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말씀 묵상 목적과 방법

PARTⅠ

주님과 동행의 필수 조(1)

말씀 묵상 목적과 방법

– The Puritan Practice of Meditation –

시작하는 말 

”묵상은 적용을 낳고, 묵상은 치유하고, 묵상은 가르친다.“(Ezekiel Culverwell)

영적 성장은 신자들의 기독교적 삶의 한 부분이 되어야 한다. 베드로는 신자들에게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벧후 3:18)고 권면한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참된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고, 그리스도의 기름 부음에 참여하게 된다.”고 말한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새 생명을 얻어 살아나고, 그에 대한 보증으로 그들에게 성령이 주어진다. 그리고 성령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위의 것을 찾는다’(골 3:1) 참된 그리스도인에게는 영적 성장이 당연히 기대되는 일인데, 그 이유는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져 있는 사람들이 감사의 열매를 맺지 않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질문 32, 45, 48, 64)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성장을 가로막는 한 가지 장애물은 그리스도인들이 영적 지식을 계발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우리는 기도와 성경 읽기에 시간을 충분히 할애하지 못하고 있고, 묵상 습관을 실천하지 못했다. 한때 기독교의 핵심 훈련의 한 분야로 간주 되고, ‘기도 활동에 극히 필수적 예비단계이자 보조 업무’로 간주 되었던 묵상(默想, meditation)이라는 단어가 지금은 비성경적인 뉴에이지(New Age) 영성과 결탁이 되어 있는 것은 얼마나 큰 비극일까!  

우리는 당연히 초월(超越) 명상과 마인드 컨트롤(mind control)과 같은 다른 수련에 종사하는 자들을 비판한다. 왜냐면 이런 수련은 불교나 힌두교(Hinduism)와 같은 거짓 종교에 연루되어 있고, 성경과는 아무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명상은 마음을 비워 세상과 격리시키고 소위 우주정신에 합일(合一)되도록 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고, 살아 계신 인격적인 하나님께 다가가 귀를 기울이고, 적극 반응을 하는 것과는 무관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통해 조용한 반성과 묵상의 중요성을 배울 수 있다.

한때 기독교 교회는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과 이웃을 가까이하는 데 초점을 둔 성경적 묵상에 깊이 참여한 적이 있었다. 청교도 시대에 수많은 목회자가 묵상 방법에 대해 설교하고 글을 썼다. 이번 장에서 우리는 청교도의 묵상 관습을 살펴보면서 ‘묵상 본질과 의무’, ‘방식과 주제’, ‘유익과 장애물’, ‘자기 검토’에 대해 확인해 볼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청교도들을 스승으로 삼으면 우리 시대에 합당한 성경적 묵상 관습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1. 묵상의 정의, 본질, 종류

(1) 묵상의 정의

‘묵상하다’(meditate) 또는 ‘명상하다’(muse)는 말은 ‘깊이 생각하다’ 또는 ‘반성하다’는 뜻이다. 다윗은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 불이 붙으니”(시 39:3)라고 말했다. 여기서 “작은 소리로 읊조리다.”(muse)는 말은 ‘속삭이다.’, ‘중얼거리다.’, ‘입으로 소리를 내다.’는 뜻이다. 곧 이 말은 ‘우리가 혼자 말을 하는 것’을 표현하는데 쓰는 말이다. 이런 식의 묵상은 성경 구절을 암기하기 위해 낮은 소리로 홀로 낭송하는 것을 가리켰다.

성경은 종종 ‘묵상’에 대해 언급한다. 창세기 24:63은 “이삭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라고 말한다. 가나안을 정복하는 일을 지휘해야 하는 힘든 업무를 맡고 있음에도, 주님은 여호수아에게 율법책을 주야로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수 1:8)고 명하셨다. 그러나 ‘묵상’이라는 말은 시편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데, 그 횟수가 다른 모든 성경 속에 나오는 것을 합친 것보다 많다.  

시편 1편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을 복 있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시편 63:6을 보면, 다윗은 자신이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린(meditating) 것에 대해 말한다. 시편 119:148은 “주의 말씀을 조용히 읊조리려고(meditate) 내가 새벽녘에 눈을 떴나이다.”라고 말한다.(참고, 시 4:4, 77:10-12, 104:34, 119:16,48.59,78,97-99) 

(2) 묵상의 본질

생각하는 것, 반성하는 것이나 명상하는 것은 묵상 주제를 전제로 한다. 공식적 묵상은 중요한 주제를 대상으로 한다. 예를 들면 철학자들은 물질과 우주와 같은 개념들을 묵상하고, 신학자들은 하나님, 영원한 작정, 인간의 의지 등에 대해 묵상한다.

청교도는 성경적 묵상은 삼위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생각하는 걸 포함한다고 말하기를 결코 게을리한 적이 없었다. 청교도는 묵상 대상을 살아 있는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와 기록된 말씀인 성경에 고정시킴으로 행함을 무시하고 명상만 강조하며, 성경 내용을 무시하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데 몰두하는 거짓 영성이나 신비주의와 같은 부류와는 거리를 두었다. 청교도는 묵상을 통해 지성과 마음(감정)을 함께 단련시켰다. 묵상하는 자는 지성뿐만 아니라 감정을 갖고 주제에 접근한다.    

토머스 왓슨(Thomas Watson, 1620-1686, the Puritan preacher and author)은 묵상을 “하나님의 진리를 기억하고, 이 진리를 진지하게 상고해서 우리 자신에게 적용하는 지성의 거룩한 실천이다.”라고 정의했다.

에드먼드 칼라미(Edmund Calamy, 1600-1666)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참된 묵상은 묵상할 때 그리스도를 묵상함으로 마음이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오르게 하고,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 묵상해서 마음이 그 진리에 따라 변화되게 하며, 죄에 대해 묵상해서 마음이 죄를 미워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묵상을 통해 유익을 얻기 위해서는 세 개의 문 곧 지성의 문, 마음과 감정의 문, 실천적 삶의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라고 했다. 에드먼드 칼라미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또 “그대는 하나님이 걷는 것처럼 걷기 위해 하나님을 묵상하고, 그리스도를 존중하고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삶을 살기 위해 그리스도를 묵상해야 한다.”라고도 말했다.

그리스도인의 묵상은 매일 이행해야 할 의무로서 청교도가 말하는 기독교적 삶의 다른 모든 의무를 더 잘 이행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기계에 윤활유를 치는 것 같이 묵상도 은혜의 수단들(성경 읽기, 설교 듣기, 기도 등)을 부지런히 사용할 수 있도록 돕고(참고,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질문 154), 은혜의 표지(회개. 신앙. 겸손)를 더 깊이 있게 하며,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를 강화시켜준다.

(3) 묵상의 종류

청교도는 두 종류의 묵상 곧 ‘임시적 묵상’과 ‘계획적 묵상’에 대해 말했다. 칼라미는 “하늘의 일들에 대한 돌발적인 ‘임시적인 묵상’이 있고, 엄숙하며 정해져 있고 ‘계획적 묵상’이 있다.”라고 말했다.

⓵ 임시적 묵상

임시적 묵상은 감각을 통해 관찰한 것으로 자신 생각을 하늘에 대한 묵상으로 들어 올리는 것이다. 신자는 자신의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는 것을 ‘천국에 오르는 사닥다리’로 이용한다. 다윗이 시편 8편에서 달과 별들을 보고 말한 것, 솔로몬이 잠언 6장에서 개미들을 보고 말한 것, 그리스도께서 요한복음 4장에서 우물을 보고 말한 것이 바로 임시적 묵상이다.    

토머스 맨톤(Thomas Manton, 1620-1677)은 이렇게 설명했다. “하나님이 모형과 의식들을 통해 구약교회를 훈련을 시키셨는데 이것은 그들로 일상적인 대상을 통해 영적 사고에 이를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신약 시대에 우리 주님은 세상사를 위해 모든 직업과 일터를 갖고 일하는 사람들 속에서 발견되는 통상적인 기능과 직무들에서 취한 비유와 비사를 통해 우리가 일하는 장소가 가게이든 공장이든 들판이든지 계속 그리스도와 천국에 대해 생각하도록 천국 정신을 가르치셨다.”

