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순교사화

기독교 순교사화(56) 영국의 종교개혁과 박해

기독교 순교사화(56) 영국의 종교개혁과 박해

George Marsh memorial at St. Mary the Virgin’s church in Deane

11. 조지 쉬 목사의 순교     

마쉬(George Marsh, 1515-1555)는 랜카셔(Lancashire) 지방의 딘(Deane) 교구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고 부모의 생업과 근면을 이어받으며 성장했다. 25세쯤 그는 그 지방의 한 젊은 여자와 결혼하여 농장 일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의 아내가 일찍 죽자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에 들어가 공부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과 성사의 사역자가 되어 당시 로렌스선더스(Laurence Sunders) 목사가 담임한 교회의 부목사로 사역했다. 그런 가운데 그는 딘(Deane) 교구와 랜카셔의 다른 곳에서도 경건한 설교를 하여 거짓 교리를 없애고 참된 신앙을 열심히 세워 나갔다.  

결국 그는 이 일로 인해 체포되어 그 교구의 주교(主敎) 조지 코츠에 의(George Coates) 해 체스터(Chester)에 단단히 감금되었다. 거기서 그는 아무런 구제도 못 받고 친구의 위로도 허용되지 않은 채 4개월을 갇혀 있었다. 그의 특별한 이야기는 그가 직접 쓴 것으로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다음은 조지 마쉬 목사가 친히 쓴 더비(Derby) 공작과 다른 사람들 앞에서 받은 그의 첫 번째 심문 내용이다.  

“종려주일 전 3월 12일 목요일 나는 어머니 집에서 로저 린스톤이 바르톤의 하인들과 함께 볼톤에서 나를 열심히 찾았다는 말을 들었다. 그들은 내가 거기 없음을 알자 로버트 워드와 로버트 마쉬에게 나를 찾아서 다음날까지 바르톤 씨에게로 데려오고 더비 공작 앞으로 보내 종교 문제로 심문을 받도록 하라는 엄중한 지시를 했다고 한다.

친구로부터 이 사실을 알고 나는 여러 가지로 고심했다. 어머니와 다른 친구들은 나에게 빨리 도망하여 위험을 모면하라고 했다. 나의 연약한 육신은 그들의 의견에 기꺼이 동의했지만 나의 영은 ‘내가 도망한다는 것은 나의 가장 가깝고 사랑하는 친구들과 고국으로부터 도망가는 것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거룩하신 말씀으로부터 도망가는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도망치는 일에 동의하지 않았다.

나는 이 같이 여러 사람의 충고 그리고 나 자신의 생각과 의견으로 엇갈린 채 저녁에 다시 돌아오겠다고 말하고 어머니 집을 나섰다. 그러면서 나는 또 한편으로는 열심히 기도하는 가운데 모든 좋은 은사와 친구들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을 그치지 않았다. 나는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과 돌보심을 신뢰하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나는 바르톤의 하인 서너 명이 나를 찾고 있는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갔다.

나를 발견하지 못한 그들은 내 동생과 월리엄 마쉬에게 그날 밤 나를 찾아 다음날 스메스힐스(Smethehills)로 데려오라는 말을 단단히 이르고 갔다고 한다. 그 같은 말을 듣고 받고 그들은 애더톤이라는 곳으로 나를 찾아 나섰다. 이 같이 나는 온 밤을 어머니와 함께 지내고 싶었지만 내가 지체하는 것이 도리어 어머니를 불안하게 해 드릴 것 같아 거기를 떠나 친구에게 가서 친구와 함께 온 밤을 지냈다.

다음날 아침 내가 일어나자마자 어떤 사람이 믿을만한 내 친구의 편지를 가지고 왔다. 그 친구의 충고는 도망가지 말고 남아서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고백하라는 것이었다. 그 말에 나는 확신과 용기를 얻어 그 후부터는 ‘도망갈까? 혹은 남아있을까?’ 망설이지 않고 바르톤 씨 집으로 내 발로 가서 주님이 내 어깨에 지우신 십자가를 인내함으로 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로 결심했다.

