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가 설교 준비하다 죽으면 그게 그렇게 아까운 겁니까?
목사가 설교 준비하다 죽으면 그게 그렇게 아까운 겁니까?
“주님 말씀 한마디를 바로 전하고 옳게 전하고 남들이 듣고 살도록 전하기 위해 목사가 설교 준비하다 생명을 잃었다면 어떻습니까? 그것이 그렇게 아까운 일입니까?” – 본문 중에서(온 힘을 다해 말씀을 외치는 박윤선 목사, 1982년)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계 3:18)
이 시간 잠깐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우리의 성경적 개혁’이라는 제목입니다. 과연 오늘날도 종교개혁이 있습니까? 오늘날도 교계가 참으로 그렇게 심각하게 부패했습니까? 또 우리 자신들이 그렇게 깊이 썩었습니까? 이런 것들을 이 시간 우리가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개혁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이것을 우리가 다 알겠지만 한번 재확인하는 것도 필요한 줄로 생각합니다. 성경 말씀을 읽는 가운데 계시록 3장에 나오는 말씀이 오늘날의 우리에게 경고하는 말 씀 같이 생각됩니다.
여기 ‘사라’는 말이 여러 번 번 나옵니다.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흰옷을 ‘사서’, 안약을 ‘사서’, 이 ‘사라’는 말이 세 번 나옵니다. 여기서 무엇을 산다는 의미는 값을 내어 소유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값을 내지 않고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귀한 것일수록 그 값이 비쌉니다. 육신의 것보다 영적인 것이 값이 비쌉니다. 우리가 무엇을 공짜로 가질 생각을 할 것 같으면 이것은 우주의 원칙에 맞지 않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거슬러 나아갈 수는 없습니다. 영계의 귀한 것을 사는 데는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을 다 팔아야 산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비유에 보화가 감추어져 있는 밭을 사는 사람이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다고 했고 진주를 구하다가 만난 사람이 자기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 그 진주를 샀다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여기 말씀하신 ‘보화’라든지 ‘진주’는 이 세상 어떤 물질이 아니라 ‘영계의 보물’을 의미한 것입니다. 거기서는 ‘천국’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영적인 것을 소유하려면 반드시 얼마의 비싼 값을 지불 해야만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겠습니다.
1.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라.
불로 연단한 금이라는 것은 욥기 23:10 이 말한 대로입니다. 거기 말하기를 “그가 나를 연단한 후에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하나님이 나를 연단시킨 후에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고 말씀했는데 불로 연단한 금이라는 것은 연단 받은 신앙 인격이라고 생각해서 조금도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 인격에는 이런 불의 연단이 절대로 필요합니다. 그래서 신학교를 졸업하고 나가서 일하는 이들이 얼마나 불의 연단을 받았는지 이것이 중요합니다.
학문을 아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보다도 신앙인격이 그 바탕이요 더 중요합니다. 연단 받은 신앙인격이 바로 그 주체가 되어야 함을 우리는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언단 받은 신앙인격 없이 신학교에서 신학적 이론이나 좀 알아서 나가 조잘거려 봤자 그것이 아무런 효과를 내지 못하고 도리어 영혼들을 피곤하게만 만드는 거예요. 불로 연단된 그 신앙인격이 주체가 되어 학문이라는 것을 내가 이용하며 도구로 쓸 일이지 나라는 이게 주체가 되어 아무런 힘이 없이 이론적 지식의 포로가 되어 이러니저러니 해봤자 그것은 다 소용이 없다 그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계에 많은 신학생이 배출되고 그 많은 목사가 쉽게 장립 받는데 한국 교계에 문제점이 여기 있다고 저는 봅니다. 과연 연단 받은 신앙 인격이 배출되느냐? 교계에 나가서 일하는 이 젊은 분들이 어떤 분들인가? 이것을 생각해 볼 때 참으로 연단 받은 여부가 연단을 받았느냐 안 받았느냐의 여부가 큰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 불로 연단한 금을 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무서운 말씀입니다. 불로 연단을 받았다니 참 이 불이 무섭고 그 연단이란 그 말 자체도 무섭다는 말입니다. 불은 환난(患難)을 의미하는 것 분명합니다. 또는 고생을 생각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 불로 연단을 받아야 비로소 신앙인격이 부요 하게 된다 그 말이에요. 하나님의 일꾼들은 이런 부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 부자는 다른 부자가 아니라 능력의 부자예요.
