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죄

부활과 함께 생각하는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

1. 언약의 피  

    예수의 죽음은 단지 무죄한 의인(義人) 의 죽음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종교적 위인(偉人)의 죽음을 넘어선다. 예수의 죽음은 소크라테스나 부처나 마호메트의 죽음과도 다르다. 그의 죽음은 많은 사람의 대속(代贖)을 위한 죽음이었다.

    예수는 제자들과 나눈 최후의 만찬에서 자신의 죽음의 의미를 제자들에게 친히 가르치셨다. 복음서 저자 마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막 14:22-24) 

마태와 누가도 기록하고 있는 최후의 만찬(마 26:17-30, 눅 22:7-23)은 단순히 작별의 자리만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예수께서 흘리실 피가 죄인을 대속하시는 ‘언약의 피’라는 사실을 미리 가르치시는 자리이다.

사도 바울은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께서 상징적으로 보여주시고 제정하신 떡과 잔을 받는 진리를 성만찬의 진리로서 ‘예수의 죽으심을 그분이 다시 오실 때까지 기념하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고전 11:23)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 11:26) 

이 글에서 사도 바울은 이 성만찬의 진리를 주 예수로부터 직접 받은 계시적 진리라고 설명해주고 있다. 그리고 이 성만찬의 진리는 역사적 예수로부터 직접 유래했음을 사도 바울은 증언하고 있다. 이런 속죄의 언약은 구약성경의 희생제사에서 예표(豫表)로서 제시되었다.

2. 구약의 속죄  

대속(代贖)의 죽음사상은 구약 출애굽기에 나타나 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이집트에서 나오기 전날 밤 유월절을 지키도록 명하신다. 하나님은 어린 양의 피를 유대인이 거주하는 집의 문설주에 바르는 의식(儀式)을 지키도록 하셨다.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가 사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災殃)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출 12:13) 

이 어린 양의 피가 문설주에 발린 이스라엘의 집에는 장자(長子)를 죽이는 죽음의 사자(使者)가 들어가지 않고 지나갔다. 그러나 문설주에 피가 뿌려지지 않은 이집트의 장자들은 바로 왕의 장자로부터 모든 평민들의 장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이 문설주에 뿌려진 죽음을 피하는 어린양의 피는 다가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贖罪)의 피를 상징한다.

레위기의 모세는 짐승의 피를 뿌려서 죄를 속(贖, 바칠 속, 재물을 바치고 죄를 면제 받는다는 의미)함 받는 속죄(贖罪)의 이치(理致)를 알려주고 있다. “모세가 그 피를 가지고 백성에게 뿌리며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출 24:8)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 17:11) 

피는 육체의 생명을 구성하는 것이므로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짐승의 피를 제단에 뿌리는 것은 죄를 범한 자의 생명을 대신하여 제물이 되는 것을 상징한다. 이 제단에 제물로 드려진 희생 제물로 인하여 제사자의 죄가 속함을 받는다. 이 피를 뿌리는 구약의 희생제사는 앞으로 다가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는 대속을 예표(豫表)하는 것이었다. 즉 제물의 피는 예수님의 생명을 상징한다.

선지자 이사야는 이미 700년 전 이 땅에 오실 메시아(Messiah)의 대속의 죽음을 예언하고 있다. 그는 바벨론에 포로 되어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여호와의 속량(贖良)을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값없이 팔렸으니 돈 없이 속량되리라.”(사 52:3) 그리고 이사야 53장에서 이사야는 많은 사람의 죄를 속량하는 여호와의 종(從)에 관하여 예언하고 있다.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罪)를 담당(擔當)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사 53:11,12)

이 이사야의 예언에서 ‘많은 사람을 위한’이란 첫째, 혈통적 이스라엘 민족, 둘째, 신앙의 이스라엘 민족. 셋째, 세계만민(마 8:11)으로 해석할 수 있다.(Gerhard Lohfink, Wie hat Jesus Gemeinde gewollt? Zur gesellschaftlichen Dimension des christlichen Glaubens, Verlag Herder, Freiburg I. Br. 1982, 정한교 옮김, 분도출판사,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그리스도 신앙의 사회적 차원, 49-53)

포로기 예언자 에스겔은 성전 속죄와 관련해 대속을 증언하고 있다. “제사장이 그 속죄제 희생제물의 피를 가져다가 성전 문설주와 제단 아래층 네 모퉁이와 안뜰 문설주에 바를 것이요 그 달 칠일에도 모든 과실범과 모르고 범죄 한 자를 위하여 역시 그렇게 하여 성전을 속죄할지니라.”(겔 45:19,20) 여기서 요구되는 희생제물의 피는 다가오는 신약이 말하는 하나님의 어린양 그리스도의 피를 예표하고 있다.