‘임시적 묵상’이나 ‘즉흥적 묵상’은 실천하기가 비교적 쉽다. 왜냐면 언제 어디서든 어떤 사람들 속에서든 실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적 성향의 사람은 자연물을 영적 진리로 삼는 법을 쉽게 배울 수 있다. 그의 욕구는 영적인 것까지도 육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육적 성향의 사람과는 반대되기 때문이다.

맨톤이 말한 것처럼 “은혜를 받은 마음은 증류기(蒸溜器) 같아서 접하는 모든 것 속에서 유용한 묵상 자료를 증류해 낼 수 있다. 은혜를 받은 마음은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을 보는 것처럼 모든 것 속에서 하나님을 본다.”

묵상에 대한 거의 모든 청교도 작품이 임시적 묵상을 언급하고 있다. 월리엄 스퍼스토(William Spurstowe, Spurstow, 1605-1666), 토머스 테일러 (Thomas Taylor, 1576-1632), 에드워드 버리(Edward Bury, 1616-1700), 헨리 루킨(Henry Lukin, 1628-1719) 같은 청교도는 임시적 묵상만을 다룬 책을 썼다. 그러나 임시적 묵상은 위험성도 있다.

조셉 홀(Joseph Hall, 1574-1656) 주교는 이런 묵상은 억제하지 않고 방치하면 쉽게 말씀에서 이탈해서 로마가톨릭 영성의 경우처럼 미신적인 것이 되고 만다고 경고했다. 즉 사람의 상상력은 거룩한 말씀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 청교도는 임시적 묵상을 어디까지 인정해야 하는지에 대해 각기 의견이 달랐다.        

‘천로역정과 청교도 묵상의 전통’(The Pilgrim’s Progress and Traditions in Puritan Meditation)에서 카우프만(Milo Franklin Kauffman, 1898-1988)은 청교도의 묵상에는 두 가지 전통이 있다고 말했다. 카우프만은 “교회 정치 분야에서는 아니나 신학 분야에서는 온건한 청교도인 조지프 홀은 1606년에 처음 출판된 ‘신적 묵상의 방법’(Art of Divine Meditation)이라는 책을 통해 청교도 속에서 묵상 문학이 발전하는 길을 열어 놓았다고 말했다.

조셉 홀은 묵상 내용을 말씀으로 한정시킴으로 묵상할 때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에 제동을 걸었다. 홀의 생각은 1650년대에 주로 활동했던 아이작 암브로스(Isaac Ambrose, 1604-1664)와 1586년 7월 5일, 토마스 후커(Thomas Hooker, 1586-1647) 그리고 그로부터 한 세대 후에 활동했던 존 오웬(John Owen, 1616-1683)과 에드먼드 칼라미(Edmund Calamy, 1600-1666)에게 크게 영향을 미했다.

카우프만은 말하기를 로마가톨릭 저술가들과 달리 대다수 청교도 저술가들은 “그리스도의 생애 속에서 일어난 사건들보다는 성경 교리나 특수한 명제들에 대해 묵상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카우프만에 따르면 리처드 십스(Richard Sibbes, 1577-1635)와 리처드 백스터 (Richard Baxter, 1615-1691)는 이런 전통에서 벗어나 성례와 천국에 대한 묵상을 추천했다. 특히 십스는 영혼은 제약 없는 상상력으로 크게 상처를 받을 수도 있으나 또한 “그로 인해 큰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천국을 잔치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혼인(婚姻)으로 표현하는 것처럼 하늘의 일들을 땅의 말로 표현하는 것은 “우리의 상상력이 허다한 영적 유익을 얻으면서 (중략) 걸어가는 넓은 들판을 제공했다.”라고 십스는 말했다. 카우프만은 백스터가 감각 대상과 신앙 대상을 비교함으로써 상상력을 강조할 때 십스의 ‘영혼의 갈등’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 생각을 했다. 또 존 번연(John Bunyan, 1628-1688)은 ‘천로역정’을 쓸 자극을 받게 되는데 이 책에서 그는 상상력을 동원해서 신자의 영적 순례에 결정적인 아주 광범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카우프만의 평가는 어느 정도 진실을 담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는 청교도가 성경을 벗어나 상상력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것을 두려워했다는 것을 거의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청교도는 안셀무스, 로욜라의 이그나티우스 그리고 다른 로마가톨릭 학자들이 지나치게 복음서 이야기-특히 그리스도의 체포와 재판과 고난과 부활-를 시각화해서 오감을 통한 상상력에 문을 열어 놓은 것을 당연히 경계했다. 나아가 홀과 람브로스에 대한 카우프만의 부정적 평가는 두 저술가가 성경적 상상력과 감각 활용에 대해 얼마나 괄목할 만한 자유를 부여했는지를 고려하지 못한 데서 기인한다.        

‘홀의 묵상’(Contemplations)과 암브로스의 ‘예수를 바라보라’는 성경의 경계를 이탈하지 않으면서 자유롭게 묵상에 전념했다. 이 균형은 청교도 전통 속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하고, 그것만으로도 청교도는 우리가 거룩한 상상력을 어떻게 사용을 해야 하는지 스승과 같은 역할을 한다.

⓶ 계획적 묵상

가장 중요한 묵상 종류는 날마다 시간을 정해 놓고 하는 ‘계획적 묵상’이다. 칼라미는 “계획적 묵상은 ‘사람들에게서 분리되어 (중략) 어떤 시간에 은밀한 골방에서나 또는 홀로 걸으면서 갖는’ 묵상으로 이때 묵상하는 자는 엄숙하게 그리고 숙고(熟考)하며 하늘의 일들에 대해 묵상한다.”라고 말했다.

이런 숙고는 ‘벌이 꽃 위에 머물러 있으면서 꿀을 몽땅 빨아들이는 것처럼’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진리 위에 머물러 있다. 또 이런 묵상은 영혼의 반성 행위로서 이 행위를 통해 영혼은 자신을 돌아보면서 그 원인과 결과와 속성들을 비롯한 주제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사실을 깊이 성찰(省察)한다.

토마스 화이트(Thomas White, ?-1762)는 “계획적 묵상은 네 가지 원천 곧 성경, 기독교의 실천적 친리, 섭리적 사건(경험), 설교에서 나온다.”라고 했다. 특히 설교는 화이트가 “단지 한편의 설교를 듣고 묵상하는 것이 두 편의 설교를 듣고 전혀 묵상하지 않는 것보다 났다.”라고 말한 것처럼 묵상을 위한 비옥한 땅이다.

어떤 청교도는 ‘계획적 묵상’을 두 부분으로 나눴다. 즉 ‘직접적 묵상’ 곧 묵상 주제에 초점을 맞추는 묵상과 ‘반성적(또는 반사적) 묵상’ 곧 묵상하고 있는 자신에 초점을 맞추는 묵상이다.      

‘직접적 묵상’은 사고(思考)하는 지성의 행위이나 ‘반성적 묵상’은 양심의 행위다. ‘직접적 묵상’은 지식으로 지성을 계몽하나 ‘반성적 묵상’은 마음을 선(善)으로 가득 채운다. ‘계획적 묵상’은 말씀을 대상으로 삼고 있으므로 교리적일 수 있고 또는 우리의 삶을 대상으로 삼고 있으므로 실천적일 수 있다.

토마스 구지(Thomas Gouge, 1605-1681)는 ‘계획적 묵상’의 다양한 국면을 종합해서 이렇게 말했다. “정시(定時)의 계획적 묵상은 진지하게 지성을 영적 주제나 천상의 주제에 적용(適用)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결국에는 마음이 따스해지고 감정은 되살아나고 결심은 더욱 굳건해져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죄는 더욱 미워하는 일 등이 일어나게 된다.”

리처드 백스터는 또 “‘정시 계획적 묵상’은 ‘임시적 즉흥적 묵상’과는 크게 다른데 그것은 정시(定時) 기도가 일상적 업무를 수행하면서 임의로 간구하는 기도와 다른 것과 같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두 종류의 묵상은 모두 성도의 경건에 필수적이다. 이 두 묵상은 머리의 지성(知性)과 가슴 감성(感性)의 필요를 충족시킨다. 가슴의 뜨거운 적용이 없으면 묵상은 연구와 다르지 않다.

