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시대의 예언과 방언 오늘날도 존재하는가?
사도시대의 예언과 방언오늘날도 존재하는가?

– The Question of Cessation –
오늘날 로마서 12장, 고린도전서 12장, 에베소서 4장에 언급된 모든 은사(恩賜. χάρισμα)들이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계속될 것이라는 견해가 널리 퍼져 있다. 반면 어떤 은사들은 중지되었다는 견해는 그 교회에 그런 은사들이 없기 때문에 명백한 성경의 교훈을 무시하고 자기 교회의 형편을 억지로 합리화시키는 궁여지책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그러나 신약성경의 교훈을 종합해보면 사도시대와 같은 ‘예언’과 ‘방언’은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중지되게 되어 있으며 이미 중지되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이제 본 논고에서 성경의 이런 교훈들을 개괄하되 어떤 부분은 좀 더 자세히 다루고자 한다.
1. 사도직의 일시성
– The Temporary Nature of the Apostolate –
사도(使徒, ἀπόστολος)의 역할에 대해 성경학자들 간에 많은 논란이 있으나 그 상세한 것을 제쳐두고 그 일반원리로서 신약에서 사도라는 용어가 다음 두 가지를 기본적으로 지적한다는 점만 말하고자 한다.
첫째, 사도는 교회에서 특수한 임무를 위해 잠정적으로 선발된 대표자를 가리킨다.(고후 8:23, 빌 2:25, 행 14:4,14)
둘째, 첫 번째 경우보다 더 중요하게 취급되는 것으로서 고린도전서 12:28,29과 에베소서 4:11 등에 나타난 대로 사도란 그리스도의 사도들을 가리킨다.
이 두 번째 의미의 사도들은 그 수가 제한되어 있고(몇 명이냐 하는 문제는 일단 차치하고서라도), 교회사(敎會史)의 첫 세대에 국한되어 있다. 즉 사도직은 신약교회의 첫 세대에만 국한된 일시직(一時職)이란 사실을 다음 몇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 사도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목격자여야 한다.(요 15:27, 행 1:8,22, 10:41)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에 자기의 경우 이 조건에 맞는다고 했다.(고전 9:1, 15:8,9, 행 9:3-8, 22:6-11, 26:12-18 참조)
- 바울은 자기가 마지막 사도라고 했다. “맨 나중에 (중략)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전 15:8,9) “사도인 우리를 (중략) 미말(尾末)에 두셨으매”(고전 4:9) 여기서 ‘우리’는 아볼로를 포함한 ‘우리’가 아니라 고린도전서 4:6의 바울 자신을 가리켜 ‘우리’라고 한 것이다. 왜냐하면 9절 하반부터 13절에 기록된 ‘우리’의 경험은 바울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 목회서신을 보면 바울이 누구보다도 디모데를 자기의 후계자로 생각한 것을 알 수 있다. 바울이 기초를 놓은 복음사역을 디모데(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이어받아 계속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디모데를 결코 사도(使徒)라 지칭하지 않았다. 신약성경에 의하면 이렇게 (로마 가톨릭교회처럼) 개인에서 개인으로 이어지는 사도권의 계승은 그 용어 자체가 모순이다. 교회에서 사도들의 활동은 단회적(單回的, 첫 번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을 연구한 자는 누구나 사도직의 일시성(一時性)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결론은 교회사가 진행되는 동안에 계속 부인되어 왔고 지금도 그것을 부인하는 자들이 있다.(로마 가톨릭교회) 우리가 사도권의 일시성(一時性)을 인정할 때 다음 몇 가지 결론도 동시에 인정해야 한다. 우선 사도직이 첫 번째로 열거 되는 독특하고 탁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교회에 주어진 여러 은사들 중 하나로 열거했다.(고전 12:28,29, 엡 4:11) 이것을 볼 때 바울이 언급한 모든 은사가 다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계속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이 은사들 중 하나가 중단 되었다고 해서 반드시 성경의 권위와 계속적 적용을 부인할 필요는 없다. 더욱이 사도적(apostolic) – 후(後) 사도적(post-apostolic)의 구분은 신약성경 자체가 하고 있는 것이지 사람들이 임의로 신약성경과 교회사에 집어넣은 것이 아니다. 특히 목회서신은 사도 이후 교회의 장래를 위해 씌여진 것이다.
따라서 사도직의 일시성을 인정하는 자들 특히 사도직의 탁월하고도 핵심적인 중요성을 인정하는 자들은 신약성경에 나타난 교회생활에 있어서 어떤 요소들이 사도직과 직결되어 있으며, 따라서 사도직이 없어짐에 따라 어떤 요소들이 사라졌으며, 동시에 어떤 요소들이 사도 이후의 교회에 계속되고 있는가 하는 점을 판단해야 하는 것이다.
2. 사도적 증거의 기초성(基礎性)
– The Foundational Character of the Apostolic Witness –
사도들의 활동 중에 가장 중요한 하나는 이미 우리가 앞서 논증 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이었다.(요 15:27, 행 1:8, 13:31) 사도들은 그리스도에 의해 친히 세우심을 받은 자들로서 그의 권위와 능력을 받아 언약의 성취인 부활을 증거 했다.(눅 24:48, 행 1:22, 2:32, 4:33, 10:39-41)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의 핵심으로서 포괄적인 복음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결국 그리스도의 부활 증거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포괄적으로 해석 증거 하는 것이다.
그것은 불신자들에게 복음의 기본적인 사실들을 선포하는 것에 국한 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부활의 증거는 말로든 기록으로든(살후 2:15) 사도들의 설교와 교육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사도적인 설교와 교육의 총화(總和)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다 전하는 것이다.(행 20:27) 그런데 이 ‘하나님의 뜻’은 자기백성의 구원과 피조물 전체의 갱생(更生)을 위해(고후 5:17, 계 21:5) 천국 도래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비밀’의 계시(롬 16:25,26)로 나타났다.
이러한 사도들의 증거 임무를 가장 포괄적으로 볼 수 있는 곳은 아마 에베소서 2:19 이하일 것이다. 거기서 바울은 새 언약 교회(11절 이하)를 그리스도의 부활과 재림 어간의 하나님의 위대한 건축활동(집을 세우는)의 결과로 보았다.(벧전 2:4-8) 이렇게 집을 세우는 데 있어서 사도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교회(집)의 초석(礎石) 내지 기초(基礎)인 것이다.(엡 2:20)
그리스도와 함께 사도들을 교회의 초석이라고 한 것은 교회의 유일한 머리요 기초인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의 종결성을 흐리게 하거나 부인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고전 3:11), 사도와 그들 활동이 특수한 의미에서 교회 창설(創設) 사역에 포함시키기 위한 것이다.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이어받은 자들이다. 그리스도의 속죄에 사도들 자신이 구속을 위한 노력을 덧붙여 추가 속죄를 함으로써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증거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사역을 이어받아 나간 것이다.
에베소서 2장 본문을 볼 때 사도들이 그리스도처럼 유대인과 이방인간의 상호 적개심을 허물어 하나님과 화목 시키고 하나로 만드는 평화 사역자(중보자)는 아니다.(엡 2:14-16)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자(使者)들로서 승귀(昇貴, exalation)하신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통해 오셔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화목하여 하나 되게 하신 것이다.(엡 2:17) 그리고 그리스도의 단회적인 신약교회 창설(創設) 사역은 그의 죽음과 부활로 완성되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신약교회 창설 사역에 그 사역을 증거 하는 사도들의 창설 사역이 결합된 것이다. 마태복음 16:18에 이미 이것이 예상되었다. 예수께서는 사도들을 대표하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그 위에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울 반석이라고 하셨다. 이처럼 사도들이 교회의 기초인 것은 단순히 그들이 시간적으로 앞서 있기 때문이거나(그렇다면 바울이 어떻게 그 기초가 될 수 있나? 고전 15:8,9), 그 숫자가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신약성경은 그 정확한 숫자를 밝히는 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또 그들이 유대인들이었기 때문에 교회의 기초가 된 것도 아니었다.
에베소서 2장의 핵심은 이방인이 유대인의 토대 위에 세워짐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 되었다는 것이 아니고 유대인과 이방인이 둘 다 초석인 그리스도께서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함께 하신 그 기초 위에 주님의 교회가 세워졌기 때문에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같이 사도들이 교회의 기초의 일부라는 것은 그들의 사도적인 기능과 구별 된 그들의 인격의 특징이나 어떤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다.
다른 한편으로 교회의 기초는 사도들 자신으로부터 분리된 사도적 인 증거가 되는 것도 아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들이 교회의 기초라고 하는 말을 그들의 인격에서 분리된 사역이나 그들의 사역에서 분리된 인격에서 이해하는 것은 해석상 잘못된 딜레마에 빠지는 것이다. 교회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사도들이라는 의미에서의 사도들이며 계시를 받아서 전했다는 점에서의 사도들이다.(엡 3:5)
여기서 또한 우리는 교회의 기초가 절대적이고 역사적인 성격을 띠고 있음을 안는 것이 중요하다. 교회의 기초라는 것을 시간과 장소에 무관하게 복음이 최초로 전파되었던 구체적인 상황으로만 보면 안 된다. 오히려 교회의 기초란 단 하나의 포괄적인 구속의 역사적 건축공사로써 그리스도와 사도들을 통해 교회역사 초기에 단번에 이루어지고 다시 반복되지 않는 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신약교회 창설시기 이후의 시대는 다시 영구적인 기초를 놓는 기간이 아니고 바로 단회적으로 이뤄진 그 기초 위에 세우는 상부구조(superstructure)인 것이다.
