통해 점진적으로 사회제도를 개조(改造)함이 희생이 적고 제일 유리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공산주의자들은 혁명사상에 중독되어 혁명이 필요치 않은 곳에도 무조건 혁명 운운하며 그야말로 평지에 풍파(風波)를 일으키고자 합니다.

지금(1947년) 대한(大韓)의 현실은 정당한 입법기관(立法機關)과 정부(政府)만 수립(樹立)되면 얼마든지 의회(議會)를 통해 노농계급의 권익을 확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혁명이 아니고 정당하게 합법적(合法的)으로 얼마든지 싸울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연히 혁명 운운하고, 더욱이 혁명은 사회의 상태가 악화될수록 일어날 기회가 있다고 하여 이런 사상을 가진 자들이 대한(大韓)의 곤궁을 더욱 유도하여 인민이 더욱 공경에 빠지도록 획책(劃策)하는 모양입니다.

    위조화폐(僞造貨幣) 사건, 공출(供出) 방해 등에 대한 말은 무엇을 시사합니까? 이런 분자들이야말로 종교적 도덕적 견지에서 뿐 아니고, 실로 인도적 견지나 민족적 견지에서 단연 용서할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맹성(猛省, 깊이 반성하여 깨달음)을 촉구해 마지않습니다.  

  이상 말한 바와 같이 유물사관을     사회철학으로 하고 계급투쟁을 주창(主唱)하는 공산주의는 프롤레타리아(노동자, 농민) 독재(獨裁)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계급투쟁과 혁명을 통하여 전권(全權)을 얻은 후에는 독재정치를 하고 계급 없는 사회에 이를 때까지 무자비(無慈悲)한 투쟁을 계속한다는 말입니다. 그리하여 공산주의자들이 자본계급과 지식계급과 그 밖의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모든 인물을 다 숙청(肅淸)하여 없애버리고 봉건제도의 잔재인 종교와 도덕도 다 전멸시키고 생산기관이나 소비기관은 다 국유(國有)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부하린(Nikolai Ivanovich Bukharin, 1888-1938, 소련의 공산혁명가)이 저술한 ‘공산주의 ABC’에 기록한 것을 보면 공산혁명이 이루어지면 “그 때에는 상품은 없어지고 생산물뿐이며 이는 매매(買賣)되지도 않고 교환되지도 않으며 사회적 창고 내에 넣어두어 필요한 각 사람에게 그저 나누어 준다. 물론 화폐란 것도 무용한 종이조각이 되어 버린다.”고 이렇게 몽상가(夢想家)처럼 공산주의의 꿈같은 세계가 전개된다고 말합니다.

이 도원경(桃源境) 같은 세계가 이 지구에서는 벌써 모 연방(소련연방)에 임하였는데, 대한(大韓)에도 어서 완전히 임하기를 절망(切望 간절히 바람)하는 공산도배(共産徒輩, 함께 어울려 나쁜 짓을 하는 무리)가 불소(不少 적지 아니함)한 모양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선전하며 민중(民衆)을 미혹(迷惑)합니다. “(공산주의가 되면) 돈도 쓸 데 없고 물건은 우리가 필요한 대로 그저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사회, 자본계급에서 일으키는 전쟁도 다시 있을 수 없고, 맹렬한 생존경쟁도 없는 이러한 사회가 얼마나 좋은가? 참 유토피아가 아니냐?” 이런 사회를 누가 동경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한 가지 촛불처럼 분명한 사실은 이런 사회가 이루어지려면 꼭 한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정권(政權)과 경제권(經濟權)을 한 손에 잡은 권력자가 하나님처럼 지혜롭고 사랑이 많아야 하며 또 모든 인민(人民)은 천사처럼 선(善)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하면 이런 사회를 이루기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못하여 인간의 부패한 성품(性稟)이 이대로 존속한다면 이런 인간을 데리고 공산사회(共産社會)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오직 계속적인 독재가 필요할 것입니다. 이러한 독재자는 일찍이 역사상에 유래가 없는 큰 권세를 가진 자입니다. 곧 전권과 경제권을 전부 쥐고 백성들에게 고루(骷髏, 해골) 빵을 먹일 것입니다. 마르크스의 말과 같이 능력에 의해 일을 시키고 요구에 의해 나누어 줄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기억할 것은 이런 사회에 자유(自由)는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먹는 것은 혹시 근심 없이 고루 먹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아무런 자유도 없고 그저 일이나 시키는 대로 하고 주는 대로 먹는 사람을 옛날에는 종(從)이라고 불렸는데 공산사회(共産社會)에서만 이런 종(從)을 인민(人民)이라고 부르는 모양입니다.

또 이 공산사회에서는 계급(階級)이 없다고 거짓 선전을 합니다. 그러나 천만의 말입니다. 명사(名詞)는 변할는지 모르나 계급은 그냥 한층 더 뚜렷이 존속(存續)할 것입니다. 치자(治者) 계급과 피(被) 치자(治者) 평민(平民) 계급, 혹은 공산당원(共産黨員)과 비(非) 당원이 그것입니다.

현재(1947년) 북한(北韓)에서는 미곡(米穀) 공출(供出)을 시켜서는 일부는 공산당 간부에, 잔부(殘部 남은 부분)는 공산당원에게만 배급해 주고 일반 인민(人民)에게는 주지 않습니다. 또 모 연방(소련 연방)에서는 치자(治者, 통치자) 계급은 궁전(宮殿)에서 전날의 귀족(貴族)과 동일한 호화스러운 생활을 하는 반면에 평민(平民)은 저급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상식 있는 사람은 다 짐작할 수 있는 사실입니다.