토머스 왓슨은 이렇게 말했다. “성경연구는 진리를 찾아내는 것이고 성경 묵상은 진리를 영적으로 진보시키는 것이다. 즉 전자는 금맥을 찾는 것이고 후자는 금을 캐내는 것이다. 연구는 따스함과 영향력이 거의 없는 겨울의 태양과 같다. 반면에 묵상은 (중략) 마음이 얼어붙어 있을 때 녹이고 마음이 사랑의 눈물을 흘리게 만든다.”

2. 묵상의 의무와 필요성

청교도들은 묵상의 필요성을 매우 강조했다. 그들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첫째, 하나님은 말씀을 묵상하라고 명하신다. 

이 한 가지만으로도 우리가 묵상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청교도는 묵상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수많은 성경 본문(신 6:7, 32:46, 시 19:14, 49:3, 63:3, 94:19, 119:11,15,23.28,93,99, 143:5, 사 1:3,  눅 2:19, 요 4:24, 엡 1:18, 딤전 4:13, 히 3:1 등)과 성경적 사례(멜기세덱. 이삭. 모세. 여호수아. 다윗. 마리아. 바울, 디모데 등)를 인용한다.  

우리가 일상적(日常的)으로 말씀을 묵상하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을 가볍게 여기게 되고 자신도 모르게 경건하지 못하다는 것을 드러내게 된다.

둘째,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신 편지이다.

토머스 왓슨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말씀을 성급하게 대충 흝어보는 식으로 넘어가서는 안 되고 말씀을 기록하게 하신 일 속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지혜와 이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신 일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의 뜻을 묵상해야 한다.”

이런 묵상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감정과 사랑에 불을 붙여 놓을 것이다. 다윗이 말한 것과 같다. “또 내가 사랑하는 주의 계명들을 향하여 내 손을 들고 주의 율례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시 119:48)

셋째, 묵상이 없으면 우리는 견고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토마스 맨톤(Thomas Manton, 1620-1677)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적 약속에 대한 묵상을 지속적(持續的)으로 먹지(계속하지) 않으면 신앙은 비쩍 말라 굶어 죽게 될 것이다. 다윗이 시편 119:92에서 말한 것과 같다. ‘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내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

또 토마스 왓슨(Thomas Watson, 1620-1686)은 이렇게 말했다. “말씀을 묵상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훈련(訓練)받지 못한 비무장(非武裝)의 군인과 같고 연장 없이 일하려는 기술자(技術者)와 같다. 말씀 묵상이 없으면 하나님의 진리는 우리에게 머무르지 못할 것이다. 곧 마음은 강퍅해지고 기억은 쇠잔할 것이다. 말씀 묵상이 없으면 결국 우리는 모든 것을 잃고 말 것이다.”

넷째, 묵상 없으면 선포된 말씀이 우리에게 유익이 되지 못한다. 

스쿠더는 “말씀 묵상이 없으면 성경 읽기도 ‘날 음식을 씹지 않고 삼키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이 말에 리처드 백스터는 “그러나 한 번에 지나치게 많이 먹으면 제대로 소화 시킬 수 없다.”고 덧붙였다.

토머스 왓슨은 이렇게 말했다. “진리에 대한 지식과 진리에 대한 묵상은 큰 차이가 있는데 그 차이는 마치 촛불과 태양 빛의 차이와 같다. 태양 빛이 비취는 정원에 등불이나 촛불을 놓아보라. 아무 영향을 주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태양은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식물을 자라게 하고 풀을 무성하게 한다.  

마찬가지로 묵상이 없는 지식도 지성 속에서 빛나고 있는 촛불처럼 별로 아니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지식은 사람을 더나은 존재로 만들지 못한다. 그러나 묵상은 태양 빛과 같다. 묵상은 감정을 변화시키고 마음을 따스하게 하고 더 거룩하게 한다. 묵상은 진리 속에 생명을 낳는다.”

다섯째, 묵상 없는 기도는 그 효력이 감소하게 된다.

토마스 맨톤은 이렇게 말했다. “묵상은 말씀과 기도 사이에서 의무의 매개체로서 양자를 관련시킨다. 말씀은 묵상에 힘을 주고 묵상은 기도를 힘 있게 한다. 우리는 우리 신앙이 오류가 있는 건 아닌지 말씀을 들어야 하고 그 후에는 우리 신앙이 열매 없는 신앙은 아닌지 묵상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 두 의무는 항상 함께 가야 한다. 말씀을 읽고 들은 후에는 묵상을 하고 묵상을 한 후에는 기도해야 한다.”

여섯째, 묵상 없이는 진리를 변증할 수 없다. 

묵상 없는 신앙은 척추(脊椎) 없는 사람과 같고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지 못한다. 토마스 맨톤은 이렇게 말했다. “묵상이 생소한 사람은 자신에 대해서도 생소하다.” 토마스 왓슨은 또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건 말씀 묵상이다.”라고 말했다. 제임스 우셔(James Ussher, 1581-1656)는 “우리는 묵상의 필요성을 알고 있다. 우리는 천국에 가고 싶다면 이 의무 실천을 결심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일곱째, 묵상은 설교 준비의 필수적 한 부분이다.

묵상이 없으면 설교는 깊이 있는 지성, 풍부한 감정, 명확한 적용이 결여(缺如) 될 것이다. 뱅겔이 헬라어 신약 성경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준 지침은 이런 묵상의 본질을 잘 포착하고 있다. “본문 전체를 자신에게 적용을 시켜라.”    

3. 말씀 묵상 방법

청교도 저술가들에 따르면, 묵상에는 필수 조건과 규칙들이 있었다. 그들이 묵상 빈도와 시간, 묵상을 위한 준비, 목상 지침 등에 대해 쓴 것을 고찰해 보자.

(1) 묵상 빈도와 시간

첫째, 경건한 묵상은 자주 해야 한다.

시간과 의무감이 허락된다면 하루에 두 번이 이상적이다. 최소한 하루에 한 번은 해야 한다. 빈틈없는 지도자였던 여호수아가 하나님에게서 그분의 법을 주야(晝夜)로 묵상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면 우리가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묵상하는 것을 즐거워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일반적으로 삼위 하나님과 그분의 진리를 자주 묵상할수록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될 것이고 아울러 묵상도 그만큼 더 쉬워질 것이다. 묵상과 묵상 사이의 간격이 길어지면 묵상의 열매를 잘 맺지 못할 것이다. 월리엄 베이츠가 이렇게 말한 것 같다. “새가 오랫동안 둥지를 떠나 있으면 알은 차가워지고 부화(孵化)에 적절하지 못한 상태가 되지만 계속 품고 있으면 부화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오래 신앙의 의무를 떠나 있으면 감정은 차가워지며 거룩함을 낳고 영혼을 위로하는 데 적절하지 못한 상태가 될 것이다.”

둘째, 묵상 시간을 정해 놓고 엄수하라.

이렇게 하면 ‘빼먹고 싶은 허다한 유혹’을 이기게 될 것이라고 백스터는 말했다. 가장 정신이 맑고 다른 의무 때문에 방해받지 않는 새벽 시간이 묵상하기에 가장 좋은 시간이 될 것이다. 왜냐면 그 시간의 목상이 하루의 나머지 시간의 분위기를 결정하기 때문이다.(출 23:19, 욥 1:5, 시 119:147, 잠 6:22, 막 1:35) 그러나 사람에 따라서는 저녁이 묵상에 더 유익할 수도 있다.(창 24:63, 시 4:4) 그들은 하루의 일과를 다 마치고 달콤한 묵상을 통해 하나님의 품에서 안식할 준비를 하게 된다.(시| 16:7)

완벽한 묵상 시간을 가지려면 주일을 활용하라.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문서 작성자들은 예배 모범에서 “회중의 엄숙한 공적 모임 사이나 후에 비어 있는 시간에 성경 읽기와 묵상과 설교를 반추(反芻)해 보는 게 좋다.”고 권면했다. 토마스 구지(Thomas Gouge, 1609-1681)는 “그대가 이 경건한 묵상의 의무가 주는 달콤함을 맛본 적이 있다면 특히 주일에는 잡담이나 한가한 담화에 시간을 거의 쓰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백스터는 “우리 주님이 땅에서 일어나 사망과 지옥을 완전히 정복하고 우리를 위해 천국을 취하신 날보다 우리가 천국에 올라가기에 합당한 날이 언제겠는가?”라고 물었다. 또 특별한 경우의 시간을 묵상에 활용하라. 청교도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하나님이 우리 영에 특별한 부흥과 능력을 주실 때,

‣ 고난이나 두려움이나 염려나 시험으로 말미암아 복잡한 심적 혼란에 빠져 있을 때,

‣ 하나님의 사자들이 죽음에 대해 환기(喚起)를 시킬 때 곧 노년에 이르러서든 육체가 노쇠해서든 아니면 모종의 죽음의 징후에 의해서든 떠날 때가 그리 밀지 않았다고 말해줄 때,

‣ 설교나 성례를 통해 감동하거나 하나님 섭리의 어떤 심판이나 자비나 한 행위를 확인했을 때, 철은 빨갛게 달궈졌을 때가 단련하기 가장 좋은 때이다.(시 119:23)

‣ 성찬과 회개의 시간과 주일과 같이 엄숙한 의무를 시행하기 전이다.