이 같은 포괄적인 의미의 사도들의 증거의 창설성을 이해할 때에 데살로니가후서에 이미 나타난 대로(2:15, 3:6) 교회가 사도적인 ‘전통’을 고수할 것을 강조하는 이유를 알게 된다. 사도적인 ‘전통’은 목회서신에서 보는 대로 사도들이 부탁한 ‘기탁물’(寄託物, deposit)로서 우리가 잃지 않고 꼭 지켜야 할 것이다.(딤전 6:20, 딤후 1:14)
그것은 또한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道, the faith)’이다.(유 3) 이렇게 사도적인 ‘전통’의 강조는 사도적인 증거의 강력한 권위를 반영해 주는 것이며 또한 신약의 정경(正經) 형성을 준비하고 그 길을 연 것이다.(벧후 3:16에서 바울서신을 이미 ‘다른 성경’과 동등한 수준에서 보고 있음)
3. 사도적 예언의 기초성(基礎性)
– The Foundational Character of Prophecy –
에베소서 2:20에 보면 초대교회의 ‘예언자들’이 창설적(創設的) 증거활동 내지 말씀 사역에 있어 사도들과 연결되어 있다. 이 ‘예언자들’이 누군가 하는 점은 다소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다. 지금도 다수의 견해는 그들이 구약의 예언자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도들과 예언자들’은 신구약의 통일성을 지적하고 교회가 신구약 위에 기초하고 있음을 지적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그러나 그들이 구약 예언자들이라는 견해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합당하지 못하다.
- 만일 구약의 예언자들이라면 어순이 ‘예언자들과 사도들’이라고 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 본문 문맥이 이방인을 유대인과 같이 그리스도의 몸속으로 영입시키는 새 언약의 새로움을 강조하는 것이다.
- 사도들과 예언자들이라는 말이 그 뒤 3:5에도 똑같이 연결되어 나오는데 3:5의 예언자들은 현재의 교회생활에 속해 있는 것으로 구약 시대와의 대조 속에서 나타나 있다.(‘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 하셨으니’)
또 어떤 이들은 예언자들(3:5과 2:20)이 예언자들 이기도한 사도들을 가리킨다고 한다. 이것은 문법적으로 가능한 주장이다. 또 실제로 사도들이 예언을 하기도 했다.(롬 11:25,26, 고전 15:51 이하, 살전 4:15 이하, 고전 14:6) 따라서 이런 견해를 틀렸다고 할 만한 근거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몇 가지 사실을 종합해 볼 때 이 또한 잘못된 주장이다.
우선 에베소서 4:11에서 바울은 승귀(昇貴) 하신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주신 일부 은사들을 열거하는데(7절 이하), 사도와 예언자가 명백하게 구분되어 있다.(‘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에베소서 2:11-4:16에서 바울이 교회 전체를 논하면서 교회가 ‘새로운 피조물’인 그리스도의 몸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지적했는데 이 큰 문맥의 일부로 4:11이 언급되었기 때문에 바울이 특별한 단서도 없이 ‘예언자’를 ‘예언자와 사도’라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의미로 사용했을 리가 없다.
바울은 또 에베소서 4:7-16에서 그리스도께서 그 몸에 주신 서로 다른 은사들 간의 조화를 지적하면서 교회론을 더 전개하였다. 그렇다면 에베소서 4:11은 2:20과 3:5에 언급된 예언자들이 사도들과 나란히 언급되었지만 사도들과 분명하게 구분되며 승귀하신 그리스도께서 주신은사 중의 하나임을 밝혀주는 것이다. 따라서 전체문맥을 볼 때 ‘사도들’과 ‘예언자들’은 서로 분명하게 구별 되며 그들 각각의 사역이 에베소서 4:11-16에서 포괄적으로 언급한 교회 창설에 구체적으로 기여하는 사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이 같은 점을 덧붙일 수 있다. 고린도전서 12:28은 바울이 ‘사도들’과 ‘예언자들’을 함께 언급한 유일한 구절인데 여기서 바울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을 별도의 그룹으로 명백히 구분했다.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고전 12:28, 계 18:20 참조)
더욱이 고린도전서 12:28은 에베소서 2장-4장과 아주 흡사한 문맥 속에서 나온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이방인과 유대인으로 구성되어있으며(고전 12:13), 봉사를 위한 은사를 받고 있음을 포괄적으로 다룬 것이다.
또한 바울이 에베소서 2:20과 3:5에서 사도들을 예언자들로 보았다면 독자들에게 그렇게 본 이유를 좀 설명했어야 했을 것이다. 물론 성령의 각 은사가 칼로 무 자르듯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사도들은 예언자와 교사의 기능도 함께 행사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설교자와 교사라고 했다.(딤전 2:7, 딤후 1:11) 그러나 바울은 자기나 다른 사도를 예언자라고 하지는 않았다. 더 결정적인 것은 에베소서 2:20, 3:5에 나타난 복수 용법이다. 사도들을 하나의 그룹으로 보았다.
바울은 또한 다른 곳에서도 사도들을 예언자들이나 교사들로 지칭하거나 교회 안에 있는 어떤 다른 봉사직분으로 지칭한 적이 결코 없었다. 그렇게 했으면 혼란이 왔을 것이다. 물론 예언 활동이 교회의 어느 한 그룹에 엄격하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예언자가 아닌 자들에게 특수한 경우에 일시적으로 예언 은사가 나타나기도 했다.(행 19:6) 그러나 에베소서는 이런 점을 다룬 것이 아니다.
이 같은 이유들로 에베소서 2:20과 3:5의 ‘예언자들’은 ‘사도들’과 구분되는 신약의 ‘예언자들’을 가리킨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이 합당하다. 일단 이 점을 이해하고 나면 에베소서 2:20과 3:5에 ‘예언자들’ 앞에 정관사가 없는 것은 바울이 ‘사도들’과 ‘예언자들’을 밀접하게 연결시켜 사용한 것으로 알 수 있다. 즉 바울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비밀’을 계시하고 증거 하는 창설 사역에 있어서는 ‘사도들’과 ‘예언자들’을 구별하지 않고 하나의 단위로 본 것이다.
그런데 이 ‘비밀’에 관한 계시가 예언자들에게 주어진 계시가 아니라는 반론은 신약 전체의 예언관(豫言觀)을 오해한 데서 나온 것이다. 또 ‘비밀’의 의미를 너무 좁게 이해한 데서나온 것이기도 하다. 이제 설명하겠지만 아가보의 경우(행 11:28, 21:10,11)는 사도시대 예언의 창설성을 뒤엎는 자료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세우는 증거자료이다. 에베소서 3:6 이하에 이방인들이 교회에 영입된 것을 강조했는데 이방인의 교회영입은 ‘비밀’의 주요한 측면이지만 ‘비밀’의 전부가 아니고 한 측면이다.
‘비밀’이란 구원 전체를 포괄하는 의미에서의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키며(골 2:2,3) 포괄적인 개념으로서의 복음을 가리킨다.(엡 6:19, 롬 16:25,26 참조) 따라서 에베소서 2:20 연구에서 내릴 수 있는 중대한 결론은 신약의 ‘예언자들’이 사도들과 함께 교회의 기초라는 점이다. 신약의 예언자들 역시 교회 창설 사역자들이다. 즉 교회사에 계속되지 않은 일시적 기능직으로서 하나님의 의도에 의해 사도직과 함께 중단된 것이다. 이제 다음의 몇 가지 점은 이 결론을 상술하는 것이며 동시에 그 반론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것이다.
(1) 에베소서 2:20에 대한 이해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엡 2:20)는 말씀을 우리는 해석의 원리로서 그 의의를 충분히 살려 이해할 필요가 있다. 신약성경의 예언에 관한 구절들이 해석상 항상 똑같은 의의를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가령 고린도전서 14장은 다른 교회의 상황에도 적용이 될 수 있지만 세밀히 살펴보면 비교적 초점이 좁은 것으로서 고린도교회의 특수 상황에만 국한된 것이다.
반면 에베소서는 바울이 회람(回覽)할 수 있는 편지(circular letter)로 쓴 것인데 에베소교회보다 더 넓은 독자층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에베소서 2:20이 가장 포괄적인 교회론을 취급한 문맥에 나온다는 점이다. 즉 에베소서 2:20은 한 발 물러서서 건물 전체를 살핀 후에 그 속에(그 건물의 기초에 속한 것으로서) 예언이 어떤 위치에 놓여있는가 하는 것을 본 것이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4장과 기타 예언에 관한 구절들은 그 일부분을 건물 안에서부터 살핀 것이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2:20은 전체를 포괄하는 것으로서 신약성경에서 좁게 구체적으로 자세하게 예언을 다룬 구절들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핵심적인 주요원리로 삼아야 한다. 특히 신약성경에서 예언을 다룬 구절들이 예언을 다양한 측면을 가진 하나의 공통된 현상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에베소서 2:20은 신약의 예언관(豫言觀) 전체를 포괄하는 일반원리를 지적해 주는 것이다.
