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묵상, 거룩한 읽기

주님동행

– 기독교 세계관과 묵상 –

시작하는 말

“대혁명이란 성경을 읽는 운동입니다. 루터는 무엇을 했을까요?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는 성경을 읽고 성경을 번역하고 그리고 수없이 많은 책을 썼습니다. 이렇게 하여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책을 읽는 것’ 그것이 혁명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반복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말은 일본의 철학자 사사키 아타루가 그의 책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통해 종교개혁을 평가한 것입니다. 일반 철학자인 사사키 아타루는 종교개혁이 성경을 읽고 본래 의미를 찾는 운동에서 시작되었다고 지적합니다. 이것은 아타루만의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이미 교회사(敎會史) 학자들은 이에 대해 많이 연구했고 교회사 학자들도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은 그가 로마서를 접하고 읽은 과거 시점부터 이미 시작되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철학자 사사키 아타루는 이에서 더 나아가 책을 바르게 읽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며 대단한 일인가에 집중합니다. 성경에 대한 바른 읽기는 유럽이 수백 년간 지켜온 견고한 중세의 세계관을 단번에 무너뜨리는 대변혁을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종교개혁자들의 ‘읽기 혁명’은 사실 새로운 것이 아니라 성경 스스로가 주장하고 증명해왔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창 1:3) 창세기는 세상의 창조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됐음을 기록합니다. 또 요한복음의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중략) 말씀이 육신이 되어”(요 1:1-14)는 하나님과 말씀의 관계성을 인간에게 알려 줍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말씀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의 본질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여러 신학적 이견들이 존재하겠지만 우리가 모두 동의할 수 있는 확실한 사실은 성경이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읽는 것을 통해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바르게 알려주는 참된 세계관을 얻습니다.

저는 이 글을 통해 ‘성경 읽기’의 한 방법론인 ‘묵상’(默想)에 대해서 논하고 바른 ‘성경 읽기’와 ‘묵상’이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생각해 볼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기독교 세계관 교육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 합니다.

1. ‘바른 성경 읽기’가 묵상이다.

묵상이란 무엇일까요? 저는 ‘성경적 묵상’이 ‘바른 성경 읽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렇게 ‘묵상’을 ‘바른 읽기’라고 말하는 이유는 기독교의 묵상은 시편 1:2과 여호수아 1:8의 ‘묵상’(הגה, hagah)이라는 단어에 기인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묵상’이란 단어는 ‘낮은 소리로 읽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시편 71:24, 143:5도 이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합니다. 이 단어를 사용한 다른 곳에서는 사자의 울음소리와 같이 ‘큰 소리’를 의미하거나 슬픔에 흐느끼는 ‘작은 소리’를 나타내는 데 쓰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서로가 상반된 상황(狀況)아래 동일한 단어를 쓴 이유는 같은 소리를 반복해서 내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볼 때 ‘묵상’이란 단어는 ‘성경을 읽는 것’이며 동시에 ‘반복해서 계속 읽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저는 묵상은 기독교가 오래전부터 실천해 온 바른 ‘성경 읽기의 방법’임이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제임스 패커(James Innell Packer. 1926- )는 1973년에 쓴 그의 책 ‘하나님을 아는 지식’(Knowing God)의 첫 장에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바꿀 수 있는 방법이 바로 묵상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패커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을 모름으로 인해서 통탄할 만큼 괴로움을 당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패커는 ‘바른 성경 묵상’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묵상이란 하나님의 사역과 도(道, way) 그리고 목적과 약속들에 대해서 자신이 아는 여러 가지 것을 상기하고(calling to mind), 숙고하고(thinking over), 깊이 생각해 보고(dwelling on), 적용하는(applying to oneself) 활동이다. 그것은 하나님 임재 안에서, 하나님이 보시는 가운데, 하나님의 도움에  의해, 하나님과 교통하는 수단으로서, 의식적으로 수행하는 거룩한 사고 활동(an activity of holy thought)이다.”

