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신학과 신앙

삶의 체계로서의 칼빈주의

요약, 갈빈주의 강연(1)

삶의 체계로서의 칼빈주의

– Summary, Abraham Kuyper’s Lectures on Calvinism – 

1. 삶의 체계로서의 칼빈주의

2. 칼빈주의와 종교  

  (1) 종교에 대한 교의적 대답  
(2) 교회의 본질과 목적
(3) 실제생활의 종교의 열매  

3. 칼빈주의와 정치

  (1) 국가에 나타나는 주권
(2) 사회 영역의 주권
(3) 종교문제에 대한 국가 간섭
(4) 교회에 대한 국가 주권

4. 칼빈주의와 학문

(1) 학문에 대한 사랑
(2) 구원 = 전체 우주의 회복
(3) 죄를 억제하는 일반 은총
(4) 학문의 본질적인 자유
(5) 두 학문체계의 갈등 대립
(6) 학문의 원리적 갈등 해결

5. 칼빈주의와 예술

6. 칼빈주의와 미래

  ‘삶의 체계’(life system)란 독일어 ‘Weltanschauung’을 영어로 번역한 것이다. 우리에게 세계관으로 더 잘 알려진 이 표현은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1837-1920, 사진)가 1898년 미국의 프린스턴신학교(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의 초청강사로 강연했던 ‘칼빈주의 강연’(Lectures on Calvinism)의 첫 번째 주제로 선택되었다.            

칼빈주의를 세상 한구석의 종교 사상이 아닌 ‘땅을 정복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으로 여겼던 카이퍼의 확신에 찬 강연에는 자신감이 넘쳐난다. 그는 신대륙의 젊은 신학도들에게 칼빈주의가 포괄적 삶의 체계를 소유하고 있음을 내세우는데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1. 칼빈주의 개념

칼빈주의 개념은 시대적으로 오해의 여지가 있었다. 이 말은 원래 로마 가톨릭이나 유대인들이 개신교도들을 통틀어서 비난할 때 사용했던 분파적 이름이었다. 또한 예정교리를 들어내 놓고 지지하는 자들에 대해 교의적 편협성을 꼬집는 표현이기도 했다.

카이퍼는 이것을 고백적 용법이라고 했는데 사람들은 도덕적 생활의 참된 진지성을 위태롭게 하는 자라는 뜻에서 ‘칼빈주의자’라고 불렀다고 한다. 만약 칼빈이 살아 있다면 가장 언짢게 여기고 비판했을 법한 경 우리는 ‘칼빈주의’라는 말을 칼빈주의와는 아주 거리가 먼 개신교 교단명칭으로 사용한 것이다. 이를테면 ‘칼빈주의 침례교’(스펄전), ‘칼빈주의 감리교’(휘트필드)이다.

이렇듯 ‘칼빈주의’라는 말이 분파주의, 신앙고백, 개신교 교단 이름 등으로 사용되기는 했지만 무엇보다도 이 ‘칼빈주의 개념’ 체계(體系)는 학문적인 이름으로 쓰인다. 역사적으로 칼빈주의(Calvinism)는 종교개혁이 루터파(Lutheran)나 재세례파(Anabaptism)나 소키누스파(Socinians)가 아닌 이들과는 차별적인 방향으로 움직인 경로를 일컫는다.      

철학적으로는 칼빈의 지도에 영향을 받아 인생의 몇몇 분야를 지배하게 된 체계이고, 정치적으로는 화란, 영국, 미국에서 입헌적 정치로 국민의 자유를 보장했던 정치적 운동이었다. 그리하여 카이퍼는 ‘전(全) 세계적으로 인생과 사유에 독립적 형태를 발전시킨 독립적인 전체 경향’으로서 즉 학문적 의미에서 칼빈주의를 규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직도 칼빈주의에 대한 편견(偏見)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수많은 기독교 종파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사상을 ‘삶의 체계’ 운운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살펴볼 때 칼빈주의의 범위는 종교개혁 정신을 꿰뚫는다. 프랑스의 ‘위그노’(Huguenots), 네덜란드의 ‘가난한 자’(beggars), 영국의 ‘청교도’(puritans), ‘장로교도’(presbyterian), 북미의 ‘필그림 파더즈’(Pilgrim Fathers) 등은 다 칼빈의 신학과 신앙을 이어받은 칼빈주의 산물이었다.

