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순교사화

기독교 순교사화(24) 유럽과 아시아에서 핍박

기독교 순교사화(24) 유럽과 아시아에서 핍박

8. 네덜란드에서의 핍박

1543년과 1544년경 핍박의 성난 파도가 플랑드르에 휘몰아쳤다. 독일의 황제며 스페인의 왕인 찰슨 5세의 통치하에 있던 지방에서는 이교도를 근절시키려고 적극적으로 애썼고 그의 그러한 노력으로 유혈극이 벌어졌다. 그것은 그의 아들이며 후계자인 필립 2세의 통치사(統治史)에서 좀 더 조직적인 알바와 종교재판소의 맹렬한 공격의 서막이 되었다. 개혁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종신 징역이나 추방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대부분은 목이 잘리거나 물에 빠뜨리거나 불에 태우거나 산채로 매장해서 순교를 당했다.

(1) 존 드 보스케인의 순교

존 드 보스케인(John de Boscane)이라는 열심 있는 개신교 교인이 안트워프에서 그의 믿음 때문에 체포되었다. 그는 우스꽝스런 형태의 재판에 회부되어 그 자리에서 자신이 개신교 교인임을 담대하게 밝히자 신속하게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아주 관대하고 모범적인 경건함 때문에 인기가 있었고 존경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당국에서는 그를 공개적으로 사형 집행하기를 두려워했다. 그들은 그가 비밀리에 처형되어야 한다고 결정하고 그를 감옥 속에서 은밀히 끌어내어 물에 빠뜨려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것은 즉시 시행되었다.

(2) 스코브란트, 휴즈, 쿠만스의 순교

1500년 스코블란트(Scoblant), 휴즈(Hues), 쿠만스(Coomans) 세 사람이 안트워프에서 체포되었다. 그들이 갇혀 있는 동안 몇몇 개신교 형제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그들은 다음과 같이 자신들의 신앙을 표현했다.

“우리가 그의 이름 때문에 고난을 받는 것이 절대자의 뜻이기 때문에 우리는 참을성 있게 순종하고 있습니다. 육이 영을 거스르지만 복음의 진리가 우리를 지탱하고 있으며 그리스도께서는 사탄의 머리를 깨뜨리실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위로를 받습니다. 우리는 소망이 있기 때문에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랑이 있기 때문에 우리 원수를 용서해 줍니다. 우리 때문에 놀라지 마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통해서 행복하며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 받기에 마땅한 자로 여김을 인해서 기뻐합니다. 우리는 다만 굳세기만을 바랄 뿐 풀려 나가기를 원치 않습니다. 우리는 한결 같은 능력을 바랄뿐 자유를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머리 위에 승리의 면류관이 놓이기를 바랄뿐 아무 변화도 원치 않습니다.”

스코블란트(Scoblant)가 맨 처음 재판을 받기 위해 끌려 나갔다. 그가 계속 그의 믿음을 고집하자 그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그는 감옥으로 돌아가면서 간수에게 수도사가 자기를 회유하기 위해 찾아오는 것을 허용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내게 아무 도움도 안 되고 다만 나를 번거롭게 할뿐입니다. 나는 내 구원이 이미 천국에 인(印)쳐져 있고, 굳게 믿고 있는 그리스도의 피가 내 죄를 다 씻어 버렸음을 믿습니다. 이제 나는 이 진흙 망토를 벗어버리고 영원한 영광의 옷을 입을 것입니다. 내가 교황의 폭군 정치에 마지막 순교자가 되고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 땅에 시작되어 영원히 이르기를 바랍니다.”

사형 집행을 당하는 날 그는 동료 죄수들과 가슴 아픈 이별을 했다. 화형당할 말뚝에 묶였을 때 그는 시편 40편을 노래했고 아주 열심히 주기도문을 반복했다. 그 기도는 의로우신 예수께서 갈릴리 언덕에서 처음 말씀하신 뒤 수백만 명의 숨결이 서려 있는 단순하지만 숭고하고 놀라운 기도였다. 그리고 그 기도는 불타는 불 속에서 마지막 숨을 거둘 때에 보다 가장 아름답게 강조되었다.

얼마 후 휴즈(Hues)는 감옥에서 죽었다. 휴즈가 죽은 뒤 쿠만스(Coomans)는 그의 친구들에게 편지했다.

“나는 이제 내 동료들을 모두 저 주님 품으로 떠나보냈습니다. 스코블란트는 순교자가 되었고 휴즈는 죽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혼자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며 그 분은 나의 방패시며 내게 넘치는 위대한 상급이십니다.”

재판정에 나왔을 때 쿠만스(Coomans)는 자신이 개혁신앙을 가진 성도임을 주저 없이 인정했다. 그리고 대장부다운 단호한 태도로 모든 책임추궁에 답변했고 자기의 이론을 복음서로 증명했다. 재판관이 말했다. “그렇지만 너는 네가 공언하는 믿음을 위해 죽겠느냐?” “나는 진리를 위해 죽을 뿐만 아니라, 복음을 위해 가장 잔인하게 괴롭힌다 해도 고난을 당할 것이오. 그 후에는 영원한 영광 가운데 하나님께서 친히 내 영혼을 영접하실 것이오.” 판결을 받은 후 그는 꿋꿋하게 사형 집행 장소로 가서 그의 믿음대로 거룩한 종말을 고했다.