이 내용을 볼 때 우리는 패커가 묵상을 크게 두 가지 활동으로 나누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사고의 활동이고, 둘째는 행함의 활동입니다. 이는 묵상은 단지 성경을 읽어 정보를 취하는 활동이 아니라, 말씀을 통하여 인간과 소통하고자 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의 참뜻을 발견하는 작업이며 그 뜻에 순종하는 것임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저는 전자는 바른 읽기이며 후자는 바른 읽기의 당연한 결과라고 말하고 싶습니다.(수 1:18)

2. ‘바른 성경 읽기’가 어려운 이유

제임스 패커가 하나님을 아는 길로서의 성경 묵상을 이야기한 지 40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묵상에 대해서 이전보다 더 잘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한국에서 묵상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한 때는 70년대 중반 ‘성서유니온’이 시작되면서 일 것입니다. 그 후로 많은 단체가 ‘성경 묵상’을 보급하기 위해 관련된 프로그램과 책자들을 만들었고 교회에서는 성도들의 경건 생활을 위해 이를 적극적으로 장려해 왔습니다.

그래서 많은 긍정적인 변화가 있었으나 여전히 한국 교회의 성도들은 ‘바른 성경 읽기’에 고질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이 문제점들만 수정한다면 한국 기독교인들이 ‘바른 성경 읽기’에 더욱 가까이 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기에 저는 한국 기독교인들의 잘못된 성경 읽기와 묵상 습관에서 가장 미숙하다고 생각되는 것 중 두 가지만 언급하려고 합니다.(하지만 이러한 진단은 저의 개인적인 경험에 바항으로 한 것이기에 이에 동의하지 않는 분들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첫째, 한국 기독교인들의 잘못된 ‘성경 읽기’와 ‘묵상’은 사고(思考) 과정에 충분한 시간과 노력을 들이지 않거나 이를 무시하는 경향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고의 과정이 무시된 ‘성경 읽기’가 얼마나 비상식적인 결과를 초래하며 성경의 권위를 손상(損傷)하는 것인지에 대한 예는 얼마든지 우리 주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얼마 전 전라남도에서 한 목회자 부부가 자신의 삼 남매를 죽이고 시신을 방치(放置)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부부는 경찰 조사에서 구약성경의 잠언 23:13,14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하려고 하지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그가 죽지 아니하리라. 네가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의 영혼을 스올에서 구원하리라.”라는 구절을 그대로 따라 했다고 진술했습니다. 또 아버지인 박 씨는 “(사도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면 맞았으며”라는 성경 구절에 따라 아이들을 때렸다고 진술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이는 상식적인 사고(思考, thought)의 과정이 없이 신비적(神秘的)인 방법으로만 성경을 읽고 해석하여 일어날 참혹한 결과였습니다. 타락한 인간들의 추악한 욕망은 유익한 것은 취하고 불리한 것은 무시하거나 왜곡시켜 자신을 선의의 사람으로 가장하고자 합니다. 또 그런 인간들은 진리에는 눈을 감아버리고서도 일말의 죄책감마저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도들의 깊은 ‘사고(思考) 활동’은 우리 안에 잠자고 있는 진리에 대한 욕구를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믿음의 성도들이 진리를 찾고자 할 때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우리의 사고 활동을 도와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 14:26) 신학자인 제임스 패커는 이렇게 말합니다. “묵상은 의식적으로 수행하는 거룩한 사고 활동이다.”  

둘째, 저는 적용 중심적이며 실용적인 성경 읽기와 묵상 방법들이 바른 성경 읽기와 묵상을 방해한다고 생각합니다.

급변하는 현대 사회와 복잡한 인간관계는 우리의 정서를 불안하게 하는 주된 원인입니다. 그러한 사회 속에서 우리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왜’(Why)나 ‘무엇’(What)이라는 질문 보다, 실용적인 “어떻게”(How)라는 질문에 자연스럽게 우리의 관심이 집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하기에 지루하고 따분한 성경 본문해석 과정은 건너뛰고 즉각적인 적용 중심의 ‘성경 읽기’와 ‘묵상’이 성도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이에 아부하여 각종 ‘성경 읽기’ 잡지들은 독자들이 해석의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여지를 주지 않고 너무나도 친절하게 답을 제공해주고 심지어 무엇을 적용해야 하는지도 알려 줍니다. 거의 유치원 수준의 교재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현실적인 필요 때문에 성경을 실용서적으로 만드는 잘못을 범하는 것입니다.

3. ‘바른 성경 읽기’와 ‘묵상’이 세계관을 바꾼다.

“인식하든지 인식하지 안 하든 지 간에 모든 사람은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인간 경험들을 해석하는 로드맵이거나 줄거리이다. 또 이것은 실제 하는 것과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알 수 있으며 어떤 도덕적 판단을 내릴 것인가를 결정한다.”

