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기독교 부활 진리의 개관

고린도전서 15장 중심 기독교 부활 진리의 개관

1. 기독교 부활 진리의 개관

(1) 불멸(不滅)에 관한 호기심

“사람이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까?”(욥 14:14)라고 욥이 하나님께 질문했다. 그러나 유일하게 욥만 이 질문을 한 것이 아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죽음 이후에도 삶이 있는가?”라고 불멸(不滅)에 관한 질문을 할 것이다. 죽음 이후도 삶이 있다는 걸 믿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아무리 그런 사람도 이 문제와 씨름해 본 적은 있을 것이다.

(2) 고린도교회를 타락시키는 자들  

고린도에 부활(復活)을 부인하는 자들이 있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을 기록하게 된 이유가 12절에 나타나 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고전 15:2)

부활을 부인하는 사람 중에는 고린도교회 교인들도 있었다. 고린도 교회의 잘못은 대부분이 실제적인 것들이었으나 15장에서 우리는 그들이 하나의 중요한 교리적인 잘못을 범했음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부활 문제이다. 부활을 부인하면 아주 엄청난 신앙의 결과들을 초래하게 되므로 바울은 이 문제를 단호하게 다루지 않으면 안 되었다.

(3) 부활의 중요성  

예수 그리스도 부활을 부인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기초 전체를 파괴하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의 기초는 예수의 교훈, 생애, 사랑, 기적 또는 죽음에 있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써 그 절정을 이룬 이 모든 것들 위에 기초하고 있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위에 언급된 바와 같은 기독교 신앙의 근간이 되는 모든 다른 요소들은 아무런 가치가 없게 된다. 바울은 이 같은 중요성을 깨닫고 고린도전서 15장을 길게 기록했다.

(4) 영원(永遠)에 대한 의식

인류 전 역사를 통해 모든 사람, 모든 사회, 모든 종교, 모든 조직은 항상 사후(死後) 생명의 실재 문제와 대면하게 된다. 예일 대학교 학장이었던 찰스 브라운(Charles Brown)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실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것에 등을 돌리셨다는 것이요, 둘째는 그분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런 다음 그를 무덤에 버리셨다는 것이며, 셋째는 그분께서 인간의 마음속에 인간 불멸(不滅)에 대한 소원을 심어놓으시고 그것을 충족시키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즉 인간은 항상 불멸을 갈망하고 추구해 왔으며 그리고 그것이 어떠한 것인가를 알고자 애써 왔다는 말이다.

(5) 성경의 대답

성경은 죽음 이후 인간의 삶에 대해 우리에게 이렇게 확증적(確證的)인 대답을 해 주고 있다.

  • 인간 사후(死後) 모든 영혼 앞에는 영원한 지옥(地獄) 아니면 천국(天國)  이란 내세가 있다.(마 25:46, 마 7:13,14, 계 20:12,15 참조)
  • 어떤 사람은 심판의 부활로 나오며 또 어떤 사람은 생명의 부활로  나올 것이다.(요 5:25-29)

성경은 죽음 이후 삶의 실재에 대해 영원한 천국과 영원한 지옥이 있다고 명백히 말하고 있다. 이 같은 죽음 이후의 삶을 긍정적인 면에서 알아보기 위해 고린도전서 15장을 살펴보게 되었는데 여기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부활의 중요성과 또한 이것이 그를 믿는 자들에게 주는 의미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15장의 주제는 예수의 부활과 또한 그분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부활할 것이라는 사실의 중요성이다. 바울은 부활에 대한 증거와 또한 예수께서 죽으셨다 다시 살아나셨음을 왜 믿어야 하는지 보여 주며 부활을 부인(否認)하는 자들을 다루고 있다.

2. 기독교의 핵심교리는 부활

신약성경에 부활에 대한 언급이 104회 나온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모든 사도의 설교에 있어 그리스도의 부활은 항상 중심 내용이었다.

