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순교사화(41) 영국의 종교개혁과 박해

7. 로버트 페라르 주교의 순교
로버트 페라르(Robert Ferrar, -1955)라는 이 훌륭하고 학식 높은 고위 성직자는 에드워드 왕의 치하에서 호민관에 의해 주교직으로 승진되었다. 그러나 그를 옹호해 주는 귀족이 몰락한 이후 그도 역시 그의 적들의 악의와 거짓 고소로 강등되고 말았다.
페라르 주교는 피의 메리(Bloody Mary) 여왕의 통치 기간 중 화형 당했다. 그는 헨리 8세가 1539년에 제정한 6개 조항법(Act of six articles)을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구속되었다. 6개 조항법은 영국교회가 로마가톨릭의 신학을 반영하는 법률로서 목회자의 독신생활, 화체설, 일종성찬(성찬 시 떡만 받음), 고해성사, 라틴어 예배 등을 강요했다.
페라르 주교의 적 가운데는 그의 하인이었던 조지 콘스탄틴도 있었다. 페라르 주교는 그가 교회 행정부를 무시하고 불순종했다는 56개 항목으로 된 고소문에 대해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했다. 그러나 페라르 주교의 적들은 너무나 많았고 가혹했기 때문에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이제 그는 다른 죄목으로 핍박을 받았다. 그것은 교리와 관련된 것이었다. 그리고 1555년 2월 4일 영광스러운 순교자 후퍼와 로저스, 브래드포드, 손더스와 함께 불려나가 정죄되었다.
그러나 틈이 없어서인지 혹은 다른 이유 때문인지 페라르 주교는 감옥에 남아 있게 되었고 거기서 2월 14일까지 있었다. 페라르 주교가 심문받고 답변한 내용을 모을 수 있는 대로 모아 여기 독자들에게 제시해 보겠다.
대법관이며 윈체스터의 주교 가드너와 더럼과 우스터 주교 앞에 페라르 주교가 처음 출두했을 때 대법관이 그에게 말했다.(대 : 대법관, 퍼 : 페라르) .
대 : 자, 주교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들었습니까?
페 : 죄송하지만 모르고 있습니다.
대 : 뭐라고? 너는 죄수인데도 불구하고 밖의 일을 모른다고?
페 : 모릅니다. 대법관님!
대 : 저런! 참 고집스런 녀석이군!
페 : 죄송합니다만 죄수인 내가 어떻게 밖의 일을 알겠습니까?
우스터 주교 : 대법관님께서 어떻게 돌아가는지 말씀해 주시지요.
대 : 여왕 전하와 의회가 종교를 헨리 8세 초기 때의 상태로 회복 시켜놓았단 말이다. 네가 만일 로마가톨릭교회로 돌아간다면 너는 여왕님의 은혜를 입어서 앞으로 잘 될 것이다.
페 : 내가 여왕전하의 은혜를 얼마나 입었는가는 재무부에 잘 나타나 있으며 장관께서 알고 있습니다. 지난번 당신 앞에서 그리고 처음에도 나는 우리나라에서 로마 교황이 어떤 권한이나 사법권을 갖는 것에 동의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것을 보여 드렸습니다. 그 러니 당신 앞에서 그것을 재연할 필요는 없겠지요. 당신이 이미 잘 알고 계시니까요.
본 : 당신은 옥스퍼드에서 이단을 일단 버렸었다.
페 : 그렇지 않습니다.
본 : 당신은 그렇게 했소!
페 : 나는 그런 적이 없습니다. 그건 사실이 아니오.
본 : 당신은 당신 주인을 밀어내었다.
페 : 내 일생에 그런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본 : 당신은 분명히 그렇게 했소!
페 : 참으로 내 일생에 결단코 그런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의 주인을 위험에서 구하기 위해 방패를 들었으며 헨리 8세 왕으로부터 진정으로 봉사할 기회를 얻었었지요. 그러므로 나는 이 일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본 : (대법관에게) 대법관님! 저자는 웨일즈에서 전과 같은 악명을 떨치고 있습니다.
페 :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증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본 : 그는 돈의 액수도 여러 번 여왕님을 속였습니다.
페 : 그건 전적으로 사실이 아닙니다. 나는 일생 동안 왕이나 여왕의 돈을 한 푼도 속인 일이 없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한 말을 증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대 : 너는 거짓말쟁이 악한이다.
그러자 페라르 주교는 명령도 받지 않고 벌떡 일어났다. 그는 계속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다.
