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 뻘콥의 기독교 교리사(1)

제1장 기독교 교리사 서론
시작하는 말
이 책은 본래 개혁파 교의학(敎義學, Reformed Dogmatics)이라는 제목의 역사서인데 이제 이름을 바꾸어 기독교 교리사(敎理史, History of Christian Doctrines)라 했다. 기독교 교리사는 교회의 신학적 진리의 점진적인 발전을 다룬다. 이 같은 기독교 교리사는 교회의 신학적 진리를 조직적으로 다룬 저서들과 흔히 병행하여 나타났다. 즉 이것은 ‘기독교 교리사’와 ‘기독교 사상사’로 분리된 두 분야를 이루게 되었다. 이것은 기독교사상의 전(全) 발전사(發展史)가 분리된 연구 분야라는 사실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분리된 연구 분야라고 해서 신학생이 ‘기독교 교리사’ 연구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교리적 진리의 연구는 그 역사적 배경을 무시하면 불완전한 신학이 되는 법이다. 이런 과오는 과거에도 많았거니와 오늘날도 많이 나타나고 있다. 그 결과로 진리에 대한 바른 이해와 정당한 평가가 이루어지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서 계시된 그 진리를 해석하며 발전시키는 일에 있어서 성령이 교회를 인도하셨다는 사실마저 제대로 인정하지 못하게 되었다.
지난날의 사상(思想)을 검토한다든가 또는 거기서 어떤 이정표(里程標, Milestone) 찾는 일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랫동안 교회의 정죄를 받았던 고대의 이단사상(異端思想)들이 마치 새로운 사상인양 끊임없이 반복해서 나타나기도 했다. 과거를 배우는 일이 이렇게 크게 등한시되었으며 따라서 많은 사람들은 지난날에는 거의 완성된 것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현재 저들 자신의 사상(思想)을 힘차게 밀고 나가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물론 신학자는 오늘의 종교계의 상황을 고려하며 진리를 새롭게 연구해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거에 관한 연구를 게을리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간단한 교리사의 연구나마 이와 같은 역사연구에 좀 더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진리 이해(理解)에 보다 나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다행으로 생각한다.(1949년 8뭘 1일 미시간 주그랜드래핏에서 저자 루이스 뻘콥)
제1절 교의사의 주제
(The Subject Matter of the History of Dogma)
교의사(敎義史)가 신학일반에 모두 관계되는 것은 아니다. 먼저 엄밀한 의미에서의 교의(敎義, dogmas)를 취급하고 다음으로 교회에서 아직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교리(敎理, doctrines)를 취급하기도 한다.
1. ‘교의’라는 말의 의미
(The Meaning of the Word “Dogma)
(1) ‘교의’의 어원적인 의미
교의(敎義, Dogma)는 헬라어 ‘dokein’에서 온 말인데 이 ‘dokein’은 ‘dokein moi’라는 표현에서 “내 생각에는 그럴 듯하다.” “그것은 나를 기쁘게 하다.”를 의미할 뿐 아리라, “나는 무엇을 명확히 결정하였으니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확정적인 사실이다.”를 뜻한다. 이 마지막 의미(意味)가 점점 강조되어 ‘교의(敎義)’라는 말은 결정적인 의미 특히 공인(公認)된 결의(決議)나 법령(法令) 등을 나타내는 말이 되었다. 즉 ‘교의(敎義)’는 자명(自明)한 과학의 진리들이나 확립되고 명백하며 타당한 철학적 확신이나 정부의 법령이나 공적으로 제정된 종교적 교의(敎義) 등을 나타낼 때 말로 쓰이게 되었다.
(2) 성경에 사용된 ‘교의’의 의미
성경은 ‘교의’라는 말을 70인경(七十人經, Septuagint)에서는 정부의 법령을 지시하는 말로 사용하였고(에 3:9, 단 2:13, 6:8, 눅 2:1, 행 17:7), 에베소서 2:15, 골로새서 2:14에서는 구약의 의식(儀式)을 나타냈으며, 사도행전 16:4에서는 예루살렘 회의의 결정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했다. 이것들은 철학적 용법이요 그 후에 신학에서 쓰는 성경적인 용법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사도행전 16:4에서 사용된 것을 보면 후대에 와서 신학에서 사용된 것과 유사한 점을 보게 된다.
예루살렘회의는 교리(敎理)를 제정(制定)한 것이 아니고 교회의 윤리생활을 위한 규율을 공포한 것이다. 그러나 그 결정은 교리적인 논쟁에서 촉발되어 이루어졌으며 또한 교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한 하나의 권고가 아니라 교회의 재가(裁可)를 얻은 적극적인 주님의 명령(命令)이었다.
