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사

새롭게 읽는 한국교회사(43) 한국 기독교와 사회변화  

백정(白丁) 신분의 천지개벽(天地開闢) :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던 천민의 백정 출신 박성춘 장로(그의 아들은 한국인 최초의 서양 의사가 되었다.)가 관민공동회의의 개회 연설을 하고 있다.(1898년 10월)

4. 신분 타파  

(1) 태생부터 천대(賤待) 받던 백정들 주 안에서 천대(天待)

한국에 기독교가 소개된 후 나타난 가장 큰 변화는 신분계급(身分階級)의 타파(打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것이 전적으로 기독교에 의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기독교 정신과 가치가 남존여비(男尊女卑) 뿐 아니라 반상(班常, 양반상놈)의 구별을 철폐하는데도 큰 영향을 끼친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기독교의 인간관과 평등사상은 사회 체제의 변화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래서 오랜 세월동안 한국사회에 고통의 굴레로 남아있던 신분과 계층 간에 벽이 무너지고 양반과 상민 사이에 가로 놓여 있던 차별의 장벽이 제거되기 시작했다. 그 일례가 백정(白丁) 해방운동이었다.    백정은 이조 500년의 역사 속에서 사회적으로 가장 천대받던 신분이었다. 백정은 노비나 종보다도, 창녀보다도 더 낮은 바닥 신분이었기에 ‘백정배(白丁輩)’라고 천대하는 말로 불렸다.

  이들은 기와집에서 살  수 없었고 비단 옷을 입을 수 없었고 가죽신을 신을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이 보는 앞에서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울 수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언제나 존댓말을 해야 했고 다른 사람의 길을 앞질러 가는 일도 금지되었다. 이들은 상투를 틀 수 없었고 망건을 두르는 일도 금지되었다. 장가를 들 때 말 대신 소를 타야 했고 신부는 비녀를 꽂아 머리를 올리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상민들과는 떨어져 성 밖의 일정 지역이나 농촌의 외딴곳에 집단을 이루고 살아야 했다. 이처럼 백정의 신분은 비천한 것이었고 그 신분은 의복과 생활환경과 사회적 삶에서 구분되고 노출되어 있었다. 이들은 500년 동안 한국사회의 속죄양이었다.

이런 현실에서 기독교회는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고 동등하게 지음 받은 존재라는 점을 가르쳤다. 이런 가르침에 따른 그리스도인들의 결단이 초기 기독교 간행물에 보고 된 바 있다. 그 일례가 황해도 금천의 범래감리교회 이연철의 경우이다. 부유한 인물로서 노비를 두고 있던 그는 다섯 명의 노비문서를 불사르고 그 가족까지 속량하면서 “나가서 자유로이 살면서 주를 진실히 믿으라.”고 권면했다고 한다.  

성경이 가르치는 인간평등 사상을 실현하고자 했던 한 가지 사례가 경남 진주군 봉래정에 위치하고 있던 진주교회의 반상(班常, 양반상놈) 합동예배 사건이었다. 1905년 진주에 부임한 호주선교사 커를(Dr Hugh Currell)이 학교와 병원을 열고 전도한 결과 진주교회가 설립되었다. 이로써 평민들만이 아니라 진주성 외곽에 있던 백정 사이에서도 신자가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반상(班常) 구별 때문에 별도의 장소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러던 중 커를은 안식년을 맞게 되었다.

1909년 3월말 부임한 리알(Rev D. M. Lyall) 선교사는 신분상의 차이 때문에 별도의 예배를 드린다는 점은 기독교 정신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1909년 5월 둘째 주일 백정들을 진주교회당으로 오게 하여 동석예배를 시도했다. 이날 백정들이 진주교회당으로 들어오자 4백여 명의 교인 중 3백여 명이 동석예배를 거부하고 퇴장하며 강하게 반발하였다. 그날 저녁 2백여 명의 신자들은 교회당에 모여 선교사에게 항의하는 등 분쟁이 일어나 49일 동안 진통을 겪었다. 이 사건은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 평등하다는 기독교의 가르침이 한국사회에서 그리고 기독교공동체에서 조차도 수용되기 어려운 현실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합동예배 사건은 1923년 4월 25일 진주에서 창립된 형평운동(衡平運動)의 원인(遠因)이 되었다.  

