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순교사화(65, 끝) 영국의 종교개혁과 박해

30. 1605년 의사당 폭파 음모
1605년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James VI & I or James Charles Stuart, 1566-1625) 때 몇 명의 흉악한 음모자들이 모여 어떻게 하면 영국에서 로마 가톨릭을 다시 복구시킬 것인가를 의논했다.(당시는 로마 가톨릭교도들이 숨죽여 지냈다.- 편집자) 그중 가장 열성적인 사람 하나가 왕을 죽이자고 제안하면서 자기가 그 일을 하겠다고 했다.
그 말에 캣츠비는 만약 왕을 제거한다 해도 더욱 고상하고 가문이 좋으며 신교 신앙에 젖어 있는 젊은 두 왕자와 공주가 있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왕만 죽여서는 사회가 전보다 더 나아지기보다는 악화가 될 우려가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왕이 개회사를 위해 의회에 참석할 때 그곳을 폭발시켜 왕과 왕비와 왕자들과 의회 의원들과 하원 의원들을 모두 없애버리자고 했다.
이 의견에 다수가 찬성하여 그대로 실행할 것을 결정했다. 그러나 그중 몇몇은 그렇게 끔찍한 살인을 하는 것이 합당한 일인가 그들 음모를 실행하기 전에 고해 신부들에게 그 의견을 물어보자고 했다. 이에 그들은 예수회 신부 오스왈드 헤즈몬드와 존 제라드와 고위 성직자 헨리 가넷을 찾아갔다. 음모를 들은 그들은 그 계책이 정당할 뿐만 아니라 아주 경건한 일이라고 칭찬했다.
그 이유는 먼저 그것이 수아레스에 의해 가르쳐진 교리며 교황 파울루스 5세가 승인한 것으로 이단자들을 파문시키고 집행되어야 할 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뒤 음모자들에 의해 비밀의 맹세가 이루어졌고 제라드의 인도로 미사를 드렸으며 그들은 모두 성찬식을 하면서 온갖 능력을 다해 그 음모를 추진해 나갈 것을 맹세했다.
그 후 그들 중 퍼시가 의회 의사당에 인접한 집을 한 채 사서 의사당 쪽으로 굴을 파 의사당 건물 전체를 날려버릴 수 있을 만한 화약을 묻기로 했다. 그들은 1604년 크리스마스 무렵부터 굴 파는 일을 시작했다. 그러나 의회가 처음에는 2월로 다시 10월로 또 1605년 11월 5일로 연기되었다.
그들은 매우 단단한 땅을 파서 굴을 내야 했으나 그들의 음모를 추진하는데 충분한 시간 여유 아니 어쩌면 너무나 많은 시간 여유가 있었다. 음모자들이 어려움을 극복하고 굴이 다 완성되려 할 때 그들이 작업하고 있는 근처에서 소음과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깜짝 놀라 자기들이 발각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가이 포크스를 보내어 알아본 결과 그들이 들은 목소리는 인접해 있는 창고에서 들리는 소리로 거기에 석탄을 팔기 위해 쌓아 놓았으며 그것이 바로 의회 의사당 아래 있는데 석탄장사가 세를 들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에 퍼시가 즉시 가서 석탄 장사에게 많은 돈을 주고 잠시만 빌려 쓰기로 했다.
그리고 네덜란드에서 수입한 화약 36배럴을 바닥에 깔고 그 위에 석탄과 장작으로 덮어놓았다. 이제 왕과 왕비와 왕자들과 귀족들과 국민의 대표들을 날려버리기 위해 불을 붙이는 일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음모를 실행할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돌발적임 변수가 생겼다. 음모자 중 한 사람이 갑자기 원인 모를 불안과 초조함에 사로잡혀 괴로워했다. 그는 특히 이 일로 그의 친한 친구 몬티글 경도 함께 죽게 될 걸 생각하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결국 의회가 시작되기 열흘 전쯤 친구 몬티글 경에게 익명으로 이런 편지를 썼다.