다음날 아침 나는 일찍 일어나 친구 집의 침상 곁에 무릎을 꿇고 늘 하던 습관대로 다른 기도와 함께 영어로 된 기도문을 아뢰고 스메스힐스로 갈 준비를 했다. 가는 도중 나는 랄프 이톤에 있는 장모 헨리 위도우스 집과 토머스 리처드슨의 집에 들러 끝까지 잘 인내하도록 나를 위해 기도해 줄 것과 모든 친구들에게 나의 어머니를 위로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고 나서 나는 그들을 떠났다.  

나는 매우 슬펐지만 눈물을 보이지 않고 아침 9시경 스메스힐스에 도착하여 바르톤 씨 앞에 나타나자 그는 나에게 더비 공작에게서 온 편지를 보여 주었다. 그 편지에서 그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를 라툼으로 보내라고 명령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내 동생과 왈리엄 마쉬에게 다음날 10시까지 나를 공작과 위원들 앞에 데려오라고 했다. 따라서 우리는 어머니 집으로 가서 기도하면서 어머니와 리치몬드 마쉬와 그의 가족들에게 작별을 고했고 그들도 나도 눈물을 흘렸다.

다음날 일찍 우리는 라툼으로 가서 오후 4시까지 거기 있었다. 그리고 나는 공작의 위원인 로저 메킨슨에 의해 불려갔다. 그는 내게 많은 질문을 한 뒤 나에게 탁자로 오라고 하며 펜과 잉크를 주고는 영성체(領聖體, Communio, 성찬의 떡과 잔)에 대한 질문에 답변을 쓰라고 명령했다. 나는 이전에 대답했던 대로 영성체에 대해 솔직하게 썼다.(로마 가톨릭의 화체설을 부인하는 내용) 내가 쓴 대답을 읽어본 공작은 크게 화를 내며 나에게 로마 가톨릭의 화체설을 인정하는 대답을 쓰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나는 펜을 든 채로 그 이상은 더 쓸 수 없다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매우 애석해 하며 안타까워 하다가 돌변하여 나를 협박하기 시작했다. 또한 내가 반역자 같이 수치스러운 죽음을 당할 것이라고 하며 그러나 만일 지금이라도 자기들에게 돌이키면 다른 사람들처럼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다는 말도 했다.

며칠 후 나는 프레스코트의 사제와 그래프날의 교구 목사에게로 끌려갔다. 질문은 미사(Missa)에 대한 것이었다. ‘미사에서 어떤 것이 거슬리는가?’라는 사제의 질문에 나는 전체가 거슬린다고 대답했다.

첫째, 미사가 낯선 용어인 방언(라틴어)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사도 바울의 교리(고전 14장)와는 반대로 사람들이 교화되지 못하고,