위의 내용은 오스 기니스(Os Guinness, 1941- )가 세계관에 대해 정의한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오스 기니스가 세계관을 크게 네 가지의 특징들로 규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누구나 세계관을 가지고 있으며, 둘째, 세계관은 해석의 틀을 제공하여 주고, 셋째, 세계관은 존재에 대한 바른 이해를 결정해 준다는 것입니다. 넷째는 세계관은 도덕적 판단의 근거를 제공하여 준다고 말합니다. 이를 두고 철학에서는 인식론, 존재론, 도덕론(윤리)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성경도 이와 유사한 방법으로 당대를 지배했던 세계관을 소개하고 있으며, 바른 세계관이 무엇인지 제시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이방인(믿지 않는 사람들)의 세계관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엡 4:17-19)

바울은 이방인의 세계관을 ‘마음의 허망함’(The futility of their minds)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이것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첫째는 무지이며(인식론), 둘째는 영적 사망이고(존재론), 셋째는 도덕적 무감각(도덕론)입니다. 이를 통해 바울이 비록 현대인들처럼 세계관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으나 그가 세계관의 틀로 세상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이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세계관)을 통해서 문제의 발단은 무지(無知) – 바울은 무지가 영적 사망을 낳고, 영적 사망은 도덕적 무감각에 이르게 했다고 말합니다. – 라는 갈 알 수 있습니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참된 지식이 도덕적 삶을 회복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참된 지식은 무엇일까요? 지혜서 특히 전도서를 보면 솔로몬은 ‘모든 지혜가 헛됨’을 알았던 그만큼 지혜로운 자였습니다. 이는 솔로몬이 인간은 ‘하나님이 계시를 통해 선(善)을 알게 해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모르고 우둔함 속에 살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달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솔로몬같이 지혜로운 자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 스스로 자신에 대해 계시한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 또한 골로새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할 때 성도 안에 지혜가 가득하다고 당부하고 있습니다.(골 3:16)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지혜는 변화무쌍한 인간들의 지혜가 아닌 불변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가리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지혜는 처세술이 아니라 ‘도덕적 선의 실제적 측면’(the practical side of moral goodness)이며 ‘하나님의 성품의 핵심 요소’(His essence in His character)입니다.

4.  사례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과연 ‘성경 읽기’가 성도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연구한 실증적 자료 들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1) 첫 번째 사례

첫 번째 연구는 영국 웨일즈 대학의 레슬리 프란시스(Leslie J. Francis)가 2002년 겨울 ‘Religious Education’에 발표한 만 13-15세 청소년들의 약물과 담배에 대한 태도와 ‘성경 읽기’와의 관계를 연구한 논문입니다. 이 연구에서 프란시스는 25,888명의 청소년을 설문한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결과를 보면 이들 중 41%가 스스로 유신론자라고 했으며, 19%가 최소 한 달에 한 번 이상은 교회에 나간다고 답하였습니다. 그러나 일주일에 한 번 성경을 읽는 청소년은 3%, 매일 읽는 청소년은 2%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한지만 주목해야 할 부분은 교회를 다니지만 성경을 규칙적으로 읽는 학생들과 그렇지 않은 학생들이 취하는 마약류 약물들과 담배에 대한 입장을 조사한 결과입니다.

프란시스는 다음과 같이 결론짓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청소년 신자들이나 교회를 다니지 않는 청소년들은 약물 사용에 대해서 비슷한 입장을 취한 반면에 성경을 읽는 청소년 신자들은 성경을 읽지 않는 청소년 신자들보다 약물 사용에 대해 관용적이지 않은 자세를 취한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해 성경을 읽는 것은 약물 사용에 반대하는 확고한 입장을 취하게 합니다. 이것은 ‘성경 읽기’가 청소년들의 영혼만 아닌 그들의 육체에도 유익하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2) 두 번째 사례

두 번째 연구는 2007년 미국의 베일러 대학(Baylor Univers)의 아론 프란츤(Aaron Franzen)이 ‘성경 읽기’의 사회적 영향을 조사한 연구입니다. 그 결과 프란츤은 ‘성경 읽기’를 통해 사람들이 사회 문제에 대해서 보수적 진보의 성향으로 변하게 된다고 결론을 얻었습니다.

