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순교사화(25) 유럽과 아시아에서 핍박
기독교 순교사화(25) 유럽과 아시아에서 핍박

12. 이슬람 터키의 정복전쟁과 기독교인 학살
이슬람의 창시자 무하마드(Muhammad, 570-632)가 처음에 그리스도인들을 존경하는 체했지만 자기 세력을 확보하자마자 그리스도인들에게 학정과 피 흘리기 좋아하는 본색을 드러냈다. 그는 이렇게 일생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자기의 추종자들에게도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할 것을 유언함으로써 그것이 지금도 계속 되고 있다. 터키인들은 그로부터 종교를 받았고 아직도 그들은 그것을 유지하고 있다. 무하마드(Muhammad)와 그의 후손들은 30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아라비아, 팔레스타인, 페니기아, 시리아, 이집트, 페르사아를 지배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스스로 분열되었다.
사라센의 왕자들은 군주(君主)라는 칭호를 내 걸고 약 400년간이나 시리아와 이집트와 아프리카를 지배했으나 페르시아의 사라센 군주는 터키를 도와주고 있었다. 그때 이 터키인들이 오토마누스 장군을 필두로 그들의 주인 페르시아를 대적하여 군대를 일으켰다. 그들은 곧 페르시아의 사라센을 누르고 오토만 왕국을 세웠으며 오토마누스의 후예들은 현재까지도 터키 왕조를 이루고 있다.
콘스탄티노플은 오래 동안 기독교 왕국으로 있다가 1453년 무함마드 2세가 이끄는 터키 군대 의해 포위되었다. 그 군대는 30만 명으로 6주 동안 유혈 전투 끝에 콘스탄티노플은 터키 군에게 넘어갔고 지금까지도 그들이 장악하고 있다. 그들은 그 곳을 정복하자마자 주민들에게 야만적인 만행을 저질렀고 온갖 잔인한 수단을 동원하여 그들을 죽였다. 어떤 자들은 산 채로 쇠꼬챙이에 끼워 불에 구워졌고 어떤 자들은 산 채로 가죽을 벗겼으며 많은 사람들을 톱으로 썰어 죽었고 또 어떤 자들은 말에 의해 조각조각 찢기기도 했다.
1521년경 이슬람의 술레이만 1세(I. Süleyman, 1494-1566)가 그리스도인들로부터 벨그라드를 빼앗았다. 그런 뒤 450척의 병선과 30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의 기사들에 의해 방비되고 있는 로도스 섬을 공격했다. 이 영웅들은 모든 건물이 훼파 되고 모든 장비를 다 쓰고 탄약이 다 떨어질 때까지 이교도들을 막아냈지만 기독교국가의 왕들로부터 아무 지원병도 오지 않아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정복에 미친 술레이만은 이제 서쪽 독일의 비엔나(Vienna)로 진격해 갔다. 그는 가는 길에 살육으로 배를 불리면서 티끌을 날리며 곧 유럽을 정복하고 기독교를 이 땅에서 뿌리 뽑겠다는 헛된 소망에 빠져 있었다.
그는 비엔나 성벽 앞에 진를 치고 3명의 그리스도인 포로를 보내 성안의 주민들에게 자기 군대의 힘을 과시하여 공포에 두려워 떨도록 했다. 그러나 독일인들에게는 다행스럽게도 터키 군이 도착하기 3일 전 비엔나 방어를 맡은 팔라틴 프레더릭 공작이 14,000명의 정예군을 이끌고 비엔나로 들어와 있었다. 술레이만은 성 안으로 항복하라는 전문을 띄었다. 독일인들은 거부했다. 그러자 그는 성을 맹렬히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슬람교는 전쟁에서 죽은 군인은 어떤 죄를 지었다 해도 즉시 낙원의 기쁨이 허용된다고 약속하고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허무맹랑한 약속 때문에 이슬람 군인들은 맹렬하게 싸웠다.
그들은 성을 향해 어마어마한 포격을 퍼붓기 시작했고 성을 함락시키려고 많은 시도를 했다. 그러나 독일인의 용맹은 그들보다 우월했다.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술레이만은 자기 목표를 이루기 위해 전 병력을 동원하기로 작정했다. 막판에 그는 왕의 문 앞에 화포를 설치하고 맹렬하게 쏘아 대어 구멍이 나자 곧 터키군은 연기를 뒤집어 쓴 채 성안으로 밀려들어갔다. 성 안에 있던 군인들은 졌다고 모든 것을 포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장교들은 감탄할 만한 용감한 정신으로 마치 새로운 군대가 방금 도착한 것 같은 큰 함성을 질러서 군인들에게 새로운 용기를 불어넣었으며 이에 터키군은 혼비백산하여 도망갔다.