신앙의 실력이 없고 신앙인격의 바탕이 없어 놓으면 결국 한평생 외식(外飾)으로 일하다가 죽는 거예요. 일은 해야겠고 밑천은 없으니 어찌합니까? 이제 일터에 나와 서게 됐는데 이제 뭐 후퇴할 수도 없고 이제 목사 장립까지 받았는데 이제 목사 취소할 수도 없고 갈팡질팡하는 이러한 처지는 참 어려운 처지인데 그 순간이라도 큰 결단을 해서 내가 어떻게 처신을 바로 해야지 그렇지않으면 그저 이미 타고 있는 그 배가 가는 대로 갈 것밖에 없는 거예요.
이제 그렇게 된다면 결국 밑천 없는 사람이요, 아무 능력이 없는 사람이요, 영에 대해서는 무지하고 모르는 사람이고, 하나님과 통하지도 못하는 사람이고, 능력이 없는 사람이니 별수 없이 교인들을 다독거리고 수단이나 쓰고, 외식하고 거짓말하고, 자기 한 사람 살아갈 계교나 꾸미고, 그야말로 가짜 목사로 한평생을 지낼 거라 그 말이에요. 이 얼마나 무가치한 생활입니까?
오늘 신학계 지도자들이 용기가 없어 이러한 슬픈 현상을 과감하게 뜯어고치지 못하는 경우 젊은 신학도들이라도 용기를 내서 각자 자신들이 과연 성경 말씀 이대로 불로 연단 받아야겠다는 이 말씀이에요. 우리는 기도하는 고생을 많이 해야만 됩니다. 참 생명을 걸어 놓고 기도할 수 있는 그러한 그 젊은 힘을 무엇에 낭비할 겁니까? 목사가 살길은 과연 기도하는 고생과 하나님 말씀을 준비하는 그 고생에 생명을 바치는 이런 도리밖에는 없는 거예요.
모든 것을 다 팔아 사야만 됩니다. 천국이 바로 이렇다 그 말이에요. 예수님이 분명히 그렇게 가르치셨어요.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서 사라는 거예요. 누구나 사람은 별수 없는데 하나님께만 방법이 있고 하나님께만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시는데 여러분은 하나님의 방법에 따라 진리대로 준비해야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먼저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되므로 오늘날 우리 교계가 개혁(改革)되는 것입니다.
참 연단을 받은 사람이라면 결국 인정받는 사람인데 얼마나 좋습니까? 참 주님의 종으로 정평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사람이면 되겠다. 그 사람이면 우리 교회에 쓸 만하다. 그 사람이면 일을 해낼 수 있겠다.” 이렇게 정평 있는 이 연단 받는 신앙 인격이 되어야지 이것이 없이 무엇을 이룰 수가 있습니까?
2.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라.
계시록 16:15에 무슨 말씀이 있습니까? “깨어서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나타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옷을 입어 벌거벗고 다니지 말아야 하겠다는 이 말씀입니다.
이것은 비유의 말씀으로써 깊이가 있는 말씀입니다. 아담이 벌거벗은 몸을 부끄러워하기 시작한 때가 바로 범죄 한 후입니다. 그 말씀을 보면 벌거벗은 몸을 부끄러워한 그 원인이 범죄이니 그 부끄러운 그 자체가 죄책감이라는 것 우리가 알 수가 있어요. 범죄 사건과 관련된 그 부끄러움 이것을 극복하는 데는 옷을 지어 입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가죽으로 옷을 지어서 입혀주신 것인데 여기서 죄와 죄책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사실상 죄의 오염 문제도 해결이 되는 거죠. 죄와 그 죄책과 오염을 해결하는 그 방법이 옷을 입는 데 있다는 것인데 우리가 신약성경 로마서 13:14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라고 하였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바로 우리의 죄책과 죄의 오염을 해결하는 방법이 돼 주셨고 좀 더 깊이 말하자면 예수님 자신이 바로 우리 성결이 돼 주신 것입니다.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해야만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을 때에 죄책이 해결됩니다. 이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것이고 하나님 앞에서 의인으로 간주 되는 것은 우리가 신학적으로 배운 사실입니다.