(3) 로마 가톨릭 신도에 암살당한 개신교 왕자

브루군디 지방 프랑슈콩테 태생으로 철저한 로마 가톨릭교회 신도인 발타자르 게라드(Baltazar Gerard)는 모든 것을 건 행동을 함으로써 신앙이 더 견고해 진다고 믿고 개신교 신자인 오랜지(Orange)의 왕자 나소의 월리엄(William)을 암살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권총을 지니고 왕자가 궁전의 홀을 지나 식사하러 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가 통행증을 발부 받기 위해 왔노라고 거짓말을 했다. 그러나 오렌지의 공주가 그의 목소리와 태도에 좀 이상한 데가 있는 것을 눈치 채고 그의 모습이 석연치 않다고 하면서 “그가 누구냐?”고 물었다. 왕자는 통행증을 발부받기 원하는 사람이라고 대답했다. 식사가 끝날 때까지 그는 발각되지 않았고 왕자와 공주가 홀을 통과해서 돌아갈 때 기둥 뒤에 숨어 있던 암살자는 왕자를 향해 발포하여 아주 치명적인 상처를 입혔다. 상처를 입은 왕자는 겨우 이 말만 했다. “주님 나의 영혼과 저 불쌍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그리고 그는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왕자의 죽음은 전국에 큰 슬픔을 안겨다 주었다. 그의 장례식은 로 컨트리즈에서 유례없이 장엄하게 치러졌다. 그리고 그를 잃은 슬픔은 꾸밈이 없었다. “슬프다! 언제나 온갖 충성을 한 몸에 받은 그분은 ‘그의 백성의 아버지’라고 불릴 만큼 아주 보기 드문 분이었는데!”

9. 리투아니아에서의 핍박 사건

리투아니아에서의 핍박은 1648년에 시작되었고 코사크 사람들과 타타르족에 의해 아주 극심한 핍박이 일어났다. 코사크 인들의 핍박은 너무나 잔인해서 타타르족들조차 거기에 반발을 느껴 그들이 핍박하려는 사람들을 그들의 손아귀에서 구해줄 지경이었다. 나라가 황폐해졌고 방어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안 러시아인들은 큰 군대를 이끌고 리투아니아에 침공하여 가는 곳마다 파괴했다. 모든 것은 파괴된 채로 버려져 있었고 나라는 폐허가 되었으며 교회는 무너졌고 마을은 불탔다. 성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훼파되었고 성벽은 무너졌으며 사람들은 살해되었고 복음을 전하는 목사들은 특별한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10. 아비시니아(에티오피아)에서의 핍박사건

15세기 말경 아비시니아에 상륙한 포르투갈 선교사들은 전에는 기독교를 공인한 아비시니아 인들에게 로마 가톨릭의 교리를 전파하기 시작했다. 신부들은 궁전에서 크게 영향력을 끼쳐 황제는 이미 설립한 에티오피아교회의 의식을 철폐하고 로마 가톨릭교회의 의식을 세우기로 동의했다. 교황으로부터 총(總) 대주교를 받아들이기로 동의한 즉시 교황의 최고권을 인정했다.

그러나 아비시니아(에티오피아)에서의 로마 가톨릭의 이 혁신은 커다란 반대 없이는 일어날 수 없었다. 처음 아비시니아에 세워진 개신교 교회에 공언했던 가장 권력 있는 제후 몇 명과 백성들 대다수가 황제를 대항하여 일어났다. 그러나 로마 궁전과 그 간첩들의 간계로 전 왕국은 대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많은 황제들이 즉위하는 동안 전쟁이 계속되었고 1세기가 넘도록 그 전쟁은 그치지 않았다. 이러한 가운데 로마 가톨릭은 궁전의 강력한 세력이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원래 아비시니아의 그리스도인들은 핍박을 당했고 많은 교인들이 죽임을 당했다.

11. 일본에서의 핍박 사건

몇몇 포르투갈의 선교사들이 최초로 일본에 기독교 복음을 전했다. 그들은 1552년 섬에 도착해서 그들이 기대했던 것 이상의 선교 성과를 거두었다. 그들의 노력은 1616년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때 그들은 나라를 뒤엎고 천왕을 폐위시키려는 음모를 꾸였다는 모략에 빠졌다. 그래서 왕궁에서는 그들을 매우 미워했는데 그러나 몇 년 동안은 괴롭힘을 당하지 않고 평안했다. 그러다가 1622년에는 외국인이나 본국인 구별 없이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두가 끔찍한 핍박을 받았다.

처음 4년 동안 20,000명 이상의 기독교인들이 대학살을 당했다는 확실한 기록이 있다. 교회는 문이 폐쇄되었고 기독교인임을 시인하면 누구든지 즉시 사형을 당했다. 결국 기독교인들은 지오미오섬에 있는 시니아바라 도시로 피난을 가 마지막 순간까지 거기서 방어하기로 작정했다. 일본 군대는 곧 그들을 뒤 따라가 그 섬을 포위했다. 기독교인들은 비록 훈련도 무기도 다 부족했지만 끝까지 아주 용감하게 대항하여 3개월 동안 모든 공격을 막아냈다. 그러나 군비와 병사의 부족으로 결국 그들은 항복하고 말았다. 그 때 그들은 나이와 성별을 불문하고 정복자들에 의해서 무자비하게 학살당했고 기독교는 일본에 잠시 존재하다가 대군(tycoon)의 지배 하에서 완전히 근절되고 말았다.(*) 출처 / 기독교순교사화(존 폭스 원저, 머리 킹 편저, 생명의말씀사)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