  • 유다 자살 후 결원된 사도를 선출했는데 조건 중 하나가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한 사람이어야 했다.(행 1:21,22)
  • 오순절 날 베드로의 첫 번째 설교는 주님의 부활에 대한 설교였다. 32절에 베드로는 말하기를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라고 했다.(행 2:14-36)
  • 사도행전은 또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라고 말씀하고 있다.(행 4:33)
  • 바울이 아레오바고 설교의 중심 교리는 예수 부활이었다.(행 17:22-32)
  • 바울은 아그립바 앞에서 자신을 변론하며 부활을 설교했다.(행 26:23)

기독교의 부활은 이처럼 신앙의 근본이다. 그러므로 만일 부활이 없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미혹된 순교자의 영웅적 죽음이나 광인(狂人)의 감상적(感傷的) 죽음 또는 한 사기꾼이 처형당한 것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런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부활하심으로 우리 죄의 값을 지불(支拂)하는 대속(代贖)의 죽음이 되었으며 또 믿는 자들을 자유하게 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 된 우리는 우리 신앙의 핵심인 부활에 그토록 집착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어야 하는가? 그렇다. 반일 예수의 부활을 믿지 못한다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로마서 10:9에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라고 했다. 이처럼 우리의 구원은 부활 신앙에 근거(根據)한다. 따라서 만일 자신이 부활을 믿는지 안 믿는지 잘 모르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무엇을 주장하든 그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다.

(1) 부활의 증거(고전 15:1-11)

바울은 세 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 함으로 고린도교회에 들어온 이단에 대해 반격을 가하기 시작한다.          

  (1,2절)

바울의 부활 메시지가 참되다는 첫 번째 증거는 지구상의 모든 믿는 무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한데 모인다는 것이다. 바울의 이 말의 의미는 “내가 전한 부활의 복음을 너희가 받아 그 위에 섰으며 그 복음에 의해 구원받았으며 또한 오늘도 너희가 그것을 굳게 지키고 있다는 사실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계시며 자기의 교회를 세우고 계심을 나나 내는 것이다.”라는 것이다.

 ② 구약 성경(3,4절)

예수의 부활을 믿는 두 번째 이유는 그것이 구약 성경에 예언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바울은 말한다.

  • 십자가에 달리실 것이 예언됨(3절) : 구약 성경은 메시아가 우리 대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을 예언했다.(시 22편, 사 53장) 또 구약의 제사에 제물로 바쳐진 어린 양은 모두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모형이었다.(요 1:29, 행 8:32, 벧전 1:19)  그리고 모세가 광야에서 든 구리 뱀은 장차 들리실 그리스도 즉 죄를 대속하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에 대한 모형이었다.(민 21:9, 요 3:14-16) 
  • 부활하실 것이 예언됨(4절) : 구약 성경은 또 메시아가 부활하실 것을     예언했다.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시 16:10)     이 예언은 하나님의 거룩한 자가 죽지 않고 다시 사실 것을 가리킨다.  과연 그분은 무덤에서 썩지 않았다.(행 2:31, 13:34-37 참조) 또 메시아가 3일 동안 무덤 속에 있을 것이 요나서 1:17에 상징적으로 예언되었다.     예수께서 친히 이것을 증거 하셨다.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배 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마 12:40)

  ③ 목격자들(5-11절)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목격자들은 아주 많았다. 열두 사도, 500여 형제, 야고보, 모든 사도, 사도 바울 – 그는 이 목격자들 목록에서 자신을 따로 언급했는데 그 이유는 남과 다른 상이(相異)한 특징 때문이었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라고 했다. 다시 말해 바울이 말하고 있는 요지는 이와 같다.  

“이 사람들은 모두 다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글쎄, 이 사람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너무 사랑하고 또한 너무나 간절히 그분을 보고 싶어 한 나머지 환상을 보았을 것이다. 그들은 간절히 그분을 보기 원했기 때문에 그분을 보았다고 생각한 것에 불과하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내 경우는 어떠한가? 내가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는 그리스도인들을 죽이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던 중이었다. 이 경우는 좀 다르지 않은가! 나는 그분을 보고 싶어 하지도 않았으며 또 그분의 환상을 구하지도 않았다. 사실 내 경우는 비록 내가 늦게 또 원하지도 않았는데 그분께서 나를 은혜로 붙들어 주시사 나는 다른 사도들보다 더 많이 수고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것은 참으로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러나 나나 다른 사도들이나 우리는 모두 꼭 같은 부활을 전파하며 믿는다.”

주님의 부활에 대해 다른 목격자들은 원래부터 그리스도에 대하여 호의적이었지만 바울은 적대적이었다. 그런데 부활에 대해서는 그들 모두의 의견이 똑같이 일치했다.

(2) 부활의 중요성(고전 15:12-20)

  ① 시비(是非) 꾼들

고린도교회 교인 중에는 부활을 부인하면서도 겉으로만 교회 일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12-20절에서 부활의 중요성을 다루고 있다. 시비(是非) 꾼들이 와서 “부활 같은 건 없어!”라고 하자 12절에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라고 반문하고 있다.            