셋째, 영혼의 유익을 발견할 때까지 통상적으로 묵상해야 한다.

베이츠는 “묵상은 젖은 나무에 불을 붙이려고 시도하는 것과 같다.”라고 말했다. 이때 끝까지 참는 자가 불을 붙이게 될 것이다. 묵상을 시작할 때 처음에는 소량의 연기와 작은 불꽃 정도밖에 일으키지 못하지만 결국에는 거룩한 감정의 불길이 치솟아 하나님을 향해 올라갈 것이다. 그래서 베이츠는 ‘불길이 그렇게 올라갈 때까지’ 인내하며 묵상하라고 말했다.    

불길이 올라가지 못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때 여러분은 막연히 계속해서는 안 된다. 이에 대해 토마스 맨톤은 이렇게 말했다. “게으름에 빠지거나 영적인 따분함에 빌미를 주지 마라. 마귀는 이 두 가지 태도에 있어 여러분보다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힘을 소진(燒盡)해서 여러분의 영이 혼란 속에 있을 때 마귀는 하나님의 역사를 가로막을 것이다.”

대다수 청교도는 묵상에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의 시간을 할애해야 하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임스 어셔는 최소한 한 주에 한 시간 정도는 할애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토머스 화이트는 이렇게 주장했다. “묵상에는 준비, 성찰, 감정, 결단 등 여러 요소가 있는데 이 요소 가운데 어느 것도 경홀히 여겨서는 안 된다. 왜냐면 감정은 그리 쉽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불이 붙으면 멈추지 않고 바람을 불어 넣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때 불길이 타오를 정도가 되려면 입문자들은 적어도 하루 30분 정도고 묵상에 익숙한 사람들은 한 시간 정도가 적합하다.

(2) 묵상을 위한 준비

청교도 저술가들은 효과적인 묵상을 위한 몇 가지 준비 단계를 제시했는데 모두가 마음 상태에 크게 좌우되는 것들이다.

첫째, 마음을 이 세상의 것에서 분리를 시켜라.

곧 세상일과 세상이 주는 즐거움과 세상과 관련된 내적 고뇌 및 동요 등에서 벗어나라. 칼라미는 이렇게 말했다. “외부 친구뿐만 아니라 내부의 친구 즉 무익하고 세속적이고 마음을 산란하게 하는 생각들도 차단(遮斷)시켜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라.

둘째, 죄책과 오염에서 마음을 깨끗게 하고 영적인 것에 열렬한 사랑으로 타오르게 하라.

 성경 본문과 영적 진리의 보물을 축적하라. 시편 119:11의 ”내가 주께 범죄 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라는 다윗의 고백에 따라 살기 위해 은혜를 구하라.

셋째, 가장 진지한 마음으로 묵상에 임하라.

묵상의 중요성과 탁월성과 잠재력을 유념하라. 묵상에 성공한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참된 임재 속에 들어가게 될 것이며, 다시 한번 이 땅에서 영원한 기쁨을 맛보기 시작할 것이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질문 58) 어셔는 이렇게 말했다.    

“다음과 같은 생각이 그대 마음의 생각이어야 한다. 곧 나는 그 앞에서 모든 것이 벌거벗은 것처럼 고스란히 드러나는 하나님을 믿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전지(全知)하신 하나님 앞에서 어리석은 말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내 생각이 탈선에 이르지 않도록 해야겠다. 사람은 다른 일로 분주해진 마음을 갖고 가장 위대한 임금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 그럴 때는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지 않도록 하라. 하나님의 눈이 그 마음 위에 있고, 그러하기에 그대의 주관 심사는 마음의 방향키를 굳게 지키는 데 있어야 한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임재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유념하라.“

넷째, 묵상이 방해받지 않을 조용하고 자유로운 장소로 하라.

조지프 홀은 “사람이 없고, 소음이 없고, 움직임이 없는 내밀함과 조용함과 쉼을 목표로 하라.”고 했다. 일단 적합한 장소를 찾으면 그 장소를 계속 고수하라. 어떤 청교도는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눈에 보이는 것들을 피하도록 방을 어둡게 하거나 눈을 감는 방법을 권장했다. 다른 청교도는 자연 속을 산책하거나 앉아서 묵상하는 방법을 추천했다. 여기서 우리는 나름대로 좋은 방식을 찾아야 할 것이다.

다섯째, 묵상의 몸가짐에도 유의하라.

않았거나 서 있거나 걷거나 누워 있거나 간에 전능자 앞에 마음은 물로 경건한 몸가짐을 유지하라. 묵상하는 동안 몸은 영혼의 종이 되어야 하고 영혼의 감정을 따라야 한다. 묵상 목표는 영혼과 지성과 몸을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고후 4:6)에 집중시키는 것이다.    

(3) 묵상을 위한 지침

청교도는 묵상 실천을 위한 지침도 제시했다.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로 묵상을 시작한다. 

묵상할 때 마음을 조절해서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는 능력을 달라고 기도하라. 칼라미가 다음과 같이 말한 것처럼 이렇게 기도하라. “나는 여러분이 ‘지성을 조명’하고 ‘경건을 소생’시키고 ‘감정을 뜨겁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리하여 그 시간이 여러분에게 복이 되기를 바라고, 나아가 경건의 일에 대해 묵상함으로써 여러분이 더욱 거룩해지고, 여러분의 욕심은 더욱 죽고 은혜는 더욱 증가 되며, 세상과 세상의 허영에 대해서는 죽고 천국과 천국의 일에 대해서는 더욱 고조되기를 바란다.”

묵상할 본문이나 주제를 선택한다.

이어서 청교도는 성경을 읽고 묵상해야 할 성경 구절이나 교리를 선택하라고 했다. 청교도는 처음에는 묵상하기에 비교적 쉬운 주제를 선정하는 것이 좋다고 권면했다. 예를 들어 삼위일체 교리보다는 하나님 속성에 대한 주제에서 시작해 보라. 그리고 한 번에 한 가지 주제를 묵상하는 것이 좋다.

아울러 여러분의 현재 상황에 가장 잘 적용할 수 있고 여러분 영혼에 가장 유익이 될 주제를 선택하라. 예를 들어 보자. 만일 여러분이 영적으로 낙심한 상태 속에 있다면 불쌍한 죄인들을 용납하고 자신에게 나아오는 모든 자를 용서해 주시는 그리스도의 자상한 마음에 대해 묵상하라. 양심이 너무 괴롭다면 회개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묵상하라. 경제적 어려움에 있다면 곤궁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에 대해 묵상하라.

묵상한 주제나 구절을 암기하라.

이후에는 선택한 구절이나 주제 내용을 암기해 둠으로써 묵상을 자극하고 신앙을 강화시키며 하나님 인도의 수단으로 삼으라. 그다음에는 여러분의 생각을 성경이나 주제에 고정시키고 하나님이 계시하신 것 이상으로 알려고 하지 마라. 여러분의 기억을 활용해서 성경이 여러분이 택한 주제에 대해 말씀하는 것에 철저히 초점을 맞추라.

과거에 들은 설교들과 다른 교훈적인 책들을 참고하라. 여러분이 선택한 주제의 다양한 측면들 곧 제목과 원인 특징과 결과와 영향 등을 생각할 때 ‘양심이라는 책’, ‘성경이라는 책’, ‘피조물이라는 책’을 활용하라. 마리아처럼 이런 것들을 마음속으로 숙고하라. 예증과 비유와 반대 사실 등을 생각함으로써 여러분의 지성을 조명하고 여러분의 감정을 불타오르게 하라.  