여기에서 성경을 읽고 변한 대상은 성경의 무오성을 믿으며, 스스로를 복음주의자라 칭하고, 매일 규칙적으로 성경을 읽는 보수적인 기독교인을 의미합니다. 데일리 대학의 조사를 4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성경을 자주 읽는 사람들이 사회, 경제 정의에 대해 더욱 민감하며, 활동적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소비적인 삶보다 절약하는 삶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성경을 자주 읽는 사람들이 과학에 대해서 더욱 열린 자세를 갖는다는 것입니다. 넷째는 동성애나 동성 결혼에 대해 거부 입장인데 동성 결혼이 성경적이라고 찬성하는 기독교인들(6%를 제외한) 대다수는 성경을 일 년에 단 한 번도 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위의 두 연구 사례를 보면 ‘성경 읽기’가 단지 우리의 영적인 참에 국한된 게 아니라 우리의 삶의 전반적인 변화를 일으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성경 읽기’와 삶이 분리된 것이 아니며, 신자들의 세계관을 확립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이런 연구가 이루어 겼는지 알 수 없으나 영국과 미국에서 이루어진 ‘성경 읽기’와 관련된 연구는 한국 기독교인들에게도 많은 것을 시사해 줍니다. 성경과 교회 역사는 분명히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성경을 바로 읽으면 우리의 도덕적 판단의 기준이 뒤바뀌는 세계관의 전환이 일어난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지금도 이 일은 성령님을 통해 일어나고 있습니다. 만약 그런 일이 신자의 삶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면 이는 ‘성령을 근심’(엡 4:30)하게 하는 일이 분명합니다.

5. 어떻게 성경을 읽고 묵상할 것인가?

마지막으로 어떻게 성경을 읽을 것인지에 대해 간략히 서술하고 이글을 마치려 합니다. 위의 조사 모릅니다. 그도 그릴 것이 각 교회에서는 ‘성경 필사’나 ‘성경 통독 수련회’를 열고 연말에는 성경을 얼마나 읽었는지 확인하여 시상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과연 성경을 바로 읽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기독교인이며 철학자인 강영한 서강대 교수는 1985년 인도에서 선교했던 레슬리 뉴비긴 목사를 스위스에서 만나 나눈 대화를 회고하며 이렇게 말을 합니다. “‘목사님은 복음주의자이신가요?’ 그랬는데 ‘아닙니다!’라고 아주 강하게 부인하더라고요. ‘왜요? 목사님은 복음주의자처럼 보이는데요.’라고 되물었죠. 그의 책에 나타난 복음에 대한 태도나 전도에 관한 이해나, 사회변혁에 대한 이해가 사실상 로잔언약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왜 복음주의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느냐?’라고 했더니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을 읽지 않아요.’라고 하잖아요. 내가 다시 한번 처다보니 ‘그들은 성경을 인용하고 암송은 하나 그러나 읽지는 않아요.’라고 해요. 그제야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지요. 복음주의자들이 칭의는 이야기하는데 사회정의에는 무관심하고, 성경이 ‘총체적인 구원’을 이야기하는데 복음주의자들은 ‘영혼 구원’만 이야기하고, 그래서 성경을 제대로 읽는 게 아니라 부분적으로 원하는 내음만 읽는다는 말이었어요.”

강영한 교수의 회고는 바른 ‘성경 읽기’가 가능하려면 어떠해야 하는지 생각하도록 만듭니다.

(1) 내가 원하는 것만 읽고자 하는 유혹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어도 그런 식으로 읽으면 변화는 없습니다. 바울은 골로새서나 에베소서에서 그것을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는 도식을 사용하여 설명합니다. 옛사람이란 하나님을 몰랐었던 그 상태와 존재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새 사람은 하나님을 알아 변화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성도들에게는 전과는 전혀 다른 삶의 태도가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요구하는 이유는 이미 새사람이라는 옷을 입었다는 현재 상태에 대한 당위성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첫 옷에 길들여져 있는 상태이죠.

이때 성도들에게 필요한 건 과거에 머물러 있는 상태를 지적함으로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새 옷을 바라보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공적으로 교회와 성도가 고백했던 신앙고백이나 기독교 세계관 공부를 통해 가능합니다. 달리 말해 새롭게 변화된 성경 해석의 틀을 배우는 것이죠.

(2) 기도하면서 읽는 것입니다.

산상설교(마 5-7장)는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5장은 주로 성도의 ‘도적적 삶의 원리’이며, 6장은 성도의 ‘기도 생활’, 6장 후반부터 7장은 성도의 ‘믿음의 확신’입니다.

