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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된 말씀, 선포된 말씀

은혜의 방도로서의 하나님 말씀,
기록된 말씀, 선포된 말씀

말씀의 사역을 맡은 목사에 의해 선포된 말씀도 하나님의 말씀이다.

개혁신학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는 신학이다. 그런 점에서 개혁신학은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이해를 계승하고 이를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더 철저하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그야말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게 개혁신학의 입장이다. 이 말을 수사적으로 하는 게 아니고 아주 철저하게 이 논지를 주장한다.

따라서 개혁 신앙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만(sola gratia) 의존한다. 그것이 바른 믿음이다.(sola fide) 이 믿음으로만 우리는 구원을 얻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은혜를 중요하게 여긴다. 구원도 그러하고 교회와 예배와 삶에서도 그러하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1. 은혜 전달의 통상적 방도들

그런데 개혁파 교회는 아주 특별한 경우에는 성령 하나님께서 직접 역사하여 신도를 중생시킨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통상적으로는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되 은혜의 방도(media gratiae)를 사용하여 은혜 베푸신다는 점을 강조해 왔다. 그래서 개혁신학에서는 마치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말씀 안에 갇혀 있는 것을 시사(示唆)하는듯한 루터파 신학자들이 애용하는 ‘말씀을 통하여’(per verbum)라는 용어사용을 자제한다. 그 보다는 오히려 성령님께서 ‘말씀을 사용하셔서, 또는 말씀과 함께’ 역사하신다는 뜻으로 ‘말씀과 함께’(cum verbo)의 원리를 강조해 왔다. 이렇게 ‘말씀과 함께 역사하시는 성령님’을 강조하는 게 개혁파의 입장이다. 그러므로 개혁파는 성령님과 말씀 모두를 강조해 왔다.

통상적인 ‘은혜의 방도’(media gratiae)로는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 즉 들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설교와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말씀’(visible word of God)인 성례만을 언급하기도 한다. 기도를 더해 은혜의 방도로 제시하기도 하는 데 기도는 우리의 생각과 사상과 감정과 세계관을 고치고 결국 성경 말씀을 깨닫게 하고 적용시켜 주님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정도 중요하지만 결국 그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작용해 은혜를 베풀게 되므로 결국 기도도 성경 말씀으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한 측면이 된다. 그러므로 기도를 은혜의 방도로 언급하는 것이나 기도의 과정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은혜를 베푸는 것이라 말하는 것이나 결과는 같다.

그러므로 본고에서는 은혜의 방도가 되는 말씀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다. ‘눈에 보이는 말씀’이요, ‘이미 믿는 신자들의 믿음을 강화시키는’(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65문) 은혜의 수단인 성례에 대해서는 2014년 로버트 레담 교수가 이미 논의한 바 있으므로 이번에는 은혜의 방도로 ‘들리는 하나님의 말씀’(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말씀)과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만 논의하기로 한다. 루터파와 개혁파에 의하면 일차적이고 가장 중요한 은혜의 방편은 첫째가 하나님의 말씀이다.

사도 바울이 말한바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는 이 말씀의 진정한 의도가 어떻게 우리 가운데 나타나는지 살피는 게 우리의 종국적 목적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역사하시기를 간절히 원한다.
2. 기록된 말씀

개혁신학에서는 늘 하나님 말씀의 삼중 형식에 대해서 이야기 해 왔다. 1) 성육신하셨고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지금도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신(the living word of God) 성자와 2) 구약에서 성육신 이전의 그가 기록돼 있고, 신약은 그야말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the written word of God) 성경과 3) 그리고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인(the proclaimed word of God) 설교가 곧 하나님 말씀의 삼중 형식이다.

(1) 바르트의 성경관

사람들은 이를 20세기에 유행시킨 칼 바르트 때문에 흔히 이런 용어와 이해를 바르트가 만들었다고 많이들 오해한다. 그러나 바르트는 이것이 루터와 개혁자 정통파 교회가 항상 하던 말이라고 이야기한다. 이는 참으로 바르트 이전에도 성경적인 신학이 늘 하던 말이었다.

그런데 바르트는 이 중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을 전개하여 소위 그리스도 일원론(Christo-monism) 또는 그리스도 중심적(Christo-centric) 이해를 제시했다. 그에게 그리스도는 모든 것의 중심이고 유일한 계시가 된다. 그는 이런 입장에서 구약과 신약의 내용을 계시와 직접 동일시하기를 거부했고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그 자신이 유일한 계시라고 여긴 그리스도에 의해 판단하려 했다.

그에게는 그리스도가 바로 ‘그 하나님의 말씀’(the Word of God)이다. 바르트는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논하면서 상대적이지 않은 “계시 자체는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다른 것이 아니며, 그 안에서 성취된 화해와도 다른 것이 아니다.”라고 단언한다. 또한 바르트는 말하기를 “이에 비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는 인간의 말이요, 성령께서 역사하사는 순간에만 하나님 말씀이 된다. 그러나 그것인 하나님 말씀인 것은 오직 계시의 순간에서고 그 순간도 역사와 시간 안에 있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라고 말한다.