여러분이 묵상하고 있는 것의 가치를 평가하라.

칼라미가 보여 주는 실례가 여기 있다. 만일 여러분이 죄에 대한 주제를 묵상하려고 한다면 “죄에 대한 설명에서 시작하고, 이어서 최의 파급에 대해 다루고, 원죄와 죄의 원인, 죄의 저주스러운 결과와 영향, 일반적으로 죄의 성격 및 속성과 특수적으로 개인적인 죄의 성격 및 속성, 죄의 반대 사실인 은혜, 죄에 대한 은유, 죄에 붙여진 명칭, 싱경이 죄에 대해 말씀하는 모든 사실을 묵상해야 한다. 여기서 두 가지 경고가 순서대로 나온다.

첫째, 맨톤이 말한 것처럼 방법의 규칙성 때문에 자유로운 영에 재갈을 물려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신앙이지 논리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규칙과 규정에 얽매이게 되면 생각이 좁아져 샘에서 나오는 물이 아니라 증류기에서 나오는 물처럼 흘러나오게 될 것이다.

둘째, 여러분의 마음이 산만해지면 정신을 바짝 차리고, 용서를 위해 짧은 기도를 드리고, 힘을 달라고 간구하며, 합당한 성경 본문을 찾아 다시 읽어 보고 묵상하도록 하라. ‘성경 읽기’, ‘묵상’, ‘기도’는 동반자라는 것을 기억하라. 어느 한 부분이 약해지면 다른 부분에서 대책을 찾으라. 인내하라. 이 의무를 포기함으로써 사탄에게 굴복해서는 안 된다. 이어서 사랑과 욕구와 소망과 용기와 감사와 열심과 기쁨과 같은 감정을 분발시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라.

여러분 자신의 영혼과 대화를 나누라.

자신의 무능력과 단점으로 야기된 불평은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여러분의 영적인 갈망을 토설하라. 하나님이 여러분을 도우실 걸 믿으라. 폴 베인(Paul Bayne, 1573-1617)은 묵상을 은혜의 개인적 수단으로 설명하면서 묵상을 첫째는 마음에 영향을 미치는 시각 능력으로 비유하고, 둘째는 잉태 및 탄생 과정으로 비유했다.    

“임신하면 출산 고통과 때가 이를 때 아기가 탄생한다는 것을 기대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영혼이 생각을 통해 임신하게 되면 감정은 즉시 즐겁고 흥분 상태가 된다. 왜냐면 불쏘시게처럼 불꽃이 튀기면 불이 붙는 것처럼 생각에 따라 감정은 불길에 휩싸이기 때문이다. 감정이 움직이면 의지는 자극을 받고 분발하게 된다. 이렇게 여러분의 기억과 판단과 감정이 환기되면 여러분의 영혼을 의무와 위로로 이끌고 죄를 멀리하도록 묵상 내용을 여러분 자신에게 적용하라.”

윌리엄 페너(William Fenner, 1600-1640)가 다음과 같이 쓴 것처럼 하라. “그대 자신의 영혼 속으로 뛰어들라. 그대 자신의 마음을 예상해 보고 대책을 세우라. 그대의 마음을 약속, 경고, 자비, 심판, 계명으로 채우라. 묵상을 통해 그대의 마음을 살피라. 그대의 마음을 하나님 앞으로 끌고 가라.” 은혜 안에서 자라고 있는지 여러분 자신을 검토하라. 과거를 반성해 보고 “내가 어떻게 했지?”라고 물으라. 미래를 전망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무엇을 하기로 할까?”라고 물으라.

율법적으로 질문하지 말고 거룩한 열정과 성령이 역사하는 은혜 안에서 자라갈 기회를 얻기 위한 마음으로 질문하라. 율법 업무는 우리의 일이지만 묵상 업무는 달콤한 일이다. 칼라미가 다음과 같이 권면하는 대로 하라. “만일 묵상을 실천함으로써 유익을 얻으려고 한다면 여러분은 구체적인 적용에까지 이르러야 한다. 또 그리스도를 묵상하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영혼에 적용해야 한다. 또 천국에 대해 묵상하되 천국을 여러분의 영혼에 적용해야 한다.”

묵상한 대로 실천할 것을 결심하라.

여러분이 묵상한 대로 살라.(수 1:8) 묵상과 실천은 두 자매처럼 손을 잡고 함께 가야 한다. 실천 없는 묵상은 다만 여러분의 죄악을 더하게 할 뿐이다. 그다음에는 여러분의 적용이 결심과 함께 이루어지도록 하라. 화이트는 “여러분의 결심은 단순한 소원이 아니라 결연한 목표나 결정으로서 굳건하고 강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여러분의 결심을 죄에 대한 유혹과 맞서 싸우는 의지로 삼으라. 여러분의 결심을 기록해 두라. 무엇보다 먼저 거룩하고 경건한 일들을 묵상하는 사람이 되는 데 목숨을 바치겠다고 결심하라.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 가족과 여러분이 소유한 모든 걸 즐거운 체념(滯念)과 함께 하나님의 손에 내려놓으라.

기도와 감사와 시편 찬송으로 묵상을 끝내라.

조지 스윈녹(George Swinnock, 1627-1673)은 “묵상은 가장 좋은 기도의 시작이며, 기도는 가장 좋은 묵상의 끝이다.”라고 말했다. 토마스 왓슨(Thomas Watson, 1620-1686)은 이렇게 말했다. “묵상한 내용에 대해 기도하라. 기도는 모든 것을 거룩하게 한다. 기도가 없으면 묵상은 단지 부정(否定)한 것일 뿐이다. 기도는 영혼을 묵상에 고정시킨다. 기도는 묵상이 탈선하지 않도록 묵상의 끝에 매듭을 계는 것이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지성에 영원히 경건한 묵상을 거하게 하고 묵상의 맛을 여러분의 마음속에 머무르게 하시도록 기도하라.”

묵상할 때 도와주신 것에 대해 주님께 감사하라. 그렇지 않으면 리처드 그린햄(Richard Greenham, 1542-1594)이 경고한 것처럼 우리는 다음 묵상을 할 때 고투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시편 찬송은 묵상에 큰 도움이 된다. 이 시편의 운율 형식은 기억하기에 좋게 되어 있다. 하나님 말씀으로서 시편은 묵상에 적절한 주제를 제공한다. 칼빈의 말처럼 시편은 ‘영혼에 대한 완벽한 해부학’으로서 묵상에 풍성한 자료와 지침을 제공한다. 기도문으로서(시 72:20), 감사의 시로서(시 118:1) 시편은 묵상의 적절한 수단이자 묵상을 끝내는 적절한 방법이다.

조셉 홀(Joseph Hall, 1574-1656)은 이렇게 말했다. “묵상을 마칠 때 나의 마음과 음성을 하나님께 바쳐 다윗 시편의 한두 구절 – 우리 기질과 우리의 묵상 주제에 어울리는 구절 – 을 노래함으로써 큰 위로를 받았다. 이렇게 하면 마음은 큰 달콤함과 만족을 누리게 된다.”

존 라이트봇(John Lightbot, 1602-167)은 “하나님에 대한 찬양을 노래하는 것은 우리가 공적으로 묵상할 때 행할 수 있는 최고의 사역이다. 이런 찬송은 찬송한 내용을 마음이 가장 오래 기억하게 한다. 기도와 설교를 듣는 것은 이 문장에서 저 문장으로 넘어가는 것이 빠르다. 그러나 찬송은 그 내용을 오래 고수하게 한다.”라고 했다.    

묵상 후 즉시 세상일에 몰두하지 말라.

마지막으로 묵상을 마친 다음에 너무 빠르게 세상일에 몰두하지 말라. 토머스 구지가 권면한 것처럼 “그래야 묵상할 때 그대의 마음속에 불을 붙여 놓았던 영적인 마음이 갑자기 꺼지지 않게 될 것이다.” 한 시간 동안의 이런 묵상이 천 편의 설교를 듣고 마는 것보다 더 가치가 있음을 명심하라. 어셔 주교는 “묵상은 말씀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말씀을 영예롭게 한다.”라고 말했다.

4. 묵상 주제

청교도는 다양한 묵상 주제와 대상과 자료를 제시했다. 각 주제 뒤에 붙어 있는 숫자는 그 주제에 대한 묵상을 요청한 청교도 저술가들로서 내가 찾아낸 사람들의 수를 표시한다. 이 목록은 개혁파조직신학의 전통적인 구분법을 따르고 있다.