(3) 신학상의 ‘교의’의 의미
교의(敎義, dogma)라는 말은 사실상 교리(敎理, doctrine)라는 말의 동의어(同義語)로서 종교와 신학에서 극히 자유스럽게 사용되나 일반적으로는 더 제한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교리(敎理, doctrine)는 종교적 진리에 대한 직접적이고 소박한 표현이다. 이 교리는 과학적인 정확성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혹 그런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그건 어디까지나 어떤 한 개인의 계통적 서술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종교적 교의(敎義, religious dogma)는 성경의 권위에 기초를 둔 종교적 진리이며 어떤 교회 회의에서 공적으로 제정된 것이다. 물론이 말의 의미는 성경적 용법에 의하여 결정된 것은 아니다. 성경에서는 항상 법령, 계명 혹은 실생활의 법규 같은 것을 표시하는 말로 쓰이나 사실은 어떤 제안이나 원리를 나타내는 철학적 용법과 더 잘 조화되는 말이다. 어떤 초대 교부들은 이 말(dogma)을 교리의 본질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하였다.(Cf. Hagenbach, History of Doctrines, I, P. 2f., Hauck, Reatencyctopaedie, Art. Dogmauk)
2. 교의의 기원과 그 특징
(The Origin and Character of Dogmas)
(1)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의관
종교적 교리들은 비록 완성된 형태는 아니지만 성경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인 의미의 교리들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다. 그것들은 인간적 반영과 교회적 반영의 결실이요 때로는 신학논쟁에 의해서 작성되거나 강화된 것들이다.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는 교의(敎義)의 기원을 말하는 데 있어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로마 가톨릭은 교의를 배제하지는 않았으나 그것이 신자의 집단이라고 할 수 있는 교회의 반영임을 경시하고 대신 교훈적 교회나 혹은 성직단(聖職團)의 연구임을 중시한다. 새로운 형태의 오류가 나타날 때는 언제나 교황이라는 무오(無誤)의 대변자를 가지고 있는 그 교훈적 로마 가톨릭교회는 그것을 신중히 검토한 뒤 성경과 유전이 가르치는 교리를 작성하여 그것을 계시된 진리라고 선언하며 모든 신실한 성도들에게 받아들이기를 강요한다.
윌머스(Wilmers)는 그의 저서 ‘기독교 요람’(Handbook of the Christian Religion, p. 15l)에서 “그러므로 교의(敎義)는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진리요 동시에 우리의 신앙을 위하여 교회가 제의한 것이다.”라고 했다. 이와 비슷하게 스파이레고 클락(Spirago Clarke)도 요리문답 강해(The Catechism Explained, p. 84)에서 “하나님이 계시하신대로 교회가 우리에게 보여준 진리는 신앙의 진리라고도 하고 교리라고도 한다.”고 했다.
교회는 교리 문제에 있어 무오(無誤) 한 존재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제의(提議) 된 진리는 권위가 있을 뿐 아니라 거절되거나 변경될 수 없는 것이다. “과학의 발달에 따라 교회가 과거와 현재에 이해하고 있는 교리에 어떤 다른 의미가 부여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저주받아 마땅할 것이다.”(Dogmatic Decrees of the Vatican Council, Canons IV.3)
(2) 개신교의 교의관
종교개혁자들은 이상의 로마 가톨릭의 교의관을 대신하여 비록 유사성은 있을지라도 중요한 점에서 다른 교의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에 의하면 모든 참된 종교적 교의들은 그 실질적인 내용을 오직 성경에서만 찾는다고 보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말씀이나 유전(遺傳)을 교의의 자료로 인정하지 않았다. 동시에 그들은 교의들을 성경에서 직접 취해진 진술로 보지 않고 신자의 단체로서의 교회의 계시된 진리에 대한 성찰(省察)의 열매로 생각하는 동시 유능한 대표적 단체의 공적 제정으로 보았다.
교회의 이와 같은 반영이 때때로 교리적 논쟁에 의해서 결정되고 그 의미가 심오해졌기 때문에 교회 회의나 대회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최종적으로 결정한 그 공포(公布)에도 지난날 인위적인 수고의 흔적이 가끔 나타남을 보게 된다. 그 교의들은 무오(無誤)한 것은 아니나 충분히 신뢰할 만큼 신빙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교의들의 권위는 그것들이 단순히 교회에 의해 제정되었다는 사실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실제로 기초하였다는 데 있는 것이다.