나는 나의 주께 당신의 친구로서 사랑으로 당신의 목숨을 구하려 합니다. 그래서 충고를 드리는데 목숨을 구하려면 이번 의회에 불참할 구실을 만드십시오. 왜냐면 하나님과 의로운 사람들이 이 나라의 사악함을 벌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이 충고를 가볍게 여기지 마시고 당신이 이번 사건에서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은거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평온한 것 같지만 의회에는 끔찍한 폭발이 일어날 것을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이 일을 계획하고 있는 사람들을 찾지 못할 것입니다. 친구로서 드리는 나의 이 충고가 정죄 되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면 이 충고가 당신에게 이롭고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이 편지를 읽고 곧 태워버리면 당신에 대한 위험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이것을 잘 이용할 은혜를 주실 것을 바랍니다. 그분의 거룩하신 보호에 당신을 맡깁니다.
몬티글 경은 이 편지를 받고 그날 저녁 국무대신 세실에게 가지고 갔고 그는 그것을 다른 국무대신들과 의논했다. 그러나 그들은 왕이 사냥을 나가 있는 로이스들에서 돌아올 때까지는 이 문제에 대해서 아무런 조사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왕은 10월 말이나 되어야 돌아올 것이다. 그래서 다음날 국무대신은 직접 왕에게 달려갔고 왕은 그 편지를 읽고 이건 사실이 아닐 거라고 말했다. 그 말에 국무대신 세실도 그 편지는 바보나 혹은 미친 사람이 쓴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왕은 의회 의사당 근처 모든 창고와 주변을 다 조사해 보도록 명령했다. 그 당시 궁내 대신으로 왕의 의전을 책임 맡은 서적 공작은 의회가 열리기 하루 전까지 그 조사를 미루었다. 그러다가 몬티글 경을 데리고 의사당 주위의 건물들을 조사하고 특히 하원의원 지하실 창고를 살펴보았다. 그는 석탄과 장작이 가득 쌓여 있는 것을 보고 수행원에게 누구 소유냐고 묻자 가끔 궁전에 드나드는 퍼시의 것이라는 대답을 듣고 왕에게 자기가 살펴본 바로는 아무 일이 없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왕의 의심은 공작의 보고만으로 없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의심이 커져서 하원 의원 건물 지하 창고의 석탄과 장작을 치워버리라고 명령했다. 늦은 밤이었지만 웨스트민스터의 치안관 토머스 네벳 경과 궁정의 내실에 있는 사람들이 왕의 명령대로 석탄과 장작을 치우자 그 밑에 숨겨져 있는 36배럴의 화약이 나왔다. 그런데 이때 건물 근처에 외투를 입은 한 사람이 발을 동동 구르며 초조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직감적으로 수상하게 여긴 치안관이 그를 체포했다.
그는 등과 성냥을 가지고 있었다. 이 사람은 퍼시의 하인으로 음모자 중 한 사람임이 판명되었다. 그는 그들의 음모가 발각된 줄 알고 체포되면 지하실 안에서 자신도 그들과 함께 폭파되겠다고 맹세했었다. 궁정 사신과 궁내 대신은 이 사실을 즉시 잠자리에 든 왕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체포된 음모자는 추밀원의 심문에 전혀 놀라는 기색도 없이 폭파계획을 인정하고 모든 것은 자기 양심이 그렇게 자극했다고 자신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고 다른 음모자들의 이름을 대지 않았다. 그는 악마가 자신들의 의로운 이번 계획을 폭로했으며 이단적인 왕을 죽이는 건 범죄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음날 그는 탑으로 끌려가 고문대 위에서 위협을 받자 그는 음모를 자백하고 동료들의 이름을 대었다. 일당은 모두 즉시 체포되었고 죄질에 따라 음모자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사형당했고 어떤 이들은 평생을 감옥에서 살아야 했다.