(1) 서 론

‣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3)
‣ 기독교에 대한 변증(1)

(2) 신 론

‣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7)
‣ 하나님의 사역과 섭리(7)
‣ 인간의 제일 목적인 하나님의 영광(4)
‣ 하나님의 엄위(3)
‣ 하나님의 자비(3)
‣ 창조주이신 하나님(2)        

(3) 인간론

‣ 죄의 죄악성과 우리의 개인적인 죄(9)
‣ 마음의 부패함과 기만성(5)
‣ 아담의 타락과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4)
‣ 인간의 헛됨(4)
‣ 영혼의 가치와 불멸성(3)
‣ 육체의 연약함(2)
‣ 세상이 주는 위로의 불확실성(1)
‣ 탐심의 죄(2)
‣ 하나님과 인간 간의 대조(1)

(4) 기독론

‣ 그리스도의 성육신
‣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8)
‣ 그리스도의 사랑(5)
‣ 그리스도의 인격(4)
‣ 복음의 신비와 경이(4)
‣ 그리스도의 본성(2)
‣ 그리스도의 직분(2)
‣ 그리스도의 생애 (2)
‣ 그리스도의 지위(1)

(5) 구원론과 그리스도인의 삶

‣ 하나님의 약속(7)
‣ 은혜의 경험적 증거에 대한 자기 검토(5)
‣ 성도의 풍성한 특권(3)
‣ 성령의 은혜와 인격(3)
‣ 신앙의 유익(2)
‣ 성화(2)
‣ 기도(2)
‣ 하나님의 계명(2)
‣ 하나님의 권면과 경고(2)
‣ 배교의 위험성(1)
‣ 구원받은 자 수가 적음(1)
‣ 영적 위험들(1)
‣ 사랑과 기쁨과 소망(1)
‣ 안식일(1)
‣ 자기 부인(1)

(6) 교회론

‣ 하나님의 규례(5)
‣ 성찬(4)
‣ 세례(2)
‣ 말씀을 듣는 것과 읽는 것(2)
‣ 교회의 기쁨과 슬픔(2)

(7) 종말론

‣ 천국(10
‣ 죽음(8)
‣ 심판(7)
‣ 지옥(7)
‣ 영원(5)

청교도는 이 주제들을 명백하고 강력하고 유용한 하나님의 진리로 불렸다. 조지프 홀과 같은 일부 청교도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상세한 목록을 제시했다. 홀은 묵상해야 할 87가지의 주제를 열거하고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각각의 주제마다 설명을 붙여 놓았다. 그 주제들은 다음과 같다.              

명예와 위대함, 무지, 타락, 거룩한 삶, 잡담, 악한 친구, 하나님의 약속, 세상을 사랑함, 만족, 위선, 행복, 세상을 사랑함, 친구, 하늘과 땅, 일과 수고, 재산, 천국과 지옥, 죽음, 고통, 선한 싸움, 죄, 성공, 은혜 안에서 자라감, 교만, 죄를 미워함, 편견, 탐심, 기도, 사랑, 불경, 고결함, 기도, 시험, 수단의 사용, 예배, 행복, 순종, 회개, 야망, 자만심, 짧은 인생, 자기 검토, 역경, 고통, 신앙과 철학, 쾌락, 죄, 신실한 친구, 분열과 진리, 근심과 걱정, 두려움, 이교도와 그리스도인, 눈의 빛, 지성과 마음, 진심 어린 신앙, 스스로 받는 상처, 마음과 혀, 시간 사용, 염려, 섭리, 사랑, 불쾌, 우정, 싼 물건 찾아다니기, 책망, 시기, 세속적 쾌락, 훌륭한 본보기를 따름, 시간, 향유, 선행, 열매 맺음, 어리석음, 선을 행함, 은둔 생활, 행복한 삶, 하늘의 징계, 영적 갈망, 회개, 영적 싸움, 시련 속에서 얻는 힘, 천국을 향한 마음, 겸손, 죽음, 삶의 목적, 악이 주는 유익, 광기, 묵상 자체의 실천

분명히 말하면 청교도는 이 가운데 어떤 주제는 다른 것보다 더 중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대해 존 오웬(John Owen, 1616-1683)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일 내가 경험을 통해 확인한 것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곧 사람은 그리스도의 인격, 그리스도의 나라의 영광,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자신 생각과 묵상에 따라 은혜의 성장과 쇠퇴를 가늠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아마 청교도에게 가장 중요한 묵상 주제는 천국 곧 하나님을 가장 깊이 알고 가장 크게 경배하고 가장 크게 즐거워하는 곳, 그리스도가 아버지 보좌 우편에 앉아 있는 곳, 성도들이 영광에서 영광으로 옮겨가며 즐거워하는 곳이었을 것이다.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 1615-1691)는 “묵상은 대다수 다른 의무들의 생명이고 천국을 보는 게 묵상의 생명이다.”라고 말했다. 천국은 이런 이유로 묵상할 때 최상의 주제다.

‣ 그리스도는 지금 천국에 계시고, 우리의 구원은 성령으로 말미암아서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고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시다. 천국의 중심이신 그리스도는 그대로 우리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고 있어야만 즉 우리가 진실로 천국을 향한 마음을 갖고 천국의 관점에 따라 이 땅과 이 시대를 바라봐야만 오늘날처럼 악한 시대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살 수 있다.

‣ 천국은 우리 순례의 목적지다. 우리는 이 땅에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그리스도와 함께하기 위해 천국을 향해 여행하고 있는 순례자이다.

청교도는 천국과 다른 주제들에 대한 묵상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로 우선권을 갖는다고 가르쳤다.

첫째, 예배 특히 설교는 특별 묵상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칼라미(Edmund Calamy, 1600-1666)는 “하나님은 여러분이 설교를 듣기를 원하시고 또 들은 설교를 묵상하기 원하신다.”라고 말했다. 제임스 어셔(James Ussher, 1581-1656)가 말한 것처럼 모든 설교는 묵상을 위한 준비이다. 그러므로 훌륭한 설교는 우리 지성(知性)에 건전한 교리를 알려 줄 뿐만 아니라 감동을 주는 설교다. 훌륭한 설교는 우리 의지(意志)를 죄에서 돌이키게 하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도록 이끈다.

묵상은 지성을 통해 하나님 말씀을 우리 마음속에 받아들이도록 합으로써 감정을 넓히고 지시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설교에 대해 묵상하지 않을 때 설교에서 아무 유익을 얻지 못한다.

리처드 백스터는 이렇게 말했다. “왜 그토록 많은 설교가 우리에게 아무 소용이 없고, 신앙 고백자들은 온갖 다양한 설교를 듣거나 읽는 데도 영혼은 쇠잔하고 굶주리게 되는지 그 이유에 대해 나는 그들의 묵상에 대한 무지와 이해할 수 없는 게으름 말고 더 참되고 더 큰 다른 원인은 모르겠다.” 그는 또 “어떤 청중은 식욕도 없고 소화력도 없어 영적 식욕 부진에 빠져 있는 반면에 또 어떤 청중은 영적 폭식증에 걸려 식욕은 있으나 소화력이 없다.”고 했다.

신실한 청교도는 묵상을 위해 설교를 받아 적었다. 우리 교회 나이가 많은 한 여성도가 이런 습관을 갖고 늘 설교를 적는다. 그리고 매 주일 저녁에는 무릎을 꿇고 한 시간씩 그날 받아 적은 설교 내용으로 기도하고 묵상했다. 그녀는 주일의 시간 가운데 이 시간이 가장 좋은 시간이라고 고백했다.                

둘째, 성찬 예식에 바르게 참여하기 위해 신자는 자신의 죄를 위해 속죄 제물이 되신 주 예수에 대한 묵상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토머스 화이트(Thomas White, ?-1672)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은 성찬을 준비할 때 거행할 때, 거행한 후에 감당해야 할 의무에 대해 묵상하라. 성부 하나님의 사랑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묵상하라. 특히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인격의 탁월하심과 그리스도 고난의 위대하심 그리고 그 고난이 하나님의 공의를 얼마나 타당하게 만족시키셨는지를 숙고하라. 그리고 나아가 성찬의 효력과 본질과 용도에 대해서도 숙고하라.”