러시아와 동유럽의 교회들 역시 순수한 칼빈주의에서 이탈(離脫)하기는 했을지언정 그들 역시 칼빈주의 영향 아래서 태동(胎動)되었다. 뿐만 아니라 영국 국교회(성공회), 독립교회주의자, 감리교, 침례교 등도 시작은 모두가 칼빈주의적이었다. 오히려 이러한 분파적 경향은 칼빈주의의 자유로운 특성으로 이해될 수 있다.

같은 종교개혁의 뿌리에서 ‘칼빈주의’와 유일하게 비교될 수 있는 것은 ‘루터주의’라고 할 수 있는데 루터교는 엄밀히 말해서 로마 가톨릭의 굴레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그에 비해 칼빈주의는 로마 가톨릭이나 루터교보다 기독교 이념을 훨씬 성경적으로 순수하고 정확하게 구현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교(이방종교), 이슬람교, 로마 가톨릭교 등의 거대한 삶의 체계와 함께 칼빈주의를 나란히 놓을 수 있다.    

인간이 무엇을 위해 사는지 안다는 것은 ‘삶의 체계’에서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이교, 이슬람교, 로마 가톨릭교는 모두 이런 의미에서 삶의 체계로서 인정할 만한데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의 기독교가 본래의 의미에서 퇴색되면서 점점 목적과 방향을 잃고 있다는 점이다.

2. 칼빈주의 삶의 체계

그렇다면 무엇으로 칼빈주의가 기독교 이념을 대변하여 삶의 체계로서 인정받을 수 있단 말인가? 이제 이에 대한 대답을 아브라함 카이퍼가 1898년 미국의 프린스턴신학교 초청강연에서 외쳤던 ‘칼빈주의 강연’의 내용을 통해 찾고자 한다. 삶의 체계로서 충족되기 위해서는 인간생활의 세 가지 근본 관계에서 확실한 출발점이 있어야 한다. 그 세 가지는 다음과 같다.

  • 하나님과의 관계
  • 인간과의 관계
  • 세계와의 관계

(1) 삶의 체계 : 하나님과의 관계

먼저 이교(이방종교)는 피조물 안에서 하나님을 찾는다. 이와는 정반대로 이슬람교는 하나님을 피조물과 분리시킨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에 교회라는 중간 고리를 두어 삶의 체계를 창출했다.

그럼 칼빈주의는 어떠한가? 칼빈주의는 이교처럼 피조물 안에서 하나님을 구하지 않으며, 이슬람교처럼 하나님을 피조물과 분리시키지 않으며, 로마 가톨릭교회처럼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에 매개적(媒介的) 종교 단체를 두지 않는다.

“하나님은 피조물(被造物)과 비교할 수 없는 높은 위엄(威嚴) 가운데 계시지만 성령 하나님으로서 피조물과 직접 교제(交濟)를 맺으신다.” 이것이 칼빈주의의 예정(豫定, predestination) 고백의 핵심이며 진수(眞髓)이다. 예정은 인간과 인간을 구분하거나 개인적 교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영원부터 영원까지 우리의 내적 자아에게 살아계신 하나님과 직접적인 교제를 보장해 주기 위한 것이다. 그리하여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한 칼빈주의자들의 저항(抵抗)은 무엇보다도 아이러니하게도 영혼과 하나님 사이에 놓인 교회를 제거(除去)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개신교의 일반적 특징을 칼빈주의의 고유한 것으로 주장하는 것은 아닌지 반문할 수 있지만 이에 대해 칼빈주의와 비교되는 것은 루터교가 유일한데 이미 언급한 대로 루터교는 로마 가톨릭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카이퍼는 루터와 칼빈을 비교하면서, 하나님과의 직접적 교제라는 근본적 해석에 이른 것은 칼빈주의가 유일하다고 강변(强辯)한다.

