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순교사화(63)
기독교 순교사화(63)

23. 로버트 사무엘 목사의 순교
서퍽(Suffolk) 카운티 입스위치(Ipswich) 근처 콥독(Cobdock)에 포스터(Foster)라는 치안관(治安官)이 살고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증오했으며 온갖 수단을 다해 박해했다. 그가 괴롭힌 사람들 가운데 잉글랜드 에드워드 왕 시대에 아주 충성스러운 하나님의 설교자 사무엘 목사가 있었다. 그는 서퍽에 있는 바폴드에서 목회했는데 목회하는 동안 주님이 맡기신 양 떼들을 부지런히 살피고 가르쳤다.
그런데도 그는 성직을 박탈당하고 핍박을 면할 수 없었다. 그래도 그는 자기 양 떼 돌보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비밀리에 계속 양무리들을 가르쳤다. 이를 눈여겨보던 이웃의 로마 가톨릭 교인 하나가 그를 당국에 고발했다. 그러자 낮에는 소요(騷擾)가 두려워 잡아가지 못하고 어두운 밤중에 갑자기 군인들이 집으로 와서 그를 잡아갔다. 사무엘 목사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순순히 끌려갔다. 그리고 감옥에 갇혀서도 조용히 묵상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그는 노리치l(Norwich) 감옥으로 이송되었는데 그 카운티의 주교(主敎)인 홉톤(Hopton)과 그의 장관인 더닝스(Dunnings)는 사무엘 목사가 도착하자마자 그를 아주 좁은 감옥에 가두고 쇠사슬에 묶어서 쇳덩이가 달린 높은 장대에 세워 까치발을 하지 않고는 그의 몸무게를 지탱할 수 없게 만들어 놓았다. 거기에 더 큰 고통을 주기 위해 먹을 것과 마실 물도 주지 않고 무자비하게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고통을 당하게 했다. 그는 매일 빵 한 조각과 물 몇 모금을 받아먹고 겨우 목숨을 유지했는데 그렇게 사는 것이 오히려 그에게 더 큰 고통이었다.
그러다가 사무엘 목사는 화형(火刑)당하기 위해 사형장으로 끌려 나왔다. 그리고 활활 타오르는 불꽃 가운데 던져 저 이제는 한 줌의 재로 변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감옥에서 이미 당한 고통에 비하면 오히려 견디기 쉬운 것이었다.
그런데 그가 감옥에 있는 동안 그에게 이상한 일들이 일어난 것을 들은 사람들이 여러 명 있었다. 즉 그가 삼일이나 계속 굶주림으로 고생하다가 잠이 들었을 때 흰옷을 입은 사람이 앞에 서서 다음과 같은 말로 그를 위로했다고 한다. “사무엘! 사무엘아! 너는 용기를 내고 안심하라. 너는 오늘 이후로 다시는 배고프지도 목마르지도 않을 것이다.” 그때부터 그는 화형당하는 날까지 사무엘 목사는 배고픔이나 목마름을 느끼지 않았다고 한다.
24. 존 필포트 사제의 순교
존 필포트(John Philpot)는 많은 사람에게 존경받는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옥스퍼드의 뉴 칼리지(New College)에서 법률 공부를 했는데 법률 외에 다른 인문학도 배웠다. 특히 그는 어학에 재주가 있어 히브리어에 아주 능숙하게 되었다. 그는 위트와 용기가 있었으며 열정적이었고 성경 말씀을 실생활에 진지하게 적용했으며 그가 얼마나 학식 있는 사람이었는가 하는 것은 그가 남긴 글들에 의해 충분히 증명되고 있다.
그는 이탈리아 여행을 하게 되었는데 여행 중 베니스(Venice)에서 파두아(Padua)로 가는 중 동행했던 성 프랜시스파 수도사(修道士)로 인해 큰 위험에 빠질 뻔했다. 그 수도사가 파두아에 도착하자마자 필포트를 당국에 이단자로 고소하려 했기 때문이다. 필포트는 여행을 중단하고 런던으로 돌아왔다. 그 후에도 윈체스터시의 가드너(Gardiner) 주교와도 몇 차례 신앙문제로 충돌이 있었다. 이러한 가드너가 물러나고 포이네트(Poinet)가 윈체스터(Winchester)의 주교가 되었는데 필포트는 그의 밑에서 부주교 일을 하게 되었다.
열렬한 개신교 신자였던 에드워드 6세(Edward VI of England, 1537-1553) 치하에서는 반(反) 로마 가톨릭교회 사상을 가진 필포트였지만 별 어려움 없이 자기 맡은 일에 충실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경건한 에드워드 왕이 갑자기 죽고 그의 누이 메리(Bloody Mary I of England, 1616-1558)가 왕위에 오르자 세상은 완전히 뒤집혔다. 메리 여왕은 잉글랜드가 철저한 로마 가톨릭 국가가 되기 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메리는 개신교를 없애기 위해 여러 가지로 노력했다.
