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순교사화(22) 체코와 독일에서의 학살
기독교 순교사화(22)
체코와 독일에서의 학살

6. 화형당한 존 후스의 고난의 삶과 순교
존 후스(John Huss, 1369-1415)는 보헤미아(Bohemia) 태생으로 휴시네츠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그에게 최선의 교육을 시켰고 사립학교에서 고전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얻었다. 그 후 그는 프라그 대학에 가서 곧 그의 재능과 근면으로 두각을 나타내었다. 1408년 그는 신학 학사 학위를 받았고 이어서 프라그(prague)에 있는 베들레헴교회 목사와 대학 학장으로 선정되었다.
그는 맡은 일을 충실하게 해냈고 나중에는 그의 설교와 진리를 말하는 그의 담대함으로 유명해지자 교황과 그의 추종자들을 흥분시켰고 그들의 악의 있는 주시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후스를 분노케 한 주요사건은 교황 존 23세가 그 당시 가톨릭 국가를 침략한 나폴리의 왕 라디스로스를 치기 위해 그의 군대에 들어오는 자들은 모두 죄를 사해 주겠다고 약속하는 교서를 발행한 것이었다.
이 교서가 후스가 있는 프라그에서도 발행되자 후스는 로마 가톨릭의 행보에 반대하는 설교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교황은 그를 로마로 송환했지만 그가 명령을 따르지 않자 그를 파문시키고 후스가 거기 남아 있는 한 교황이 지정한 한 교회 이외의 프라그 모든 교회에서 거행하는 공 예배를 금지했다.
그러자 후스는 자신으로 인한 소란을 피하기 위해 휴시네츠로 물러갔다. 이즈음 영국의 개혁자 위클리프(Wycliffe, 1331-1384)가 종교개혁의 불을 붙이자 그것은 가톨릭의 가장 어두운 구석을 찌르기 시작했다. 그의 교리는 보혜미아에서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특히 존 후스와 그의 친구며 동료 순교자인 프라그의 제롬(Jerome of Prague, 1379-1416)에 의해서 큰 열심과 열정으로 받아들여졌다.
대학에서 후스의 영향력이란 대단한 것이었다. 그것은 그의 학식과 웅변과 모범적인 그의 신행일치의 생활 때문만이 아니라 그 신학 대학에서 전 보혜미안들을 대신해서 왕으로부터 그가 얻은 고귀한 특권 때문이기도 했다. 위클리프의 이론을 신실하게 옹호하면서 후스는 로마 가톨릭 대주교의 법령을 열심히 반대했다.
대주교는 교황으로부터 교서를 받고 그 지방에서 위클리프의 저서 발간을 금지시킬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그 교서에 의해서 대주교는 위클리프의 저서를 정죄했다. 이에 대항해서 후스는 대학의 몇몇 사람들과 함께 항의하면서 대주교의 선고에 대한 탄원에 들어갔다. 교황은 이 사실을 듣자마자 콜로나 추기경을 시켜서 존 후스에게 로마의 법정에 출두해서 그의 잘못된 이단에 대한 설교에 내려진 고소에 답변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후스는 그러한 출두를 원치 않았고 그가 보헤미아에서 대단한 호의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윈체스로스 왕과 왕비와 귀족들과 대학은 교황이 그러한 출국명령을 철회하기를 바랐다. 교황이 보헤미아 왕국을 이단이라 정죄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들의 예배 장소에서 자유롭게 복음을 전하도록 해 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래서 세 명의 대리인이 후스를 위해 콜로나 추기경 앞에 나타났다. 그들은 후스가 오지 않은 것을 변명하고 그들이 그 대신 답변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추기경은 후스가 불복종했다고 선포했고 따라서 그를 파문시켰다. 이에 대해서 대리인들은 교황에게 호소했고 교황은 네 명의추기경을 지명하여 사건의 전말을 조사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이들은 추기경의 선고를 확고히 하고 후스에게 뿐만이 아니라 그의 친구들과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도 파문을 확장시켰다.
그러나 후스는 이 공정치 못한 선고에 대해서 한 위원회를 구성할 것을 호소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아주 심한 법령과 프라그에 있던 그의 교회로부터의 추방에도 불구하고 그는 휴시네츠로 돌아가 계속 그곳 강단에서 글로 진리를 퍼뜨렸다.
1414년 11월 독일 콘스탄츠에서 총회가 열렸다. 그것은 그 당시 교황 직에 출마한 세 명의 경쟁자 사이에 있었던 논란을 결론 지으려는 목적으로 열린 회의였다. 이탈리아에서 제안하고 이탈리아가 세운 존, 프랑스에서 세운 그레고리, 스페인에서 세운 베네딕트 세 사람이었다. 이 회의는 4년 동안 계속되었는데 거기서 신교도들을 없애기 위한 가장 혹독한 법률이 제정되었다. 그래서 교황 존은 폐위되어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
존 후스는 이 회의에 출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자 황제는 후스가 체포될지도 모르는 위험성을 피하기 위해 그에게 다음과 같은 말로 된 안전 통행권을 줬다. “존 후스를 안전하게 가고 멈추고 머무르게 하여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돌아오게 해야 한다.” 이것을 받은 존 후스는 그것을 가지고 온 사람에게 자기는 공개적으로 이단이라는 누명을 벗는 것 이외에는 더 바라는 것이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출두하라는 명령에 대해 그 회의와 같은 공정한 기회를 얻게 됨을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추기경들은 황제가 그에게 콘스탄츠에 갔다 올수 있는 안전 통행권을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황제의 약속 같은 것은 상관도 하지 않았다. “이단자에게는 신의를 지킬 필요가 없다.”는 회의의 원칙에 따라 그가 도시에 있다는 것이 알려지자 체포되었고 궁전 안에 갇혔다. 황제에게 안전 통행권을 탄원했던 후스의 친구 한 사람이 교황에게 신의를 지키지 않았음을 지적했다.
