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단상

말씀과 함께하는 은혜

은혜의 방편에 대하여

“타락한 인간이 어떻게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구원(救援)의 복을 받을 수 있는가?” 은혜의 방편(方便)은 이 같은 질문에서 출발한다. 왜냐하면 타락한 인간은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죄인(罪人)이 구원 얻을 수 있는 유일(唯一)한 길은 우리의 구원의 유일한 기원(起源)인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그리스도의 공로(功勞)가 주는 은택(恩澤)을 받는 방법 외에는 없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의 공로와 그 은택이 죄인 된 우리에게 적용되는 길은 우리의 믿음을 통해서이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은 성령(聖靈)의 사역을 통해서 일어나며 유지(維持)된다. 그렇다면 성령은 어떻게 역사하시는가? 바로 여기에 은혜의 방편의 자리가 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실 때 성령이 직접 역사하실 수도 있으나 통상적으로는 어떤 방편의 사용과 함께 역사 하신다. 이것을 ‘은혜의 방편’이라 부른다. 즉 성령께서 은혜를 주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방편을 말한다. 성령께서 어떤 방편을 사용하셔서 우리의 믿음을 일으키시고, 믿음을 보존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또한 성장하게 하신다. 이 때 우리는 성령께서 역사하신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더 간절히 붙들며, 우리 죄를 떨쳐버리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담대히 세상을 이기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성령의 은혜의 방편에 대해 교회의 신조(信條) 사이에 차이가 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서’는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구속의 은택을 전달하기 위해서 사용하시는 외적인 통상적 방편이 ‘말씀’, ‘성례’, ‘기도’라고 한다.(웨소 88문) 반면 ‘하이델베르크 요기문답서’는 성령이 복음의 ‘설교’(말씀)로 믿음을 일으키고, ‘성례’로 강하게 하신다고 진술한다.(하요 65문) 즉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서에서는 ‘말씀’, ‘성례’, ‘기도’ 세 가지를 언급하고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서에서는 ‘말씀’과 ‘성례’ 두 가지를 언급한다.  

그러면 이 둘은 다른 것인가? 이 둘이 다른 내용을 담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기 전에 좀 넓게 생각해 보자. 우리가 경험적으로 은혜의 방편을 생각해보면 다양한 것이 떠오를 수 수 있다. 사람마다 갖고 있는 믿음의 삶의 내용들이 은혜의 방편인 경우를 보게 된다. 즉 신자는  다양한 삶의 모습을 만난다. 좋은 일을 만나기도하고 역경과 고난의 순간을 마나기도 한다. 그런 다양한 삶의 순간들도 신자에게는 은혜의 방편이 되어서 그것들을 통해 믿음의 교훈을 받으며 삶의 모습을 교정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만나는 다양한 사람들 다양한 경험들 다양한 삶의 내용이 믿음을 일으키기도 하고 믿음의 교훈을 주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 삶 전체가 은혜의 방편인가? 우리가 넓게 본다면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왜 신조는 우리 삶을 은혜의 방편이라고 진술하지 않는 것인가? 왜냐하면 우리 삶의 경험 자체만으로 은혜의 방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만나는 다양한 경험이 믿음의 유익을 주는 때는 그 경험이 말씀과 묶였을 때이다. 말씀과 분리(分離)된 우리의 경험은 어떤 유익도 가져오지 못한다. 아니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의 경험을 말씀과 묶으셔서 우리 삶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攝理)가 은혜의 방편이 되게 하신다.

‘기도’가 은혜의 방편일 때도 ‘말씀’과 분리(分離)된 기도를 말하지 않는다. 물론 공적인 회집의 기도가 가장 중요하지만 신자가 기도할 때는 언제나 ‘말씀’ 안에서 자신의 뜻과 자신의 속성(屬性)을 계시하신 하나님 앞에서 선다. 즉 성도의 기도는 말씀에서 계시하신 우리의 소망을 주님 앞에 올리는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말씀 계시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또한 신자는 자신의 삶의 문제를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갈 때에도 삶의 해석이 말씀과 분리되어서는 안 되며 말씀으로 해석(解釋) 된 자신의 삶을 바라보며 나아가야 한다.        

정리하면 교회문서(신조)가 ‘말씀’과 ‘성례’를 은혜의 방편으로 말할 때 이 같은 객관적인 은혜의 방편을 생각한 때문이다. 은혜의 방편으로 ‘기도’를 포함할 때에 은혜가 작용하는 주관적인 면까지 고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앞서  언급한 두 문서가 결코 서로 다른 내용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즉 ‘말씀’과 ‘성례’와 같은 객관적 은혜의 방편을 말함은 언제나 그 내용이 열매 맺기를 소망해서 말한다. ‘기도’와 같은 주관적 은혜의 방편을 말할 때에 항상 말씀을 전제하고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의학(敎義學)의 ‘은혜의 방편’’ 항목에서는 성령님의 수단으로서 객관적으로 은혜가 전달되는 ‘말씀’과 ‘성례’로 제한(制限) 하여 다 다룬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말씀’과 ‘성례’를 은혜의 방편이라고 할 때 마치 우리가 마주하는 삶의 내용들이 은혜의 방편과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오해해서는 안 된다.(롬 8장 참조) 가장 중요한 은혜의 방편인 객관적인 ‘말씀’은 결국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의 삶의 내용들과 함께 주관적으로 ‘열매’를  맺는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언제나 ‘말씀’과 분리되어 별개(別個)인 객관적 은혜의 방편이 될 수 없다. 기도자는 ‘말씀’ 때문에 은혜에 들어간 자요, ‘말씀’ 때문에 주님 앞에 선자요, 기도 그 자체가 은혜의 증거이며, 믿음의 증거이자 믿음의 실천(實踐)이다. 기도함이 이미 은혜를 누리는 것이요 기도를 통해 주의 말씀과 약속을 다시 확인하여 더 큰 은혜로 들어간다.(*) 글쓴 이 / 이남규 교수(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한양대학교 전자공학과(B.S.),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M.Div.), 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Th.M.), Theologische Universiteit Apeldoorn(Dr.theol.), 학위논문 Die Prädestinationslehre der Universität Heidelberg von 1583 bis 1622(Dr.theol. diss.) 출처 / ‘합신은 말한다’(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Vol. 33-3. 2018.9. pp.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