이처럼 바르트는 성경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 계시의 순간에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는(werden) 것으로 보았다. 계시에 대한 증언으로 여길 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바르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록 된 성경은 계시를 참으로 증언할 때에만 하나님의 말씀이다.”

바르트는 이를 이 시대에서 신학이 살아 있을 수 있는 방식이라고 생각한 듯하다. 그러므로 바르트는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인 설교도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것이어야 하며, 오직 그런 면에서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바르트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말씀 선포는 참으로 계시를 약속할 때에만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같은 바르트의 사고(思考)로 본다면 그에게는 이 세상 시공간에 있는 것은 모두 다 특정한 잠정적인 가능성만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며 실체는 없다. 그래서 모두 다 항상 궁극 이전의 것(pen-ultimate)이다. 예를 들면 칼은 어떤 것을 자르는 순간에만 칼이지 그렇지 않을 경우는 칼이 아니라는 식이다. 기록 된 성경 말씀도 그런 사고로 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는 항상 시공간을 초월해 계시는 그리스도만 중요하다. 이것이 소위 ‘말씀의 신학’의 근간이 되는 내용이고, 여기서 그의 역동적 특성이 늘 드러난다. 바로 이런 의미의 역동성이 바르트가 말하는 ‘그리스도 일원론’이고 또 ‘그리스도 중심주의’이다.

(2) 개혁주의 성경관

이에 비해 개혁파 정통주의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중심적 입장’을 견지한다. 따라서 개혁파 정통주의는 성경에 기록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다.

– 모세의 증거

모세는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전했고 기록한 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모압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신 28:2)라고 말했다.

– 예수님의 증거

이렇게 성경 기록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는 것은 예수님 자신의 입장이기도 했다는 것을 우리들은 강조한다. 예수님이 고르반이라는 말을 하시면서 부모를 공양하지 않는 유대인들을 강하게 비판하셨다.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도다.”(마 15:6) 그런데 예수님이 이 같은 성경 내용들을 언급하실 때 ‘기록되었으되’라는 말로 권위를 부여하셨다. 즉 기록 된 말씀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기록 된 성경을 말씀 하실 때 ‘하나님이 말씀하시되’(마 22:31)라고도 하셨다. 이것은 기록 된 성경 말씀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의미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 성경의 자증

또 성경 자체가 성경을 언급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증거 한다. 사도 바울은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 12:19)고 구약 말씀을 인용하여 이를 주께서 말씀하시는 것으로 표현했다. 이 같이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래서 우리 개혁파 선배들은 성경을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언급하기를 기뻐했다.

(3) 완결 된 계시

그렇기 때문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하여 중요한 또 다른 한 측면이 강조되어야 한다. 그것은 성경이 완결되었고 이제 특별 계시를 새롭게 형성하는 요소들이 더 이상 덧붙여질 수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왔고, 그의 사역은 다 이루어졌고, 그의 말씀은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특별 계시가 완성된 상황에서는 특별 계시는 성경 안에서 우리 모두에게 현존하며 계속 지속될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이를 분명하게 천명한다. 제1장 성경에 대한 고백 1항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자신의 뜻을 계시해 주시던 과거의 방식은 이제 중지되었다.”는 진술과 6항 중에 “이 성경에다 성령의 새로운 계시에 의해서든 아니면 인간들의 전통에 의해서든 아무 것도 어느 때뜬지 더 첨가할 수가 없다.”는 말을 중시해야 한다.
이런 상황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계속되는 상황이다. 그러므로 특별 계시는 그쳤으나 구속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바빙크가 잘 표현했듯이 “하나님의 객관적인 특별 계시는 그리스도의 초림에서 완성되었고, 그 계시의 효과는 그리스도의 재림 시 인류 역사에서 완전히 끝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개혁파 정통주의 역시 지금도 살아 계셔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를 강조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만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을 모두 중요시하여 삼위일체 하나님 중심으로 신학을 하려 하기에 개혁파 정통주의의 그리스도 중심주의는 결국 삼위일체 중심주의가 된다.(바르트도 삼위일체를 말하나 그의 삼위일체 이해는 정통적 삼위일체 이해와는 또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드러내 정통파 신학자들은 그가 제시하는 방식에 대하여 안타까워한다.)

개혁파 정통주의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지금도 하늘에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존중하며 경배한다. 그런데 그 예수님에 대해서 알게 되는 것이 바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기에 개혁파 정통주의는 인식론적으로 성경으로부터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님께 접근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 살아 계신 하나님께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정통파 그리스도인들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또한 개혁파 정통주의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님이 사용하셔서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신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것이 성령님의 역사는 객관적 계시에 새로운 것을 첨가한다는 의미에서 말하는 계시는 결코 아니다. 그것은 단지 신자가 이 객관적 계시를 알고 자신의 것으로 삼도록 도울 뿐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성령의 사역은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다른 이름들 특히 조명과 중생으로 불린다.(고후 4:6, 요 3:5) 바빙크는 분명한 구분을 위해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성령님의 사역은 조명으로 지칭되는 것이 더 좋다.”고 말한다.