  ② 사도 바울의 반론

사도 바울은 “죽은 자의 부활이 정말 없다고 하면?”이라는 가정(假定)과 그 결과를 말하며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13-19절)

  •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지 못하셨다.(13절)
  • 모든 설교는 무의미하며 모든 사람의 믿음은 어리석은 것이다.(14절)
  • 부활 설교자들은 모두 거짓말쟁이며 그 설교는 거짓말이다.(15절)
  • 믿음은 전적으로 무익하며 사람은 여전히 죄 가운데 있다.(17절)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담당하여 죽으셨다. 만일 그분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지 않았다면 죄가 그분을 죽인 것이다. 따라서 그분은 죄를 정복하실 수 없었다는 것이 된다. 만일 그분이 죄를 정복하는 데 실패했다면 우리는 곤경에 처할 것이다. 왜냐면 죄가 우리 또한 죽일 것이며 우리를 지옥에 떨어뜨릴 것이기 때문이다.

  ③ 그러므로

만일 부활이 없다면 우리에게는 현세(現世)뿐이라고 바울은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한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금생(今生)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더욱 불쌍한 자리라.”(19절)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해 주실 수 있는 모든 것들이 현세(現世)에 국한된 것이고 내세(來世)에는 아무것도 없다면 그런 것에 신경 쓰지 말아라! 그런 게 뭐 필요한가?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내 힘으로도 할 수 있다!”라는 말이다.

그래서 부활은 철학적 논의처럼 대강 처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만일 당신이 부활을 잘못 처리한다면 그것은 바로 기독교에서 심장(心臟)을 떼어 내는 것 같다. 왜냐면 기독교 신앙의 모든 것에 의미(意味)와 중요성(重要性)을 부여하는 것이 바로 부활이기 때문이다.

(3) 부활의 순서(고전 15:20-28)

20절의 첫 단어는 ‘그러나…’이다. 당신은 이 말이 반갑지 않은가?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그분은 다시 살아나셨으며 이것은 사실이다. 1-11절에서 주어진 증거들이 이것을 뒷받침한다. 이제 부활이 일어나는 순서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그분은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

  ① 첫 열매의 의미            

  • 원리(原理)

밭에 씨를 뿌렸을 때 똑같은 기후에 똑같은 양의 비가 내리면 맨 처음에 뿌려진 씨가 맨 먼저 결실할 것이다. 첫 열매가 나머지 농작물보다 먼저 맺어지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는 첫 열매를 원한다.”라고 하신 것은 사실 그들의 곡식 단을 조금만 바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은 무엇이든지 처음에 결실하는 것을 거둬들여 그분께 바치고 그다음 나머지 농작물들이 잘 결실하게 해 달라고 그분을 의지하라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아주 실제적인 농부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하나님, 저는 모든 농작물이 결실할 때까지 기다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만일 밭에 남는 것이 있으면 그때 그것을 당신께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렇게 하지 않고 당신께 첫 열매를 드리는 것은 나머지 곡식도 첫 곡식처럼 충실하게 결실이 될지는 불확실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첫 열매는 하나님이 받기 원하시는 것이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삶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만일 너희가 내게 첫 열매를 가져온다면 내가 너희 창고를 채워 주겠다.”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하나님께 바치는 원리를 예시(例示)하고 있다. 만일 당신이 가장 먼저 얻은 것 하나님께 제일 먼저 바친다면 그분께서는 그 나머지도 얻게 하실 것이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삶이다.

  • 과정(過程)

구약 시대의 유대인들은 첫 열매가 결실하면 그것을 베어서 성전으로 가지고 가 제사장에게 주었다. 제사장은 그 곡식이 상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탈곡하여 구멍이 뚫린 냄비에 넣어 불에 그을렸다. 그런 다음 바람에다 대고 껍질을 날려 보냈다. 이 곡식은 한차례 가루로 빻아진 다음 제사장에게 주어졌으며 그는 그것을 봉헌하였고 그것으로 떡을 만들어 먹었다. 이것이 그 과정이다. 첫 열매는 그 후에 결실할 수확의 예표(豫表)였다.          

  • 모형(模型)

바울은 이곳 고린도전서 15:20에서 그리스도를 잠들어 있는 모든 자의 첫 열매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무덤으로부터의 첫 열매이셨다. 첫 곡식처럼 그분은 자신의 생명을 베어 하나님께 바치셨으며 죽음의 불에 태워지셨다. 그리하여 그분은 ‘생명의 떡’(요 6:35)이 되셨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다시 살아날 부활(復活)에 대한 보증(保證)이시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는 우리가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 다음에 거둬지는 수확물(收穫物)인 것이다.