동시에 이때 오염도 역시 해결이 되는 것을 압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을 때에 우리의 이 겉만 이 외부만 어떻게 부끄럽지 않게 만들어 놓는 그것이 아니고 이 옷을 입으면 이 내부에 있는 이 오염도 다 녹아지고 이 오염도 사라지고 이 오염의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을 우리는 믿으며 또 우리의 신앙 경험을 통해 압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을 때 거기 중요한 것이 즉 믿음 아닙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의요 나의 성결로 내가 믿을 때 그 믿음이 바로 우리 속에 있는 죄까지도 녹여버리고 우리 속에 있는 죄악의 문제도 해결된다는 것을 우리는 믿고 또 압니다. 제 경험대로는 믿음이 뚜렷하게 내게 있을 때 나의 이 심령이 깨끗해져요. 그러므로 이 죄악이라는 것은 믿음 없는 나에게 침범해 들어오는 것이고 그 믿음이 없는 그 자리에 자리를 잡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 그 심리 주님을 믿는 그 속사람의 모습 이것을 우리가 다 아는데 얼마나 그 기쁨과 얼마나 그 성결함과 얼마나 그 밝음을 가져옵니까? 주님을 믿지 않고 믿는다고 해도 식별하지 못할 그런 희미한 믿음이고 심지어 믿음이 없는 이런 이 심령은 온갖 죄악으로 침해당하고 그 죄악이 점령한다는 것을 우리가 잘 알아요. 우리는 육신을 입혀주는 이 옷으로는 우리의 외모를 가릴 수는 있어도 외부문제는 해결할 수 있어도 우리의 속에 무슨 좋은 것을 가져다주지 못하고 이 속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요.
그렇지만 흰옷이라는 여기 흰옷은 예수 그리스도 그 자신을 우리가 믿음으로 입을 때 이 내부까지 다 이렇게 쑤셔대고 이 내부까지 개조해 주고 이 내부의 평안과 구원과 기쁨을 건설하는 이런 하나님의 옷이에요. 그러니 이 옷이 얼마나 귀합니까? 그래서 우리가 모든 것을 다 팔아야 사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팔아야 산다는 건 성결을 이루기 위해 우리의 전심전력을 다 해야만 된다 그 말씀이에요.
루터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선행과 고행을 통해 의롭게 된다는 구원론을 엎어버리고 이신득의(以信得義) 즉 ‘오직 믿음으로써 의롭게 된다’고하는 종교개혁을 성립시켰지만 칼빈은 더 나아가 믿음으로 구원받는 정도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개혁을 이룬 겁니다. 우리 개혁주의는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 겁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구원도 받는 것이죠. 먹으나 마시나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을 우리 생의 목표로 삼는 것이니 참 이거야말로 성결을 위한 개혁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 정도만이 아니라 성결을 이루어야만 합니다. 이 성결을 우리의 생명보다 귀히 여기는 것이 성경에 가르치는 목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거룩하게 살기 위해 죽을 수 있는 그러한 위험한 길이라도 당해낼 수 있는 이런 주장을 우리 개혁주의는 가져야만 한다는 이것입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세계적으로 교계에서 너무도 이 성결의 문제를 등한히 합니다. 거룩하게 살아 보자는 여기에 말이 별로 없고 이 거룩하게 사는 문제를 생명 시 하지도 않고 구원이나 받았으면 되는 듯이 너무도 안일주의에 빠져 성결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애쓰는 이러한 노력이 없는 걸 발견하게 됩니다. 즉 흰옷을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는 이 노력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개혁입니다.
이제는 한국 교회 100여 년의 역사가 지나니 이럭저럭 어두워졌고 이럭저럭 쇠약해져서 성결을 향해 달음질하는 이것은 별로 없고 명목 주의에 멎어 외부주의와 비성경적 노력에 급급 하는 불행을 우리가 피부로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주의 일 한다는 이들도 너무도 생활 문제에 포로가 되고 “어떻게 하면 밥을 먹을까?” “어떻게 하면 주택을 소유하겠는가?” “어떻게 하면 내가 좀 잘살아 보겠는가?” 하는 이런 생각으로 분망해지며 주님을 사랑하기보다 자기를 사랑하는 데 언제나 더 급급하고 하늘나라보다 이 세상을 더 사랑하는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지금 모두가 이러한 판국입니다.
그러므로 성결을 위해 죽도록 노력하는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개혁입니다. 제가 설교 중 종종 말한 것 같습니다. 옛날에 바실(Basil the Great, 330-379)이라는 신실한 성도가 두통으로 고생하다가 하나님 앞에 두통을 없애 달라고 기도한 후 두통이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후부터 자기의 마음에 일어나는 그 정욕과 자기 마음에 일어나는 모든 이 부정한 생각을 어떻게 막아볼 도리 없어서 다시 기도하기를 “주님이여! 나에게 두통을 주시옵소서!”라고 했답니다.