최근 한 청년과 산상설교를 공부하던 중 “5장의 말씀을 우리가 과연 지킬 수 있을까요? 이것이 정말 가능할까요?”라고 그가 질문했습니다. 당연히 가능하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자신 있게 말할 수가 없더군요. 그러나 말씀을 공부하던 중 왜 예수님이 ‘도덕적 원리’를 제시하시고 기도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청년의 질문에 답할 수 있었습니다.

그 답은 ‘기도’였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을지라도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기도일까요? 기도는 바로 유한한 인간이 무한하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경험하는 합법적이며 거의 유일한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저는 예수님을 믿은 지 얼마 안 되는 성도님과 한적한 산길을 걸으며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저에게 자신의 믿음이 흔들린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알기 위해 성경을 읽는 일이 단지 정보를 아는 수준에서 머물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느냐?”고 물어오셨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체험이 약해서 그런 것은 아닌지 걱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해 드렀습니다.

제임스 패커가 설명했듯 하나님을 아는 것은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사람을 알려면 상대방이 마음을 열어 자신에 대해서 알려 주어야만 합니다. 이것을 관계라고 하지요. 이때 내가 이전에 알고 있었던 정보는 상대방을 더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게 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열어 우리를 받아들이셨고 그렇게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는 깊어져 우리는 하나님을 알게 되었지요. 이때 우리가 읽은 성경의 내용은 인격적인 지식이 되고 삶을 변화시키는 말씀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과의 대화라 불리는 기도는 하나님이 우리를 친구이자 양자로 받아주셨다는 증거입니다.  

(3) 확신하며 읽는 것입니다.

산상설교의 세 번째 부분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의 기도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으며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이는 외식과 대조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외식에 대해서 남들을 향한 자기 자랑이나 우월의식이라 볼 수도 있지만 산상설교에서 예수님이 비판하시는 바리새인의 외식하는 모습은 또 다른 대상을 염두 해 두는 것 같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만 아니라 하나님에게도 보이기 위해서 대로에서 기도하고 금식을 하면서 재를 머리에 뿌렸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자신이 변했다는 것을 봐주시고 인정해 주시길 간절히 원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의도는 참으로 경건해 보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겉모습이 아닌 마음으로부터 자발적으로 우러나오는 경건과 순종을 보길 원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하나님을 숨어계신 분이라고 소개하십니다. “네 자선 행위를 숨겨두어라. 그리하면 남모르게 숨어서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마 6:4)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달고서 숨어서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리하면 숨어서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마 6:6) 하나님은 숨어서 남들이 보지 않았을 때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진짜 모습을 보길 원하십니다. 그러니 참된 제자가 되려면 겉으로 떠들고 다니지 말고 은밀한 마음으로부터의 변화를 보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의 변화는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것은 성령님이 하시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을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갈 5:18) 그러기에 이미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 숨어서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확신하지 않으면 우리도 외식하는 바리새인이 될 것입니다.  

(4) 교회(공동체)와 함께 읽는 것입니다. 

성경학자들은 바울 서신을 읽을 때 한 가지 유의할 점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바울 서신들은 혼자서 조용히 속으로 읽도록 쓴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서 큰 소리로 단번에 읽도록 할 의도로 쓰였다는 것입니다. 바울 서신만이 아닌 대다수 성경은 공적으로 공동체에서 함께 읽혔습니다. 그렇게 한 이유는 개인의 확신은 언제나 흔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공동체는 우리의 확신과 의지가 약해질 때 우리가 강해지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다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교회라는 공동체로 부르셔서 자신이 거할 집으로 교회(공동체)를 건축하시기 때문입니다.(엡 2장) 이 집에 하나님은 거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집은 모든 우주에 하나님이 주인이시라는 사실을 널리 알리도록 사용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공동 운명체이며, 공동의 사명을 위해 함께 일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은 반드시 교회와 함께 읽히지 않으면 안 되는 핵심 이유입니다.

정리하자면 ‘바른 성경 읽기’란 새 사람(기독교 세계관)의 프레임으로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읽어야 하며, 읽은 말씀이 내 속마음으로부터 이루어져, 교회라는 공동체를 통해 완성될 것이라는 확신으로 읽는 것입니다. 이럴 때 말씀은 우리 안에 성취되고, 삶은 변하며, 세상은 하나님이 주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글쓴이 / 이춘성 목사(합동신학대학원 M. Div., 고려신학대학원 기독교윤리 Ph. D., 국제라브리선교회 간사 및 국제위원)  출처, https://www.labri.kr/downloads/docs/lcs_holy_reading.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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