그러나 교황은 자기는 그런 것을 허용한 적이 없으며 황제에 대한 의무에도 매이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후스가 감금되어 있는 동안 그 회의는 종교 재판소 역할을 했다. 그들은 위클리프의 교리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이미 죽은 그에게 형을 집행 할 수 없으니 그의 유해를 파내어 태워 버리라고 명령했다. 그 명령은 그대로 이행되었다.
한편 보혜미아와 폴랜드 귀족들은 후스를 살리기 위해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하였다. 후스가 회의석상으로 끌려나오고 그를 고소한 고소문이 읽혀졌다. 그것은 26개 항목 이상으로 되여 있었고 대부분 그의 저서에서 발췌한 것들이었다. 그에 대한 심문이 끝나고 그가 다시 법정에서 끌려 나가자 그가 그의 이단적인 주장을 취소하지 않는 한 그를 이단자로 태워 죽이라는 결정이 그 회의에서 내려졌다.
그때 후스는 더러운 감방에 갇혀 낮에는 단단히 족쇄에 채웠졌기 때문에 움직이지도 못할 지경이었고 밤에는 감방 벽에 달린 고리에 손을 꽁꽁 묶여 있었다. 그는 그런 상태에서 며칠을 계속 보냈고 그동안 보헤미아의 많은 귀족들이 그를 구하려고 그의 편에서 중재했다. 또한 그의 석방을 위한 탄원서를 작성하여 보혜미아에서 가장 유명한 귀족 서너 명이 그것을 회의에 제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정에는 후스의 적들이 너무나 많아 그 탄원서에는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고 개혁자는 그 무자비한 법정 선고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탄원서가 제출된 직후 황제는 후스에게 그의 주장을 취소할 것을 설득시키기 위해 4명의 주교와 2명의 제후를 보냈다. 그러나 후스는 눈물을 흘리며 그가 진리의 하나님의 정통 교회에 대한 믿음을 거스르는 것을 설교했거나 저술했다는 양심의 가책이 없음은 하나님이 그 증인이시라고 말했다.
1415년 7월 4일 그는 마지막으로 회의석상에 불려 나갔다. 오랫동안 심사를 마친 후 그는 신앙을 포기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것을 거절했다. 회의에서는 그를 고집쟁이요 고칠 수 없는 자라고 비난하고 그를 신부직에서 파면하고 그의 책들을 공개적으로 불살랐으며 그를 세상 권력에 내 주었다.
그러나 후스는 조금도 감정적 동요가 없이 자신에게 내려진 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선고가 끝나자 무릎을 꿇고 눈을 들어 친국을 향하여 고대 순교자의 아량을 가지고 외쳤다. “오 나의 하나님! 당신의 무한한 자비로 내 원수들의 이 부정을 용서해 주옵소서. 당신은 나를 고소하는 자들의 부정을 아십니다. 내가 얼마나 왜곡된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되어 있는지요. 나는 가치 없는 증거와 잘못 된 정죄로 얼마나 압박을 당해 왔는지요. 그렇지만 오 나의 하나님!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당신의 그 자비로 내게 가해진 잘못을 갚지 말아주옵소서.”
그의 표정에는 평온이 감돌았다. 그것은 그의 영혼이 영원한 행복의 영역으로 다가가고 있다는 표시였다. 주교가 마지막으로 그에게 그의 신앙을 버리라고 종용하자 그는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 제후들과 주교들은 나에게 당신들 앞에서 내가 잘못했음을 고백하라고 충고합니다. 그것이 만약 인간의 불명예와 수치로만 된 것이라면 그들은 혹시 쉽게 나를 설득해서 잘못했다고 자백시킬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보시는 가운데 있습니다. 그 분을 크게 거스르지 않고서는 그들이 요구하는 바를 나는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그들이 나를 대적하여 잘못 주장하는 바를 가르친 적이 없으며 다만 언제나 그 반대로 성경대로 설교했고 가르쳤고 썼으며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교들은 그를 황제에게 넘겨주었고 황제는 바바리아 공작에게 넘겨주었다. 그가 쓴 책들은 교회 문 앞에서 불살라졌다. 그리고 7월 6일 콘스탄츠 교외로 끌려 나가 산 채로 불에 태워졌는데 그는 그 전에 사형 집행장에 이르자 무릎을 꿇고 시편 몇 구절을 노래하더니 계속 하늘을 바라보며 외쳤다. “오 주님! 당신의 손에 저를 부탁 하나이다. 내 영혼을 의탁 하나이다. 당신은 저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오 가장 선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이여!”
장작더미에 불이 붙여지자 후스는 아주 힘찬 목소리로 찬송을 불러서 그 찬송 소리는 장작이 타는 바삭거리는 소리와 군중들의 소음을 초월하여 들렸다. 드디어 그의 목소리는 불길로 말미암아 끊어졌고 그는 곧 종말을 고했다.(*) 출처 / 기독교순교사화(존 폭스 원저, 머리 킹 편저, 생명의말씀사)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