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사

새롭게 읽는 한국교회사(60) 일본의 패망과 해방

새롭게 읽는 한국교회사(60) 일본의 패망과 해방

일제의 박해에도 끝까지 신앙을 지킨 출옥성도들, 뒷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 조수옥 주남선 한상동 이인재 고흥봉 손명복 서정환 오윤선 김화준 방계성 이기선 최덕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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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일본의 식민 지배로부터의 해방은 한국교회에 있어서도 역사의 전환기였다. 해방은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전환이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 기독교회에도 중요한 변화의 시작이었다. 병자수호조약(丙子修好條約, 1876)을 조선침략의 발판으로 삼은 일본은 임오군란(壬午軍亂, 1882)을 통해 일본군의 조선 주둔권(駐屯權)을 획득했다.  

청일전쟁(淸日戰爭, 1894-5)과 러일전쟁(露日戰爭, 1904-5)을 통해 중국과 러시아 세력을 조선반도에서 몰아내고 조선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탈취했다. 을사조약(乙巳條約, 1905)을 강제로 체결한 후 조선군대를 해산시킨(1907년) 일본은 이준(李儁, 1859-1907) 열사(烈士)의 헤이그밀사사건(1907년 6월 29일)을 이유로 고종(高宗, 1852-1919)을 폐위(廢位)시켰다. 1910년 8월에는 ‘한일병합’(韓日倂合條約) 이란 이름으로 한국을 강점(强占)했다. 이때부터 일제(日帝)는 35년간 조선을 지배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의 패전(敗戰)함으로 조선(朝鮮)은 자유와 해방을 얻게 된 것이다.  

    한일병합조약(韓日倂合條約) 문서 또는 한국병합에관한조약(韓国併合に関する条約 칸코쿠 헤이고니 칸스루 조야쿠)은 1910년 8월 22일에 조인되어 8월 29일 발효된 대한제국과 일본제국 사이에 일방적인 위력에 의해 이루어진 합병조약(合倂條約)이다. 이는 한일합방조약(韓日合邦条約)이라고도 불린다. 대한제국의 내각총리대신이었던 이완용과 제3대 한국 통감인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형식적인 회의를 거쳐 조약을 통과시켰으며, 조약의 공포는 8월 29일에 이루어져 대한제국은 일본 제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한국에서는 국권피탈(國權被奪), 경술국치(庚戌國恥) 등으로 호칭한다. 이 한일병탄조약 시 전권 위임장 관례와는 다르게 순종의 이름(坧)이 서명에 들어갔다. 그러나 坧은 순종의 친필이 아니었다. 출처 / 한국 위키백과  

일본의 침략전쟁은 패망(敗亡)이 예견된 것이었다. 노일전쟁을 계기로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든 일본은 만주사변(滿洲事變, 1931년 9월 18일)을 일으켜 만주를 식민지로 삼고 1937년 중국과 전면전쟁으로 침략전쟁을 확대시켰다. 1941년 12월 8일 미국 하와이 진주만을 습격하고 미국 태평양 함대를 거의 전멸시켰다. 미국과 영국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일제(日帝)는 유럽에서의 독일 이탈리아에 이어 제2차 세계대전에 뛰어들었다.

전쟁 초기 일본은 싱가포르, 필리핀, 인도네시아, 버마(미얀마)까지 전선을 확대시키면서 승세를 떨쳤으나 곧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패전의 길로 접어들었다. 특히 미국이 사이판을 점령한(1944년 7월 7일) 후 전세는 급변하여 일본의 패색(敗色)이 짙어졌다.  

1944년 11월 사이판에 공군 비행장을 확보한 미군은 오키나와(1945년 6월)와 유황도(硫黃島)를 차례로 점령하면서 일본 본토 상륙을 준비했다. 그와 함께 원자폭탄 제조에 성공한(1945년 7월 16일) 미국은 이를 히로시마(廣島, 1945년 8월 6일)와 나가사키(長琦, 1945년 8월 9일)에 투하함으로 일본을 결정적인 파국으로 몰고 갔다. 버마전선에서도 일본은 거의 전멸 당했고 중국 전선에서도 1945년 봄부터 패배(敗北)하기 시작했다.

이 사진은 1945년 8월 16일 경성감옥(서대문형무소의 당시 명칭)에서 석방된 애국자들이 이들을 환영하는 인파 속에서 만세를 부르는 모습을 촬영한 것이다.

