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으로 성경을 설교하라!

‘성경적 설교’는 어떻게 하는 것인가?
시작하는 말
칼빈은 “교회는 곧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지는 곳이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오늘 이 땅의 수많은 교회에서 수없이 외쳐지는 설교가 과연 전부 다 성경적인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라고 볼 수 있는가?우리가 이렇게 반문해 볼 때 우리는 대답을 주저할 수밖에 없다. 우리를 주저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원인 중 하나는 그 많은 설교자들이 설교에 대한 분명한 신학적인 이해가 결여된 채 나름대로의 열정이나 습관적인 반복만을 거듭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설교의 기능을 하나님의 말씀 ‘선포’(Proclamation), ‘해석’(Interpretation), ‘적용’(Application)이라고 할 때 거기에는 ‘무엇을?’, ‘어떻게?’, ‘누구에게?’라는 질문이 따르게 된다. 즉 설교는 아무런 전제나 조건이 없이 즉흥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수단과 언어를 하나님의 말씀이 되게 하는 신학적인 내용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제 그 같은 ‘성경적 설교’의 신학적 원리를 규명하기 위해 ‘성경적 설교’의 개념을 정의해 보고 ‘성경적 설교’의 신학적 원리를 성경적 의미와 구원론의 의미 그리고 삶과 사회에 영향을 주어야 한다는 현실적인 의미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1. 성경에서 출발되는 ‘성경적 설교’
“설교는 반드시 ‘성경적 설교’이어야만 하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가장 좋은 설교는 ‘성경적 설교’이다. 그 이유는 우리가 성경을 떠나서는 설교를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설교는 성경 해석이요, 설교는 성경의 설명이며, 설교는 하나님 자신에 의하여 말씀되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설교는 반드시 ‘성경적 설교’이어야만 한다는 확신을 가진 죤 브라이트(J. Bright)는 이렇게 단언하고 있다. “성경적 설교를 대치할 만한 것은 없다. 성경적 설교는 권위를 수반하는 단 하나의 방법이다. 설교자의 권위는 교회가 항상 확증하는 것 같이 성경에 두고 있다.”
영국 신학자 포시트(Forsyth)는 그의 저서 ‘적극적 설교와 현대 이성’(Positive Preaching and the Modern mind)의 제1장에서 “설교자가 끊임없이 성경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될 큰 이유는 성경이 곧 최대의 설교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이 같이 성경을 떠나서는 설교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주지(主枝)의 사실이다. 그러므로 유능한 설교자는 성경의 조용한 내부에서부터 그의 설교를 시작한다.
바레트(C. K. Barrett) 역시 이 사실에 공감을 표시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설교자는 자신을 나타내거나 자기주장을 교인들에게 펴기 위해서 강단에 서는 것이 아니다. 가능한 한 인간적인 설명은 적게 하고 가능한 한 성경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진리를 드러내고 표현하기 위하여 강단에 서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실들에 비추어 본다면 어떤 형태의 설교이든지 설교의 본문이 선포하는 메시지로부터 이탈한다거나 너무 다른 내용에 관심을 둔 나머지 본문은 언급 조차하지 않는 설교는 결코 용납될 수 없다. 그 이유는 말씀의 주인이신 하나님에 대한 이탈 내지 무관심으로서 설교자가 흔히 범하기 쉬운 범죄(犯罪)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런 모순을 박근원도 그의 ‘오늘의 설교론’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 있다. “많은 경우에 있어 성경 본문은 설교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뒷받침해 주는 권유의 근거로서 선택한 성구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성경 본문은 읽되 설교 내용은 그것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한국교회의 설교 풍토의 맹점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런 비(非) 성경적 설교의 팽배라고 할 수 있다.” 한국교회의 비(非) 성경적 설교 풍토의 팽배를 지적한 박근원 교수의 지적에 필자는 전적으로 공감하면서 그 이유를 살펴보고자 한다.
