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순교사화

기독교 순교사화(52) 영국의 종교개혁과 박해

Hugh Latimer preaching to the civic authorities at St. Paul’s Cross in 1548 

8. 라티머 주교의 생애와 순(2)    

케임브리지(Cambridge)에서 있었던 라티머(Hugh Latimer, 1487-1555)의 설교에 대한 잡음과 소요를 다 말하자면 긴 시간과 지면이 필요할 정도다. 먼저 누구보다도 라티머의 설교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블랙수도원(Black Friars)의 부(副) 수도원장인 벅크네함(Buckneham)이라는 사람이 그의 설교에서 영어성경은 무식한 사람과 야비한 사람들이 약간 불편함을 면하는 것 이외에는 전혀 필요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했다.

라티머는 이 같은 벅크네함의 설교를 듣고 즉시 그렇지 않다는 것을 그에게 설명하려고 그를 찾아갔다. 그러자 라티머의 말을 들으려고 대학과 도시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으며 박사들과 석사들이 그가 어떻게 말하는지를 듣기 위해 큰 기대를 가지고 기다렸다. 그들 가운데는 물론 벅크네함도 앉아 있었다.  

라티머는 먼저 벅크네함이 영어성경이 불필요하다는 그의 주장의  요지를 요약하고 이에 대해 조목조목 철저하게 답변했기 때문에 벅크네함의 주장이 어리석을 뿐 아니라 옳지 않다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드러났다. 여기서 벅크네함과 함께 라티머를 대적하는 전 대학의 사제들과 박사들의 이름을 열거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라티머를 대적하는 그들 증에는 라티머가 박사로 있었던 기독교대학(Master of Christ’s College)의 왓슨(Watson) 박사도 있었다. 요컨대 각처의 지도자들이 이 훌륭한 그리스도복음의 기수(旗手)였던 라티머의 적이었다.  

마침내 일리의 주교(Bishop of Ely)며 바른웰 수도원(Barnwell Abbey)의 원장인 웨스트(West)는 더 이상 대학교회에서 설교할 수 없다고 라티머의 설교금지 명령을 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라티머로 하여금 어거스틴교회(Church of Augustine)에서 설교를 계속할 수 있도록 인도 해 주셨고 성 에드워드교회(St. Edward’s Church)에서도 계속 설교할 수 있도록 역사해 주셨다. 그러자 킹스 홀(King’s Hall)의 특별 연구원인 티릴(Tirell)이라는 사람이 라티머의 설교 내용과 그의 글의 내용들을 문제 삼아 라티머를 추기경에게 고소했다.

래티머는 이 같이 사제들과 수도사들과 박사들과 대학 학장들에 의해 핍박을 받으면서 1529년경부터 그러한 적들의 악의적인 모함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약 3년간 케임브리지에서 설교를 계속 했으며 경건한 자들의 호평을 받았고 심지어는 그의 적들도 그의 설교를 듣고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래티머와 빌니(Bilney)는 그 후 얼마동안 케임브리지에 계속 있었는데 그들은 아주 자주 만났고 그들의 대적들은 그 두 사람이 함께 거닐던 들판은 ‘이단자의 언덕’(The Heretics’ Hill)이라고 불렸다. 두 사람의 친밀함은 대학에 있는 많은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고 그들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찾아보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에 좋은 본보기가 되기도 했다. 다음 이야기는 라티머가 자선을 베푼 좋은 실례가 될 것이다.

그것은 빌니와 함께 있을 때 있었던 일이다. 라티머는 케임브리지 탑(the Tower of Cambridge)에 갇힌 사람들을 방문하러 갔다. 그들 가운데 자기 아이를 죽였다는 혐의로 잡혀온 여자가 있었는데 그녀는 그 사실을 강력하게 부인했다. 그래서 라티머는 그 문제를 조사해 보았는데 그녀의 남편이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를 없애 버릴 계획으로 그 같은 일을 저질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라티머는 그 같은 조사결과에 따라 그녀에게 죄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라티머는 헨리 8세(King Henry VIII of England)의 요청으로 윈저(Windsor) 궁에 들어가 왕 앞에서 설교를 하게 되었다. 설교가 끝나자 왕은 라티머를 불러 그와 친숙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때 라티머는 무릎을 꿇고 왕에게 그 여인의 문제를 모두 고하고 그녀를 용서해 줄 것을 청원했다. 왕은 그것을 승낙하고 그가 돌아가는 길에 그 일을 중재할 특사를 보내 주었다. 이 사건 이외에도 라티머는 많은 사람들을 그들의 억울함과 곤경에서 구해 주었고 사람들은 이런 라티머를 더욱 존경하며 따랐다.    