칼라미는 성찬에 참여하는 동안 묵상해야 할 주제로 12가지를 제시했다.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주심에 나타나 있는 성부 하나님의 크고 놀라우신 사랑, 자신을 내놓은 것에 나타나 있는 그리스도의 사랑, 죄의 가증함, 성찬 예식의 효력, 우리 자신의 무가치함, 우리의 영적 기갈과 궁핍, 자격 없는 수찬자가 받게 되는 저주, 자격 있는 수찬자에게 주어지는 복, 성찬의 요소(떡과 포도주), 성찬에서의 행동(목사의 행동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표상하는지), 성찬의 약속, 복음으로 주어지는 그러스도(성찬의 은사)”

에드워드 레이놀즈(Edward Reynolds, 1599-1667) 같은 청교도 신학자들은 성찬에 임할 때 신자들이 어떻게 해야만 되는지에 대한 논문을 썼다. 존 오웬은 성찬 준비 방법으로 묵상, 자기 검토, 간구, 기대 등을 요구했다. 모든 신자는 이런 준비에 동참해야 한다.(참고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질문 171,175)

셋째, 매 주일은 묵상에 특별히 좋은 시간이다.

주일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영적 양식을 공급받아 다가올 한 주간을 위해 그 양식을 비축해 놓는 날이다. 따라서 청교도들은 주일을 ‘영혼의 장날’이라고 했다.  

넷째, 영적 성숙에 따라 묵상의 내용도 다르다. 

나다니엘 레이뉴(Nathaniel Ranew, 1602-1678) 같은 청교도는 묵상에 대한 글을 광범하게 썼는데 영적 성숙도에 따라 신자들이 다양하게 도움을 받도록 지침을 제시했다. 레이뉴는 각각 ‘갖 회심한 초신자를 위해’, ‘더 성숙하고 연륜이 있는 신자를 위해’, ‘노년 신자를 위해’ 장을 따로 구분해서 글을 썼다. 그리스도인은 나이가 들수록 더 깊은 묵상을 당연히 기대하게 된다.

5. 묵상의 유익

청교도는 묵상의 유익, 장점, 효능, 이점, 활용 등에 대해 방대한 글을 썼다. 여기서 그들이 강조한 묵상의 유익을 열거해 보자.

‣ 묵상은 삼위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도록 도움을 줌으로 그 인격들에 따라 지성적, 영적, 심미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즐거워하도록(요일 4:8) 이끈다.
‣ 묵상은 경건한 진리에 대한 지식을 증진 시키는 데 도움을 준다. 묵상은 진리의 얼굴에서 수건을 제거한다.(잠 4:2) 묵상은 ‘지혜의 유모’  인데 그 이유는 지혜의 근본인 하나님에 대한 경외를 자라게 하기 때문이다.(잠 1:7)
‣ 묵상은 우리의 온갖 영적 환난 속에서 약속의 하나님을, 우리의 온갖 외적 시련 속에서 섭리의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도움을 줌으로 우리의 믿음을 증진시킨다.
‣ 묵상은 우리의 감정을 자극한다. 토머스 왓슨은 묵상을 ‘감정의 고함 소리’라고 했다.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묵상은 어미 닭이 달걀 위에 앉아 병아리를 부화시키듯이 좋은 감정을 부화(孵化)시킨다. 우리는 이 묵상의 불로 감정을 점화시킨다.”(시 39:3)
‣ 묵상은 회개와 삶의 개혁을 일으킨다.(시 119:59, 겔 36:31)
‣ 묵상은 기억의 절친한 친구다.  
‣ 묵상은 예배를 계발할 필요가 있는 분야로 생각하도록 도움을 준다.
‣ 묵상은 우리 자신의 집보다 하나님의 집을 더 좋아하게 한다.
‣ 묵상은 영혼의 천에 성경을 수놓는다.
‣ 묵상은 기도의 유익한 도구이다.(시 15:1)
‣ 묵상은 기도하기 전에 기도라는 악기를 조율한다.
‣ 묵상은 말씀을 듣고 읽을 때 실제 유익을 얻도록 돕는다.
‣ 묵상은 말씀이 우리 영혼을 생명과 에너지로 채우게 하는 역할을 한다. 월리엄 베이츠는 이렇게 말했다. “말씀을 듣는 건 음식을 섭취하는 것과 같고 들은 말씀을 묵상하는 건 섭취한 음식을 소화하는 것과 같다. 묵상을 통해 말씀을 소화하는 것은 따스한 감정, 강한 결심, 거룩한 행동을 낳는다.”
‣ 성례에 대한 묵상은 우리가 받은 은혜를 더 유익하게 하고 더 강하게 하는 데 유익을 준다.
‣ 묵상은 믿음, 소망, 사랑, 겸손 그리고 수많은 영적 위로가 영혼 속에서 풍성하게 자라도록 도움을 준다.
‣ 묵상은 죄의 가증함을 강조한다.
‣ 묵상은 우리가 죄를 이기는데 필요한 모든 무기를 모으고 모든 논쟁    의 힘을 집약시키고 그것들을 마음에 담아 준비하게 한다. 토마스 후커(Thomas Hooker, 1586-1647) “묵상은 타락의 침과 힘을 날카롭게 해서 영혼을 더 아프게 찌른다.”고 했다.
‣ 묵상은 죄에 대한 강력한 ‘해독제’요 탐심에 대한 ‘치료약  이다.
‣ 묵상은 영혼에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생생한 느낌과 감정을 전달하기 때문에 신앙적 의무를 이행할 수 있게 한다.
‣ 묵상은 헛되고 사악한 생각을 예방하는 데 도움을 준다.(렘 4:14, 마 2:35)
‣ 묵상은 오늘날 악한 시대에 우리를 세상과 구별하는 데 도움을 준다.
‣ 묵상은 일상적 삶에 대한 지침(잠 6:21,22)과 유용한 내적 자원들을 제공한다.(시 !77:10-12)
‣ 묵상은 믿음 안에서 인내하도록 도움을 준다. 월리암 브리지(William Bridge, 1600-1670)는 묵상은 “우리가 외적, 세속적으로 즐기는 모든 것     속에서 향기롭고 영적인 것으로 우리의 마음을 지켜 준다.”고 했다.
‣ 묵상은 사탄과 시험을 물리치는 강력한 무기다.(시 119:11,15, 요일 2:14)
‣ 묵상은 고통 속에 있을 때 구원의 길을 열어준다.(사 49:15-17, 히 12:5)
‣ 묵상은 영적 교제와 권면으로 다른 사람을 돕게 한다.(시 66:16, 77:12, 145:7)
‣ 묵상은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통해 우리에게 베푸신 온갖 복을 더욱 감사하게 한다.  
‣ 묵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시 49:3)

정리하면 토마스 브룩스(Thomas Brooks, 1608-1680)가 이렇게 말한 것과 같다. “묵상은 여러분 영혼의 양식이다. 또 묵상은 영적 진리들을 소화하는 진정한 위(胃)이자 참된 열(熱)이다. 만일 사람이 심장이 뛰지 않아도 살 수 있다면 묵상하지 않아도 자신이 읽거나 들은 것을 통해 유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중략) 가장 훌륭하고 가장 멋지고 가장 지혜롭고 가장 강한 그리스도인으로 인정될 수 있는 자는 가장 잘 읽는 자가 아니라 가장 묵상을 잘하는 자다.”

6. 묵상의 장애물

청교도 지도자들은 묵상의 장애물에 대해 자주 경고했다. 여기서 이런 장애물들과 그에 대한 해결 방법을 들어보자.

(1) 불안정 혹은 무지

이런 사람들은 자신 생각을 하나의 대상에만 고정(固定)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들의 생각은 가볍고 새의 깃털처럼 이리저리 떠돌아다닌다.

답변 : 불안정하거나 무지하거나 또 생각이 요동한다고 해서 의무에 대한 면죄부(免罪符)가 주어지는 건 아니다. 즉 여러분의 능력 상실이 하나님의 권리 상실을 의미하는 건 아니라는 말이다. 진리가 선포됐을 때 여러분은 아마 묵상을 게을리하고 진리를 사랑하지 않아서 불안정한 상태가 되었을 것이다.  