설교는 물론 문화의 영향이나 재래의 습관과 그 시대의 윤리에 영향을 받는다. 특별히 한국 강단은 재래의 윤리주의, 유교적인 교훈, 샤머니즘과 기복주의 신앙 등으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이것은 잘못된 설교자들의 설교 내용 가운데 불교적인 요소와 유교적인 내용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 것과 설교에 있어 가장 중요한 성경은 설교의 도입을 위해서만 이용하고 대부분의 전개는 비(非) 성경적인 것들로 엮어져 있는데서 확실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한국 강단의 설교가 ‘성경적 설교’가 되지 못하는 더 큰 이유를 보면 설교자의 신학의 부재(不在)와 교육과 훈련 부족 그리고 간혹 과다한 설교사역을 들 수 있다. 그 배경에는 1980년 이전까지만 해도 한국 신학교에는 설교학을 전공한 설교학 교수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따라서 한국 신학교에서 설교가 무엇이고, 어떻게 하는 것이며, 무엇을 전하는 것인가에 대해 교육받을 기회가 거의 전무했던 것이다. 그 결과 ‘성경적 설교’의 이해 부족에서 ‘성경적 설교’를 성경 구절을 많이 인용하는 설교로 이해하거나, 성경 전체와 동떨어진 주어진 본문만을 강조하는 설교를 하는 것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한국 강단의 설교는 설교의 주어(主語)인 삼위일체(三位一體) 성삼위 하나님이 생략됨으로써 신언(神言)의 전달이 아니라 설교자인 인간(人間)의 생각과 지식의 선포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축원합니다, 기원합니다, 원합니다, 바랍니다, 생각합니다, 느낍니다, 봅니다.” 등의 설교의 종결어(終結語) 사용에서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한국 강단에 진열해 놓은 이 모든 종결어의 주어는 하나님 또는 예수 그리스도나 성령이 아닌 바로 설교자 자신이라는 것이다.
이 같은 설교에 대해 다니엘 바우만(J. Daniel Baumann)은 “그것은 ‘성경적 설교’이기보다 자기의 주장을 펴기에 편리한 본문들만 잘못된 방법으로 나열하는 주제설교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고 비판했고, 죤낙스(J. Knox)는 “성경 본문을 기초로 하고도 전혀 비(非) ‘성경적 설교’를 할 수도 있고 또 전혀 본문에 매달리지 않고도 매우 ‘성경적인 설교’를 할 수가 있다.”고 하여 바우만의 입장을 지지한다.
우리가 바우만의 이 같은 비판을 겸손히 받아들인다면 “한국 강단의 설교가 성경적이냐 비성경적이냐?”하는 것은 성구를 열거한 설교였다 하더라도 대부분 그 형태가 주제설교나 제목설교였고 ‘성경적 설교’가 못 된다는 것을 누구라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 강단의 기형적 설교가 궤도를 수정하여 나아가야 될 돌파구는 ‘성경적 설교’로 돌아가는 길 외에 없다고 본다.
그렇다면 “성경적 설교는 무엇이며, 어떻게 하는 것인가?” 성경적 설교란 처음부터 끝까지 그 주제와 내용이 성경과 성경적인 사상으로만 이루어진 설교로 ‘성경으로 시작하여, 성경에 의하여, 성경으로 끝나는 설교’이다. 이것은 다른 형태의 설교가 다루지 않았던 몇 가지 영역과 방법들을 설교의 세계로 끌어들이고 있다. 기존의 제목설교나 본문설교 그리고 강해설교가 대부분의 경우 설교의 본문이 몇 구절이거나 아주 짧았고 충분한 석의(釋義)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설교자 혼자 준비하여 성인들만을 대상으로 선포됨으로써 설교가 예화(例話) 진열장이 되거나 인간의 말이 되었던 단점들을 보완해 준다.
필자가 섬기는 교회에서 지난 9년간 행해져 온 성경적 설교는 그 준비 과정과 방법에 있어서 독특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필자가 주장하는 ‘성경적 설교’는 본 교회를 섬기는 모든 교역자가 함께 본문 선택, 제목 설정, 설교자료 준비, 설교 작성 등에 참여하여 일주일 동안 준비하며, 영아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서(교회 학교는 한 주 후)의 교인들에게 새벽기도회, 금요 구역예배, 주일예배에 동일한 본문으로 선포하고 성경 전체를 모든 교인들에게 강해하는 설교이다.
그리고 일주일 분량의 묵상 자료를 준비하여 일주일 동안 새벽기도회 때에 설교하고, 모든 교인들은 이 본문을 읽고, 쓰고, 묵상한 후에 듣는 설교이기도 하다. 또한 ‘성경적 설교’는 설교자가 설교할 본문을 한 장 전체로 선택하여 일주일 동안 30회 이상 읽고 묵상하면서 각종 주해와 주석을 참고하여 그 본문의 뜻을 충분히 이해한 후 청중들의 삶에 필요한 하나님의 음성을 적절하게 전달하는 설교를 말한다.