(2) 사도시대 예언의 종결 문제
예언이 사도직과 함께 교회에서 종결(終結, 철수)되었다는 우리의 결론에 대해 사람들이 반론을 제기할 때 흔히 에베소서 2:20보다 다른 구절을 더 강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창설적 계시를 전하는 예언자들은 교회에서 사라졌으나 그 예언의 창설 기능에 덧붙여서 혹은 그와 거의 평행하게 예언의 다른 기능이 있는데 그것은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볼 수 있는 대로 오늘날의 교회에도 계속되게 되어 있으며 또 실제로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에베소서 2:20은 특수한 예외적인 것이고 고린도전서 14장은 예언론의 일반원리로 계속 적용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에베소서 2:20에서 무엇을 말하고 있으며 그 해석적 ‘무게’가 어느 정도인가 하는 점을 다시금 강조할 필요가 있다. 에베소서 2:20은 예언의 모든 기능을 포괄하는 예언론의 일반원리인데 거기서 분명히 예언이 중지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더욱이 우리가 사도시대 예언의 계시성(啓示性)을 인정할 때 이중(二重) 계시관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상 예언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주장할 수 없는 것이다.
이중(二重) 계시관은 교회 전체에 대한 정경적(正經的)인 계시와 신자 개인이나 개인 신자들의 그룹을 위한 사적(私的)인 계시를 여러 방식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중 계시관은 ‘구원에 필요한’ 종합적 성경 계시와 성경의 차원을 넘어서 ‘개인생활’의 형편과 필요와 관심에 관한 계시들을 구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중계시 관은 성경이 말하는 계시관과 도무지 맞지 않는다.
성경은 모든 계시(啓示)의 언약성(言約性)과 구속(救贖)의 역사성(歷史性)을 보여 준다. 하나님은 절대로 두 줄기로 계시하시지 않는다. 즉 한 줄기는 교회를 위한 공적계시 다른 한 줄기는 개인을 위한 사적계시로 계시하시지 않는다. 우리가 계시 이해에 있어 계시가 우선적으로 나 개인에게 주로 나 개인의 생활지침으로 나 개인생활의 특수한 관심사와 난제에 대한 해결책으로서의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본다면 그것은 근본적으로 계시에 대한 잘못된 이해이다. 그렇다면 성경이 일반적인 생활지침으로서는 부적합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성경 전체의 증거를 볼 때 모든 계시에 두 가지 기본 특징이 있는데 이 두 특징이 계시를 주는 근본원리이다. 간추려 말하면 이렇다.
- 하나님의 계시는 언약적(言約的)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언약(言約)의 하나님으로 계시하셨다. 하나님은 어중이떠중이 개개인이나 어느 인간 집단에게 계시하시지 않고 자기의 언약 백성들에게 계시하신다. 그리하여 그 언약의 백성을 세우시고 그들을 한 백성으로 완전하도록 만드시는 것이다. 이 같이 하나님의 계시는 항상 하나님의 언약백성 전체에게 주시는 것이고 언약백성 전체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물론 그 계시가 개인에 따라 그 상황이 다르므로 적용되는 면이 다른 것도 사실이다.
- 하나님의 계시는 구속사적(救贖史的)이다.
타락 이전의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 하나님은 언약 백성의 구속주(救贖主, Redeemer)와 세상의 구주(救主, Savior)로서 자신을 계시하셨다. 계시는 역사 속에서 언약 백성의 구원을 단회적으로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의 구성 요소로 주어진 것이다. 계시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과 승귀에서 최초로 완성된 계속적인 언약 역사의 본질적인 요소이다. 계시는 이 언약사(言約史)를 기록한 것이다. 특히 약속의 성취(成就)로서의 그리스도를 기록하고 있다.
또한 계시는 구속된 언약 백성의 생활에 적용시키고 그들도 순종하도록 함으로써 언약사(言約史)를 해석하고 있다. 구속사가 단회적으로 성취되었고 또 오순절 이후로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구속을 적용하고 이방인을 언약의 구원에 영입(迎入)시키기 위해 구속사의 움직임이 지연되었다. 따라서 사도시대의 예언과 방언과 동일한 새로운 계시의 기초와 근거는 없다. 즉 언약적이며 구속사적인 하나님의 계시는 중단된 것이다.
물론 성경에 개인에게 개인적으로 특별한 계시가 주어진 예는 많다. 또 성경은 우리 개인의 사정과 형편에 확실히 적용된다. 성경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다.(시 119:105) 그러나 성경이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인 것은 성경이 언약(言約)의 역사로서 ‘때가 차매’(갈 4:4)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될 때까지 전개된 것을 다룬 계시이기 때문이다. 즉 여러 모양으로 예언자들을 통해 조상들에게 말씀하시다가 마침내(‘이 마지막 날에’) 아들로 완성되고 사도들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그의 말씀을 들은 자들, 히 1:1,2, 2:3)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 계시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계시는 우리를 위하여 사도들과 그 밖의 사람들을 통해 계시된 ‘모든 것’, ‘모든 진리’이기 때문에(요 14:26, 15:15, 16:13) 또 ‘그리스도에 관한 것들’과 ‘진리’이기 때문에(요 16:14),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으로서(요 1:1) 단회적으로 말씀하신 진리이신 그리스도이기 때문에(요 14:6) 바로 이런 까닭에 우리의 생활을 통제하는 권위요 지침인 것이다. 더욱이 언약 계시의 관심사는 우리의 구원인데 구원은 우리 생의 어느 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구원은 또 우리의 존재 그 자체에만 국한된 것도 아니다. 구원은 포괄적인 것이다. 우리 신자들과 우리의 생활에 관계된 그 어떤 것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언약 백성에게 단회적으로 주신 정경(正經) 말씀 하나님의 단회적인 구원과 연결시켜 주신 말씀에 의거하여 항상 모든 면에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가신다.(빌 2:12) 이처럼 이미 언약적으로 완전한 구원에 필요한 모든 계시가 완성되었기 때문에 구원에 관한 한 신자의 생활에 새로운 계시가 있을 자리가 없다.
성경은 구체적인 개인의 요구와 형편에 맞춘 사유화되고 지역화 된 말씀이 아니다. 아가보의 예언(행 21:8-14)을 들어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잘못이다. 아가보의 예언도 역시 언약적이며 역사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사도행전 11:28에서 교회 안에 유대인과 이방인 간에 새로 수렴된 기초적인 교제와 유대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아가보가 예언한 것이다. 그것은 안디옥에 있는 헬라인들로 하여금 유대에 있는 기근 만난 유대인 형제들을 구제하도록 하기 위한 예언이었다.(행 21:20,27, 29,30) 다시 말해서 이 예언은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비밀’의 주요한 측면과 관계된 것이다.(엡 3:6)
사도행전 21:10,11의 경우도 바울 사도의 이방선교 사역 전개와 관계된 예언이다.(행 20:23) 더 일반적으로 말해서 예언의 주제는 ‘비밀’(고전 13:2)인데 바울은 이 ‘비밀’을 항상 구속역사의 범주로 보았다.
(3) 사도시대의 예언과 신약성경의 관계
이상에서 다룬 것과 직결된 것으로서 예언과 신약정경의 관계를 다룰 수 있다. 이 문제는 여기서 다룰 필요가 없는 문제인데 왜 다루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교회 창설시대 즉 사도시대는 정경개방(open canon) 시대였다. 즉 신약정경이 최종 확정되기 전에 자료 형성기였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는 예언이 주요한 계시적인 말씀은사의 하나로 나타났다.
예언은 다음 두 가지 면에서 신약교회의 창설적인 말씀 은사이다. 첫째는 정경으로 인정된 책 즉 요한계시록이 바로 이 시기에 기록되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리고 둘째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신약교회 창설 시기에 특별히 정경 형성과 관계된 초대교회 당시 교회의 요구에 대한 응답이 바로 예언이었다는 면에서 그렇다.
초대교회 사도직 역시 이 경우에 해당 된다. 사도 바울을 비롯하여 몇몇 사도들이 영구적으로 교회가 믿고 순종해야 할 문서 계시로서의 신약성경이 이때 기록되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또한 이와 함께 다수의 예언자들과 사도들은 신약교회 창설 시기에만 한시적으로 교회에 필요한 계시를 받기도 했다. 이 점에 있어서는 다음 두 가지를 다시 언급할 필요가 있다.
첫째, 일부의 기록 된 계시는 그것이 비록 영감 된 권위 있는 것이었다고 할지라도 신약성경의 정경(正經)으로 채택 되지 않았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 영감(靈感)은 정경으로 확증함에 있어 필요조건이나 그렇다고 사도시대에 사도들이 영감을 받아 기록 한 것들이 모두 다 신약성경으로 채택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예를 들면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그 이전의 이미 고린도교회에 보낸 또 다른 편지와 그 속에 담긴 명령을 언급하고 있다.(고전 5:9) 또 골로새서와 함께 지금은 우리가 알 수 없는 라오디게아교회에 보낸 편지를 모든 교회가 돌려가며 회중 앞에서 읽도록 하라고 지시했다.(골 4:16, 빌 3:1 참고)
지금 존재하지 않지만 분명히 사도들이 영감을 받아 기록한 후 모든 교회들이 읽도록 한 서신들은 그것들 역시 사도들이 영감을 받아 기록한 것이라는 점에서 오늘날의 신약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가진 서신들이었다. 이것을 볼 때 최종적으로 확증 된 오늘날의 신약성경보다 사도시대에는 계시의 폭이 더 넓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고린도서에 언급된 예언자들을 통한 계시가 정경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권위가 없었다는 주장은 그릇된 주장이다.