토머스 맨톤은 “죄악 된 불안정한 기질이 하나님에 대한 우리 의무를 무효화 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종이 술에 취했다고 해서 할 일을 면제받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라고 말했다. 성결한 지식을 충분히 비축하고 그 지식을 꾸준히 실천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라. 그리고 이렇게 하는 동안 반드시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하라. 그렇게 할 때 여러분은 묵상이 더 수월하고 더 달콤하게 되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2) 분주함

이런 사람들은 자신들이 세상일에 너무 바빠 묵상의 의무를 철저하고 진지하게 실천할 시간이 없다고 말한다.

답변 : 참된 신앙은 단순히 한가한 시간에 펼쳐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바쁠수록 더 묵상에 힘써야 한다. 바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묵상할 필요가 더욱 크기 때문이다.

(3) 영적 무감각

이런 사람들은 선한 의도는 있으나 묵상할 때 영혼이 집중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답변 : 마태복음 11:12에 천국은 ’침노하여 빼앗는 자‘가 받는 상이라고 말한다. 왜 여러분은 영원하지 않은 세상에서 얻는 상(유익)을 추구하는 데는 열심이면서 영원한 상(기업)인 영적 추구는 게을리하는가? 영적 잠자기를 즐기는 자는 낡은 옷을 입게 될 것이다.(잠 23:21) 맨톤이 한 말처럼 “부끄러운 고통을 당하는 것보다는 수고하는 것이 낫고, 어둠의 사슬에 묶이는 것보다는 의무의 줄에 묶이는 것이 낫다.”

(4) 세속적 쾌락과 친구

이런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나치게 의로운 자가 되는 것은 원하지 않고 그래서 헛된 즐거움과 친구들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답변 : 이에 대해 메이츠는 이렇게 말했다. “세상 쾌락은 우리 영혼을 불안하게 하고 우리 육체가 묵상 의무를 수행하는 데 부적합한 상태로 만든다. (중략) 이것을 기억하라. 곧 신앙의 즐거움은 감각적인 모든 쾌락과 비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5) 마음의 거역

이런 사람들은 이처럼 힘든 의무의 멍에를 메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그들은 죄책(罪責)을 젊어지고 하나님과 대면하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있다.

답변 : 이에 대해 맨톤은 “그리스도의 피를 진지하게 적용하여 양심을 깨끗하게 하고 묵상을 비롯해 은혜의 수단들의 멍에를 메라!”고 권면했다.(시 19:14) 묵상을 빼먹은 결과는 심각하다고 칼라미는 경고했다. 그 결과 마음이 완고해진다.

하나님의 약속과 경고들이 왜 우리에게 별로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될까? 하나님의 약속과 경고들에 대해 우리가 묵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 우리가 하나님이 베푸신 복을 감사하지 못할까? 왜 하나님의 섭리와 고난이 우리의 삶 속에서 경건의 열매를 맺지 못할까? 왜 우리가 말씀과 성례에서 유익을 얻지 못하고 왜 우리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며 왜 우리가 영원을 준비하는 데 그토록 빈약할까?

그것은 묵상하지 않는 데 가장 큰 원인이 있다. 우리는 묵상 훈련을 해야 한다. 대다수 청교도 목회자들이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청교도 시대에도 상대적으로 묵상 훈련을 자신의 의무로 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백스터는 이렇게 말했다. “많은 사람이 설교, 금식, 공적 및 사적 기도 등을 빼먹으면 혼란을 느끼나 묵상을 빼먹고는 혼란을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한평생 지금까지 그렇다.”

결론

– 자기 성찰로서의 묵상 –

청교도에게 묵상은 은혜의 특별 수단 이상의 것이었다. 묵상은 청교도의 헌신을 위한 포괄적인 방법이었다. 곧 성경적, 교리적, 경험적, 실천적인 방법이었다. 묵상 신학은 바울과 아우구스티누스와 칼빈 신학이었다. 묵상 주제는 성경이라는 책, 피조물이라는 책, 양심이라는 책에서 나왔다.

월리엄 브리지가 말한 것처럼 묵상은 영혼이 어떤 것을 열렬히 그리고 긴밀하게 적용하는 것으로 묵상을 통해 사람의 지성을 그 일을 깊이 생각하고, 자신의 유익과 이득을 위해 그 일에 거하고 고정되며  결국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나아간다.

청교도는 전형적으로 자신들이 쓴 묵상에 대한 글에서 독자에게 자기 검토를 요청하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다. 이 자기 검토는 다음과 같은 요소로 이루어진다.

(1) 시험

‣ 여러분의 묵상이 ‘살아 있는 신앙’을 행사하는 데서 연원(連原)하고 있는가? 참된 묵상은 신앙의 실천과 불가분리적(不可分離的)이다. 여러분은 새뮤얼 워드가 다음과 같이 설명한 것처럼 묵상하는가?

“묵상할 때 하나님과 대화하도록 그대의 영혼을 각성시키라. 그대가 습관적으로 믿고 있는 약속과 권면들이 무엇인지 확인해 보고 이제부터는 그것들을 진심으로 생각해 보라. 곧 그대 영혼의 미각으로 달콤함을 느낄 때까지 그것들을 그대의 혀로 굴려 보고 그걸 씹으라. 그것들을 전체적으로, 여러 번에 걸쳐 바라보라. 때로는 하나를 숙고하고 때로는 다른 하나를 더 깊이 생각해 보라. 이것은 배우자가 동산을 거닐면서 열매를 따 먹도록 부르는 것으로 단순하게 말하면 내가 믿음을 사용하고 믿음으로 사는 것으로 부르는 것이다.”

‣ 여러분의 마음속에 있는 이 영적 생각들이 그대의 삶 속에서 거룩함을 낳고 있는가? 하나님 생각이 싫증 난다는 건 귀신들처럼 된다는 것임을 명심하라.(약 2:19)

(2) 책망과 권면

‣ 불신자에게 : 하나님이 여러분을 이성적인 피조물로 만드셨을 때 하나님이 여러분이 생각을 이기적이고 죄를 범하는 데 사용하도록 의도했겠는가? 여러분의 모든 생각 속에 왜 하나님이 없는가? 이에 대해맨톤은 이렇게 물었다. “그대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는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과 영원한 영광이 그대가 해 볼 최고의 생각으로 가치가 없는가? 그대는 다른 일들 – 속된 일, 아주 유치한 일 – 에 대해서는 충분히 생각하고 충분히 시간을 내면서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대해서는 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 신자에게 : 묵상을 게을리하면 우리는 두려움과 근심에 직면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묵상하지 않고 죄악 된 일들을 생각한다는 그것은 얼마나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인지 아는가? 농부는 자신의 땅에 대해, 의사는 자신의 환자에 대해, 법률가는 자신이 맡은 소송사건에 대해, 가게 주인이 자신의 판매 상품에 대해 심사숙고한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하나님과 구주에 대해 묵상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청교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여러분이 계속 묵상을 게을리하면 하나님에 대한 여러분의 사랑은 곧 약화 되거나 파괴되고 말 것이다.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는 게 불쾌한 일이 되고 말 것이다. 죄를 즐거운 것으로 간주할 정도로 죄에 대해 문을 열어 놓고 말 것이다. 그 결과는 온갖 종류의 시험과 유혹 앞에서 상처를 입고 무너지기 쉬울 것이다. 요약하면 여러분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나가게 될 것이다. 레이뉴가 말한 것처럼 “어떤 경건의 의무도 우리에게 먼저 다가오는 것은 없다. 우리가 다가가야 한다.”

마지막으로 여기서 토머스 왓슨의 권면을 주목해 보자. “여러분이 이전에 묵상을 게을리했다면 그 게으름을 슬퍼하고 이제부터는 양심에 부끄럽지 않게 해야 한다. 경건한 묵상을 통해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께 묶어두라.(적어도 하루에 한 번) 이 산을 올라가라. 정상에 도달하면 여러분 앞에 멌진 광경 곧 그리스도와 천국이 보일 것이다.(*) 

글쓴 이 / 조엘 비키(Joel R. Beeke, 퓨리탄리폼드신학대학원(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 학장, 조직신학 교수, 그랜드래피즈 네덜란드개혁교회(The Heritage Netherlands Reformed Congregation) 담임목사  출처, 조엘 비키, 마크 존스 지음 / 김귀탁 옮김, ‘청교도 신학의 모든 것’ (서울. 부흥과 개혁사) 2017, pp. 1010-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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