세상이 이렇게 바뀌었지만 필포트는 여전히 생각을 바꾸지 않고 주교회에서 자기가 믿는 복음을 끝까지 주장했다. 그로 인해 비록 전에는 그런 태도가 허용되었지만 메리 여왕의 치하에서는 절대 용납될 수 없었다. 필포트는 즉시 주교인 대법관 앞으로 끌려가서 심문을 받았다. 거기서도 필포트는 자기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대법관과 여러 가지 신앙문제를 놓고 논쟁을 벌였다. 필포트가 남긴 비망록 기록 중에 이런 말이 있다. “내가 창고에 갇혀 있던 둘째 날 밤 런던 주교 앞으로 다시 불려 갔다. 그리고 그 창고에서 나와 여섯 명의 동료들은 짚을 덮고 아주 즐겁게 누워 있었다.”
주교는 필포트가 자신의 신앙을 조금도 포기하려 하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그에 대한 정죄 선고를 공개적으로 했다. 그는 필포트에 대한 선고문을 읽다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그리고 너 고집스럽고 악질적인 이단자여!” 그러자 필포트가 말했다. “나는 당신의 저주받은 교회에 대해서만 이단인 걸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당신들에게는 이단이나 나는 하나님 앞에서는 이단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당신을 축복하셔서 당신의 사악한 행동을 회개할 은혜를 주시기 바랍니다.”
보너가 선고문의 중간쯤 읽었을 때 베스 주교가 그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주교님, 주교님! 먼저 그가 자기주장을 취소할 것인지를 물어보십시오.” 그러나 보너는 개의치 않고 선고문을 계속 읽었다. 선고가 끝나자 보너는 군인들에게 필포트를 끌고 나가라고 명령했다. 군인 둘이 필포트를 끓고 나가 주교 집을 지나 패터노스터로우로 갔다. 거기서 필포트는 그의 하인들을 만났다.
그러자 하인들이 반기며 인사를 했다. “아, 사랑하는 주인님!” 필포트가 말했다. “잘들 있게! 나는 잘 될걸세! 내일 다시 만날 테니까!” 그러자 군인들이 하인들을 밀어내고 계속 끌고 필포트를 뉴게이트 감옥으로 데려갔다. 거기서 군인들은 필포트를 간수들에게 인계했다. 그런데 하인들은 돌아가지 않고 뉴게이트 감옥까지 따라왔다. 군인 하나가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다. “이 녀석들아! 돌아가! 돌아가!” 그래도 하인들은 돌아가지 않고 “나의 주인님과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라고 했다. 필포트가 돌아다보며 말했다. “내일 나와 이야기하자.”
간수는 그들이 필포트 하인임을 확인하고 감옥까지 따라 오도록 허락했다. 필포트와 하인은 작은 방에 잠깐 함께 있게 되었다. 그때 간수장 알렉산더가 그에게 오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 당신이 여기까지 오다니 뭔가 잘못한 모양이군!” 필포트가 말했다. “글쎄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니까 나는 만족하오. 당신이 내게 너그러운 호의를 베풀어주시기 바라오. 당신과 나는 서로 잘 아는 오랜 친구 사이가 아닌가!”
그러자 간수장 알렉산더가 말했다. “당신이 만일 당신의 주장을 취소만 한다면 나는 물론 당신에게 대단한 호의를 베풀겠소!” 필포트가 대답했다. “아니오!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나는 내 생명이 있는 한 내가 한 말을 절대 취소하지 않을 것이오. 왜냐면 그것은 내가 아는 한 가장 확실한 진리이기 때문이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나는 내 피로 그것을 인칠 것이오.” 알렉산더가 말했다. “그것이 당신네 이단들이 의례 하는 말이오!” 그는 그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벽돌과 쇳덩이를 그의 넓적다리에 올려놓으라고 간수에게 명령했다.
필포트가 자기 하인에게 말했다. “장관에게 가서 내가 여기서 받는 대우를 말씀드리고 좀 더 잘 해 주기 바란다고 해라.” 하인이 장관에게 가서 필포트가 뉴게이트 감옥에서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지 말하자 그는 손가락에서 금반지를 빼어 필포트의 하인과 함께 온 자에게 주면서 간수장 알렉산더에게 가서 쇳덩이를 내려놓고 좀 부드럽게 대하라고 명령했다. 그들이 장관의 메시지를 전하면서 그의 반지를 주자 알렉산더는 이렇게 말했다. “아! 장관도 저자와 꼭 같은 이단이로군! 그렇다면 내일 이 사실을 윗사람에게 알려야지.” 그러면서도 그는 반지를 받아 주머니에 넣고 10시에 필포트에게 가서 쇳덩이를 치웠다.