독일군의 저항이 점점 더 결사적이 되자 술레이만은 고린도 성 밑으로 갱도를 파서 성을 함락시키려는 또 다른 시도를 하기로 결심했다. 그들은 탑의 기초까지 이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들은 용감한 시민들이 그들을 맞아 갱도를 마주 파고 있음을 발견했다. 독일인들은 화약 기차를 만들어 적의 참호까지 불을 질러 8,000명이 날아갔고 그로 말미암아 터키군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모든 시도가 실패하자 터키 장군의 용기는 분노로 변했다. 그는 자기 부하들에게 성벽을 기어오르도록 명령을 내렸고 그렇게 하다가 그들은 수천 명씩 죽었으며 큰 군대를 동원했음에도 실패하자 터키군의 용기는 꺾이고 말았다.
유럽의 적들의 대담함에 두려워진 터키군 병사들은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기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또한 질병이 참호를 덮었고 기아로 많은 병사들이 죽었다. 독일인들의 철저한 차단으로 그들의 지원이 끊겼다. 그리고 용감하고 대담한 군인 로젠도르피우스 대위는 한번 출격하여 5,000명의 터키 군을 사살했으며 그로 말미암아 터키군의 참호는 성에서 멀리 떨어지게 되었다. 모든 시도에 실패하자 의기소침해진 술레이만은 드디어 80,000명의 부하를 잃은 뒤에 원정을 포기했다. 그는 수하물을 먼저 고향으로 보낸 뒤 고향으로 향했다. 이 전쟁의 승리로 유럽은 이슬람의 전 세계 정복이라는 공포에서 해방되었다.
13. 칼라브리아에서의 핍박 사건
14세기경 프라겔라와 도피니의 개신교 발도파(Waldensians)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이태리 남부 칼라브리아로 이민을 갔다. 칼라브리아의 귀족들은 이 새로운 거주자들이 정직하고 조용하고 부지런하다는 것을 알고 는 아주 기뻐했다. 그러나 신부들은 질투에 차서 곧 그들에 대해 부정적인 불평을 늘어놓았다. 이에 대해서 칼라브리아 지주들은 이 사람들은 조금도 해를 끼치지 않으며 로마 가톨릭교도들에게 아무런 악의가 없고 오히려 신부들에게 기꺼이 십일조를 내고 있어 그들 때문에 신부들의 수입도 더 증가되었으니 그들은 불평할 사람이 못된다고 대답했다.
몇 년 동안은 평화가 유지되었다. 그간 발도파 사람들은 그들의 관할 구역에 대여섯 마을이 부속된 두 개의 도시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한 도시에 한 명씩 두 명의 성직자를 초빙하기 위해 제네바로 사람을 보냈다. 이 사실이 교황 피우스 4세에게 알려지자 교황은 지체 없이 칼라브리아에서 그들을 근절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난폭한 기질의 성급하고 완고한 알렉산드리노 추기경을 두 사제와 함께 칼라브리아로 보냈고 그들은 거기서 종교 재판관 노릇을 했다.
그들은 발도파 사람들이 세운 도시 중 하나인 세인트 지스트에 가서 사람들을 모아 놓고 그들이 만약 교황이 지명한 설교자를 받아들인다면 아무런 해를 받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이 만약 거절한다면 그들은 재산과 생명을 빼앗길 것이라고 했다. 그들을 시험해 보기 위해서 그날 오후 미사가 있었는데 거기 모두 꼭 참석해야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인트 지스트 사람들은 그 말을 따르지 않고 가족들을 데리고 숲으로 도망가 추기경과 그의 보조자들은 실망하고 말았다.
그러자 그들은 발도파 사람들의 다른 한 도시 라 가르드로 가서 거기서는 똑같은 실패를 하지 않기 위해 성문을 모두 잠그라고 하고는 성문을 지키게 했다. 그리고 그 성의 주민들에게 세인트 지스트의 주민들은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교황이 그들의 설교자를 임명하기로 동의했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그들에게도 똑같은 제안을 했다. 이 거짓말은 성공했다. 단순한 라 가르드 사람들은 만약 추기경이 한 말이 사실이라면 그들도 세인트 지스트에 있는 형제들의 본을 따르겠다고 했다.