그러자 라티머의 대적들은 가장 절친한 빌니와 라티머 사이를 깨뜨릴 방법을 찾기에 골몰했다. 이런 가운데 라티머는 케임브리지대학의 몇몇 사람들에 의해 이단자로 고발당했고 추기경은 즉시 라티머를 소환했다. 추기경 앞으로 불려간 라티머는 그들이 제출한 항목에 서명을 했다. 그 후 라티머는 다시 대학으로 돌아갔는데 얼마 안 되어 왕의 주치의 부츠(Butts) 박사의 추천으로 왕의 우월권(King’s supremacy)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명단에 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라티머는 궁전에 있는 부츠 박사의 거처에서 함께 지내며 종종 런던에서 설교를 했다. 그러나 라티머는 궁전생활에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크롬웰 경(Lord Cromwell)과 부츠 박사는 왕께 라티머를 성직자의 자리를 청원했고 왕의 허락이 나자 기쁜 마음으로 궁전을 떠났다.

왕의 허락으로 사역하게 된 라티머의 새 사역 지는 사룸(Sarum) 주교 관할구역 안에 있는 월트셔(Wiltshire)의 웨스트 킹스톤(West Kingston)이었다. 여기서 이 훌륭한 설교자는 열심히 사역을 하면서 자기에게 맡겨진 양떼들과 그 주변 모든 사람들을 가르쳤다. 그는 매우 열정적이었고 설교는 강렬했으며 가르치는 태도는 아주 열렬했기 때문에 거기서도 역시 그를 대적하는 적들을 피할 수가 없었다.

사건은 라티머의 동정녀 마리아에 대한 설교로 인해 터졌다. 모든 영광은 오직 우리의 유일하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 한분에게만 돌려야 한다고 설교했는데 이 설교를 전해들은 로마가톨릭 신부들은 분노했다. 왜냐하면 라티머가 설교 중 “어떤 눈먼 사제들이 동정녀 마리아는 결코 죄가 없으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게 아니라고 가르치는데 이는 미신적이며 성경에 없는 거짓말입니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 지방 사제들이 라티머를 격렬히 반대하여 들고 일어났고 그들 외에도 라티머를 가장 괴롭히던 자들은 솔즈베리의 포웰(Powel) 박사와 전에 케임브리지에 있던 월슨(Wilson) 박사와 허버딘(Hubberdin)과 셔우드(Sherwood) 박사 등이었다. 이들 중 어떤 이는 그를 반대하는 설교를 했고 어떤 이는 그를 비난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반대자들의 끈질긴 선동으로 라티머는 1531년 1월 29일 겐터베리 대주교 워함(Warham)과 런던 주교 스토케스리(Stokesley) 앞으로 소환 당했다. 래티머는 그 소환 명령의 부당함을 자기 교구의 대주교에게 탄원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런던에 있는 캔터베리 대주교 워함과 런던 주교 앞으로 끌려가 크게 고통을 당했고 오랫동안 억류당해 치료도 받지 못했으며 일주일에 세 번씩 앞서 말한 주교들 앞에 나가 자기 설교를 입증하고 어떤 조항과 제안에 서명해야만 했다.  