3. 선포 된 말씀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인 설교도 하나님의 말씀이다. 예를 들면 바울 사도가 옥에 갇혔을 때도 사도가 전한 말씀을 다른 형제들이 그대로 전하는 것에 대해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 니라.”(빌 1:14)고 말한다.

그러나 목사의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이 전달되는 바른 설교가 되려면 항상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드러내는 것이 되어야 하기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또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인 설교보다도 우선권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동시에 “전도(선포)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다.”(고전 1:21)고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말씀 선포로 구원하시기 원하시므로 기록된 말씀은 항상 선포되고 풀어 설명되어야 한다. 이 때문에 개혁파 정통주의는 설교를 항상 강조했다. 성경 없이 선포될 게 없고 선포 없이는 효과적인 전달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참으로 흥미로운 점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처음에는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었다는 사실이다. 아모스는 자신이 선포하는 것에 대해 이것이 “주 여호와 만군의 하나님의 말씀이니라.”고 한다. 따라서 아모스는 또 “너희는 듣고 야곱의 족속에게 증언하라.”고 강력하게 말하고 있다.(암 3:13)

스가랴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의 영이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감동시키시매 그가 백성 앞에 높이 서서 그들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스스로 형통하지 못하게 하느냐 하셨나니 너희가 여호와를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너희를 버리셨느니라.’”(대하 24:20, 강조점은 덧붙인 것임)고 한다.

또 예레미야는 자기에게 이른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예레미야가 모든 백성에게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 곧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를 보내사 그들에게 이르신 이 모든 말씀을 말하기를 마치니”(렘 43:1, 강조점은 덧붙인 것임)

이처럼 구약에는 하나님의 사람들과 선지자들이 말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라는 것이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신 27:10; 신 28:10; 수 3:9; 수 23:14-15; 삼상 9:27; 삼하 7:25, 28; 왕상 20:28; 왕하 22:15; 왕하 23:16; 대하 33:18; 사 21:17; 렘 23:23; 렘 25:27; 렘 39:16; 렘 42:20-21; 렘 45:2) 따라서 구약의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선지자가 선포하는 말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확신하였다.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가 말한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을 보고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오,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왕상 17:24)라고 했다.

또한 최초의 신약 교회인 예루살렘교회가 핍박 가운데도 열심히 기도하고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 4:31)고 말하는 것에서도 사도들에 의해서 선포된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사도 바울이 전도 여행을 하면서 복음을 전한 것에 대해서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 새’(행 13:5)라고 하며 비시디아 안디옥에서는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시민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행 13:44)라고 하여 바울이 선포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공표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일 년 육 개월을 머물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행 18:11)고 했다. 따라서 사도들의 말을 듣고 복음을 믿는 것에 대해서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행 11:1)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선포한 그 말씀들을 하나님이 성문화(成文化)하기를 원하셔서 성경이 기록되고 우리에게 계시로 주어진 것이다. 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계속해서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읽히고 사람들에게 들려지기를 원하셨다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사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도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요한계시록에서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 1:3)고 한 것이다. 또한 골로새서를 보내며 바울은 “이 편지를 너희에게서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서도 읽게 하고 또 라오디게아로부터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골 4:16)고 했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기록된 말씀도 선포되고 들려지기 원한 것이다. 이처럼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의 한 부분이라고도 할 수 있다.

결론

우리는 1) 선지자나 사도가 선포한 것과 2) 선지자나 사도가 그것을 기록한 것과 3) 목사와 말씀 사역자들의 선포(설교)를 정확히 비교하여 연속성과 차이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선지자와 사도들이 선포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것들이었다. 나단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대상 17:3), 하나님의 사람 스마야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대하 11:2)을 잘 생각해 보라. 만일 하나님께서 직접 주시지 않은 것을 선포하는 자가 있었다면 그는 거짓 선지자로 여겨졌다.(신 18: 20, 22)

이렇게 하나님에게 받은 말씀을 전하는 사도와 선지자들의 선포 속에 성령 하나님은 영감(靈感)을 통해 구원에 꼭 필요한 것을 기록하게 하신 것이 신구약 성경이다. 여기에 선지자와 사도들의 선포와 성경의 연속성이 있다. 성경 기자들이 성령 하나님은 영감(靈感)을 통해 기록한 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직접 주신 것이고 그것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목사의 설교가 성경의 가르침에 일치하는 한 하나님의 말씀이고(여기에 연속성이 있다), 반대로 성경의 가르침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여기에 비연속성이 있다) 여기에 기록 된 성경과 일치하는 개혁주의적인 올바른 설교와 기록 된 성경 보다는 인간의 신비한 체험을 강조하는 신비주의와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조엘 비키도 다음같이 말했다. “신비주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경험(역사적 사실)을 분리시키는데 반해 역사적 개혁주의 신앙은 말씀 중심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리스도를 높임, 성령님의 역사하심과 같은 경험적 기독교를 요구한다, 이런 설교만이 본질적으로 교회의 건강과 번영을 가져 올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성경에 근거해서 지금 여기서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말씀만을 전달해야 한다. 그와 같은 방식으로 회중에게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해야 한다. 바로 여기서 우리의 다음 주제가 주어진다.(*) 글쓴 이 / 이승구 교수(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