페 : 아닙니다. 대법관님, 나는 진실한 사람입니다. 그것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나는 헨리 7세 때에 태어나서 현리 8세와 에드워드 6세를 진정으로 섬겼으며 여왕님을 섬겼습니다. 이제 내 보잘 것 없는 마음과 말로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지만 나는 결코 거짓말쟁이가 아니며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거짓말쟁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대 : 무슨 소리냐? 네가 개심할 수 있다는 말인가?
페 : 대법관님, 나는 하나님께 그리고 헨리 8세 왕께 또한 에드워드 왕께도 서약을 했습니다. 그것은 여왕님께도 한샘입니다. 나는 그로 인해 죽을지언정 살아 있는 한 그 서약을 깨뜨릴 수 없습니다.
더럼 주교 : 너는 전에 또 다른 서약을 했다.
페 : 아닙니다. 나는 전에 다른 서약을 한 일이 없습니다.
더럼주교 : 너는 맹세했다.
페 : 나는 맹세하지 않았습니다.
대 : 너는 아내 없이 살겠다고 공언했다.
페 : 아닙니다. 대법관님, 결코 그런 말을 한일이 결코 없습니다. 나는 깨끗하게 살겠다고 공언했지 아내 없이 살겠다고 공언한 일은 없습니다.
우스터 주교 : 너는 네 주인에게 그렇게 맹세했었다.
페 : 그런 적이 없습니다.
대 : 자, 너는 고집쟁이 악당이다. 네가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고 우 리는 더 이상 너를 다루지 않겠다. 너를 간단히 다루겠어! 너는 오늘밤 7시 안에 알게 될 것이다.
페 : 대법관께서 좋으신 대로 저를 부르십시오. 그러나 당신 앞에서 모본을 보인 것같이 내 양심으로 확인하고 서약한 것을 깨뜨릴 수는 없습니다. 내가 그로 인해 죽을지언정 살아있는 한 그 서약을 깨뜨리지 않을 것입니다.
더럼 주교 : 자, 저자는 자기 서약을 지키겠다고 말했습니다. 다른 자를 부르지요.
그러자 대법관이 조그마한 종을 울렸다. 페라르 주교가 말했다. “나는 왕과 여왕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계속해서 그들의 평안과 이 나라의 평강이 있기를 하나님께 기도드립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당신들의 명예를 아끼시기를 기도합니다.”그리고 법정을 떠났다.
이 심문 뒤에 페라르 주교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2월 14일까지 정죄 받지 않은 채 감옥에 남아 있었다. 그러고 나서 정죄 선고를 받기 위해 웨일즈로 보내졌다. 정해진 날에 이 참된 하나님의 종은 세인트 데이비드의 거짓된 주교 앞에 서 그의 이단설과 교리와 지금까지 지녀온 잘못을 버리고 로마가톨교회에 동의하겠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이에 페라르 주교는 영어로 쓰여 진 어떤 계획표를 제출했다. 그들은 무능한 재판관으로부터 추기경 폴에 이르기까지 주교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다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몰간은 재판을 격렬하게 끌고 가 확실한 선고를 내렸다. 그 선고로 인해 페라르 주교는 이단자로 파문되었고 세속 세력인 카마르텐의 장관 레이손에게 즉시 넘겨졌다. 이렇게 해서 이 경건한 주교는 정죄되고 격하되어 세속 권력에 넘겨졌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카마르델 도시의 형장으로 끌려 나갔다. 1555년 3월 30일 페라르 주교는 타오르는 불길이 자기 몸을 태워 숨이 끊어질 때까지 불길의 고통을 참을성 있게 끝까지 견뎌냈다.
8. 존 브래드포드 목사의 순교
존 브래드포드(John Bradford, 1510-1555)는 맨체스터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그에게 군대 경험을 시키기 위해 입대하게 했다. 반면 브래드포드는 법조계에 들어가기 원했다. 그는 1547년에 토마스 샘슨(Thomas Sampson)이라는 친구를 통해 극적으로 회심하게 되었다. 한편 그의 친구 샘슨은 메리 여왕의 통치 때 귀양살이를 했다.