둘째, 미사에 포함된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직분과 희생과는 반대되는  여러 가지 견딜 수 없는 남용과 잘못들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내게 ‘어디가 그러냐?’고 물었다. 나는 서너 군데를 대었다. 그들은 그것들은 그 말의 취지나 혹은 내가 받아들인 이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멋쩍고 어정쩡한 태도로 자신들의 주장을 합리화 하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이 일이 있은 후 조지 마쉬 목사는 랜카스터 성으로 보내졌다. 수주일 뒤 조지 마쉬 목사는 체스터의 주교에게 보내졌고 주교는 그와 자주 만나 그로 하여금 로마 가톨릭교회의 화채설과 모든 강령과 전통들을 인정하게 만들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그래도 조지 마쉬 목사가 흔들림이 없자 체스터의 주교는 그에게 신체적 고통을 주고 종종 이단이라고 욕을 퍼붓는 화풀이를 한 뒤 대성당에서 열리는 미사에 그를 보냈다. 마쉬 목사가 받아들일 수 없는 미사의 여러 가지 순서가 끝난 후 재판이 열렸고 주교는 그의 품에서 한 문서를 꺼내 그를 정죄한다는 선고문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주교가 선고문을 반쯤 읽었을 때 판사가 가로막으며 말했다. “좋아요 주교님! 거기서 멈춰요. 더 이상 읽으면 너무 늦어서 다시 돌이킬 수 없을 테니까요.” 주교가 멈추자 신부들과 많은 무식한 사람들이 마쉬 목사에게 그의 주장들을 취소하라고 말했다. 주교도 다시 마쉬 목사에게 “너무 늦기 전에 여왕의 자비를 받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마쉬 목사는 “나도 그 자비를 받기 바라며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여왕의 은혜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내가 그리스도의 자비를 잃어버리고 영원한 죽음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나는 나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절대로 부인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주교가 안경을 쓰고 다시 대여섯 줄을 더 읽어 나갔을 때 판사가 아첨하는 미소를 지은 얼굴과 아첨하는 말로 다시 주교를 부르면서 말했다. “그렇지만 훌륭하신 주교님! 한 번만 더 멈춰주십시오. 당신이 만약 그 선고문을 다 읽어버린다면 모든 것은 다 지나가 버릴 테니까요. 그 때는 저자가 마음이 부드러워져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주교가 다시 선고문 읽기를 멈추자 또 다시 여러 명의 신부들이 마쉬 목사에게 다가와서 “빨리 고집을 버리고 당신의 말을 취소하시오! 그리고 목숨을 건지시오!”라고 말했다. 그러나 마쉬 목사는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만약 내가 나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부인했는데도 하늘에 계신 그의 아버지 앞에서 주님이 나를 부인하시지만 않는다면 나도 여러분들만큼이나 기꺼이 살려고 할 것이오.”    

그러자 주교는 그의 선고문을 끝까지 다 읽고 나서 그에게 말했다. “이제 내가 너를 위해 기도하느니 차라리 개를 위해 기도하겠다.” 그러나 마쉬 목사는 “당신은 내게 그럴 지라도 나는 당신의 그 불쌍한 영혼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후 주교는 마쉬 목사를  그 도시의 사형집행 담당 관리들에게 인계했다. 그때 마쉬 목사의 전 간수가 그와 헤어진다는 것을 알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잘 가게, 착한 조지!” 마쉬 목사를 인계 받은 군병들이 북쪽 문에 있는 감옥에 가두고 처형되는 날까지 아주 삼엄하게 지켰고 그 어떤 사람의 면회도 허락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일체의 물건도 받지 못하게 했다.

마쉬 목사의 처형 날이 되자 군병들이 그의 발에 착고를 채운 채 끌고 나왔다. 그가 스피탈 버톤 근처의 사형장으로 끌려왔을 때 그 당시 체스터의 부시장이었던 코드리는 마쉬 목사에게 많은 도장이 찍힌 문서를 보여 주면서 “만약 지금이라도 네가 네 말을 취소하기만 한다면 이것이 사면장이 될 것이다.”고 했다. 마쉬 목사는 “나를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그런 사면장은 내게 필요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마쉬 목사는 구경나온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끝까지 그리스도께 충성하라고 권면했다.

그러고 나서 마쉬 목사는 무릎을 꿇고 기도한 후 옷을 벗고 속옷만 입은 채 기둥에 쇠사슬로 묶였다. 그의 발밑에는 장작이 쌓여 있었고  타르가 가득 든 통이 그의 머리 위에 있었다. 불이 잘 붙지 않아 그는 너무나 큰 고통을 겪었으나 인내로 견디었다. 그의 살이 타서 부풀어 올라도 불길 속에서 그가 꼼짝하지 않자 사람들은 그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갑자기 그가 팔을 번쩍 쳐들며 말했다. “하나님 아버지, 제게 긍휼을 베풀어 주시옵소서!”하며 그의 영혼을 주님의 손에 의탁했다.(*) 출처 / 기독교순교사화(존 폭스 원저, 머리 킹 편저, 생명의 말씀사)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