(3) 현대신학의 교의관
슬라이어막허(Schleiermacher), 릿출(Ritschl), 비넷(Vinet)과 그 외의 다른 학자들의 영향으로 근본적으로 다른 교의 개념들이 발전되었는데, 이것은 과거에 개신교 권내의 사람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졌었다. 그들은 기독교적 의식(儀式), 기독교적 경험(經驗), 기독교적 믿음, 기독교적 생활을 교의(敎義)의 실질적인 내용의 근원으로 표현하고 이것이 종교개혁의 원리와 더 잘 조화된다고 보았다.
교회의 교의들은 단순히 교회생활의 경험, 감정, 신앙 등에 대한 지적 형성들이라 하였으며, 또 어떤 사람들은 경건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계시로 인정하는 객관적 요소에서 발생한 것이라 말하기도 한다. 슐라이어막허는 이 종교적 경험의 직접성에 대해 주장했고 릿출이나 그의 학파들은 교의란 신앙이 하나님의 계시로 높이는 어떤 객관적인 요소에 의해서 조정되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종교단체가 이러한 경험들을 숙고하고 마침내 어떤 유능한 단체가 그 경험들에 대하여 형식을 갖추어 지적으로 표현함으로써 교의가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물론 다른 부분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교의의 구성은 신학자 개인의 일이 아니고 단체 곧 교회나(슬라이어막허) 교회와 노선을 같이하는 국가의 일(롭슈타인)이라 할 수 있다. 이 같은 교의의 기원설은 슐라이어막허, 릿출, 카후탄(Kaftan), 롭슈타인(Lobstein), 비넷, 싸바티어(Sabatier), 밴 데이크(Van Dijk)와 또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점은 현존한 교의(敎義)들이 실제적으로 개신교 교회에서 기원했다는 것을 그들이 말하지 않고 다만 앞으로 그 교의들이 존재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옛 교의(敎義)들을 낡아빠진 것으로 보았다. 그 까닭은 그 교의(敎義) 들이 너무 지적(知的)이어서 교회생활에 적절한 표현을 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종교적 공동체 생활에 영향을 주는 새로운 교의가 요청되는 때문이라는 것이다.
(5) 하르낙의 교의관
하르낙(Harnack)의 교의관도 주의해 볼만하다. 그는 불후의 명저 ‘교의사’(敎義史, TAe History of Dogma)에서 초대교회 모든 교의를 헬라 철학과 기독교 진리의 괴상한 혼합물이라 보고 그 속에는 이교(異敎) 철학의 요소들이 압도적으로 차지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교의란 그 개념이나 발전에서 볼 때 복음의 토양 위에 세워진 희랍 정신의 작품이다.”라고 했다.
그는 또 “교회는 복음을 어떤 지혜로운 형식으로 나타내서 지식인들의 호감을 사려는 유혹에 빠지게 되었다. 교회의 실제적인 신앙은 지적인 개념 곧 교의로 변했으며, 이것은 교회사(敎會史)의 주축이 되어 버렸다. 이것은 큰 과오였으며 이 과오는 후대의 교의 형성에 있어서도 계속되었다. 그러므로 전(全) 교의사(敎義史)는 거대한 오류(誤謬)의 역사이다.”라고 했다. 이것이 바로 신학에서 모든 형이상학적인 것들을 제거하려는 릿출학파(Ritschlian School)의 대 야심이며 하르낙이 바로 이 학파에 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6) 교의의 올바른 정의
교의(敎義, dogma)는 교리(敎理, doctrine)라는 말로 정의할 수 있다. 그것은 성경에서 유래되었고 교회가 공적으로 정의하였으며 또한 신적 권위에 의존한다고 선언되었기 때문이다. 이 정의는 부분적으로는 그 특징을 나타내고 부분적으로는 그 특징을 암시해 주고 있다. 교의의 주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유래되었기 때문에 권위가 있는 것이다. 교의는 성경에서 발견되는 것의 단순한 반복이 아니고 교의(敎義) 성찰의 열매인 것이다. 그것은 권위 있는 교회단체에 의해 공적으로 정의되었으며 신적 권위에 의존한다고 선언된 것이다. 이처럼 그것이 단순한 개인의 진술이 아닌 한 단채의 표현이기 때문에 사회적인 의의(義意)를 갖는다. 또한 교회의 중요한 유산으로서 후대에까지 전승되기 때문에 전통적인 가치도 갖는다. 교의사를 통해 우리는 교회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신적 진리 부요함을 점진적으로 의식하게 되고 진리의 기둥이며 초석으로서의 자신의 높은 특권을 자각하고 성도에게 주어진 신앙을 방어하려고 애쓴 모습을 보게 된다.(*) 글쓴 이 / Louis Berkhof 출처 / Louis Berkhof, ‘The History of Christian Doctrine’, 신복윤 역, (성광문화사, 2004. 9. 4.)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