여기서 전체적으로 볼 때 사도시대와 그 이후 시대의 상황이 달랐다는 점을 우리가 알 필요가 있다. 처음에는 구약성경에 더하여 사도들과 예언자들에 의해 말해지고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초대교회의 ‘새 정경’이었으나 사도시대가 지난 다음에는 초대교회 시기에만 한시적으로 주어진 예언의 말씀들은 빠지고 모든 교회가 영구히 믿고 지켜야 할 27권만이 오늘날과 같은 신약의 ‘정경’이 되었다.
둘째, 교회가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활동하던 그 창설시기에는 충분한 성경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특히 초대교회는 신앙생활을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이제 막 계시된 구원의 의의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충분한 설명한 계시가 없었다. 이 점에서 오늘날의 교회와 비교해 볼 만하다.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썼을 때 그의 독자들은 예수님의 사역과 제자훈련에 관한 공관복음의 풍부하고도 다각적인 관점을 알 수가 없었고, 사도행전의 교회사관도 알 수 없었으며, 로마서의 체계적인 복음 설명도 알 수 없었고, 옥중서신이나 히브리서나 요한계시록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완성된 말씀을 읽을 수 있는 형편에서 과연 얼마나 유리한 위치에 있는지 모른다. 우리는 이 점을 깨닫고 있는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하여간 정확한 의미의 예언이 교회의 창설(創設) 시기를 지난 그 이후시대에도 계속되었다고 보는 것은 정경(正經)이 완성되었다는 사실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 만일 오늘날도 사도시대와 동일한 예언이 계속되고 있다면 엄밀한 의미에서 ‘정경’은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사도적인 예언이 계속되고 있다면 정경을 단위별로 잡아서 한 단위가 완성되기는 했으나 그 후에 새로운 계시가 추가됨으로써 정경의 또 한 단위가 보완된 것으로 보아야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의 모든 계시가 하나님이 먼저 언약으로 주시고 그것을 이루어 가시는 언약의 특성에 어긋나는 것이다.
(4) 에베소서 2:20의 적용
에베소서 2:20의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에서 예언자들을 사도들과 긴밀하게 연결시켜 주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사도관에 융통성과 균형을 보일 필요가 있다.
사도들은 은사를 풍성하게 받은 자들 이었다. 이 말은 사도들이 로마서 12장, 고린도전서 12장, 에베소서 4장에 열거된 은사들 중 많은 은사 아마 모든 은사를 받아 행사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우리가 이러한 교회의 창설 시기를 ‘사도시대’라고 하는 것도 적절한 표현인 것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 예언자들은 사도들과 연결된 자들로서 그 들도 한두 은사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사도직은 승귀하신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주신 은사들의 핵심 내지 근원이었던 것 같다. 이렇게 보는 것이 우리가 은사론을 전체적으로 균형 있게 보는 것이다.
그리고 당시에도 더 뚜렷하고 확실하게 사람들 눈에 띄는 은사들(방언, 신유 등)이 ‘사도의 표’로 불렸던 것 같다.(고후 12:12) 이런 일은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교회에 나눠 주시는 성령의 은사들은 사도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을 귀로 듣고 증거 한 것을 성령께서 확증하시는 일의 일부분이었다고 볼 수 있다.(히 2:3,4) 그러나 사도직 외의 은사는 어느 은사든지 사도 아닌 자들도 행사했다.
성령의 은사들을 ‘사도적인 은사들’이라고 부르는데 어째서 사도 외의 다른 사람들에게 은사가 있을 수 있는가? 그 이유는 사도들 외의 다른 사람들 에게 있는 이 은사들은 교회에 사도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 사도직에 철저하게 의존하여 그 사도직에서 흘러 왔다는 점에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도직과 어떤 은사들을 형식적이거나 기계적으로 연결시켜서는 안 된다. 마치 다른 사람들이 사도의 구체적인 지시나 사도들의 안수로 은사를 받은 것처럼 볼 수는 없다는 말이다.
이것은 신약성경에 어긋나는 입장이다. 물론 사도행전에 있어서 표적 은사가 내릴 때마다 사도들이 거기에 직접 참여하였거나 감독한 것은 사실이다.(행 2장, 8:14-19, 10:44이하, 19:6) 그러나 그것은 승귀하신 그리스도께서 몸 전체에 유기적으로 은사를 나눠 주실 때에 그 몸 안에 있는 자들 중에 바로 사도들이 교회 창설 시기에 교회의 제일 핵심적인 인물들이었기에 그들이 참석한 것을 보고 은사를 주셨기 때문이다.
4. 사도적인 방언은 중지되었다
– The Cessation of Tongues –
이제 방언의 중지문제에 대해 결론을 내릴 시점에 왔다. 신약의 방언은 항상 예언과 직결되어 있고 일단 통역된 방언은 교회에 유익을 주는 하나님의 계시 기능을 발휘한다는 면에서 기능상 예언과 같다. 실제로 방언은 예언의 한 방식이다. 이 점에서 방언도 역시 교회 창설을 위한 은사였다. 따라서 사도적인 예언이 중지되었다면 사도시대와 같은 방언도 중지 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런 결론은 앞서 몇 항목으로 제시한 바 있는 내용들과 일맥상통한다.
사도시대 직후 몇 세기 동안 교회 역사상 방언이 있었다는 증거로서도 이 결론을 뒤집을 수는 없다. 4세기 이전의 증거로서 가령 마가복음 16:17과 이레니우스(Irenaeus)의 ‘이단논박’(Against Heresies V,vi,1)에 나오는 증거는 너무 동떨어지고 모호한 것이어서 결정적인 증거가 될 수 없다. 더욱이 예언의 경우도 그렇지만 방언의 경우도 방언의 기능을 사도시대에 중지된 기능과 그 이후에 계속되는 기능으로 나누어 생각할 만한 성경해석적인 근거가 없다. 사도적 예언에 대해 이미 살핀 대로 정경과 정경의 완성 문제와 방언과 방언의 계속 문제는 직결되어 있다.
고린도전서 14:20-25을 지금까지는 자세히 다루지 않고 지나왔는데 여기에서 방언이 중지되었다는 결론과 연결시켜 생각해 보기로 하겠다.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른 방언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저희가 오히려 듣지 아니하리라.’하였으니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않겠느냐?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무식한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계시다.’ 전파 하리라.”(고전 14:20-25)
이 본문은 많은 난제를 안고 있다. 오늘날까지 이 구절의 바울의 정확한 논지가 무엇인지에 대해 의견의 일치가 없다. 그중 하나는 21절에 나타난 구약인용(사 28:11,12 하반절)이다. 맛소라(Masoretic) 사본과 신약 저자들이 흔히 사용한 구약의 헬라어 역본인 70인경(Septuagint)이 이 부분에서 각기 다르다. 그런데 바울의 인용문은 맛소라 사본과도 다르고 70인경과도 다르다. 이것은 아마 바울이 이미 없어진 사본을 인용했거나 자기 자신의 해석을 곁들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보다 더 큰 난제는 바울이 그 인용문을 어떻게 이해했느냔 하는 것이다. 이사야 28:11은 예언자가 안식의 복음을 분명히 알아듣도록 전했으나 유대 백성들이 계속 듣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상한 외국 방언으로 말씀하시겠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문맥상 가장 합당하다. 그들이 듣지 아니했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 이사야 28:12 하반절에 다시 요약되어 제시되었다.
이 예언은 외국(앗수르와 바벨론) 침략자들 즉 유다의 반역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써(사 33:19, 렘 5:15, 창 11:9 참조) 신명기 28:49에 말씀하신대로 언약백성에 대한 저주로서 유대에 침입하여 점령한 자들의 언어로 성취된 것으로 보통 해석한다. 그러나 바울은 이사야 28:12 상반절의 안식의 메시지 자체가 외국 방언의 내용인 것으로 본 듯하다. 그 안식의 메시지를 듣지 않기 때문에 결국 이사야 28:13 하반절의 예언대로 심판과 멸망을 받을 것으로 본 듯하다.
또 하나의 난제는 고린도전서 14:23,24에 나오는 ‘무식한 자들’, ‘외인들’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하는 것이다. 헬라어 이디오테스(ἰδιώτης, 무식한자)를 어떻게 해석해야 정확하게 해석인가? 이 말이 불신자들을 말하는가? 아니면 신자가 아닌 어떤 사람들인가? 이런 난제들로 우리가 확실히 수 없는 것을 고집하여 분명한 것까지 흐리게 하는 것보다 차라리 분명한 것들을 밝히는 것이 더 중요하다.
우선 전체문맥의 흐름에서 이 구절(고전 14:20-25)을 생각해야 한다. 바울은 공예배시 예언과 관계 된 방언의 위치를 계속 다루었다. 고린도전서 14:20에 이르기까지 통역되지 않은 방언은 회중이 이해하지 못하면 유익이 없기 때문에 공예배시 하면 안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공예배시 예언과 방언을 어떻게 사용할 것이냐 하는 지침을 제시하기(26절 이하) 전에 방언(과 예언) 불신자들 즉 교회 회중이 아닌 자들을 언급했다. 그는 모든 회중이 통역되지 않은 방언을 하는 상황과 모든 회중이 예언을 하는 상황을 대조시켰다. 또 이 구절은 고린도전서 14장 전체에 서 방언의 목적을 가장 명백히 해 주는 구절인 점도 주목해야 한다.
바울은 방언이 불신자들에게 표적(標的)이 된다고 했다.(고전 14:22 상반절) 여기서 바울이 고린도교인들의 오해가 어떻든지 간에 불신자들에 대한 표적으로서의 방언을 분명 부정적 의미로 말한 것이다. 즉 방언은 불신자들에 대한 표적이다. 이 점을 다음 세 가지 면에서 볼 수 있다.