루터 역시 하나님과의 직접적 교제를 위해 싸웠지만 주관적이며 인간학적인 측면에서 도전하였다. 여전히 그는 교회를 하나님과 신자 사이에 있는 대표적이며 권위적인 교사로 보았고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례관과 의식(儀式)에 의지하고 말았다. 하지만 칼빈의 하나님을 향한 접근은 보다 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주권’主權)이라는 일반적 우주론적 원리에 있었다. 따라서 칼빈은 바로 신자 안에서 교회를 보았으며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직접 이어지는 선(線)을 그었다. 또 다른 반문은 현대주의(現代主義, modernism)가 “하나님도 없고 주인도 없다!”는 외침이 프랑스혁명(French Revolution, 1789-1799)에서 생겨났는데 “어떻게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해석으로 삶의 체계를 추론해 낼 수 있는가?”하는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은 로마 가톨릭교회를 통해서만 신(神,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질 수 있었던 사람들이 그러한 교회의 잘못 된 권력을 전멸시키기 위해 선포한 것이었다. 따라서 프랑스 혁명은 사실상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이고 특수한 해석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는 오히려 모든 일반적인 삶의 체계를 지배하는 것이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해석임을 확증해 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코람 데오’(Coram Deo) 즉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面前) 살아야 한다.”는 것이 칼빈주의의 근본(根本) 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2) 삶의 체계 : 인간과의 관계

이에 따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규정된다. 이교는 하나님이 피조물 안에 거(居) 한다고 믿기 때문에 신적 우성월(優越性)이 인간 가운데 생겨나 인간들 사이의 차별적인 계급(階級)을 만든다. 인도와 이집트의 카스트(Caste) 제도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또 이슬람교에서는 여자는 남자의 노예가 되며, 카피르(불신자)는 회교도의 노예가 된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구별의 절대적 특성을 극복하고 상대적으로 만들어서 인간과 인간의 모든 관계를 위계적(位階的)으로 해석한다. 그 결과가 교회 내 성직자(聖職者)와 평신도(平信徒)의 구분이다. 이와는 정반대로 현대주의는 인간과 인간의 모든 차이를 부인하고 모든 구별을 공통의 수준에 놓으려고 한다.(오늘날에는 심지어는 성(性) 평등이라는 미명 아래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무너뜨리고 남녀의 구분까지도 부인한다. – 편집자) 

그러나 칼빈주의는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 앞에서 서로 동등(同等)한 자로 여기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권위(權威)와 재능(才能 또는 恩賜) 외에 사람 사이에는 어떠한 차별도 인정하지 않는다. 이 권위와 재능은 다른 사람을 섬기고 그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도록 주시는 것이다. 이러한 칼빈주의의 개념이 오늘날의 민주주의 발전과 평등 이념 등에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칼빈주의’와 ‘프랑스혁명’의 차이는 프랑스혁명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데 통일(統一)을 이룬 반면에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영광(榮光)을 향한 통일(統一) 된 열정으로 인해 그분 앞에 무릎을 꿇었다는 것이다.  

(3) 삶의 체계 : 세계와의 관계

삶의 체계를 해석하는 마지막 조건은 세계를 향한 우리의 태도이다. 이교는 때때로 하나님과 피조물을 동일하게 여김으로써 세계를 너무 높게 평가한다. 반면에 이슬람교는 세계를 너무 낮게 평가한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교회와 세계를 서로 대립(對立)의 관계로 보았다. 교회는 성화(聖化)되고 세계는 저주(咀呪) 아래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세계는 교회의 보호와 훈계를 받아야했다. 로마 가톨릭교회의 세계를 보는 이러한 이원론(二元論) 시각은  세계를 구원하겠다는 고상한 목적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교회를 부패시켰고 교회는 세상의 자유로운 발전을 가로막는 방해물이 되고 말았다.

칼빈주의는 이런 사상과 개념에 한마디로 개혁을 가져왔다. 사람뿐 아니라 세상 역시 하나님의 피조물로 존중돼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시는 특별은혜(特別恩惠, Special Grace)와 창조주로서 자신을 영화롭게 할 목적으로 베푸시는 보통은혜(普通恩惠, Common Grace)가 있다는 위대한 원리를 제시함으로써 세상생활을 교회의 지배(支配)에서 해방시켰다. 세상으로부터 피하는 수도원(修道院)의 도피가 아니라 세상 안에서 삶의 모든 지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의무가 강조된다. 그래서 청교도의 맑은 정신은 자연스럽게 세상의 모든 생활을 다시 정복하는 일로 이어졌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세상에서 하나님을 섬긴다. 또한 교회 안에서 세상의 유혹과 죄를 이기기 위한 힘이 결집되었다.