3. 신약

신약성경에서 복음서 저자들과 사도들은 예수의 죽음이 단지 의인의 무죄한 죽음만이 아니라 인류의 죄를 속하는 대속의 죽음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는 죄인의 대속을 위하여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다고 수차례 고난에 대한 예언을 하셨다.

(1) 복음저자들

예수는 제자들과 다락방에서 최후의 만찬 석에서 앞으로 자신의 죽음이 지니는 대속의 의미를 기념하라고 당부하셨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해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막 14:22-24) 이 같이 예수가 십자가에서 흘리는 피는 인류의 속죄를 상징하는 언약의 피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 누가는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졌다.”(눅 23:45)고, 마태는 “성소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마 27:51)라고 기록했다. 성소(聖所)와 지성소(至聖所) 사이를 가로막아 구분하는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대속 제물이신 예수의 찢겨진 육체로 인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새롭고 산길이 열렸음을 상징하는(히 10:19,20) 언약을 의미한다. 이로써 그 어떤 죄인이라 할지라도 예수의 이 대속(代贖)의 죽음을 의지하고 담대히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예수는 이미 그의 복음전파 시에 이 사실을 예언하셨다. 예수는 가버나움에서 이방인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앞으로 이방인의 시대가 도래 할 것이라는 예언을 하셨다.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마 8:11,12) 이 예언은 성소의 휘장이 찢어짐으로써 가시화되었다.

예수께서 운명하시자 무덤이 열리고 무덤 속의 성도들이 부활하는 사건들이 일어났다. 복음서 저자 마태는 이 영적 사건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마 27:52,53)

이런 사건들은 예수의 죽음이 지니는 대속적이고 우주적 의미를 시사(示唆)하고 있다. 사도 요한은 그의 서신에서 예수의 죽음이 세상 죄를 위한 대속의 제물임을 증언하고 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2) 바울의 증언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하나님의 구속의 섭리가 나사렛 예수의 십자가 죽으심에 의해 실현된 것을 증언하고 있다. 바울은 그가 전도하여 세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예수께서 제정하신 성만찬의 말씀을 회상시키고 있다.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고전 11:24,25) 성만찬 예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심의 대속의 진리를 기념하는 것이라고 천명(闡明)하셨다. 그러므로 성만찬은 예수의 죽으심에 기초해서 세워진 구원에 대한 새로운 언약의 상징이다.

복음의 진리란 하나님 사랑의 진리이다. 그것은 대속(代贖)의 진리이다. 하나님의 독생자(the one and only son)가 이 세상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속량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 안에서 인간이 되신 이유이다. 나사렛 예수는 누구인가? 그는 바로 인간이 되신 태초의 하나님의 말씀이었고 세상의 죄를 속량하시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증여하신 하나님 아들이시다.

복음서는 나사렛 출신 예수의 인격과 삶 속에서 하나님이 인간의 구원을 위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하나님의 오심은 나사렛 예수 안에서 역사적 형태와 몸의 형태로 주어졌다. 사도 요한은 서신에서 예수 안에 있는 태초의 생명의 말씀에 관해 증언 한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 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요일 1:1,2)

이것이 신구약 성경이 증언하고 있는 하나님의 독특성이다. 성경의 하나님은 스스로 신적 존엄 속에만 계시지 않고 자신을 낮추시어 죄인과 연대(連帶)하시고 죄인들을 위하여 스스로 자기의 생명을 내어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심으로 죄인과의 연대를 보여주신 것이다. 그리고 죄인을 위해 희생의 제물이 되시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나사렛 예수의 역사성과 진실의 내용이다.  

나사렛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 자신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십자가에서 치욕(恥辱)의 죽음을 당하셨다. 초대교회 그리스도 찬가는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8) 사도 바울은 이 증언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 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히브리서 저자도 다음과 같이 증언 한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3) 하나님의 철저히 비우심(radical kenosis of God)

죄와 죽음의 세력을 척결하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유대인 즉 평범한 가문의 출신 나사렛 예수 안에서 죽으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철저히 자기 비우심(kenosis)을 나타낸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 영광의 본체를 버리고 철저히 인간의 아들이 되시고 고통을 받으시고, 능욕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처형되시기까지 자기를 철저히 낮추셨다는 것을 말한다.