(1) 바울은 방언의 성격(표적)을 밝히기 위해 이사야 28:11,12을 인용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방언)로 예언한다는 것은 분명히 유다의 배도와 불신앙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해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예언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 주는 것이다.
(2) 고린도전서 14:23-25에서 바울은 전도 수단으로서의 방언의 역할을 부인했다.
반면 예언은 불신자들로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여 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한다. 그러나 통역 없는 방언은 “너희들은 미쳤다.”고 하게 한다.
(3) 고린도전서 14:20의 경고를 흔히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사도 바울은 방언을 좀 더 신중하고 성숙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경고한다. 통역이 없는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은 불신자들을 고발하는 표적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불신앙 속에 버려두셨다는 것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 불신앙을 확인해 준다. 즉 통역되지 않는 방언은 복음의 명백한 메시지를 무시하고 거절한 자들로부터 하나님께서 얼굴을 돌려 멀리 하신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처럼 통역 없는 방언은 불신자들의 마음을 더 완악하게 하여 복음을 거절하게 만드는데(고전 14:23) 양심이 있는 신자라면 교인들의 집회에 찾아 나온 자들의 마음을 이렇게 완악하게 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고전 14:20) 그러므로 누구나 공예배시에 방언할 때는 반드시 질서 있게 하고 통역하라는 것이다.(고전 14:27)
방언은 또 이렇게 표적의 기능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계시 방식으로서의 특징도 있다. 즉 방언은 하나님의 말씀이면서도 동시에 불신앙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표시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바울의 구약성경 인용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방언과 이사야의 예언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바울은 이사야의 예언이 유다를 앗수르와 바벨론이 점령한 사건으로 성취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거울로 삼아 통역이 없이 하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씀인 방언은 완악한 불신앙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바울의 이사야서 인용은 단순히 역사적인 유추(類推)로만 인용한 것이 아니라 ‘이 백성’ 즉 하나님의 옛 언약백성 유대인들에 대한 진정한 예언으로 인용한 것이라고 결론내릴 수도 있다. 방언은 이 예언이 마침내 신약적인 것으로 성취되었다는 것이며 또한 불신자들에 대한 표적과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에 관한 것이라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 견해가 교묘히 꾸민 것이라며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 견해를 뒷받침하는 근거를 쉽게 무시할 수는 없다. 우리는 적어도 바울의 의중에 방언이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자들과도 관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한다. 이제 나는 또 다른 측면에서 방언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진술하고자 한다.
- 방언과 예수님의 비유는 둘 다 ‘비밀’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슷한 점이 있다.
예수님의 비유 역시 심판의 측면이 있다는 것이 심판의 표시인 방언과 가깝다. 심판의 표시로서 사복음 전체가 비유를 통한 예수님의 교훈을 기록하고 있다.(마 13:10-15, 막 4:10-12, 눅 8:9-10, 요 9:39 이하, 10:6,19,24) 즉 예수님의 비유는 베일에 싸인 것처럼 둘러서 말하는 표현 방법으로(요 10:24), 신앙으로 돌아서든지 아니면 불신앙으로 굳어지게 하든지 하는 심판의 도구이다.(요 9:39) 이처럼 공관복음은 예수님의 비유의 부정적인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막 4:11)
구약 이사야 6:9,10 말씀에 대한 신약의 성취로 나타난 이 같은 비유의 기능은 마태복음에 인용되었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마 13:14)
예수님의 비유들은 이미 현존하는(마 12:28, 13:16,17) ‘천국의 비밀’을 제자들에게 나타내 보이는(마 13:11) 비유들인데(마 13:18,19,24,31-33) 이 천국 비유들이 종말적임과 같이 그 비유로 인해 마음이 완악해지는 것도 종말적이다. 즉 예수님의 비유에 대한 거부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 최종적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이처럼 ‘구별기능’ 내지 ‘심판기능’이 예수님의 비유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물론 마음을 완악하게 하고 적대감정을 격화시키는 것이 비유 자체의 보편적인 목적은 아니다. 예수님의 비유 사용에만 적용되는 것을 성경의 다른 비유들이나 성경 밖의 비유들에 적용시키면 안 된다. 가령 오늘날 복음 사역자들이 일부 청중들이 ‘들어도 깨닫지 못하도록’ 비유를 사용함으로써 예수님을 모방하고자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 비유의 심판성은 그의 지상사역의 특징이다. 그것은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 지 아니한’(요 1:11) 구속의 역사적 맥락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는 구약역사로부터 신약역사로 바뀌는 전환기 즉 교회가 창설되는 그 전환기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비유는 이스라엘 안에서 신앙과 불신앙을 가려내는 일을 했다.
베일에 싸인 비유를 통해 더 굳어진 불신앙은 구체적으로 유대인의 불신앙이었고 언약적인 불신실이었다. 그렇다면 이와 비슷하게 방언으로 알아듣지 못하도록 표현된 천국 ‘비밀’ 현상(고전 14:2)도 교회 창설의 맥락에서 하나님의(새 언약의) 심판과 이스라엘을 버리심을 보여 주며(롬 11:15) 주로 유대인의 불신앙을 격화 내지 경직시키는 역할을 했다.
- 신약의 구약 인용의 특징은 글자만 맞추는 것이 아니라 문맥에 맞추는 것이다.
바울이 인용한 이사야 28:11,12 말씀은 이사야 28:16의 말씀과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문맥이다. 이상한 외국 방언으로 유다를 심판하시겠다는 예언은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이라.”는 예언과 직결된 예언이다. 신약성경에서는 이 구절이 교회를 집으로 비유하는 구절 속에 뚜렷이 나타나 있다. 즉 베드로전서 2:4,6에 인용되었고 에베소서 2:20 비유의 밑바닥에 깔려 있다.(고전 3:11 참조)
교회의 기초(基礎)인 그리스도는 이 예언의 성취(成就)이다. 그러나 그것이 로마서 9:33(10:11 참조)에 인용되기도 했다. 믿지 않는 이스라엘(롬 9:31,32)이 그리스도와 복음을 거스린 일에 적용되어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외국 방언으로 말씀하시겠다는 것을 포함하여 이사야가 예언한 유다에 대한 심판이 그리스도와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초대교회의 기초를 놓은 것으로 성취되었다.
하나님이 시온에 기초를 놓으시는 단회적 행동은 그것으로 인해 조장된 시온의 불신앙에 대한 최종심판의 시기이기도 했다. 하나님의 모퉁이돌이라는 말씀과 또 거기 걸려 넘어진다는 말씀이 시편 118:22,23과 이사야 8:14,15에도 함께 나온다. 신약에서 이 두 구절은 그리스도의 사역과 그 사역에 대한 주로 유대인의 불신앙적인 적대적 반발로 성취되었다.(마 21:42, 눅 2:34, 행 4:11, 롬 9:32, 벧전 2:4 참조)
우리가 이렇게 예언과 그 성취의 포괄적인 관점에서 볼 때 고린도전서 14:21,22의 바울의 요점은 초대교회의 방언이 새 언약의 개시와 교회 창설에 나타난 하나님의 심판의 표시라는 것이다. 방언은 이 같이 교회의 기초를 놓는 활동과 연관된 표시로서 주로 유대인의 불신앙과 그에 대한 종말심판을 유발하는 것이다. 방언은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시므온이 재확인한 바대로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다.”(눅 2:34)는 예언의 성취로 나타난 것이다.
만일 어떤 이들이 주장하는 대로 방금 고찰한 이사야 28장을 포함한 구약의 성경구절들이 초대교회가 유대주의와 대치하여 사용한 ‘언약집’(collection of testimonia)에 나오는 것이라면 우리가 내린 초대교회의 방언의 중지 결론이 한층 더 뒷받침 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앞서 지적한 사실들이 고린도전서 14:20-25의 바울의 의도 특히 구약인용의 의의를 바로 분석한 것이라면 그것은 초대교회의 방언이 사도들과 예언자들과 함께 교회에서 오늘날에는 철수된 일시적 은사였다는 결론에 대한 뒷받침도 된다.