3. 세계를 덮는 칼빈주의 체계

아브라함 카이퍼는 이 강의를 독특한 주장으로 마무리한다. 인류의 발전과 혼혈을 연관을 지어 역설하는데 고대 문명의 발상지였던 바벨론, 이집트, 그리스, 이슬람 세계에서 있었던 다양한 민족의 혼혈을 말한다. 또한 로마 제국으로 세계의 지도력이 넘어갔을 때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프랑스에서 일어난 민족의 혼합을 말한다.  

더 나아가 칼빈주의가 융성했던 스위스,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등 여러 민족이 결합했고 그에 따라 생활수준이 높아졌음을 말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자유의 땅 미국에 서서 칼빈주의와 인종의 교류를 연결시키고 있다. 역사적 국가들이 자신의 구성원을 재 연합하는 과정을 보면서 아마도 카이퍼는 인류의 발전상을 보고 있는 듯하다. 역사적으로 혼혈이 인류의 발전을 촉발시켰음을 상기하면서 또다시 칼빈주의의 영향으로 세워진 미국이라는 나라에 세계 모든 민족이 모이고 있음을 지켜보고 있다. 카이퍼는 단순히 문명의 발전을 가늠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카이퍼의 이 강연은 1898년에 있었다. 그의 강의 중에 이런 부분이 있다.

“이 물결은 그리스에서 로마 제국으로 옮겨갔다. 로마의 나라들에서 유럽의 북부로 계속 나아갔고 네덜란드와 영국에 마침내 여러분의 대륙에 도달했다. 현재 이 흐름은 정지 상태이다. 중국과 일본을 통하는 서쪽 길이 막혀 있다. (중략) 그러나 이러한 미래의 비밀은 여전히 신비 속에 가려 있지만 동쪽에서 서쪽으로 향하는 이 세계적 물결의 경로를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카이퍼는 칼빈주의 하나님의 진리가 미국을 통해 한국에도 당도할 것을 내다보았던 것일까? 아무튼 오늘날 칼빈주의 삶의 체계가 온 세상을 뒤덮고 있음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사실이다.(*) 요약 / 편집 : 나쥬니, 출처 http://www.nazuni.pe.kr/faith/books/calvinism/lifesystem.php

아브라함 카이퍼는 누구인가?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1837-1920) 만큼 19세기 개혁신학의 장을 발전시키고 영향을 미친 인물은 없다. 그는 조국 화란에서 삶의 전 영역에 위대한 흔적을 남겼을 뿐 아니라 전 세계 개혁주의교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카이퍼는 생존 시나 죽은 후나 찬사와 비평을 동시에 받는 사람이다. 그는 너무나 폭 넓게 일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평가는 단지 신학자로만 볼 것이 아니라 칼빈주의적인 삶을 실현하기 위한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일한 사역을 동시적으로 평가 할 때만 가능하다.

물론 아브라함 카이퍼 역시 그 시대사상에는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사상 속에는 19세기적 낭만주의와 이상주의적 사상을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19세기 자유주의 사상과 신학에 항거해서 삶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주권’과 ‘그리스도의 왕권’(Pro Rege)을 위한 칼빈주의적인 삶의 업적은 실로 위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카이퍼가 모든 개혁교회에 절대적 영향을 주었음을 아무도 부인 할 수 없다.