12월 27일 화요일 식사 중에 장관으로부터 그가 다음날 화형(火刑)당할 테니 준비하라는 전갈이 왔다. 필포트가 대답했다. “나는 항상 준비되어있소. 하나님께서 내게 힘과 기쁜 부활을 허용하셨다오!” 그는 자기 방으로 돌아가 주님께 자기 영을 쏟아놓으며 진리를 위해 자기를 고난받기에 합당한 자로 여기셨음을 진심으로 감사드렸다.
다음 날 아침 8시경 절차에 따라 장관이 와서 그를 부르자 그는 아주 기쁜 태도로 그들에게 나왔다. 거기서 그의 하인이 그를 만나 말했다. “아! 사랑하는 주인님, 안녕히 가십시오. 흑! 흑!” 그의 주인이 돌아보며 그에게 말했다. “하나님을 잘 섬겨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널 도와주실 것이다.” 필포트가 장관들과 함께 처형 장소로 가는 스미스필드로 들어가는 길은 더러웠다. 화형 장소에 도착하자 두 장교가 그를 데리고 화형대로 향해 올라갔다.
그러자 필포트가 명랑하게 말했다. “저런, 나를 교황으로 만들 셈인가? 나는 맨발로 마지막 여행에 만족한다.” 그러면서 그는 무릎을 꿇고 말했다. “오! 스미스 필드여!(사형장소) 나는 네게 서원한 것을 갚으리라.”그리고 일어나 화형대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나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가장 천한 죽임 당하심을 거절치 않으신 구세주를 생각하면 내 어찌 이 화형대에서 죽기를 부끄럽게 여기겠는가?” 그러더니 그는 순종하는 마음으로 그는 시편 106편, 107편, 108편을 암송했다.
그는 기도가 끝나자 장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늘의 이 영광스러운 순간을 위해 당신들은 무슨 일을 했는가?” 그러면서 필포트는 그가 지니고 있던 마지막 남은 돈을 그들에게 주었다. 그들은 필포트를 화형대에 묶고 불을 붙였다. 불길이 활활 타올랐고 잠시 후 순교자는 자신의 영혼을 주님께 맡기고 숨졌다. 그날은 1955년 12월 28일이었다.
25. 토머스 휘틀 목사의 순교
– 이것은 토마스 휘틀(Thomas Whittle) 목사가 기록한 자신의 이야기다. –
1556년 1월 10일 화요일, 런던 주교가 목사인 날 부르러 사람을 보냈다. 나는 밤새도록 작은 침대에서 끙끙 앓던 문간방에서 나왔다. 주교가 보낸 사람은 나를 보자마자 이렇게 물었다. “주교가 미사에 참석하라고 부른다면 너는 어찌할 것이냐?” “나는 당신들 미사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갑자기 내게 달려들더니 사정없이 주먹으로 내 양 볼을 가격했다. 이는 내가 그들에게 끌려가 여러 날 계속 모진 매를 맞게 되리라는 전주곡이었다.
그는 즉시 나를 끌고 나갔다. 그리고 나는 알 수 없는 집으로 끌려갔고 그는 나를 몹시 냄새나는 한 작은 낡은 방에 밀어 넣었다. 거기는 짚도 침대도 없었다. 몸이 불편한 나는 이틀 밤을 겨우 누울만한 낡은 책상 위에서 담요도 없이 떨며 잠을 잤다. 그리고 나는 미사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을 취소하라고 여러 날 심한 매를 맞고 고문을 당했다.
1556년 1월 14일 오후 나에 대한 마지막 심문을 위해 보너 주교는 나를 여러 사람과 함께 재판정으로 불러냈다. 내가 끝까지 로마 가톨릭 미사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거부하자 그들은 나의 성직을 박탈하고 화형(火刑) 판결을 내린 후 사형을 집행할 세속 권력자들에게 나를 넘겼다. 이때 나는 이렇게 기도했다.
“이제 사형선고를 받고 내 마음과 양심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온함을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 드립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의 진리와 순수한 신앙을 위해 적(敵) 그리스도와 그의 잘못된 종교와 교리에 죽기까지 대항해서 이 몸을 바치게 됨을 감사하나이다.”
1556년 1월 27일 휘틀 목사와 여러 형제가 함께 화형대로 끌려갔다. 그리고 그들은 죽음으로 자신들의 신앙고백에 인(印)을 쳤다. 이때 휘틀 목사와 함께한 형제들은 바렛 그린, 존 터드슨, 존 웬트, 토머스 브라운, 이사벨 포스터, 존 워른 등 모두 여섯 명이었다.(*) 출처 / 기독교순교사화(존 폭스 원저, 머리 킹 편저, 생명의 말씀사)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