31. 1641년 아일랜드 대학살 사건
잉글랜드 찰스 1세(Charles I of England, 1600-1649) 치하에 명목상 로마 가톨릭 대주교와 대성당 아일랜드 성직자들 수가 너무나 늘어났기 때문에 1629년에는 로마 가톨릭의 의식과 관례의 공적인 행사를 중지시켜야 할 필요가 생겼다. 그런데도 로마 가톨릭 신부가 더블린에 새로운 로마 가톨릭 대학을 세웠다. 그들은 또 나라 여기저기에 수도원과 수녀원을 계속 지었고 거기서 신부들과 아일랜드 사람들이 자주 모이고 또 프랑스, 스페인, 플랑드르, 로렌, 로마 등지로 퍼져 나갔다.
이때 1641년 아일랜드의 오네일 가족과 그들의 추종자에 의해 한 음모가 꾸며지고 있었다. 그 음모란 아일랜드 전국에서 동시에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켜 모든 신교도를 다 살해한다는 것이었다.(당시 아일랜드는 일글랜드와 달리 로마 가톨릭이 장악하고 있었다. 편집자) 이 끔찍한 대학살 음모는 로마 가톨릭 예수회 설립자 이그나티우스 로욜라 축제일인 1641년 10월 23일로 결정되었다. 전국 주요지역의 주모자들은 이날을 위해 필요한 모든 준비를 끝냈다. 그리고 그 음모의 실행은 잉글랜드에서 구원병을 보내는 것이 어려운 겨울까지 연기되었다.
프랑스 신부 리슬리과 추기경은 이 음모자들에게 막대한 돈과 협력자들을 보내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많은 아일랜드의 군 장교들이 거사가 시작되면 기꺼이 로마 가톨릭 형제들과 함께하겠다는 강력한 지지 의사 표시를 했다. 그런데 이 끔찍한 일이 벌어지기 직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아일랜드 수도 더불린(Dublin)에서는 이 음모가 오웬 오코밀리라는 사람에 의해 발각되었다. 그래서 다행히 화를 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 이 유혈의 비극이 저지되지 못했다. 음모자들은 약속된 날 아일랜드 전국에서 무장하고 아침 일찍부터 그들에게 붙잡힌 신교도들은 모두 살해했다. 10월 22일 필림 오네일(Phelim O’Neil) 경은 신교도이며 상관인 찰르몬트 경을 방문하는 척하면서 먼저 그의 성안에서 그를 사로잡고 그 앞에서 하인들을 죽이고 며칠 만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냉혈 동물처럼 자기 상관을 살해했다.
유혈의 비극이 일단 시작되자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나이도 성별도 지위도 상관이 없었다. 연약한 여성이나 아이까지도 모든 잔악성을 자행하는 데에 차별이 없었다. 심지어 폭도들의 자녀들도 부모의 본보기 권유에 용기를 얻어 죽은 잉글랜드인 어린이의 시체를 때릴 지경이었다. 주민의 편리를 위해 지어진 집들은 재로 화해 버리든지 다 파괴되었다. 집주인이 문을 잠그고 집 안에서 방어하고 있으면 집과 함께 온 집안을 식구를 불태워 버렸다.
맹신적이고 무자비한 아일랜드의 로마 가톨릭교도들은 손을 피로 적시자마자 매일 끔찍한 비극을 되풀이했으며 전국에 걸쳐 신교도들은 전례 없는 처참한 죽음으로 그들의 격노에 희생이 되었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이 끔찍한 일을 자행하는 데에 로마 가톨릭 예수회 사람들과 신부들과 수도사들에 의해 더욱더 선동되었다. 그들은 그 음모를 실행할 날이 결정되자 사람들에게 빨리 실행하라고 독촉했다. 그들은 그것이 국가의 번영과 로마 가톨릭의 부흥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선동했다. 그들은 폭도들에게 신교도들은 다 이단이며 그들을 더 이상 살려두면 안 된다고 했다. 그리고 잉글랜드 신교도들을 죽이는 것은 개를 죽이는 것 이상의 죄가 아니며 그들을 놓아주거나 보호해 주는 것은 가장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라고 말했다.