회심한 브래드포드는 자신이 가졌던 귀중품들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고 자신은 목회를 위해 케임브리지에서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는 경건한 삶에 있어 빠르게 성장했다. 그는 케임브리지에 있는 동안 유럽에서 잉글랜드로 건너와 가르치던 대륙의 유명한 종교개혁자인 마틴 부처(Martin Bucer)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그는 세상적인 밝은 장래를 포기하고 성경 말씀 사역에 자기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자기 계획을 수행하기 위해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으로 갔고 그는 아주 열심히 공부하여 3년 반 만에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뒤 펨브로크 대학의 특별 연구원이 되어 마틴 부처(Martin Bucer or Butzer, 1491-1551)와 친구가 되었고 부처는 브래드포드에게 그가 특별히 받은 설교의 은사를 사용할 것을 강력하게 권고했다. 그러나 브래드포드는 그런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여 설교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 말에 부처가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렇게 말했다. “만일 자네가 좋은 밀가루 빵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불쌍한 사람들에게 보리떡도 좋으니 주님이 자네에게 맡기신 것들을 그 어떤 것이라도 열심히 나눠주게!” 그 후 브래드포드는 리들리 박사에 의해 세인트 폴(St. Paul) 성당의 평의원으로 임명되었고 그는 3년 동안 부지런히 말씀을 전했다.
메리(Mary I of England, 1516-1558) 여왕이 즉위한 첫 해에 바스의 주교 본 박사가 교황의 공적에 대한 설교를 폴의 십자가 앞에서 하다가 그것이 너무나 사람들의 분노를 극도로 자극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강제로 그를 강단 밖으로 끌어내려고 했다. 주교는 자기가 위험한 것을 깨닫고 가까이에 서 있던 브래드포드를 불러 앞으로 나와 자기 자리에 서 있어 달라고 부탁했다. 브래드포드는 그의 요청에 응했고 그는 사람들로부터 큰 존경과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격렬한 소동을 곧 진압하고 사람들을 조용히 해산시켜 집으로 돌아가게 했다.
3일 만에 그는 여왕의 추밀원 앞으로 송환되어 본 박사의 목숨을 구해 주고 주교 자리에 서서 설교한 것 때문에 고소를 당했다. 이 죄목으로 그는 탑에 갇히고 말았다. 2년 동안 그는 그 속에 단단히 갇혀 있었다. 그런 뒤 그는 대법관과 다른 고문관 앞으로 불려 나가 폴의 십자가 앞에서의 선동적인 행동에 대해서 정죄를 받았다.
고문실에 들어가자 대법관은 그에게 권한도 없이 주교처럼 설교한 그의 오만함 때문에 감옥에 갇혀 있었던 것은 당연한일이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대법관은 브레드포드에게 특별히 여왕 전하께서 너에게 전하라는 말씀을 전한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네가 만일 영국 국교로 돌아와 우리와 함께 일을 한다면 너는 우리가 발견한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은 여왕의 회유였다.
이 말에 브래드포드는 대답했다. “대법관님은 제가 부당하게 오랫동안 갇혀 있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선동적이거나 거짓되거나 오만한 일은 한 적이 없으며 오히려 진리와 평안과 모든 경건을 추구했고 현재의 바스의 주교 본을 순종하면서 충실하게 섬겼으며 그에 따라 조용하게 만들기 위해 설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대답을 들은 대법관은 화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네가 영광스러운 말을 하면서 훌륭하게 보이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네가 하는 말은 모두 거짓말이다. 그리고 또 네가 탑에 갇혀 있을 때 네가 우리 앞에서 얼마나 고집스럽게 굴었는지를 나는 잊지 않고 있다. 그 결과 너는 종교 때문에 감옥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고문관들과 주교들이 그에게 종교에 관한 의견을 묻기 시작했고 그들은 그에게 사형언도를 내릴 이유를 발견하려고 애썼다.
많은 논란 끝에 대법관은 그에게 다시 자비를 베풀겠다고 제안했다. 이에 대해 브래드포드는 하나님의 자비와 함께 베푸는 자비는 얼마든지 받겠지만 그렇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받지 않겠다고 품위 있고도 단순하게 대답했다. 그 말을 마치자 대법관이 작은 종을 울려 법무차관이 들어오게 하여 그에게 말했다. “이 사람을 끌고 가 단단히 가두고 내 허락 없이는 아무도 만나지 못하게 하고 편지도 쓰지 못하게 하라. 이제 전 보다 더 큰 책임으로 네가 그를 맡아야 한다.”
