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게 읽는 한국교회사(37) 한국교회의 해외선교(1)

1. 해외선교에 눈을 뜬 한국교회
근대 선교운동은 18세기 말에야 시작되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해외선교에 관심을 가진 이들이 없지 않았지만 영국의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 1761-1834)가 1793년 침례교선교회(BMS)를 조직하고 동료 두 사람과 함께 인도로 떠난 일이 근대선교의 기원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선교사들의 사역의 결과로 19세기 이후 기독교는 유럽 중심에서 비(非) 유럽 세계로 확산되어 세계적인 종교로 자리 잡게 되었고 19세기 후반에는 한국에까지 기독교가 전파된 것이다.

1907년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 7인의 한국인 최초 목사 중 한 사람인 이기풍 목사는 제주 선교사로 파송되어 성내교회 등 12개 교회를 개척 제주복음화의 초석을 닦았다. 그 후 광주, 순천, 고흥, 벌교에서 목회하다가 1937년 10월 70세의 고령으로 우학리교회에 파송됐다. 그리고 일제(日帝)의 신사참배 반대에 앞장섰다. 1940년 11월 15일 이기풍 목사는 일본 순사의 강요에 못 이겨 관사 뒤편 신사당(神祠堂)으로 끌려가는 교우들과 주민들을 가로 막아섰다. “여러분 신사에 절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절대로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겨서는 안 됩니다.” 그러자 일본 순사는 총개머리로 이기풍 목사를 가격하고 넘어지자 마구 짓밟았다. 그날로 이기풍 목사는 여수경찰서에 수감 되었고 1942년 4월 모진 고문과 병보석으로 출옥했으나 1942년 6월 20일 소천 했다. 70이 넘어 우학리교회에 부임하여 신사참배 반대하다 순교한 이기풍 목사는 기독교계의 큰 별이었다.
한국교회는 역사가 오랜 서구교회에 비한다면 ‘신생교회’(新生敎會)에 불과했다. 네덜란드의 교회사가인 캄파이어스(J. Kamphuis)는 모든 지역의 교회는 사도와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진 오직 하나의 교회라는 관점에서 ‘신생교회’라는 개념 자체를 부정하지만 한국에 거주 선교사가 입국하고 한국에서의 교회가 조직된 것은 19세기 말이었다는 점에서 ‘신생교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교회는 역사가 오랜 서구의 신앙유산을 체득하기도 전에 해외선교에 관심을 보인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교회가 해외선교에 관심을 가진 때는 언제였을까? 65
한국교회가 해외선교에 처음으로 관심을 보인 것은 1901년이었다. 장로교 공의회의 기록에 의하면 장로교회는 6명의 선교사와 9명의 한국인들로 구성된 ‘선교위원회’를 구성하여 북방의 미전도 지역에 전도자를 파송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 당시만 해도 선교란 만주나 타 지역에 거주하는 내국인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그러다가 1904년에는 구체적으로 외국인과 해외선교에 대한 관심을 표명했다. 이때 주한 일본인들에 대한 선교에 관심을 표명하고 한국에서 사역하고 있는 일본인 목사를 지원한 것이 한국장로교회 최초의 외국인 상대 선교활동이었다.
2. 1908년 한국교회 최초 선교사 파송
한국교회가 구체적으로 선교사를 파송한 것은 1908년이었다. 장로교회는 1907년 9월 독노회의 조직과 함께 7명의 목사를 안수했는데 그중 한 사람인 이기풍(李基豊, 1865-1942) 목사를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에 따라 이기풍 목사는 1908년 1월 11일 동료 목사였던 길선주의 집례로 제주도 선교사로 공식 파송되었다. 이것이 한국교회 최초의 선교사 파송이었다. 이기풍 목사가 평양을 떠난 날은 1월 17일이었다. 일단 서울로 가서 1주일간 체류한 후 다시 기차로 목포로 갔다. 목포에서 제주도로 출발한 날은 2월 20일이었으나 풍랑으로 인해 추자도에서 표류하였고, 40여일이 지난 4월 초순에야 제주도에 도착했다. 이것이 당시의 교통 환경이었다.
당시 제주도는 인구 약 11만 명의 한적한 섬이었다. 이곳은 1899년에 있었던 신축교난(辛丑敎難, 濟州敎難) 이래로 기독교에 대한 반감과 적개심이 비등해 복음을 전하기에 아주 불리한 상황이었다. 특히 제주도 특유의 해안성(海岸性) 미신과 우상으로 이기풍의 전도활동은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그는 때로 굴욕을 당하고 매를 맞기도 했고 집단적인 구타를 당하기도 하고 심지어 생명의 위협도 당했지만 묵묵히 전도자의 길을 갔다. 그 결과 1908년 제주도에 최초의 교회가 설립되었는데 그것이 한때 성내교회라고도 불린 성안교회의 시작이었다.
이기풍 목사는 1916년 8월까지 9년간 제주도 선교사로 일하고 선교사직을 사임했다. 그해 8월 광주 북문안교회(현 양림교회) 초대목사로 청빙을 받아 사역하였고(1916∼1918), 광주기독병원 전도목사(1919), 순천읍교회(1920∼1924), 고흥읍교회(1925∼1927), 제주도 성내교회(1927∼1931), 벌교읍교회(1931∼1937), 여천군 남면의 우학리교회(1938∼1942)에서 목회자로 섬겼다. 1940년 9월에는 한국 최초의 원로목사로 추대된 바 있고, 그해 11월 15일에는 순천노회 소속 17명의 목사들과 함께 신사참배 거부로 광주형무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1942년 4월 초 병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건강 악화로 1942년 6월 20일 그의 마지막 목회 지였던 우학리교회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3. 두 번째 선교사 ‘한석진’

한국교회가 파송한 두 번째 선교사는 일본 도쿄(東京)로 파송된 한석진(韓錫晋, 1868-1939) 목사였다. 흔히 그가 이기풍 목사와 동시에 파송된 것으로 일컬어지고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그 역시 한국 장로교회의 첫 7인 목사 중 한 사람이었는데 그는 도쿄에 있는 유학생을 위해 오직 3개월 동안 일하고 귀국했던 단기 선교사였다. 1909년 9월 평양신학교에서 개최된 제3회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는 한석진 목사를 일본으로 보내 한 달간 유학생을 돌보고 귀국하도록 결의했다.
당시 일본은 한국인의 주된 유학지였고 한국 YMCA는 1906년 9월 김정식 부총무를 파견하여 일본유학생을 위한 YMCA를 조직한 바 있다. 흔히 1890년에 도일(渡日)한 유길준, 유정수, 윤치호 등은 최초의 일본 유학생으로 알려져 있는데 1883년에는 김옥균의 인솔로 30여명의 청년들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고 1894년 갑오경장 이후 그 수는 증가했다. 따라서 이들에 대한 목회적 지원이 필요하게 됐다. 이 일을 위해 독노회는 한석진을 도쿄유학생을 위한 전도목사로 파송하게 된 것이다. 한석진은 1909년 10월 도쿄로 가서 교회를 설립하는 등 3개월간의 활동을 마치고 귀국했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으나 그는 일본에 파송된 첫 선교사였다. 귀국한 그는 독노회의 위임에 따라 ‘예수교회보’를 창간하고 안동교회를 설립하는 등 목회자로 혹은 장로교 총회장(1917)으로 활동하고 1939년 8월 20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글쓴 이 / 이상규(고신대 역사신학 교수) 출처 / 국민일보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