카이퍼는 너무나 다재다능한 인물이었기에 그를 반대한 사람들마저도 ‘열 개의 머리와 백 개의 손을 가진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1920년 아브라함 카이퍼 박사가 서거했을 때 전 세계 120여개 신문들은 그의 타계를 애도하면서 ‘제 2의 칼빈이 잠들었다.’고 논평했으며, 그가 일생동안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왕권을 위해서(Pro Rege) 일했던 위대한 신학자요, 교회 개혁자요, 정당의 총재, 국회의원, 수상 그리고 대 학자요, 교육가였고 한평생 필봉을 휘두르던 기독교 언론인이었다고 격찬하였다. 그는 칼빈의 입장을 그대로 따르면서도 일반은총을 강조하였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1837년 10월 29일 화란의 마슬루이스에서 화란 개신교회의 Dis Kuyper 카이퍼 목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8세에 라이덴 대학에 입학하여 더 브리스 교수에게서 성경 원어와 문학을 공부했고 신학부에서 스콜턴 교수로부터 조직신학을 배웠으며 약관 25세의 나이로 ‘요한 칼빈과 요한 라스코의 교회론 비교연구’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26세에 결혼했고 첫 목회지인 베이스드 교회로 부임해 청년목사로 일할 때 그는 여전히 자유주의신학과 신앙의 신봉자가 되어서 목회를 했다. 그런 던 중 그 교회의 진실한 신앙의 부인이었던 발투스의 충고로 자유주의 현대신학에 회의를 품고 칼빈주의 신학과 신앙으로 돌아서게 된다. 카이퍼는 한 여성도의 ‘하나님 주권’이라는 성경적인 신앙고백을 듣고 꼬꾸라지고 말았다. 그는 베이스드교회를 떠나는 마지막 설교에서 “그리스도에게 온전히 헌신하지 못한 채로 목사가 되었고 베이스드교회에 부임한 것을 하나님께 회개하며 용서를 빈다.”고 말했다. 이제는 그는 개혁주의 신앙에 불타는 목사가 되었던 것이다.

이즈음 카이퍼는 사상적인 스승이며 칼빈주의적 정치운동에 동기를 부여했던 흐룬 봔 프린스터를 만나게 된다. 카이퍼는 우트레흐트 대 교회의 목사로 청빙 받고 이전 목회자와 다른 개혁주의자로서 새로운 발돋움을 한다. 흐룬 봔 프린스터의 문하생이 된 카이퍼는 칼빈주의적인 세계관과 삶의 모든 영역에서의 기독교인의 활동을 강하게 주장한 걸작인 ‘불신앙과 혁명’이란 책을 읽고 확신하게 된다.

1864년부터 카이퍼는 19세기의 위대한 칼빈주의 부흥운동의 충격을 주었던 노 정객 흐룬 봔 프린스터를 만남으로서 카이퍼의 생애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흐룬 봔 프린스터는 카이퍼에게 그리스도인의 증거는 교회, 국가, 학문 그 밖의 삶의 모든 분야에서 모든 가능한 형태로 세속적 인본주의에 대항하여 나타나야 한다고 확신시켜주었다. 흐룬 봔 프린스터는 생애의 마지막이 가까워오자 교회와 국가에서 개혁주의 신앙의 정통성을 지키기 위한 영적 지도자로서 아브라함 카이퍼를 지명하게 된 것이다.

그 후 카이퍼는 A.R.P.당의 총재가 된다. 이 정당은 흐룬 봔 프린스터가 창설한 것으로 불란서혁명이 하나님 없는 무신론 바탕에서 이루어졌음을 지적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높이는 정당정책을 폈다. 그러나 본래 A.R.P.당은 대중들의 지지를 크게 받지는 못했으나 아브라함 카이퍼가 총재를 맡은 후에는 면모를 일신하여 중산층에 인기 있는 정당이 되었고 대중들에게 깊이 있게 파고드는 정당으로 활성화 되었다.

또한 아브라함 카이퍼의 생애는 기독교 언론인의 생애이다. 그는 1870년 A.R.P.당 소속의 일간지로 스텐다드지를 창간하여 주필로 취임하였고 곧 이어서 기독교 주간지인 더 헤타우트지의 편집인이 되어서 약 50년간 필봉을 휘둘렀다. 그의 많은 저서들 가운데 설교집, 명상록, 수필집, 시집, 논문 등이 일간지와 주간지에 기고했던 글을 모은 것이다. 평소 카이퍼의 지론은 하나님의 주권은 삶의 어떤 영역에서든지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언론도 예의는 아니었다.