이렇게 해서 첫 번째 심문은 끝났고 브래드포드는 말뿐만 아니라 표정으로도 자기의 신앙과 교리를 확증하기 위해 목숨도 기꺼이 바치겠다는 각오를 나타내었다. 약 일주일 만에 브레드포드는 다시 고문관 앞으로 끌려 나갔다. 대법관은 긴 연설을 시작하면서 브래드포드가 폴의 십자가 앞에서 한 행동은 오만하고 불손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그가 탑에 갇혀 있을 때 선동적인 편지를 썼으며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려 했다고 비난하면서 마지막으로 그에게 성만찬에서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심을 믿느냐고 물었다.
그는 대답했다. “대법관님 나는 이제 거의 1년 3개월을 감옥 속에 있었으며 그동안 당신은 그런 질문을 한 적이 없습니다. 만일 그랬다면 나는 조금도 숨김없이 솔직하게 내 양심대로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당신은 어떤 사람이 만약 당신이 좋아하는 방향이 아니라 자유롭게 대답한다면 중단시키고 사형시킬 수 있는 법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이제 그런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그러자 대법관은 깜짝 놀라는 척하며 그는 그런 권한을 받지 않았으며 종종 너무나 친절하게 관용을 베푸는 재판을 해 왔다고 대답했다. 브래드포드가 다시 대답했다. “그렇다면 대법관님, 제발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으니 느낄 수 있을 만큼 당신의 친절함을 제게 더 보여 주십시오.” 그때 대법관은 식사준비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 일어났고 브래드포드는 다시 감옥으로 끌려갔다.
다음날 아침 7시 토머스 허세이가 그가 갇혀 있는 곳으로 찾아와서 그를 만나 이야기하려고 왔다고 말했다. “당신은 어제 대법관과 다른 주교들 앞에서 너무나 놀랍게 행동했기 때문에 가장 큰 원수라도 당신을 대적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시간을 벌고 사람을 동원하여 당신이 짐작하는 것보다 더 임박한 위험을 모면할 것을 충고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브래드포드는 그런 요청은 하지 않겠다고 했다. 사람들이 그로 인해 자기가 자백한 교리를 의심한다고 생각하게 만들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 세턴 박사가 들어와서 리들리와 래터머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어떤 질문에는 대답할 수 없으며 다른 사람들과 협의할 것을 요청하라고 말하면서 브래드포드에게 그들의 본을 따르는 것이 더 났다는 암시를 주었다. 그러나브래드포드가 허세이의 제안을 거절한 것처럼 그의 제안을 거절하자 그들은 둘 다 화가 났다. 그들이 감방을 떠나자마자 브래드포드는 다시 재판관 앞으로 끌려 나갔다. 원구들은 오랫동안 토론한 뒤에 그들이 잔인한 것만큼 친절함을 과시하며 파문과 함께 화형 선고가 낭독됐다. 그 때 그는 무릎을 꿇고 그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고난 받기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받은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그를 불에 태워 죽이기 위해 그의 고향인 맨체스터로 보내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그들이 그렇게 할까 말까를 결정하는 동안 브래드포드는 다시 한 번 감옥에 갇혔다. 그는 거기서 거의 5개월을 갇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 간수의 아내가 그에게 와서 매우 고통스러워하면서 말했다. “오! 브래드포드 씨 나는 당신에게 무서운 소식을 전하려고 왔습니다.” “그 소식이 무엇입니까?” “내일 당신은 화형을 당하게 됩니다. 지금 당신을 묶을 쇠사슬이 준비되고 있으니 당신은 곧 뉴게이트로 가야 할 것입니다.”
브래드포드는 목사는 모자를 벗고 두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며 조용히 외쳤다. “이로 인해 나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러고 나서 그녀가 언제나 그에게 보여준 친절함에 대해서 감사를 한 뒤에 자기 방으로 가서 얼마동안 혼자 기도했다. 한밤중에 그는 뉴게이트로 옮겨졌고 다음날 아침 그는 무장한 많은 사람들에게 호송되어 스미스필드로 갔다. 그날 존 브래드포드와 함께 화형대에 달렸던 그의 한 젊은 제자가 있었다. 존 리프(John Leaf)라는 18세의 청년이었다.
1555년 3월 20일 그들이 함께 산 채로 고통 가운데 불에 타죽을 때 브래드포드는 그 젊은 순교자에게 이렇게 격려했다. “형제여, 위로를 받게! 우리는 오늘 밤 주님과 함께 즐거운 저녁식사를 하게 될 것일세!” 브래드포드 목사는 그의 생명이 남아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구세주를 위해 죽기에 합당한자로 여김 받는 것을 기뻐했다.(*) 출처 / 기독교순교사화(존 폭스 원저, 머리 킹 편저, 생명의 말씀사)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