그리스도가 오실 때부터 예루살렘의 멸망 때까지 계속된 언약사의 전환기에 나타났던 다른 현상들과 아울러 ‘방언’은 천국이 완악하고 불신앙적인 이스라엘로부터 그 열매 맺는 백성에게로 옮겨진 것을 보여 주는 하나의 표지였다.(마 21:42, 21:43에 인용된 시 118:22과 신 32:21 참조) 더욱이 표적으로서의 방언의 의의가 무엇이든 간에 ‘방언의 기능’이 방언하는 곳이면 어디서나 나타난 표적으로서의 본질적 특징 중 하나였다는 것이 바울의 분명한 교훈이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5. 고린도전서 13:8-13 해석
– 1 Corinthians 13:8-13 –
“8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9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8-13)
이 구절에서 특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는 10절 말씀은 ‘예언’과 ‘방언’이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교회에 계속된다는 교훈의 결론적인 근거로 자주 인용되고 있다. 이런 저런 주장을 다 내세워도 이 구절을 갖다 대면 예언과 방언이 폐지되었다는 견해가 흔들리는 것 같다. 물론 10절의 ‘완전한 것이 올 때’와 12절의 신자들이 ‘완전한 지식을 가지게 될 그 때’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를 가리킨다. ‘그때’가 신약정경이 완성된 때를 가리킨다는 학설은 성경 해석학적으로 성립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때’가 정경 완성의 때라는 학설은 ‘예언’과 ‘방언’이 교회사의 창설시기 및 정경 형성시기와 직결된 것이라는 올바른 통찰에 근거한 것이긴 하지만 그것은 바울의 관점 밖의 것을 본문 속에 집어넣어 읽어 바울의 구절을 곡해한 것이다. 그러나 이 구절이 ‘예언’과 ‘방언’이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계속되는 것을 가르친다는 결론도 역시 너무 경솔한 결론으로 현대 은사론의 관점에서 읽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바울이 목회서신에서 사도시대 이후 교회의 장래에 필요한 교훈을 했지만 본문에서 바울은 교회 창설 시기로서의 사도시대와 사도 이후 시대를 구분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리스도 재림 때까지의 기간 전체를 염두에 두었다. 그 기간에 무엇이 계속되고 무엇이 폐지되는가 하는 것에는 상관하지 않고 믿음과 소망과 특히 사랑이 계속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고전 13:8,13)
따라서 고린도전서 13장 전체는 신앙생활에 있어 ‘방언’과 ‘예언’이 언제까지 지속 되느냐 그런 문제가 아니라 사랑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사랑’은 특별히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언급한 여러 은사들과 구분되는 ‘더욱 큰 은사’이며 ‘가장 좋은 길’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고린도전서 13:1은 ‘사랑’과 ‘사랑 없는 은사의 사용’을 대조했다. 또 고린도전서 13:4-7에서는 사랑의 주요한 특질 몇 가지를 열거했다.
그리고 8절에서는 새로운 주제로 넘어가고 있는데 12절까지 ‘지식’을 핵심 주제로 다루었다. ‘사랑’과 기타 ‘은사들’을 이 지식의 관점에서 생각한 것이다. 또한 사랑과 기타 은사의 관계를 현재 신자의 지식과 그리스도 재림 때 신자의 지식을 대조하면서 다루었다.(8절 ‘지식도 폐하리라’, 9절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11절, 말과 생각과 추리에 있어서 어린아이와 성인의 대조, 12절 거울로 희미하게 보는 것과 직접 대면과의 대조, 신자가 부분적으로 아는 것과 온전히 아는 것의 대조)
현재의 지식은 단편적이고 희미하나(9,12절) 장래의 지식은 완전하고 명료하고 직접적이다.(12절) ‘부분적인 것’과 ‘완전한 것’의 대조(9,10,12절)는 양적인 것이 아니라 질적인 것이다. 현시대의 질서(‘지나가는 것’, 고전 7:31 참조)와 절대 완전한 미래 시대의 질서간의 관계가 ‘부분적인 것’과 ‘완전한 것’의 관계이다. 이런 구조 속에서 볼 때 ‘은사’는 분명히 신자의 현재의 일시적인 지식에 속한 것이다. 은사 자체가 그 대조의 한쪽 편이 아니라 더 큰 그림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
따라서 8절(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의 구체적인 초점은 신자의 현재의 지식의 일시성과 잠정적인 성격뿐 아니라 그와 관련하여 신자의 인식 방법의 일시성과 잠정적인 성격을 강조하는 데 있다. 다시 말해 ‘예언’과 ‘방언’은 신자의 현재의 지식과 관련된 ‘계시의 방도’인 것이다.(8절의 ‘지식’이 예언과 방언 다음의 제3의 추가 은사를 가리키든 그렇지 않든 간에) 바울의 의도를 그의 초점이 점점 좁혀지는 데서 볼 수도 있다. 즉 예언과 방언과 지식 (8절)으로부터 예언과 지식(9절)으로 또 거기서 지식(10-12절)으로 초점이 점점 좁혀진 것이다.
바울은 한쪽 편에는 사랑을 놓고 다른 한쪽 편에는 교회에서 일부 신자들이 발휘하는 계시 은사들로부터 모든 신자들의 현재의 지식(그 중에 계시가 근본)으로 옮겨가면서 다루었다. 바울이 ‘예언’과 ‘방언’을 계시의 방도로 말한 이유는 분명히 넓은 문맥에서 볼 때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상황을 다루었고 고린도전서 14장에서 특히 예언과 방언의 올바른 행사원리를 제시한데서 알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이 ‘예언’과 ‘방언’을 계시의 방도로 말한 것을 고린도전서 13:8에서 사랑과 타 은사들의 관계를 신자의 현재의 지식과 미래의 지식의 대조 면에서 넓게 다루었다는 점도 평가해야 한다.
고린도전서 13:8에서 바울은 어떤 은사의 폐지에 일차적인 강조점을 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재 지식의 일시성과 단편성에 일차적인 강조점을 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은사로서의 계시가 희미하게 보이는 현시대를 위한 거울인 점 즉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는 것이 올 때’에는 그것이 현재의 우리의 지식 전체와 함께 지나가 버릴 일시적인 보조 재료라는 점을 무시하기 쉽다.
그런데 계시의 성문화(成文化)가 끝났다면 즉 성경을 기록이 끝났다면(실제로는 끝났다. 계 22:18,19) 이 구절에 언급된 ‘예언’과 ‘방언’을 통한 계시의 방도가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교회에서 계속 기능을 발휘한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견해이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어떤 계시 방법이 끝나는 시기를 구체적으로 보여 주려는 의도는 없었다. 그가 주장한 것은 ‘완전한 것’이 오면 ‘일시적인 계시 방법’에 근거한 신자의 현재의 파편적인 지식이 끝난다는 점이다.
끝으로 지금까지 고찰해 온 내용과 고린도전서 13:13절의 결론“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의 관계를 간단히 다루고자 한다.
믿음과 소망이 그리스도 재림 후에도 항상 있을 것인가는 난제이다. 아마 바울이 말한 것은 믿음과 소망이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에도 어떤 방식으로 기능을 발휘한다는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바울이 그것을 말한 것은 아닐 것이다. 바울이 바로 앞 절까지 지식에 초점을 기울여 왔으니까 그의 요점은 ‘믿음, 소망, 사랑’이 신자의 현재의 지식 보다 앞서가는 것이라는 점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앞서 간다’는 말은 ‘믿음, 소망, 사랑’이 현재의 지식과 분리된 것이라거나 현재의 지식과는 달리 비이성적 원리에 의하여 움직이는 것이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현재의 지식(신령한 은사들과 함께)과는 다른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나타날 완전한 질서를 파악하고 미리 내다본다는 의미에서 인 것이다.
이렇게 ‘믿음, 소망, 사랑’이 종말적으로 현재 신자가 ‘보는 것’(sight)과 대조적으로 ‘앞서가는 것’이라는 것을 사도 바울은 다른 곳에서도 말하고 있다. ‘믿음’에 대해서는 고린도후서 5:7에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고 했고, ‘소망’에 대해서는 로마서 8:24,25에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라고 했고, ‘사랑’과 ‘믿음’에 대해서는 베드로전서 1:8에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 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한다.”고 하였다.
결론적으로 사도 바울은 신약성경에 언급 된 모든 은사들 보다도 ‘믿음, 소망, 사랑’이 ‘앞서 가는 것’이라는 논리적인 주장을 통해 모든 은사가 절대적이거나 영구한 것이 하나님의 구속역사의 섭리적 진행에 따라 어떤 은사는 종결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6. 은사의 중지문제 개관
– The Question of Cessation in General –
성령의 활동 중에 어떤 것이 교회의 창설시기에만 있었고 또 어떤 것이 그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는가?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결정할 수 있는가? 우선 우리는 거의 기계적으로 로마서 12장, 고린도전서 12장, 에베소서 4장의 은사목록 중에서 특수은사는 중지되었고 보통은사는 계속되고 있다든지 더 심하게는 초자연은사는 중지되었고 자연은사는 계속되고 있다는 식으로 구분하게 되는 데 그럴 수는 없다.
이런 구분은 성경의 유기성(有機性)을 무시하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2:12-27과 로마서 12:4은 특별히 열거된 은사들의 기능이 서로 관련되어 있음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은사들은 당시 교회의 실제 상황의 필수적인 부분인데 이 상황을 전체적으로 볼 때 어떤 점에서는 사도 이전과 이후의 상황과 다른 상황이었다.
신약 전체의 통일된 구조면에서 볼 때 목회서신은 아주 명백하게 사도 이후의 교회 상황에 필요한 구체적인 교훈을 주고 있으나 다른 바울 서신들에 나타난 상황은 그것과 다르다. 목회서신의 상황과 그 외의 바울의 주요 서신의 상황과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문제는 주로 목회서신의 상황을 보고 판단해야 한다. 목회서신에서는 교회생활과 목회질서를 다루고 있는데 거기에 나타난 목회지침은 오늘날 교회의 은사문제와 직분문제를 결정하는 기본지침이 된다.
말씀 은사가 계속된다는 면에 있어서 주요원리는 ‘성령께서 말씀과 함께 역사하신다.’는 원리이다. 성령은 사도들의 기초적 전통내지 교훈(살후 2:15, 3:6, 딤전 6:20, 딤후 1:12,14)과 함께 그리고 마침내 완성된 정경과 함께 깨닫게 하고 조명하는 방식으로 오늘날도 역사하시는 것이다.
