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단상

기로에 선 성경관

정통 기독교신앙의 위기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절대로 성경관에 대해 타협하면 안 된다. 복음이 더 확장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동시에 상당 부분 복음의 핵심인 성경에 대해 점점 관대해진다면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럼에도 너무나 슬프게도 오늘날 어떤 곳에서는 신학교나 신학회나 복음주의자로 알려진 사람들이 더 이상 성경적인 성경관을 고수하지 않는다.

신정통주의 실존신학의 핵심은 성경이 종교적 체험의 원천은 제공하지만 역사와 과학과 같이 증명되어야 할 것을 다루는 부분에서는 성경이 오류(誤謬)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현재 어떤 곳은 이 개념이 복음주의의 한 부분이 되어있다. 그런 곳에서는 신정통주의 실존신학이 복음주의 또는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가르쳐지고 있다.

오늘날의 성경관의 문제는 분명하다. “성경은 진리이며 역사와 우주를 다루는 부분을 포함한 성경이 말하는 모든 부분이 전혀 오류가 없는가? 아니면 종교적 주제를 다루는 부분에서만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계시인가?”하는 것이다. 즉 “성경이 역사와 우주와 아브라함 이전시대 곧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에서 명제적 진리를 제시하는가 아니면 종교적이라 간주되는 것을 다루는 부분에서만 그런가?”하는 것이다.

다윈(Darwin, 1809-1882)의 친구였던 헉슬리(Thomas Henry Huxley, 1825-1895)는 1890년 자신의 저서에서 머지않아 성경의 모든 사실들 특히 아브라함 이전의 모든 성경역사로부터 기독교신앙이 분리될 것이며 그 후로 그 같은 주장이 영원히 승리할 것을 예견(豫見)했다. 이는 실존철학이나 실존신학이 태어나기 이전인 1890년임을 고려할 때 놀라운 주장이다.

그는 참으로 무엇인가를 명확하게 내다보았다. 그래도 아직 기독교세계관이 절대적이었던 당시 서구에서는 틀림없이 그의 친구들은 이 말을 일종의 농담처럼 여겼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만일 기독교신앙이 사실과 특히 아브라함 이전의 시공간적 역사와 분리된다면(즉 창세기 11장 이전의 말씀을 역사적 사실로 믿지 않는다면 – 편집자 주) 그들은 분명 그런 것은 절대로 기독교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오늘날 신정통주의 실존신학자들만 헉슬리가 예견(豫見)한 바를 주장하고 있는 게 아니다. 스스로 복음주의자로 자처하는 몇몇 사람들도 그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신정통주의의 이런 주장은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신학적 측면에서 출발하거나 아니면 성경이 우주에 대해서 거의 혹은 아무 것도 가르치고 있지 않다고 주장하는 진화론의 측면에서 유래한다고 볼 수 있다.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하나님의 진리의 모든 부분을 강한 목소리와 명확한 설교로 고백하며 또 아무리 담대하게 그리스도를 고백할지라도 바로 그 순간에 세상과 마귀가 공격하고 있는 성경의 사소한 점을 제외한다면 나는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군인의 충성심은 전쟁이 한창 치열할 때 입증된다. 그가 모든 전투에서 최전선을 다 지키고 있다 하더라도 전쟁이 한창 치열한 그 시점에서 겁을 먹고 달아난다면 그건 치욕스러운 도주일 뿐이다.” 오늘날 이 시대는 바로 어떤 성경관을 택해야 하는가를 결정할 시점이다. 확고한 성경적인 성경관을 고수하느냐 고수하지 않느냐가 바로 오늘날의 신학과 복음의 분기점이다. 우리는 지극히 정중하게 그러나 담대하고 명확하게 이렇게 외쳐야 한다. “성경적인 성경관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명확히 구별하는 선이 없다면 복음은 시종일관 철저한 복음이 될 수 없다.”(*) Francis Schaeffer 著  ‘No Final Conflict’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