이렇게 거짓말로 뜻을 이룬 추기경은 2개 연대의 군대를 보내어 세인트 지스트 주민들을 학살하도록 명했다. 숲으로 들어간 군대의 만행으로 많은 발도파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그러나 발도파 사람들도 그들의 생명을 될 수 있는 한 값지게 희생하려고 무장을 갖추고 아주 용감하게 싸워 양편에서 상당히 많은 사람이 죽었다. 결국은 숫자가 더 많은 발도파 사람들이 상대편을 죽이고 남은 자들은 물러갔다. 대단히 화가 난 추기경은 즉시 나폴리의 총독에게 증원병을 요청했다.
이에 나폴리 총독은 나폴리의 모든 범법자들과 탈주자들과 법률 보호 밖에 있는 모든 자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그들이 만약 세인트 지스트의 개신교 발도파 사람들을 공격하는 일에 참전하여 그들을 다 죽여 없앨 때까지 군대에 남아 있으면 어떤 죄도 다 용서해 주겠다고 선포했다. 그리고 이 행운을 잡으려는 자들에게 결사적으로 숲을 뒤져 개혁신앙을 가진 왈도파 사람들을 붙잡는 즉시 죽이라고 했다. 그리고 나풀리 총독도 부대의 선두에서 추기경과 합세했다.
이렇게 하여 왈도파 사람들을 박멸할 때까지 로마 가톨릭 군대의 야만적인 추적이 계속됐다. 세인트 지스트의 왈도파 신도들을 한 사람도 남김없이 다 죽여 버린 후 이제는 또 다른 왈도파 신도들의 도시 라 가르드에 추기경과 총독이 눈을 돌렸다. 그리고 또 다시 협박을 했다. 그들이 만약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한다면 그들의 생명과 가족과 자녀들을 보호해 주겠지만 그러나 만일 이 긍휼을 거절한다면 가장 극단적인 잔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 같은 협박에도 불구하고 라 가르드의 발도파 사람들은 그들 신앙을 부인하거나 가톨릭의 교리를 따르겠다고 하지 않았다. 화가 난 추기경과 총독은 그들 중 30명을 끌어내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주려고 모든 사람 앞에서 무지한 고문을 했다. 그러나 그 같은 야만적인 행위에도 사람들은 동요하지 않았다. 심문대위에서 고통을 당하고 살아남은 자나 고통을 맛보지 않은 자나 한결같이 그들의 신앙에 변함이 없었으며 어떤 고통도그들을 그들의 하나님을 부인하거나 우상 앞에 머리를 숙이게 할 수 없다고 담대하게 선언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들 중 서너 명을 뽑아 발가벗긴 뒤 사람들 앞에서 쇠 회초리로 죽을 때까지 때리라고 추기경이 명령했다. 또 어떤 사람은 큰 칼로 조각조각 도려내어 죽였다. 어떤 사람은 높은 탑 위에서 떨어 뜨려 죽였고 또 이방인들의 본을 따라 많은 사람을 건초더미에 파묻은 후 불을 질러 산채로 태워 죽였다. 또 라 가르드 도시의 왈도파 지도자 네 명을 목을 매어 교회 뾰족한 종탑 위에 내던져 찔려 죽게 했다. 하여간 추기경은 그가 생각 해 낼 수 있는 사람이 가장 고통스럽게 죽는 방법을 총 동원하여 왈도파 신도들을 학살했다.
이렇게 온갖 잔인한 방법으로 학살하는 가운데 추기경은 로마 가톨릭 신도라 할지라도 만일 동정심을 가지고 개혁신앙을 가진 자들을 도우려하면 즉시 체포하여 이교도 두호자로 처형했다. 그 후 총독은 나폴리로 돌아가야 하고 추기경은 로마로 불려갔기 때문에 부띠안느 후작이 그들이 시작해 놓은 개신교 왈도파 신도를 박멸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결국 그도 개신교에 대한 같은 야만적인 분노를 가지고 계속하여 칼라브리아에는 개혁 신앙을 가진 사람은 한 사람도 남지 못했다.
이렇게 무고한 많은 왈도파 개신교도들이 생명을 잃고 재산을 빼앗기고 가정을 파괴당했으며 온갖 수단과 방법이 다 동원되어 그들이 한 사람도 남지 않을 때까지 로마 가톨릭에 의해 학살당했다. 그 이유는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 그것은 그들이 로마 가톨릭의 우상숭배와 같은 비 성경적인 신앙과 신앙고백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며 로마 가톨릭 신자가 되기를 거절하고 자신들이 바르다고 믿는 성경적인 신앙을 끝까지 지키기 위해서였다.(*) 출처 / 기독교순교사화(존 폭스 원저, 머리 킹 편저, 생명의말씀사)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