7. 신유와 그 관련 은사들
– Healing and Related Gifts –
이제까지 필자는 ‘예언과 방언’ 그리고 ‘예언과 방언의 중지문제’를 다루었다. 오늘날 ‘예언과 방언’ 못지않게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신유’(神癒, 병 고침)와 또 그와 비슷한 사람들이 큰 관심을 갖는 그런 은사들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논증이 교회에서 신유 및 그 관련 은사들의 위치 문제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요컨대 신유와 그 관련 은사들은 ‘예언’과 ‘방언’과 같은 말씀 은사들과는 다른 각도에서 보아야 한다. 그 은사들은 교회에 대한 계시문제와 하나님의 말씀의 기원문제와 관계가 없으므로 말씀 은사와는 문제가 전혀 다르다. 아마도 고린도전서 12:9-10,29,30에 열거된 대로 또 사도행전의 기록에서 보는 대로 이 은사들(신유 등)은 특별히 일정한 개인에 의해 정규적으로 행사되었을 때는 교회 창설의 일부였던 것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 같다.
이 은사들은 앞서 지적한 대로 넓은 의미에서 ‘사도의 표지’에 속했기 때문에 교회생활에서 지나가버린 은사들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신유와 또 신유 은사를 받았다는 주장은 아무리 달리 평가한다 할지라도 예수님과 사도들의 신유기적에 나타났던 만큼의 크고도 놀라운 주권적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마 4:23,24, 눅 8:43,44, 요 11:43,44, 행 5:15,16, 19:11,12)
예수께서 이제 막 아버지께로 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약속하시기를 그들이 ‘더 큰 일들’을 하겠다고 하신(요 14:12) 이것을 신유(神癒) 등의 은사들을 행사할 것에 대한 약속이었다고 보는 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분별없이 뭐든 막 받아들이는 무분별한 자들이다. 이 약속은 복음으로 여러 민족을 범세계적으로 추수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인데 주님이 승천하시고 성령을 보내신 후에 성취된 것이다.(요 4:34-38 참조)
그러나 우리는 오늘날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과 성령의 능력으로 특히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병을 고친다는 사실은 인정하고 주장해야 한다.( 약 5:14,15) 우리가 지금까지 고찰한 내용을 근거해서 의학적으로 아무리 가망이 없다는 진단이 났다 할지라도 지금까지의 교회역사를 보면 신유(神癒)의 역사가 엄연한 현실로 있어 왔고 또 하나님의 백성이 오늘날도 그것을 기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 성경에는 그것을 부인하는 내용이 전혀 없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수 있다.(엡 3:20)
그러나 이 점을 강조하면서도 우리가 반드시 동시에 생각해야 할 점이 있다. 하나님이 현대의학으로는 불치로 판단된 병을 고치실 수 있고 또 정말 고치시는데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런 불치병을 전부 혹은 거의 다 고치시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믿음을 지나치게 비정상적으로 강조하는 것이다. 이 경우 병 고침 받고자 하는 사람의 믿음이 최종 결정의 요소가 된다. 병 고침을 받느냐 못 받느냐는 전적으로 그의 믿음에 달려 있다.
또한 기도만 하면 어떤 병이든 무조건 다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단순한 생각은 신자의 생활에서 중병이 하나님의 뜻과 관련하여 어떤 역할을 하는가 하는 점을 계산하지 못한 것이고 믿음의 참 성격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데서 나온 것이다. 고린도후서 12:7-9에 나타난 바울 자신의 경험을 보라. 그것이여기서 아주 주요한 교훈을 준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7-9)
신약해석에 있어 바울의 ‘육체의 가시’가 무엇인가는 난제 중 하나지만 하여간 어떤 종류의 질병이나 육체적 고통이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것은 만성적인 고통이었다. 육체에 날카로운 ‘가시’가 박혔다는 말과 그것이 ‘친다’는 강한 말을 보면 그 고통이 심했음을 알 수 있다. 이 고통을 가리켜 ‘사단의 사자(使者)’라 하여 사단이 질병과 고통의 근원임을 보여 주었다.(눅 13:16 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의 그것은 동시에 하나님이 보내신(또는 주신) 것 이었다. 바울은 이 고통에서 헤어 나오기 위해 주께 간절히 세 번 간구했다.
칼빈 등 많은 주석가들이 이 말은 바울이 계속 반복해서 기도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표현이라고 했다. 문자적으로 이해하더라도 ‘세 번만’이란 의미가 있거나 바울이 기도하다가 흔들렸다거나 뜨뜻미지근하게 기도했다는 의미는 없다. 여기서 예수께서도 세 번 기도하신 겟세마네의 기도가 생각난다.(마 26:44) ‘간구했다’는 동사와 함께 ‘세 번’이란 말은 간절히 계속 기도한 것을 가리킨다. 바울은 마음을 다하여 주님께 고쳐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나 주님은 바울의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았다.
그것은 바울이 의심이 있거나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본문을 보면 오히려 바울은 뜨거운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적극적인 측면에서 바울의 연약한 상태 속에 그리스도의 은혜가 충분하게 드러나고 그의 능력이 완전하게 드러나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고 바울이 교만하거나 자부심을 갖지 않도록 하시기 위한 것이었다.(갈 4:11) 사도 바울의 이러한 경험은 확실히 그가 사도로서 받은 독특한 계시들과 관계되어 있었다.(7절, 1절 이하 참조)
사도 바울의 이 ‘육체의 가시’의 기능이 모든 신자들의 생활에 나타나는 육체적인 고통의 귀감이 되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모든 질병이 고쳐지기를 원하신다.”는 등의 신유 은사에 대한 단순한 생각은 진정한 성경의 교훈을 피상적으로 왜곡한 것으로 이미 영육 간에 고통당하는 자들의 신앙을 망가뜨릴 수 있는 위험한 것이다. 그런 견해는 신앙의 혼란을 가져온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께서 육체의 고통을 포함한 고난의 때에 자기 백성들에게 주시는 위대한 축복을 잃게 한다. 그 축복은 바울이 발견한 것을 체험하는 축복이다. “내가 약할 그때에 강하니라.”(고후 12:10)
8.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
– Don’t turn away God’s Spirit –
위에서 결론을 내린 대로 ‘예언’과 ‘방언’은 교회 창설시기 즉 사도시대에 한시적(限時的)으로 주어진 계시(啓示) 은사(恩賜)들이다. 그러므로 사도시대의 예언과 방언은 사도들의 사역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으며 사도들이 사라짐과 함께 교회생활에서 영구적으로 중지되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이 결론이 잘못된 결론일 뿐 아니라 공격적인결론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성령께서 우리의 시대에 새롭고도 강하게 역사하신다는 뒤엎을 수 없는 증거가 있는데 위의 결론은 이런 증거에 대한 핑계할 수 없는 무지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볼 때 우리는 전 세계 수백만의 신자들이 겪고 있는 보배로운 경험을 발밑에 짓밟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렇게 많은 신자들이 잘못 된 그런 체험을 하는가? 오늘날 사도시대와 동일한 신약성경의 은사들을 받았다는 수많은 신자들의 주장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들 그리고 그것들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논쟁을 그냥 외면하거나 무시할 수는 없다. 그 질문들에 대해 확실하고도 성경적인 대답을 해야 한다. 이 질문들은 여기서 다루는 것의 분량보다 더 자세히 다루어져야 할 질문들이다. 그러나 필자는 다만 몇 가지 핵심 점들을 지적하면서 지금까지 제기 된 몇몇 오해들을 풀어주고자 한다.
(1) 소위 은사운동(Charismatic movement)이란 것은 대개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의 관심사와 체험을 대변하는 자들이다.
이 점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은사자들과 비(非) 은사자들의 차이점은 주로 신자들 간의 차이점 즉 한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 간의 차이점이다. 비(非) 은사자들은 소위 은사 경험이라는 것이 말과는 다르다는 것을 들어 “은사 체험(體驗)이란 다 사단이나 귀신들의 영향을 받아 생긴 것이다.”라고 하는데 이것은 통탄할 만한 일이다.
성령의 은사에 대한 이런 태도는 간혹 은사자들이 나타내는 제2축복의 우월의식보다 더 유감스러운 것이다. 그런 태도는 성경적이 아닐뿐 아니라 분열과 분쟁을 고조하여 신자 상호간의 타협이 불가능한 자리까지 몰고 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몸 전체의 연합과 평안이며 그 모든 지체들 은사자들과 비은사자들 모두의 건강과 화목인 것이다.(고전 12:26)
이 시점에서 바울이 먼저 할 말이 무엇이겠는가? 바울이 살아있다면 아마 이렇게 말할 것이 분명하다. “내가 성경의 진리를 말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모든 성경을 밝히 보는 안목이 있고 교리적 오류를 파악하고 지적하는 모든 능력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혹 다른 사람에게) 아무 유익이 없다.”
(2) 그러나 사랑의 관심이 성경을 무시하거나 제쳐놓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은사 자들과 비은사자들 간에 신자의 사랑과 관심이 반드시 있어야 하지만 그러나 동시에 이런 사랑의 관심이 성경을 무시하거나 제쳐놓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관심의 본질은 성경에만 의존하고 있다. 말씀에 의존하는 한 성령에 속한 사랑의 관심이 된다.