로마 가톨릭교도들이 롱포드 성을 포위했을 때 그 성의 신교도 주민들은 관대한 대우를 조건으로 로마 가톨릭교도들에게 항복했다. 그러나 포위자들은 주민들이 성문을 나오자마자 무자비하게 그들을 공격했다. 그들의 신부가 나머지 사람들에게 공격을 시작하라는 신호로 제일 먼저 잉글랜드인 신교 목사의 배를 갈랐다. 그 후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나머지 사람들을 살해했다.
어떤 이들은 목이 매달렸고 어떤 이들은 칼에 찔리거나 총에 맞아 죽었고 많은 사람이 폭도들 도끼에 머리를 맞아 죽었다. 로마 가톨릭교도인 트리로니 남작은 수도사들의 충동을 받아 40명 이상의 여자와 어린이가 포함된 신교도들을 향해 칼에 찔려 죽든지 스스로 바다에 빠져 죽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강요했다. 그들은 후자를 택했고 잔인한 핍박 자들의 무기를 피해 어린아이들을 팔에 안고 물로 뛰어들었다. 그들은 턱을 올린 채 떠밀려 가다가 잠시 후 가라앉아 함께 죽어갔다.
어떤 폭도들은 신교도를 잡아 마차 바퀴 위에 눕혀 한쪽은 두 다리가 나오게 하고 다른 한쪽은 머리와 팔이 나오게 했다. 그리고 폭도 하나가 신교도의 두 다리에 채찍질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으르렁거리는 개들이 달려들어 머리와 팔을 물어뜯었다. 또 대여섯 명의 신교도가 말의 꼬리에 다리 하나가 묶였는데 말이 마구 뛰기 시작하면 불행한 희생자들은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땅바닥에 질질 끌려다녔다.
또 많은 사람이 높은 장대에 목이 매달렸는데 아래는 불길이 넘실거려 질식해서 죽었다. 연약한 여성이라고 해서 이 무자비하고 격노한 핍박 자들이 고안해 낸 잔인한 살해 만행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나이에 상관없이 많은 여자도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죽임당했다.
1,000여 명의 남자, 여자 어린이들이 포텐다운 다리 가운데 가치게 되었는데 폭도들이 다리 양 끝을 파괴하자 다리와 함께 강물 속으로 처박혔다. 살려고 기를 써 헤엄쳐 나오는 사람들은 강가에 기다리고 있던 폭도들에게 머리를 맞아 죽었다. 또 200여 가구의 킬모어 주민들은 모두 그들의 분노에 희생자가 되었다. 어떤 이들은 돈을 어디에 두었는지 자백할 때까지 착고에 채웠다가 알아낸 뒤에는 죽여버렸다.
아일랜드 전국이 도살장과 같았고 수천 명이 단시간에 칼과 굶주림과 불과 물 그리고 분노와 고안해 낼 수 있는 온갖 잔악한 방법으로 죽어갔다. 그들은 또 신교도들을 모두 카쉘에 있는 외딴 토굴 속에 가두어 놓았다가 서너 주일을 만에 막았던 굴 문을 열었는데 어떤 사람은 야만적인 방법으로 매를 맞아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목이 매달렸으며 어떤 사람들은 땅속에 산 채로 묻혀있었다.