또 여러분이 잘 아는 중세 때 아일랜드섬 사람 성 말라기(St. Malchi, 1094-1148)가 유럽대륙으로 가서 성 버나드 수도원의 성 버나드(St. Bernard of Clairvaux, 1090-1153)에게 배우면서 성결을 힘썼습니다. 버나드는 성 말라기가 죽은 후에 평하기를 “말라기는 살았을 때 죽었고 지금 죽었지만 살았다.”라고 했습니다. 말라기는 “어떻게 하면 거룩하게 살까?”라고 하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자기 고향을 떠나 성 버나드의 수도원에 가서 성화의 생활을 배우던 가운데 세상을 떴는데 그가 살았을 때는 죽은 사람 같았고 살았으나 자기라는 것을 나타내지 않고 죽은 사람 같이 고요했고 온유했었으며 그가 세상 떠난 다음에는 죽은 것 같지도 않다는 이러한 뜻으로 글을 쓴 거라 그 말이에요.
3. 안약을 ‘사서’ 네 눈을 보게 하라.
이 ‘안약’(眼藥)은 성령의 밝혀 주는 은혜인 동시에 성령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접촉할 데가 어디입니까? 안약을 사기 위해서 접촉할 데가 성경이 아닙니까? 이 성경을 바로 깨닫고 깊이 알고 넓게 알 때 우리는 안약을 바른 눈을 소유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이 어떻게 주님의 말씀을 전합니까?
어떤 신학교 교수가 신학생이 기도할 줄 모르더라는 말을 내가 들었습니다. 기도할 줄 모르는 신학생이 성경은 또 얼마나 알겠는가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얼마나 아는지 여러분이 스스로 판단을 내릴 수 있어요. 성경을 우리가 연구하며 배울 때 참 우리의 모든 것을 팔아서 사는 이러한 대가를 지불(支拂)해야만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겠습니다.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어느 목사님은 셈 방언을 공부하다가 박사 학위를 받기 위해 ‘포괄적 시험’(comprehensive examination)에 모든 과목을 시험하는 그러한 자리에서 교수들이 둘러앉은 거기에서 쓰러져 넘어진 일이 있다고 하는 것을 직접 내가 들었어요. 공부를 너무 힘 있게 하고 너무 애써서 한 나머지 쓰러져 넘어질 정도가 됐다고 하니 참으로 모든 것을 다 팔아 박사를 사는 그러한 심리가 아니겠는가 생각됩니다.
이 세상 학문에 있어도 사람들이 그렇게 노력하고 모든 것을 다 팔아서 무엇을 사려고 하는데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특별히 주님을 위해서 몸을 내놓고 지금 생명을 바쳐 일하려고 하는 이 귀한 일에 있어서 우리 어찌 성경 말씀을 공부하며 성경 말씀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노력을 아끼겠습니까? 설교 한마디 하기 위해서 준비하느라고 그야말로 쓰러질 정도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설교 한마디가 얼마나 귀합니까? 이것은 사람을 죽은 가운데서 살려내는 말씀인데 우리는 아무래도 이 사실을 의심할 수가 없는데 이러한 귀한 것을 내 것으로 삼기 위해서는 생명을 버릴 만치 노력하는 것이 그리 아까운 것입니까? 새벽에도 연구하고 밤에도 연구하고 언제든지 연구하면서 그 어느 한 가지 말씀을 가지고 내가 살고 남들을 살려 보려고 힘쓰고 애쓰는 이런 노력이 결코 아까운 게 아닙니다.
주님 말씀 한마디를 바로 전하고 옳게 전하고 남들이 듣고 살도록 전하기 위해 목사가 설교 준비하다 생명을 잃었다면 어떻습니까? 그것이 그렇게 아까운 일입니까? 그것이 옳지 않은 일입니까? 우리는 하늘에서도 귀하고 땅에서도 귀한 이 귀한 이 말씀을 위해서는 내 목숨이 아까운 것이 아닙니다.
하려면 바로 하고 하려면 열매를 맺도록 하고 하려고 하면 참되이 해야지 목사 일을 하면서도 하는지 안 하는지 알 수 없는 정도로 희미하고 막연하고 뚜렷한 유익을 주지 못하며 과연 하나님이 함께하는 종으로 일하지 못한다면 그 일한 것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우리 하려면 바로 하고 잘해야만 되겠는데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 우리가 모든 것을 다 팔아야만 돼요.
모든 것을 다 팔아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고 또 모든 것을 다 팔아서 흰옷을 사서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아니하게 하고 모든 것을 다 팔아서 안약을 사서 영계의 그 사실들을 보게 되는데 다하고 나면 무슨 판정이 되느냐? 이것 값없이 돈 없이 된 거라는 판정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사야 55장에 무슨 말이 있습니까?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이렇게 말씀하였는데 우리가 죽도록 노력해서 모든 것을 다 팔아서 이루어 놓기는 놨지만 사실 최후의 판정을 볼 때 이것은 값없이 돈 없이 산 거예요. 어쨌든 사는 겁니다.