유럽지역 전쟁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추축국(樞軸國)의 하나였던 이탈리아가 연합군에 항복하자(1943년 6월) 연합국의 처칠 수상, 루즈벨트 대통령, 장제스 총통은 이집트 카이로에서 회담을 개최하고(1943년 11월 12일) 전쟁 후의 문제를 논의했다. 이 회담에서 “한국 인민의 노예 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자유국가로 독립케 할 것을 결정한다.”고 결의함으로서 ‘조선의 자유와 독립’을 보장했다.  

그 후 독일이 항복하자(1945년 5월 7일) 연합국은 다시 독일 포츠담에 모여(1945년 7월 17일) 일본에게 무조건 항복(降伏)을 요구하는 한편 카이로선언의 이행을 결의하고 “일본의 주권은 본주(本州) 북해도(北海道) 구주(九州) 사국(四國)과 연합군이 결정하는 작은 섬들에 국한 될 것이다.”라고 종전(終戰) 후 조선의 독립을 재확인했다.

패전(敗戰) 직전 일본은 무조건적인 항복을 면하고 유리한 조건으로 항복하기 위해 소련을 중재자로 삼고자 했다.(1945년 5월 14일) 이보다 앞서 소련의 얄타에서 모인 회담에서(1945년 2월 11일) 스탈린, 처칠, 루즈벨트는 대 일본, 대 독일 전략을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소련의 참전을 강력하게 요구하여 소련은 1945년 8월 9일 참전했다. 소련군은 만주와 북조선으로 진출했다. 1945년 5월 베를린이 미국, 영국, 프랑스군에 의해 포위되자 히틀러는 자살하고 8월 나치는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의 항복은 시간 문제였다. 원자폭탄의 투하로 일순간에 히로시마에서만 20만 명 이상이 죽임을 당하는 무서운 파괴력을 본 일본은 항복의 길을 피할 수 없었다. 마침내 일본은 포츠담선언을 수락하고(1945년 8월 10일) 항복을 결정 1945년 8월 15일 정오 히로히토 일왕이 직접 항복방송을 했다. 항복방송은 두 시간 후 재방송 되었다. 전쟁은 끝났고 9월 2일 미국 미주리호 함상에서 일본정부 대표는 미국, 영국, 중국, 소련 그 밖의 연합국에 대한 항복문서에 조인했다.

이보다 앞서 일본의 포츠담선언 수락이 결정되자 조선총독부는 패전 후에 있을지도 모를 조선인들의 보복을 막고자 정무총감(遠藤柳作)을 여운형((呂運亨, 1886-1947) 송진우(宋鎭禹, 1890-1945) 등에게 보내 막후 접촉을 시도했다. 해방 당시 한국에 거류하던 일본인은 민간인과 군인을 합쳐 80만 명에 달했다.(송건호는 71만2천 명으로 파악하고 있다.)

항복이 정식 발표되자 조선총독부는 약 10일간에 걸쳐 총독정치의 죄악사와 관련된 총독부 문서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이를 시작으로 전국의 공공기관, 헌병대, 경찰서, 검찰, 법원, 주재소, 도, 부(府), 군 등 3천여 각급기관의 기밀문서(機密文書)를 불태웠다. 조선통치에 관한 죄악문서는 조선에서만이 아니라 일본 본토에서도 대대적으로 소각했다. 조선에 있던 일부 문서는 일본으로 가져갔다. 조선의 광업자원에 관한 문서 등을 가져간 것은 후일의 조선 진출을 위한 의도였다.  

해방 당시 조선에는 서울 남산의 조선신궁(朝鮮神宮)과 부여신궁 등 1,141개의 신사(神社)가 있었는데 일제는 이를 다 불태웠다. 이른바 승신식(昇神式)이었다. 한국인들에 의해 모욕적(侮辱的)으로 태워지기보다는 영예로운 자결을 택한 것이다. 전국의 136개 신사는 조선인들에 의해 불태워졌다. 평양신사는 8월 15일 밤에 불태워졌다. 가장 늦게까지 남아 있던 부산의 용두산 신사는 11월 17일 불태워졌다.

해방이 되자 신사참배(神社參拜)를 거부하여 마지막까지 투옥되어 있던 20여명은 평양, 대구, 부산, 광주 형무소에서 출옥했다. 해방은 많은 변화를 가져왔고 한국과 한국교회는 새로운 과제에 직면했다.(*) 글쓴 이 / 이상규 교수(고신대 역사신학) 출처 / 국민일보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