라티머는 대주교들에게 편지를 썼다. 허약해진 자신의 건강 때문에 더 이상 감옥생활을 하기가 어렵다는 것과 자신에 대한 주교들의 부당한 처사에 대해 항의하는 내용이었다. 주교들은 라티머에게 그에게 불리한 어떤 진술서 서명할 것을 요구했지만 그가 거기에 서명을 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의 편지에는 대주교에게 자기는 절대 거기에 동의할 수 없노라고 말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나는 감히 그 제안에 서명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나 자신의 저주의 장본인이 되지 않으려면 그러한 대중적인 미신에 더 이상매어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조항에 서문을 쓴 톤스톨(Tonstal)의 기록을 보면 그가 서명을 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 기록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케임브리지 대학의 신학자 휴 라티머는 1531년 3월 21일 웨스트민스터에서 열린 종교회의에서 캔터베리 대주교님, 런던 주교님과 다른 성직자들 앞에서 다음과 같은 조항에 있는 대로 그의 믿음을 고백하고 인정했다.”  

만약 이 말이 사실이라면 그가 서명을 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그 당시 로마가톨릭교도들 사이에 성행하던 술책과 계교일 수 있다. 부츠 박사와 크롬웰 경의 추천으로 그가 우스터의 주교로 임직한 뒤 어느 정도 지위가 있는 사람이 악한 의도를 가지고 그의 설교에 대해서 왕에게 불평을 했다. 라티머는 에드워드 왕 앞에서 설명한 설교에 대한 이 특정 사건을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돌아가신 왕(헨리 8세)이 통치할 때 우리들 여러 명은 한꺼번에 불려가 그 문제에 대해서 우리 생각을 이야기했다. 마침내 한 사람이 무릎을 꿇고 내가 선동적인 교리를 설교했다고 고소했다. 왕이 나를 돌아다보면서 말했다. “거기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겠소?”

그러자 나는 무릎을 꿇고 먼저 나를 고소한 사람을 향해 물었다. “제가 전하 앞에서 한 어떤 형태의 설교를 말씀하십니까? 당신은 왕 앞에서 설교할 때 왕에 관해서 아무 것도 설교하지 말라는 것입니까? 당신은 내가 어떤 설교를 해야 할지 지정해 줄 책임이 있습니까?” 그 외도 나는 여러 가지 질문을 했으며 그는 거기에 아무 답변도 못했다.

그러자 나는 왕을 향해 그의 은혜에 나 자신을 내어 맡기고 말했다. “저는 저 자신을 전혀 가치 있다거나 전하 존전에서 설교자가 되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부르심을 받았고 만약 전하께서 저를 싫어하신다면 저는 기꺼이 물러갈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보다 더 훌륭한 사람들에게 그 자리를 허용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만약 전하께서 원하셔서 그들에게 설교자의 자리를 허용하신다면 저는 그들의 책을 들고 다니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전하께서 설교자로 저를 허용하신다면 양심의 부담을 느끼면서 청중에 따라 제 교리를 짜 맞추지 않도록 허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매우 어리석어서 전하 앞에서 설교할 때도 로마의 영토 변두리에서와 마찬가지로 설교했습니다.”

나는 언제나 나를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왕은 나의 말을 잘 받아 들여서 은혜로운 군주처럼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것은 마치 성경말씀과 같았다. “주께서 왕의 마음을 지도하느니라.”내 친구 몇 명이 내게 와서 눈물을 흘리며 그들은 내가 그날 밤 탑 속에 갇힐 줄 알았다고 말했다.

라티머는 ‘6개 조항’(The Six Articles 1539)이 통과될 때까지 그의 고된 성직자의 사역을 잘 감당했다. 그러나 시대가 점점 어려워지는 데 크게 실망한 그는 선한 신앙양심을 희생하든지 아니면 주교 직분을 버리든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고심 끝에 그는 후자를 택했다. 그러나 그는 고통과 수고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가 주교 직분을 사임한 후에도 그는 크게 상처를 입었다. 쉬려고 런던으로 올라오자마자 라티머는 런던탑 속으로 보내졌고 거기서 에드워드(Edward VI of England, 1537-1553)가 왕위에 오를 때까지 죄수로 갇혀 있었다.    