우리가 내놓을 것은 우리 노력과 우리의 생명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다 판 겁니다. 하지만 이것은 저 귀한 영적인 보물들에 비해서 값이 못 되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의 진실성을 증거 하는 정도입니다. 그야말로 저 좋은 것을 원하는 자라고 할 것 같으면 다른 것은 다 그만두고라도 자기의 모든 것을 다 팔아서 그 어떠한 노력을 해서라도 그것을 소유하려는 이런 움직임을 아니 가질 수 없는 게고 또 그래야만 그 진실성이 증명되는 거예요.
모든 것을 다 팔았을 때 나의 진실성이 드러나고 그야말로 저 귀한 하늘의 보물 앞에서 내가 진지하게 지금 거래를 한다는 그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에요. 사실인즉 저 하늘이 열리게 된 것은 우리 주님께서 피 흘려서 성립시킨 거예요. 우리가 받게 된 건 예수님의 보혈 때문입니다. 그런고로 그 실질적인 대가는 우리 주님의 피인데 이제 다 받아서 일하는 가운데 깨닫는 것이 값도 없이 돈도 없이 산 거라고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의 개혁은 우리는 말 뿐으로서의 개혁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개혁을 이루기 위해서는 참 죽을 지경의 그 노력이 있어야만 하고 또 죽기도 해야 하고 세상 손가락질도 받을 수가 있겠고 또 욕도 먹을 수 있겠고 어떠한 희생이라도 당할 그러한 일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제가 이 마당에 있어서 과연 라오디게아교회에 주신 이 말씀이 경종이 되기를 바랍니다. 불로 연단한 금을 사야하고 흰옷을 사야겠으며 안약을 사야겠습니다.
< 기도 >
하나님 우리 아버지 감사하옵나이다. 우리가 주님을 대할 때 입술만으로 대하기를 원치 않사오며 겉껍데기로만 대하기를 원치 않사오며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을 다 팔아서 대하기를 원하며 오직 주님만으로 영원한 나의 삶에 방법이 되기를 원하옵니다.
주님이여!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만이 인생의 본분이요 우리 믿는 자들의 목적인 것을 다시 되새겨서 과연 합동신학의 우리 이 적은 무리가 합심 단결해서 이 개혁을 이루어 나가도록 하여 주옵소서. 이 개혁이 이루어져야 우리가 살고 남들도 살겠사오니 원하건대 이 등불을 밝히 켜 주시옵기를 간절히 비옵고 원합니다.
이제 이 일이 되어 가려고 하면 말할 수 없는 고생이 말할 수 없는 희생이 나야겠으며 죽기까지도 해야 되겠사온즉 하나님 아버지 이 사랑하는 모든 성도가 합심 단결하여 과연 우리 주님 앞에 제물이 되도록 은혜를 주옵소서.
모든 것을 다 팔지 않고 우리가 무엇이 됐습니까? 주님이여 희생하지 아니하고 죽지 아니하고 무슨 일이 되었습니까? 주님이여 천국의 일은 더욱 그러하오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더 주시어 과연 아버지 이 기관이 과연 눈물이 있는 기관이 되며 주님이여 희생하는 기관이 되며 과연 죽는 것을 무릅쓰면서 과연 걸어가는 이 기관이 되도록 은혜 주시기를 간절히 비옵니다.
그동안 난관도 있어서 주여 까무러칠 만한 그런 단계도 없지 않아 있었으나 주님께서 이런 걸 통해서 우리를 훈련 시키셨고 주님이여 앞으로도 이런 일이 있을 것인데 이러한 모든 난관 가운데서 낙심하지 않도록 하시고 주님이 우리를 붙들어 주사 믿음으로 평안한 마음으로 전진하도록 은혜 주시옵기를 간절히 비옵고 원하옵나이다.
이제 이 기관을 위해 노력으로 물질로 희생한 모든 성도를 하감하옵시고 주님이여 그들이 어디 있든지 주님께서 그들에게 영적으로 갚아 주시며 필요한 것을 채워 주시옵기를 간절히 비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모든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설교 자 / 고 정암 박윤선 목사, 이 설교는 1984년 11월 8일 합신 개교 4주년 기념 감사 예배 설교이다. 원제 : ‘우리의 개혁’, 출처, 기독교개혁신보 2018년 11월 14일, 2011년 ‘정암신학강좌 기념 자료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