이런 현실에서 기독교회는 한국사회의 신분차별 철폐를 위해 고투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무어(Samuel F. Moore, 1860-1906) 선교사였다. 한국이름 모삼율(毛三栗, 1846-1906)로 알려진 그는 46세이던 1892년 9월 내한하였다. 서울에 거주하면서 백정들의 사회적 신분을 알게 된 그는 현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근처인 곤당골에서 시작된 곤당골교회(후일 승동교회)를 중심으로 백정 해방운동을 전개하였다.

1894년 백정 박성춘 씨를 개종시킨 일에서부터 백정과 그 자녀를 위한 선교와 교육 사업을 시작하였다. 그 결과 1895년에는 6명의 백정이 복음을 받아드렸다고 한다. 그 중 한 사람인 박성춘 씨는 1895년에는 세례를 받았고 1911년 12월에는 한국 최초로 백정 출신의 장로가 되었다. 그의 아들 박서양(朴瑞陽)은 모삼율 선교사가 설립하여 운영하던 곤당골 교회 부속 예수학당에서 공부하게 되었고 후일 제중원에서 시작한 의학교육(후일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을 받고 1908년 한국인 최초의 서양 의사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후일 한국인으로 최초의 세브란스의전의 교수요원이 된다.

선교사들은 이런 일들을 통해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동등하게 지음 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시위하고자 했다. 무어와 그 동료들의 협조로 신분의 자유를 누리게 되자 다른 직종으로 이직하는 백정의 수가 급증하였다. 그래서 1900년 당시 40여만 명으로 추정되던 백정의 수는 1920년대에는 3만3천여 명으로 감소되었다.

사무엘 무어(Samuel F. Moore) 선교사와 그의 가족

무어선교사는 백정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한편 1894년 갑오경장 당시 동료선교사인 에비슨(O. R. Avison)과 함께 구한말 정부에 백정들의 신분제한 철폐와 일반인들과의 동등한 공민권 보장을 탄원하였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조정에서는 포고문을 발표하고 백정에 대한 복장 제한 철폐와 동등한 법적 권리를 선포하였다. 무어는 사재를 털어 포고문을 인쇄하여 전국에 배부하고 백정들 스스로 자기의 권리를 찾아가도록 계몽하기도 했다.

한국에서 14년간 신분철폐를 위해 일했던 무어는 1906년 12월 22일 세상을 떠나 양화진에 묻혔다. 묘비에는 모삼율(毛三栗)로 기재되어 있으나 본인은 소(牛)가 운다는 의미의 모(牟) 씨 성을 사용한 모삼열(牟三悅)을 더 즐겨했다고 한다. 사람들을 그를 인목(仁牧)이라고 불렀고 그의 집을 인의예지가(仁義禮智家)라고 불렀다. 마르타 헌틀리(M. Huntly)는 한국 기독교회의 백정 해방운동을 ‘세상을 뒤집어 놓은 사건’(turning the world upside down)이라고 평가했다.

(2) 천민 백정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박성춘

사무엘 무어(Samuel F. Moore, 1860-1906) 선교사가 백정(白丁)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예기치 못한 일이었다. 그가 설립한 곤당골 학당(學堂)에 다니던 학생 봉출이의 사연을 듣게 되면서 시작됐다. 소년 봉출이의 아버지가 많이 아프다는 것이었다. 소년의 아버지는 당시 갖바치로 불리며 가장 천민으로 취급받던 백정 박성춘이었다.  

조선시대 백정은 성인 남자의 징표였던 갓과 망건을 쓸 수 없었고 호적에 올릴 이름조차 없었다. 양반들에게 재산을 빼앗기거나 학대받기 일쑤였고 심지어 어린아이들에게도 업신여김을 당하는 등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는 최하의 천민 부류였다. 그런 백정의 아들로 태어난 봉출이의 아버지 박성춘은 어려서 부모마저 잃고 모르는 사람의 손에서 자랐다. 장성한 후 아내를 얻고 아들까지 낳았지만 술과 도박에 빠져 가족에게 고통만 안겨주는 존재로 비참한 삶을 살았다.