이 십자가의 죽으심은 죄인을 구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심이다. 요한은 이 사랑의 화신(化身)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 아들 나사렛 예수라고 증언하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9,10)

헬라인에 의하면 신적인 이데아(Idea)는 저 영원의 세계 속에서 변하지 않고 멸망당하지 않고 그 정신적 숭고함 속에 있다. 그러므로 물질이나 육체란 영혼이 그 속에 들어 있는 무덤과 같이 비천하고 욕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비우심은 당시의 헬라사상에 의하면 비천하고 어리석고 미련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므로 바울은 헬라인들에게는 십자가 도의 미련함을 말한 것이다. 바울은 이 하나님의 철저한 비우심을 복음의 핵심(헹엘, 십자가 처형, 115)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은 종교적 상징 이상이다. 이것은 모든 인간에게 다가오는 고통과 죽음과 대결하시는 하나님 아들의 사랑의 행위이다. 예수의 십자가에 달리심은 제자들을 부르시는 윤리적 모델 이상(以上)이다. 이 예수 십자가 죽음의 사건은 하나님이 죽음의 세력에 대결하여 이것을 철폐하신 것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종교적 상징을 넘어선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 안에서 스스로 한 유대 청년의 죽음을 받아주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윤리적 모델을 넘어선다.

(4) 예수 죽음의 독특성은 죽음과의 대결(對決)

예수의 죽음은 “악법도 법이다.”라고 체제에 순응하면서 독배(毒盃)를 마시고 조용히 죽은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같지 않다. 예수는 구약성경의 족장들(아브라함, 이삭과 야곱 등)처럼 천수(天壽)를 다하고 평온히 죽지 않고 하나의 노예 내지 흉악범같이 십자가 위에서 치욕스러운 죽음을 당했다. 그러나 실상 예수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치욕스럽고 저주스러운 십자가에 자신의 생명과 몸을 내어 주셨다. 예수는 그처럼 신뢰했던 아버지에 의해 버림당하는 데 대해 절규하기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하면서 운명하셨다.

소크라테스(Socrates, ?-399BC)의 죽음은 평온했고 죽은 뒤에는 그것으로 끝나 아무것도 없이 그것으로 종결되었다. 그러나 예수의 죽음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가져왔다. 예수는 음부(陰府, 地獄,  Gehenna, hell) 즉 죽음의 세계에까지 내려가셨다. 어느 인간도 실제로 하지 못한 일을 하신 것이다. 예수는 음부의 세계에서 죽음과 대결했다. 그런데 죽음의 권세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음부는 죽음의 권세를 가진 하나님의 아들을 품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음부는 그것이 더 이상 자기 권세 아래 통제할 수 없는 하나님의 아들을 토해낸 것이다. 아들은 그 자체가 생명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는 죽음을 죽이신 것이다.(to kill the dead)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죽음에 관해 다음과 같이 담대하게 쓰고 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전 15:55,56)

결론 

예수께서 세우신 것은 속죄자(贖罪者)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피를 믿고 속죄함을 입는 것이다. 구약 이스라엘 제사의 어린 양이나 염소의 파의 속죄는 앞으로 올 메시아의 속죄를 예표(豫表)하는 것이었다. 예수의 속죄는 역사적으로 일회적이며 유일하다. 그 이유는 하나님 아들이 인간이 되시고 유일회적으로 속죄제물이 되셨기 때문이다.

아직도 타종교에서는 짐승의 제물이 되풀이 되고 있다. 히브리서 저자는 증언하다.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히 10:11) 이 구약의 제사는 다가오는 실재의 예표이다.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히 10:1)

기독교에서 하나님 아들의 제물은 더 이상 되풀이 되지 않는 단 한 번 만에 결정적인 제물이 되셨다. 히브리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 10:10)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히 10:12)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 10:14)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의 말씀이실 뿐 아니라 스스로 속죄 자이신 것이다.(*) 글쓴 이 / 김영한 교수(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 철학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Ph.D., 철학박사,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Th.D., 신학박사, 한국개혁신학회 회장, 숭실대학교 기독교학대학원 초대원장, 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 기독교학술원 원장, 샬롬나비 / 개혁주의 이론실천학회 상임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