카이퍼의 사역은 거기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국공립대학의 무신론적이며 반기독교적 성향에 반대하여 성경적인 기독교 사립대학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1880년에 뿌라야 대학을 설립하고 그 유명한 ‘영역주권’(領域主權, Sphere sovereignty)을 제창(提唱)했다. 물론 이 사상은 그의 독창적인 사상은 아니지만 사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던 흐룬 봔 프린스터로부터 배워서 발전시키고 구체적으로 적용한 것이다.    

‘영역주권’이란 한 마디로 우주의 모든 주권은 하나님의 소유이며 하나님이 그 주권을 땅에 행사 하실 때는 한 사람 또는 한 기관에 독자적으로 행사 할 수 없고 삶의 여러 영역들에 분산되어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말하면 인간의 삶의 모든 영역에는 어떤 영역에서든지 하나님이 거기에 주권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왕권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영역주권 사상은 비판적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나 삶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사상은 칼빈주의 사상의 핵심적인 내용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카이퍼의 생각은 복음이 인간의 전 생애를 변화시켜야 한다고 믿었다. 개인적으로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의 삶을 사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러한 신앙의 삶이 성도의 구체적인 삶 가운데 명백히  나타나야만 한다고 믿었다.

아브라함 카이퍼의 영향은 그가 항상 즐겨 사용한 ‘Pro Rege’(왕을 위하여)라는 말로 잘 표현되었다. 이 ‘Pro Rege’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적인 나아가 우주적 통치를 드높이자는 것이다. 이 주제는 환란 중에 있는 모든 나라와 모든 방언이 그의 왕권에 순종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카이퍼는 국회의원이 되었고 수상이 되었으며 교수와 총장으로서 언론인으로서 기장으로서 언론인으로서 기독교 사회사업가로서 지칠 줄 모르고 일했다. 그의 삶의 폭이 너무나 넓었기에 거의 손대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러므로 카이퍼를 단순히 조직신학자로서만 비판하거나 저울질하는 것은 카이퍼의 일부분에 대한 평가일 뿐이다.

카이퍼 박사는 교육과 과학 분야에서도 괄목할 만한 공헌을 했다. 모든 종류의 혼합주의 원칙과 싸웠으며 대조(對照, Antithesis) 원칙을 세웠다. 즉 모든 삶의 체계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중생한 사람들에 의해서 세워지는 체계가 있다고 보았고 다른 하나는 불신자의 세계다. 카이퍼는 중생한 기독교인들 마음에서 출발하는 칼빈주의적 체계를 세우려고 노력했다. 기독교인의 삶의 전 영역을 포함하는 사상체계 즉 세계관으로서 칼빈주의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이것이 1898년 미국 프린스톤 대학에서 강의한 ‘칼빈주의’(Lectures on Calvinism)란 제목이었다.  

카이퍼는 신학과 과학 뿐 아니라 기독교인들의 매일 매일의 삶도 하나님 중심으로 개혁되기를 원했다. 기독교인은 삶 전체를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할 것을 주장했으며 “이 세상에는 예수님께서 이것이 내 땅이 아니라고 할 땅은 한 치도 없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었다. 카이퍼는 불을 튀기는 설교자로서, 교회의 개혁자로서, 신학자로서, 정치가로서, 교육가로서, 언론인으로 지칠 줄 모르는 정열을 가지고 일생을 ‘그리스도의 왕권’(Pro Rege)을 위해 일한 위대한 칼빈주의자였다.

그는 평생에 2백 23권의 책을 저술한 다작가로서 어느 분야에 손대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러나 앞서도 말한 대로 그에게도 약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신학 방법에 있어서는 스콜라적인 요소와 19세기의 이상주의와 낭만주의 사상의 잔재가 엿보이기도 한다. 누구이던 허물이 없으리오마는 그의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을 위한 웅장한 삶은 여전히 칼빈주의의 찬란한 별이었다고 주저 없이 말 할 수 있다. 신앙의 이원론적 삶의 체계로 고민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카이퍼의 칼빈주의적인 삶은 새로운 이정표를 주리라고 본다.(*) 출처 / 기독신보, 1988,10,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