이 하나님의 사람의 부지런함은 결코 끊임이 없어 에드워드 왕이 다스리는 동안은 줄곧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교회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을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께서는 그가 후에 일어날 전염병을 미리 예언할 수 있게 해 주셨다. 만약 영국에 선지자가한사람 있다면 그가 바로 그 선지자일 것이다. 그리고 자신에 관해서 그는 종종 복음을 전하는 것이 그에게는 생명을 내어놓는 일이 될 것이라고 분명히 말했으며 그것을 위해 준비했다.

에드워드 왕이 죽고 메리(Mary I, 1516-1558)가 잉글랜드의 여왕으로 즉위하자 얼마 안 되어 여왕의 시종이 직접 라티머를 체포하기 위해 지방으로 내려왔다. 라티머는 존 케어리스라는 사람에 의해 6시간 전에 그 사실을 미리 알았지만 도망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는 자기를 체포하기 위해 온 장교가 그의 집에 이르기 전에 마지막 여행 떠날 준비를 갖추었다. 이런 라티머의 태도에 여왕의 시종은 감탄 했다.

그 때 라티머는 그 시종에게 이렇게 말했다. “친구여, 당신은 내게 반가운 심부름꾼이오. 당신과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노니 나는 지금 이 세상 다른 어떤 곳과 마찬가지로 런던으로 기꺼이 가는 것이오.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두 왕 앞에서 복음을 전파하기에 합당한 자로 만드신 것과 같이 세 번째 왕에게도 그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꼭 같은 복음을 전하게 해 주실 것을 확신하는 바이오.” 그러자 시종은 여왕의 편지를 전한 후 라티머를 기다리라는 명령을 받지 않았다고 하면서 바로 떠나버렸다. 라티머를 체포하기 위해 내려 온 그들은 라티머의 체포를 원치 않고 그 지역서 피신하기를 바라는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라티머는 여왕의 명령대로 런던으로 올라갔다. 그가 감옥생활을 할 스미스필드에 갔을 때 라티머는 그곳이 자기를 위해 오랫동안 신음해 왔다고 명랑하게 말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위원회 앞으로 불려나가 냉소적인 로마가톨릭교도들의 모든 조롱과 비웃음을 참을성 있게 견뎌 내고 다시 탑 속으로 돌아갔다. 그의 대적들이 잔인한 방법을 사용하는 데도 불구하고 그는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의 은혜로 오랫동안 감금 생활을 참을성 있게 견뎌 냈다.    

그들의 악의에 찬 대우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내심만 보인 것이 아니라 명랑하고 유쾌한 태도까지 보였다. 주님께서 그에게 강건한 영을 주셨기 때문에 그는 감옥의 끔찍한 환경과 고통을 개의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대적들이 그를 경멸하는 잔인한 처우에도 웃을 수 있었다. 그가 탑 속에 갇혀 있는 동안 그를 지키는 대위에게 한 대답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한번은 대위의 젊은 부하 하나가 자기 아버지보다 더 연로한 라티머를 지키게 되었는데 라티머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추운 겨울 날씨에 불도 없이 오랫동안 나를 이렇게 가둬둔다면 얼어 죽을 수도 있고 만약 그렇게 되면 내가 대위를 실망시킬지도 모른다고 가서 전해라.” 대위는 이 말을 듣고 라티머가 혹시 도망갈까 봐 더욱 철저히 지키라고 부하에게 명령했다. 그리고 대위는 라티머에게 왜 그런 말을 했느냐고 추궁했다. 그러자 라티머는 이렇게 대답했다. “왜냐하면 당신은 내가 불에 타 죽기 바라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만일 내가 여기서 얼어 죽기라도 하면 그런 당신이 얼마나 실망하겠소!” 라티머는 오랫동안 탑 속에 갇혀 있으면서 최대한의 인내를 보였고 거기서 옥스퍼드로 옮겨져 켄터베리 대주교 크랜머 박사와 런던 주교 리들리 박사와 함께 있다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원체스터 주교 가드너가 보내온 조항에 대해서 논쟁을 벌였다. 그들과 대학 박사들 사이의 논쟁 내용을 우리는 이미 이야기했다.(*) 출처 / 기독교순교사화(존 폭스 원저, 머리 킹 편저, 생명의 말씀사)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