1894년 어느 날 이런 박성춘이 열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전염병 콜레라에 걸린 것이다. 박성춘의 아들 봉출은 자신이 다니 던 곤당골 학당을 세운 무어 선교사를 아버지에게 모셨다.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그를 무어 선교사는 위로했고 당시 고종황제의 전담 의사였던 에비슨 의료 선교사에게로 데려갔다. 박성춘은 그를 통해 치료받아 완쾌됐다. 그러나 다시 살아난 박성춘은 그 하늘같이 지체 높으신 황제의 의사가 왜 짐승 같은 나를 치료하기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충격을 받은 박성춘은 자발적으로 곤당골교회에 나가기 시작했고  1894년 무어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성춘(成春)이라는 이름도 갖게 됐다. 이 같은 백정 박성춘의 회심은 무어 선교사의 사역이 조선의 천민 백정들에게 집중 하게 하는 계기가 됐다. 무어 선교사는 또한 백정 전도와 백정 해방운동의 선구자였다. 갑오개혁(甲午改革, 1894.7.27.-1895.7.6.)이 진행되던 때에 그는 정부에 탄원서를 제출하여 개혁의 혜택이 백정들에게까지 미치게 하는 결정 적인 역할을 했다. 그 결과로 천민 백정들도 갓과 망건을 쓸 수 있게 되었고 호적에 이름을 올 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박성춘은 이 기쁨을 전국의 40만 여명의 백정들에게 전하기 위해 백정들이 밀집해 살고 있는 지방을 다니면서 전도하기 시작했다. 조선 백정의 전국조직인 백정조합의 책임자가 됐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백정들 계몽에 힘쓰는 동시에 자기가 얻은 큰 구원을 전하고 기독교서적을 나누어 주며 복음을 전했다. 그의 전도로 전국의 수많은 백정들 이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났다. 이 같은 영향력을 배경으로 박성춘은 1898년 10월 28일 서울 종로에서 독립협회가 주관하는 관민공동회에 민중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석하여 이렇게 연설을 했다.

“나는 대한의 가장 천한 사람이고 무지몰각합니다. 그러나 충군(忠君) 애국(愛國)의 뜻은 대강 알고 있습니다. 이에 이국편민(利國便民)의 길인즉 관민(官民)이 합심한 연후에야 가하다고 생각합니다. 저 차일(遮日)에 비유하건대 한 개의 장대로 받친 즉 역부족이나 많은 장대를 합한즉 그 힘이 공고합니다. 원컨대 관민이 합심하여 우리 황제의 성덕(聖德)에 보답하고 국운(國運)이 만만세 이어지게 합시다.” 그의 연설 전문은 한국사사료에 남아있다.  

한편 박성춘의 아들 봉출은 훗날 박서양(朴瑞陽, 1885-1940)이란 이름으로 곤당골교회 예수학당을 나온 뒤 1899년 제중원의학교 즉 오늘의 세브란스의대에 입학했다. 박서양은 1908년 제1회 졸업생이자 조선 최초의 서양 의사가 됐다. 그는 1917년 간도로 이주 해 병원을 세우고 의사로 활동하였고 민족 교육기관인 숭신학교를 세워 청년교육에 헌신했다. 또한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국민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대한국민회 산하 군사령부의 유일한 군의(軍醫)로 임명 됐다. 한 가정에 복음이 들어갈 때 이런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참고로 조선시대의 신분제도를 소개하면 크게 양천제도(良賤制度, 양인과 천민으로 나누는 제도, 양인만 벼슬이 가능했다.)와 반상제도(班常制度)로 나뉜다. 양천제도(良賤制度)는 법제적인 신분제도로써 양인(良人)에 양반, 중인, 상민이 속했고 천인(賤人)에 천민(賤民, 백정 등)이 속했다. 반상제도(班常制度)는 사회적인 신분제도로써 지배층에 양반, 중인이 속했고 피지배층에 상민, 천민이 속했다.(*) 글쓴 이 / 이상규(고신대 역사신학 교수) 출처 / 국민일보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