그들은 신교도들에게 미사에 나오라고 강요해 놓고는 나오면 그 몸을 찢어 벌려 놓은 채 그대로 두었다. 그들은 또 사람을 조각조각 톱질을 했고 그의 아내의 목을 베고 그의 자녀 머리를 깨뜨려서 돼지우리에 던져 돼지들에게 밟히도록 했다. 이 짐승 같은 자들이 그런 잔인한 일을 행하면서 쾌락을 느꼈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들은 신교도들을 짐승처럼 도살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네 영혼은 악마에게 가라!” 이런 극악무도한 자 중 하나가 손에 피가 얼룩진 채 집으로 들어오더니 그것은 영국 사람의 피며 자기 칼이 신교도들의 흰 피부를 찔러 칼자루까지 깊이 들어갔노라고 자랑했다.
글래스로라는 곳에서 한 로마 가톨릭 신부가 몇몇 사람들과 함께 40명의 신교도를 붙잡아 로마 가톨릭교회로 다시 돌아오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신교도들이 위협에 못 이겨 그렇게 하겠다고 하자 신부는 웃으며 신교도들이 타락해서 다시 이단으로 돌아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세상 밖으로 보내야 한다면서 신교들의 목을 다 잘랐다.
티퍼러리 카운티에서는 신교도 자녀 남녀 어린이 30여 명이 로마 가톨릭교도들에게 붙잡혔다. 그들은 어린아이들을 발가벗긴 채 돌로, 도끼로, 칼로 또 다른 도구로 살해했다. 핀스 카운티에서도 60여 명이 갇힌 집에 불을 지르자 그들은 모두 불길 속에 목숨을 잃었다. 또 대여섯 명이 발가벗겨진 채 채찍질을 당했고 그 후 몸을 밧줄로 꽁꽁 묶인 채 깊은 수렁에 던져지어 말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 숨져갔다.
또 여러 사람이 구멍이 뚫린 나무 기둥에 발을 거꾸로 매달린 채 죽어갔다. 몇몇 사람은 죽을 때까지 활처럼 휜 두 나무 사이에 양다리가 묶여 있었는데 그런 모습은 피에 굶주린 핍박 자들에게는 즐거운 구경거리가 되었다. 클라운스에서는 17명의 신교도가 산채로 땅에 묻혔다. 그리고 한 잉글랜드 사람과 그의 아내와 다섯 자녀와 하녀 한 명이 함께 목이 매달렸고 그들의 시체는 깊은 구덩이에 던져 졌다.
어떤 사람들은 풍차에 매달려 산채로 야만인들에게 칼로 산산조각 이 나 죽었다. 남자든 여자든 어린아이들의 몸 여러 부분을 난도질하여 피를 청평 쏟으며 죽을 때까지 쓰러진 자리에 그냥 놔두었다. 터론느 카운티에서는 하루에 300명 이상의 신교도들이 물에 빠져 죽었고 많은 사람이 목매달려 죽었으며 불에 타 죽고 그렇지 않으면 맞아 죽었다.
아르마흐 대성당도 폭도들이 불을 질러 완전히 타 버렸다. 그리고 가능한 아르마흐와 근처에 사는 신교도들을 그 종족까지 근절시키기 위해 먼저 그들의 집을 다 불태워 버렸다. 그런 뒤 이 무죄한 사람들 남녀노소를 한꺼번에 모아 놓고 콜러렌스로 가는 길로 안전하게 인도해 주는 척하면서 도중에서 비인간적인 방법으로 모두 살해했다.
이와 비슷한 야만적인 행위가 아일랜드 전국 각처에서 불행한 신교도들에게 자행되었다. 그 후 로마 가톨릭교도들의 악마 같은 잔악성을 만족시키기 위해 희생당한 신교도들의 수를 어림잡아 헤아려 보니 150,000여 명에 달했다. 이같이 우리는 순교자들의 거룩한 순교를 기억하면서 그들의 신앙에 찬사를 보낸다. 그러나 인간의 칭찬은 일시적이며 부활하는 날까지로 제한되어 있으나 주님의 칭찬은 영원하다. (*) 출처 / 기독교순교사화(존 폭스 원저, 머리 킹 편저, 생명의 말씀사)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