  ② 부활의 순서(順序)

  • 차례(次例)

그 구체적인 순서는 23절에 나온다.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 개관(槪觀)

20-28절까지 나중에 상세하게 다룰 것이기에 여기서는 개관(槪觀)만 하겠다. 아담의 타락으로 세상에 죽음의 씨앗이 뿌려졌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사람은 누구나 똑딱거리는 시계 소리와 함께 태어나는데 이 시계의 카운트다운(Countdown) 제로(Zero)가 되면 죽는다. 우리는 모두 죽음의 씨를 갖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다 부활할 것이다. 언제 부활하는가? 그가 다시 오실 때 부활한다. 그리고 부활의 왕국은 그분 것이 될 것이다. 그분은 이 나라를 취하시고 성부 하나님 외에 우주의 모든 것 그분에게 복종시키실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그것을 그분 자신을 포함하여 성부 하나님께 드리심으로 완성하실 것이다.

(4) 부활의 가치(고전 15:29-34)

  • 구원의 필요성을 느끼게 하는 것(29절) – 이것에 대해서는 뒤에 상세하게 논의하겠다.                
  • 봉사의 필요성을 느끼게 하는 것(30-32절) – 여기서 바울이 하는 말의 의미는 이렇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내가 왜 이렇게 힘들고 어렵고 험난한 삶을 살아야 하겠는가? 만일 내가 내일 죽고 그게 다라면 오늘 나는 오로지 먹고 마실 것이다. 만일 부활이 없고 내가 죽음으로써 모든 것이 끝이 난다면 나는 여한 없이 최대한으로 생을 즐기며 살겠다.”

바울의 말이 옳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을 잃는다. 모든 도덕도, 모든 정의도, 모든 윤리도 사라진다. 내일의 죽음으로 모든 것 끝이라면 차라리 오늘 원 없이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당신이 현재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최대한으로 만끽하라. 왜냐면 그것이 당신이라는 존재가 누릴 수 있는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부활이 있기에 경건하게 산다.

  • 성화(聖化)의 필요성을 느끼게 하는 것(33,34절) – 바울은 고린도인들 중 부활을 부인하고 부도덕하고 악한 삶을 사는 자들이 있다고 말한다. 그는 말하기를 부활은 반드시 있으며 또 의로운 심판이 있을 것이기에 그들과 교제를 끊으라고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러분은 의로운 표준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좋고 또한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과 사귀지 않는 게 좋으며 그들이 행하는 대로 행하지 않는 것이 좋다. 왜냐면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기 때문이다.”

당신이 믿는 바는 당신의 행위에 큰 영향을 끼친다. 세상에는 악한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스스로 말하기를 악하게 산다고 해서 불행한 결과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들은 하나님이나 부활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신하고 있다. 무신론자란 교활(狡猾)한 결론을 내리는 교활한 사람이다. 그는 하나님을 제거하고자 하는 악하고 비열한 죄인이기 때문에 자기가 죄를 범해도 아무런 불행한 결과가 생기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부활의 가치는 이렇다. 즉 만일 부활이 없다면 도덕도 없고, 윤리도 없고, 의도 없으며 아무것도 없다! 차라리 우리는 그냥 매일 놀러 다니고 육체가 하고자 하는 대로 행하며 여한 없이 즐기며 사는 게 낫다. 그러나 부활은 있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고민이 따른다.          

(5) 부활의 몸(고전 15:35-50)

  (疑問)

35절에 누군가 이렇게 묻고 있다.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즉 이렇게 비웃었다. “오, 그거 아주 좋은 말씀이오. 바울 선생, 그런데 사람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날 것인지는 왜 말해 주지 않소? 나는 죽은 사람을 많이 봤소. 그런데 얼마 후면 다 흙밖에 남은 게 없었소, 그런데 그런 그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난단 말이오?” 그들은 사도 바울이 전한 부활에 대한 모든 말을 비웃었다.

 ② (轉換)

36-41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비평하는 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원리 즉 씨가 식물로 전환(轉換)하는 원리로 그 비평적인 질문에 답하고 있다. 씨를 땅에 뿌렸을 때 그 씨는 죽고 썩고 부패하고 또 분해되며 그런 다음 그것으로부터 무엇인가가 새것이 나온다고 바울은 말한다.