북한(北韓)에 가서 보시오! 공산당은 또 말하기를 “지금의 독재는 과도기(過渡期)일 뿐이요, 혁명이 완성되면 완전히 민주주의가 됩니다.” 라고 선전합니다. 그러나 현재 모 연방(소련 연방)은 혁명이 있은 지 거의 30여년이나 되었는데 왜 독재가 계속되고 있습니까? 내가 단언하는 것은 마르크스식의 공산사회(共産社會)에서는 독재는 언제까지나 무한(無限) 계속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 러셀(Bertrand Russell, 1872-1970, 영국)의 이론과 같이 사람이 일을 하는 것은 소유적충동(所有的衝動)과 창조적충동(創造的衝動)에서인데 이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전자는 없어지고 후자에 의해서만 일하게 될 것이니 그것은 극소수일 것입니다. 곧 이 공산사회에서는 인민들이 열심히 일을 하지 않게 됩니다. 그리하여 독재적(獨裁的)으로 폭력적(暴力的)으로 노동을 강행(强行)하지 않으면 국가를 유지(有支)하기가 곤란 할 것입니다.  
  • 그러나 인간의 본성(本性)인 소유욕(所有慾)은 그냥 남아 있어 일을 안하고도 많은 것을 소유(所有) 하려고 할 터이니 이것을 억제(抑制)하기 위해 또 독재가 필요하게 됩니다.
  • 고금(古今)을 막론하고 독재자(獨裁者)는 자발적으로 권력(權力)을 내놓는  법은 없고 또 “권력은 언제나 부패한다.”는 루소의 말처럼 이것을 숙청하려면 혁명이 필요하고 혁명에는 독재가 반드시 따라가니 또한 독재가 계속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만일 독재(獨裁)가 없는 공산사회(共産社會)를 이루려면 그 사회를 형성(形成)하고 있는 인민 각자가 서로 사랑하면 가능합니다. 가정(家庭)은 일종의 공산사회입니다. 또는 각자가 지선(至善)하면 됩니다. 수도원이나 원시 기독교가 그러하였습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독재가 있어야 공산사회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공산주의(共産主義)는 종교(宗敎)나 도덕(道德)을 정배(定配 귀양)보낸 지 이미 오래입니다. 그러므로 공산주의는 독재가 반드시 계속될 것입니다.

공산주의 사상이 도덕과 인격에 미치는 일반영향 

공산주의자들은 성경이 가르치는 도덕(道德)을 봉건시대(封建時代)의 도덕이라고 비웃습니다. 그렇습니다. 공산주의는 ‘네 것 내 것의 분별(分別)이 없는 것이니’ 성경의 도적질하지 말라는 제8 계명과 십계명이 쓸데없어집니다. 아무 것이나 다 공산(共産)이니까 내 맘대로 무엇이나 가져와도 도둑질이 아닙니다. 그 사회는 도둑놈이 하나도 없게 됩니다.

또 가족제도(家族制度)도 봉건시대의 유물(唯物)이니 신시대에는 정조(貞操)라는 거추장스러운 관념을 내버리고 자유로운 성(性) 생활을 향유(享有)해야 한다고 부르짖습니다. 레닌도 “아이들과 일하는 데 장애가 없는 한 아내는 3일 만에 한 번씩 바꾸어도 상관치 않겠다.”고 하였습니다.(여자 공유제를 말함-편집자) 그러니 간음(姦淫)하지 말라는 성경의 제7 계명이 무용하게 됩니다. 북한에 강간죄가 없어지고 이혼이 성행된다는 말을 듣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어떠한 다양한 짐승과 같은 추태(醜態)가 양성(養成)될지는 우리가 물어볼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이 공산주의 사상에 미혹(迷惑) 당하는 것은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생존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생활하기 위해서이다.”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1854-1900, 영국)는 말했습니다.

1848년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발표한 ‘공산당선언’ 첫 구절은 이런 말로 시작합니다. “한 괴물(怪物)이 유럽을 횡행(橫行)하고 있다. 곧 공산주의란 괴물이다.” 저들 자신들의 말 그대로 공산주의이야 말로 일대 괴물(怪物)입니다. 이 괴물이 지금(1947년) 삼천리(三千里) 강산(江山)에 횡행(橫行)하며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이 괴물을 베어바릴 자 누구입니까? 이 사상이야말로 묵시록(黙示錄)에 있는 붉은 용(龍)입니다. 이 용(龍)을 멸(滅)할 자 누구입니까? 사람은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입니다.(*) 

설교 자 / 한경직 목사(韓景職, 1903-2000, 평안남도 평원 공덕면 간리 마을에서 한도풍(韓道豊)과 청주 이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출생, 본관은 청주(淸州), 호는 추양(秋陽), 1925년 평양 숭실전문학교(崇實專門學校) 졸업, 1926년 미국 엠포리아대학 졸업, 1929년 프린스턴 신학대학을 졸업, 1948년 엠포리아대학에서 신학박사, 1945년 서울 영락교회(永樂敎會) 부임, 1954년 숭실대학 학장, 1955년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장, 숭실대학(崇實大學) 이사장, 서울여자대학 재단이사장, 영락상업고등학교 재단이사장, 대광(大光)중고등학교 재단이사장, 다수의 설교집과 기고문) 본 기사의 출처 / 한경직 목사 설교집 1권 중, 1947년 베다니교회에서 한 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