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게 읽는 한국교회사(54)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

신사참배 수용이냐 학교 폐쇄냐 기로에
한국에서 신사참배(神社參拜)가 공식적으로 강요된 것은 1935년부터이지만 그 이전에도 이와 비슷한 강요가 없지 않았다. 이미 1910년대부터 각급학교에 걸린 천황(天皇) 사진 앞에 절하게 하거나 천황이 있는 동쪽을 향해 허리 굽혀 절하게 하는 동방요배(東方遙拜)를 강요하는 일이 있었다. 이를 거부하는 자를 처벌한 경우도 있었다.
그 한 가지 예가 손양원(孫良源, 1902-1950)1) 목사로 그는 칠원공립보통학교(漆原公立普通學校) 재학(1914-1919) 중 동방요배를 거부하여 퇴학당한 일이 있었다. 이런 요구는 지역적으로 동일하지 않았다. 그러나 1930년대 일본에서의 군국주의자들이 득세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1932년 평양 서기산(瑞氣山)의 충혼탑(忠魂塔) 앞에서 만주사변(滿洲事變)의 전몰장병을 위한 위령제(慰靈祭)를 겸한 춘기황령제(春期皇靈祭)가 열렸을 때 기독교 학교의 참여를 강요한 일이 있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간헐적으로 참배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장로교총회는 사태의 심각성을 간파 유억겸(兪億兼, 1896-1947) 법조인, 차재명(車載明, 1881-1947) 목사, 마포삼열(馬布三悅, Samuel Austin Moffet, 1864-1939) 선교사를 교섭위원으로 당국과 교섭했다. 이들은 “기독교신자 자녀들의 신사(神社)에 참배는 기독교 교리에 위반되는 일이니 특별 양해가 있기 바란다.”는 청원서를 제출하려 했으나 압력에 의해 무산되었다. 그래서 교회가 처음부터 조직적으로 대항하지 못했다.
신사참배를 공식적으로 강요하기 시작한 것은 1935년 11월 평양에서부터였다. 평안남도 도지사 야스다케 타다오(安武直夫)는 11월 14일 공립, 사립학교 교장회의를 소집하고 참석자 전원에게 평양 신사(神社)에 참배할 것을 요구했다. 동경제국대학 법과대학 출신인 야스다케는 대만총독부 문교국장을 역임하고 1935년 4월 평안남도지사로 부임했다. 그는 신도주의(神道主義)를 신봉하는 군국주의적 인물이었다.
이때 숭실중학교(崇實中學校) 교장 윤산온(G.S. McCune), 숭의여중학교(崇義女中學校) 교장 선우리(V.L. Snook) 등은 이런 행사는 이전에 없던 일이며 자신들은 교장인 동시에 선교사이므로 기독교 교리에 반(反)하는 신사(神社)에 참배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 교장회의가 끝난 뒤 ‘신사참배는 국민교육상의요건이므로 앞으로 참배를 거부할 때에는 단호한 조치를 취한다.’는 공문이 각급 학교로 발송되었다. 그리고 60일간의 기한을 주고 신사참배 여부를 회답하라고 요구했다. 이렇게 신사참배 강요는 학교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사태가 급박하게 전개되자 허대전(J.C. Holdcroft), 소열도(T.S. Soltau), 노해리(H.A. Rhodes) 선교사들로 구성된 북장로교선교부 실행위원회는 1935년 12월 13일 밤 윤산온 선교사 집에 모여 오랜 토론 끝에 신사참배를 거부키로 결의했다. 결국 윤산온 교장은 교장직에서 해임돼 한국에서 추방되었다. 숭의여중 교장 선우리도 같은 길을 갔다. 이를 계기로 일본 총독부와 한국교회는 날카롭게 대립하기 시작했다.
기독교학교에 대한 신사참배 강요는 신사에 참배함으로써 학교를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학교 폐쇄를 감수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는 심각한 현실에 직면했다. 이것은 단순한 문제는 아니었다. 기독교 교육은 선교의 중요한 영역이었고, 교육의 포기는 한국의 미래와도 관련된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남지방에서 선교했던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는 신사참배 요구에 대해 단호하게 대처했다. 이들은 신사참배는 명백한 우상숭배(偶像崇拜)이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사안임을 확인하고 학교 폐쇄(閉鎖)를 결정했다.
당시 선교부 총무 풀톤(Fulton)은 일본 고베지역 선교사 아들로 일본에서 성장했으므로 신사(神社)와 신사제도(神社制度)를 정확하게 헤아리고 있었다. 남장로교 선교부가 운영하던 광주의 숭일중학과 수피아여중, 목포의 영흥중학, 정명여중, 순천의 매산학교, 전주의 신흥학교와 기전여학교, 군산의 영명학교 등은 폐교되었다.
경상남도의 호주장로교 선교부도 약간의 이견이 없지 않았으나 절대다수가 신사참배를 반대했다. 다른 선교부도 동일했지만 직접적으로 학교 교육에 종사하는 이들은 신사참배 문제에 있어서 비교적 관용적이었다. 호주 선교부의 맹호은(J.F.L. Macrae), 대마가례(M. Davies), 서오성(S.M. Scott) 등은 신사참배가 최선은 아니지만 차선책으로 신사참배를 수용하더라도 학교 교육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마라연(C.H. McLaren), 태매시(M.G. Tate), 서덕기(J. Stuckey) 등은 강경한 반대론자였다. 처음에는 원로 선교사였던 매견시(J.N. Mackenzie)의 ‘어떤 명예로운 방법을 강구하라’는 충고를 받아들여 신사에 가서 ‘묵도’(默禱) 는 하되 ‘참배’(參拜)는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1938년 6월 이후 강경하게 돌아서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학교 폐쇄를 선택했다.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는 이 문제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정리하지 못하고 오랫동안 고심했다. 학교 교육에 가담하는 이들이 신사참배를 수용하더라도 교육을 포기할 수 없다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원한경(H.H. Underwood)이였다. 일본 측 문헌을 보면 언더우드는 정도 이상으로 친일적 성향을 보이고 있었다. 미 북장로교는 논란 끝에 남장로교의 영향을 받아 결국에는 학교 폐쇄를 결정하게 된다. 서울의 경신학교, 정신학교, 대구의 계성학교, 신명학교, 평양의 숭실학교, 숭의학교, 재령의 명신학교, 선천의 신성중학교, 보성학교, 강계의 영실학교 등이 죽음을 선택했다.
반면 캐나다 선교부(캐나다연합교회)는 신사참배를 일제가 말하는 국민의례로 수용하여 학교 교육을 계속했다. 이런 연유에서 함경도지역에서는 조직적인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일어나지 않았다. 천주교는 일찌감치 일제에 굴복하여 신사참배를 수용했고 감리교도 동일했다. 그래서 이들 학교가 운영하는 선교학교는 폐쇄되지 않았다. 신학교육기관의 경우 장로교의 평양신학교는 1938년 1학기를 끝으로 자진 폐교를 선택했다. 이제 신사참배 강요는 학교에 이어 교회와 교회기관으로 확대되었다.(*) 글쓴 이 / 이상규 교수(고신대 역사신학) 출처 / 국민일보 < 다음에 계속 >
(1) 손양원(孫良源)의 본명은 손연준이었으나 여수 애양원(愛養院) 교역자로 부임한 이후 애양원의 양원을 따서 손양원(孫良源)으로 개명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