당신이 전문가가 아닌 한 알지 못하는 씨앗만 보고 그것에서 어떤 식물이 나올지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당신은 이름 모를 씨앗을 심어 그것이 싹이 나서 자랄 때까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씨앗과 그 씨앗에서 자라 나오는 식물과는 그 모습이 완전히 다르다. 우리는 어떠한 몸으로 부활하는가? 바울은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모른다. 그러나 내가 분명히 아는 것은 현재 우리의 몸은 죽어 분해되어 흙이 될 것이며 그것으로부터 오직 하나님만이 알고 계시는 지금의 몸과는 다르고 또한 독특한 몸이 나올 것이라는 사실이다.”

  ③ (特徵)

42-44절에 바울은 장차 부활하게 될 부활체(復活體)의 네 가지 특징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 썩지 않음(42절) – 그것은 결코 죽거나 썩거나 늙지 않는다.
  • 영광스러움(43절) – 그것은 현세적인 몸이 아니다. 그것은 현세적인 몸을 훨씬 능가하는 빛나는 몸이다.      
  • 강함(43절) – 우리 이해를 초월한 능력을 지닌 몸으로 다시 살아난다.
  • 영적임(44절) – 우리의 자연적인 몸은 이 세상 요인에 의해 지배를 받으나 영적인 몸은 더는 세상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確證)

45-50절에 바울은 성경에 호소하여 자신의 주장을 확증하고 그는 창세기 2:7을 인용하고 거기에다 약간의 자기 생각을 첨가하고 있다.

자연적인 몸과 영적인 몸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는 가운데 바울은 아담이 자연적인 몸을 입었기 때문에 우리도 역시 아담과 같은 자연적이고 흙에 속한 인간의 몸을 입는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영적인 몸을 입으셨기 때문에 우리 역시 하늘에 속한 신령한 몸을 입는다. 우리의 첫 번째 몸은 아담과 같고 두 번째 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과 같다.

그리고 50절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기 위해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은 몸을 입지 않으면 안 된다. 썩을 몸으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⓹ 부활의 순간(51-53절)

51절은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 아니요 (중략) 다 변화하리니”라고 한다. 믿는 자들은 다 죽지는 않는다.  믿는 자들은 죽는 것이 아니라 변화(變化, 부활)할 것이다. 왜 그런가? 변화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썩지 않는 몸을 입지 않으면 썩지 않는 나라에서 영원하신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없다. 영광스러운 몸을 입지 않으면 우리는 영광스러운 영역에서 살 수 없다. 강한 몸을 입지 않고는 하나님의 강하심을 나타낼 수 없다. 영적인 몸을 입지 않고는 영적인 영역에서 살 수 없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언제 변화하는가? 52-53절에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일은 예수께서 자신의 교회를 들어 올리시기(휴거) 위해 오실 때 일어나는데(살전 4:13) 그분은 언제라도 오실 수 있다.      

  ⓺ 부활의 승리(54-57절)

54절은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라고 말하고 있다. 땅에 씨앗을 뿌릴 때 당신은 “아, 가엾어라! 불쌍한 작은 씨앗이여!”라고 그렇게 말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나는 꽃이 필 때까지 기다리겠다.”라고 말한다. 씨앗이 존재하는 이유는 꽃을 피우기 위해서이다.

이같이 우리는 “아, 슬프다! 그리스도인이 죽다니!”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결코 슬픈 일이 아니다. 왜냐면 모든 그리스도인이 충만한 부활의 생명을 경험할 것이며 또한 영광스러운 새 몸을 입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사망(死亡)의 쏘는 것을 제거(除去)하셨다. 사망은 그리스도인에게 무력하다. 승리는 우리 것이다.

 ⓻ 부활의 실용성(58절)

아마 당신은 “이것은 단지 먼 훗날에 가서 누리게 될 축복인가? 이것은 단지 미래의 소망에 불과한가?”라고 말할지 모른다. 아니다! 여기에는 상당한 실용성이 있다. 58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 자기를 충성되게 섬긴 자들에게 상급을 주시러 오실 것이니 굳게 서서 일하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부활의 실용성은 이런 것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큰 확신을 준다. 그것은 우리로 순간(瞬間)을 위해서가 아니라 영원(永遠)을 위해서 일하게 한다. 이제 나는 마지막으로 한 가지 질문으로 나의 글을 마치겠다. “당신은 당신의 삶에 부활이 실재함을 알고 있는가?” 당신이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다면 당신은 그것을 알 것이다!(*) 글쓴 이 / 존 맥아더 목사(John Fullerton MacArthur Jr., 1939-  , pastor-teacher of Grace Community Church, Talbot School of Theology, Bob Jones University, Azusa Pacific Univers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