방언과 예언이 중지되었다는 견해에 대한 반론으로 흔히 “은사 중지론은 성령의 자유를 부인하는 것이며 성령을 우리의 제한된 신학상·안에 가두는 것으로 성령께서 원하시는 대로 은사를 나누어주신다는 성경의 교훈(고전 12:11)에 배치되는 것이다.”라는 주장을 한다. 이 반론은 언뜻 보면 그럴듯하나 깊이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
여기서 성령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신다는 성령의 주권과 능력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교회에 말씀을 계시하시는 형태 성령께서 자유스럽게 스스로 설정해 놓으신 구조 내지 질서가 문제다. 물론 성령은 ‘임의로 부는 바람’과 같다.(요 3:8) 성령의 활동은 인간이 헤아릴 수 없고 신비스럽다. 성령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서 그의 길은 우리의 길보다 높고 그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보다 높은 것이 마치 하늘이 땅보다 높음과 같다.(사 55:9)
그러나 성령 사역의 불가해성(不可解性)을 일방적으로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절대화하여 성령 자신에 의해 성경에 명백히 지적된 성령의 계시 활동의 범위를 무시하거나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 범위는 필자가 이미 고찰한대로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모든 요구 축복을 위해 적합하고 완전한 절기의 사도들을 통해 교회에 주신 계시의 범위인데 그 이상 덧붙일 수 없는 것이다.(계 22:18,19)
그리스도의 재림은 그 재림 징조와 함께 있을 것인데 일단 재림하시면 ‘재림하셨느냐 안 하셨느냐’의 문제를 놓고 교회 안에서 분쟁과 불확실성이 없을 것이라고 신약성경은 말한다. 그러니까 성경은 재림 사건까지 성경은 필요 충분하도록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이 이렇게 확실함에도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개인적 신앙 체험만 가지고 성령의 계시활동의 범위를 무시하거나 은근히 의심하는 일이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계시의 범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 당시의 주류 기독교였던 로마 가톨릭은 루터가 틀렸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루터가 틀린 것은 아니었던 것처럼 말이다. 여기서 루터를 꼬집어 내는 것은 막 갖다 붙이는 것이 아니다. 종교개혁의 진전을 보면 우리가 늘 명심할 주요한 교훈이 있는데 그것은 오늘날 은사운동(恩賜運動)으로 야기되는 문제에도 역시 해당되는 교훈이다.
루터와 칼빈(Jean Calvin, 1509-1564)의 방대한 저작은 전체적으로 볼 때 양면(兩面) 전쟁이었다. 한편으로 로마 가톨릭에 대항하며 다른 한편으로 종교개혁의 ‘좌익’(左翼)에 대항하는 것이었다. 루터는 그 좌익을 ‘열성분자들’(enthusiasts), ‘천상의 예언자들’(heavenly prophets)이라 했고, 칼빈은 그들을 ‘열광주의 자들’, ‘자유로운 영들’이라고 했다. 종교개혁에 대한 이 좌익 재세례파의 반발은 그 안에서도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오늘날의 은사운동과 같이 성령을 강조한 것이 그 특징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은 양면 공격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왜냐하면 로마 가톨릭과 재세례파가 서로 다른 입장이면서도 성경의 존엄성에 대해서는 공동의 위협을 가해 오고 있다는 것을 개혁자들이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로마 가톨릭은 제도화된 ‘교회의 전통’의 권위로 재세례파는 자생적인 ‘은사의 계시들’로 각기 성경의 유일 권위와 충족성을 위태롭게 하였고 그리하여 신자의 진정한 영적 자유를 위태롭게 하였던 것이다. 오늘날도 로마 가톨릭이 개신교와 달리 은사운동에 그토록 쉽사리 적응하는 것을 보아도 종교개혁 당시의 형편과 흡사함을 알 수 있다.
(3) 그렇다면 예언과 방언이 오늘날 교회에서 철수되었다는 결론의 참 된 의미는 무엇인가?
오늘날 ‘예언과 방언’이 교회에서 철수되었다는 결론은 성령을 거스르는 것도 아니고 성령의 자유를 소멸하는 것도 아니다. 도리어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시기 위해 주권적으로 선택하신 그 계시 방법을 중시함으로써 신자의 자유를 확보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의 은사운동은 그 독특한 강조점을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 은사운동은 적어도 해석학적으로 그런 강조점이 이미 그 은사운동 내에서 개발되었다는 점과 그런 강조점이 주요한 점에서 성경의 교훈에 배치되는 신학에 의해 뒷받침을 받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은사체험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복잡한문제다. 그러나 건설적인 해결에 도달하기 위해 내디뎌야 할 주요한 첫걸음은 교회의 모든 ‘진영’(陣營, sides)이 다 같이 성경이 성령세례를 중생 이후의 독특한 체험으로 보고 있지 않다는 점과 현재 은사 현상들이 신약성경의 예언과 방언은사는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는데 있는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은사운동의 항복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은사체험이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은사운동자들이 ‘성령세례’를 중생 이후의 체험으로 보는 것은 성령의 진정한 역사를 오해하는 것이다. 특별히 오늘날도 성령이 계속 신자 속에 활동하셔서 때로는 갑자기 혹은 극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게 하시고 확신과 기쁨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도록 하시는데 은사운동자들이 성령의 이런 결정적 체험내지 강렬한 체험을 오해한 데서 나온 것이다.
예언이라 하는 것은 실상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자발적으로 성경을 적용시키는 것이며 어느 특별한 상황이나 문제에 대한 성경교훈을 다소 갑작스레 파악하는 것이다. 모든 신자들은 이런 성령의 자발적 역사에 민감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은사주의 자들은 교회에서 성령세례를 중생 이후의 체험으로 본 나머지 모든 신자들이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고도 최종적인 구원을 얻었음에도 이런 구원을 무시하거나 심지어 부인하게 하는 경우가 흔히 생기며 동시에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얻은 그 신앙의 성격을 무시하거나 부인하는 경우가 생기는데 이것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또 은사운동자들이 예언을 받아 구체적인 지시와 예측을 하는데 그리하여 성경의 충족성을 무시하고 저해하는 일도 있다. 이것은 성경과는 거리가 먼 인간적인 주장일 뿐이다.
오늘날의 방언 현상과 신약성경의 은사가 다르다는 것을 여러 면에서 분명히 살펴볼 수 있다. 그중 몇 가지만 언급해 보면 다음과 같다.
- 오늘날의 방언은 보통 모든 신자들이 이상 가운데 받는 은사인 것으로 주장된다.
- 오늘날의 방언은 다 그런 것은 아니나 주로 개인의 경건을 위하여 사용된다.
- 방언이 불신자들에 대한 심판의 표시라는 점은 거의(물론 인식하는 자도 있겠지만)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 통역이 등한시되거나 엉터리로 이루어지고 있다.
오늘날의 방언은 분명히 사도행전 2장과 고린도전서 12장-14장에 묘사 된 성령의 은사는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 방언 현상에 뒤따르는 해방감과 하나님과의 강렬하고도 깊은 교제감과 아울러 이런 방언 현상을 지지할 만한 성경의 근거가 없다고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 은사운동이나 그 밖의 교계에서도 자발적 비지성적 자유스런 발성화가 사실 인간의 보편적인 능력이라는 점을 점점 더 인식하여 가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면 ‘신자의 자유스런 발성화’가 정당한 것인가? 이 질문이 필자의 판단으로는 오늘날 방언논쟁의 초점이다. 즉 예배의 영역 안에서와 성경에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법에 대한 교훈 안에서 이 질문이 해결되어야 한다. 여기서 개발해야 할 문제는 비지성적 발성화가 예배원리와 공존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이 글의 범위 밖의 것이다.
(4) 현대 은사운동의 적극적인 측면
많은 사람들이 은사운동의 적극적인 측면(이것은 사실이다)을 지적해 왔다. 성령을 하나의 교리로만이 아니라 현재 강력하게 존재하는 현실로 믿는다든가, 신학의 지성주의와 교회의 예배와 생활의 형식주의에 반발한다든가, 뜨겁게 기도하고 찬양을 한다든가, 신자들 간의 관계를 두텁게 하고 교회 안에서 더 친밀하게 교제한다든가 하는 등의 적극적인 측면이 은사운동에는 분명히 있다. 이런 점에서 은사운동을 하는 신자들이 교회 전체가 모든 신자에게 유익하고 모든 신자가 참여하는 예배와 교회생활을 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성령의 역사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은사자들과 비은사자들 간의 간격이 확대되는 것은 교회에 큰 손실을 가져올 것이다. 오늘날 교회의 시급한 과제는 말씀 선포와 행동으로 복음의 핵심이 완전한 자유를 주는 사죄에 있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피조물과 종말 생명이 실제로 나타나는 데 있으며, 속사람에 의해 신자가 전인적으로 실제적으로 새롭게 변화하는 것과 인간의 생활 전체가 새로운 방향으로 재조정되는 데 있음을 명백하게 보여 주는 것이다.
복음은 승귀하신 그리스도와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복음이다. 교회가 오순절 사건을 두고 이 점만은 꼭 명심해서 살펴야 한다. 이 점을 모르면 교회는 자체 확신을 잃고 주님을 바로 봉사할 수 없다. 이런 관점을 가질 때에 교회는 세상에 대한 선교사명도 능력 있게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교회는 오순절의 ‘첫 열매’의 능력으로서 앞으로 나타날 영광을 바라보며(롬 8:18-25), 의가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확신 속에서 기대하며(벧후 3:13) 활력 있게 살아가는 것이다.(*) 글쓴 이 / Richard B. Gaffin, Jr,.(a Calvinist theologian, Presbyterian minister, and was the Charles Krahe Professor of Biblical and Systematic Theology at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 in Philadelphia, Pennsylvania from 1999 to 2012.) * 이 글은 리차드 개핀(Richard B. Gaffin Jr,.) 저서 ‘성령 은사론’(Perspective on Pentecost), 권성수 역, 기독교문서선교회, 서울. 199년 pp. 109-149. 내용을 발췌 요약한 것입니다.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