따라서 필자가 주장하는 ‘성경적 설교’는 유형으로 볼 때 강해설교의 일종으로 동일한 본문이 새벽기도회 때에는 본문설교 형태가 되고, 주일에는 주해와 응용을 결합시킨 설교 형태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성경적 설교’에 대해 죤 브라이트(John Bright)는 유용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 그에 의하면 “성경적 설교는 성경 본문의 주석과 성경적 교훈의 어느 부분을 해석하거나 기독교인의 신앙과 실천의 규율로 복음을 확실하게 선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다른 식으로 설명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개개의 설교의 목적은 본문으로 하여금 특별하게 말씀하게 하는 것이다. 인간의 사상 체계가 아니라 성경 본문만이 끝에 남아야 한다. 성경 본문만이 최종적으로 남아서 회중과 더불어 있어야 한다.”
이 같은 주장에 죤 낙스는 동의하면서 “성경적 설교의 내용이 어떤 특징을 가져야 하는가?”하는 질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첨가하여 기술하고 있다.
- 특징적이고 본질적인 성경관념(교리)에 접근해 있어야 한다.
- 중심 되는 성경의 사건은 그리스도의 사건과 핵심적 관련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 설교가 본질적 교회생활에 해답을 주고 영향을 끼쳐야 한다.
- 그리스도의 사건이 실제적 의미에서 삶 속에 재현되어야 한다.
정장복 교수는 그의 책 ‘설교의 사역론’에서 이 ‘성경적 설교’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보다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 설교내용 전체가 성경관념(교리)에 근접해 있는 가운데서 복음의특징과 본질을 나타내야 한다.
- 설교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현존이 보여야 한다.
- 참된 ‘성경적 설교’는 언제나 하나님과 인간과의 만남의 현장이 마련 되어야 한다.
- ‘성경적 설교’의 메시지에 현대적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 ‘성경적 설교자’는 언제나 신구약을 하나의 성경으로 보는 관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 ‘성경적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확신을 심어주어야 한다.
- 참된 ‘성경적 설교’는 명령과 책망과 훈계와 함께 은총과 사랑과 용서의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시 되어야 한다.
이상의 ‘성경적 설교’의 특징들을 종합하면 ‘성경적 설교’는 성경적이어야 하고, 성경적 구원론이어야 하며, 성경이 삶과 사회에 영향을 주어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2. 성경으로 설명되는 ‘성경적 설교’
(1) 설교의 근원과 출발은 성경이다.
성경은 영(靈)으로 임하시는 그리스도 자신이 교사로 계시는 곳이다. 성경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이 실제적으로 자신을 알리신 것은 성경뿐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문자로 기록해 주고 있으며 그 과거의 역사를 가르쳐 주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하여 존재한다. 성경 전체는 이 사실에 대한 증언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며 자신의 길을 가르치신다. 그렇기에 설교는 성경의 본문을 낭독하는데서 시작해야 된다고 보렌은 역설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가장 좋은 설교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라는 것이다.”라고 한 죠우엘의 말을 빌려 김이태 교수는 설교가 성경을 씨앗으로 잉태(孕胎)되고 자라나야 됨을 말한다. 이것은 설교자가 성경을 해석하고, 적용하고, 표현할 수는 있지만 새로운 것을 창안해 낼 수는 없으며, 성경은 설교라는 나무의 씨로서 말씀이 없거나 말씀과 무관한 설교는 설교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정장복 교수도 이 같은 견해를 전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다음의 내용을 강조하고 있다. “메시지의 재원이 시대적인 사건, 문학, 철학, 정치, 이데올로기 등이 될 수는 결코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신의 경험과 감정까지도 설교의 원천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오직 설교의 메시지는 성경에만 그 원천을 두어야 한다.”
(2) 성경은 설교의 영원한 원천이다.
말씀의 씨앗은 삶의 주변적인 사건이나 어떤 인기 있는 사상이 아니라 성경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 성경이 설교 자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한 성경학자는 이런 견해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한 세대 동안 성경의 교리를 연구했지만 그 진술에 있어서 가장 만족할 만한 모범은 성경을 하나님이 설교하시는 책이라고 기술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또 어떤 신학자는 “성경이 곧 설교다.”라는 입장을 밝히면서 이렇게 강조하고 있다. “설교자가 끊임없이 성경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될 큰 이유는 성경이 최대의 설교(Kerygma, κῆρυγμα)이기 때문이다. 다른 어떤 기능보다도 월등하게 성경은 하나의 설교이다.”
(3) 성경 자체보다 더 분명한 설교는 없다.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하게 하라!”는 말을 생각할 때 더욱 성경은 설교로 간주된다. 바우만은 “설교에 따라 기독교의 성패는 결정이 된다.”고 말한다. 이 명제는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얼마나 충실하냐에 따라 그 성패가 좌우되고 이에 따른 설교의 성패가 기독교의 성패를 결정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설교란 그 자체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계시하고 그 역사를 이룬 성경의 대 진리를 선포하는데 그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성경을 떠난 설교는 하나의 종교 에세이(essay, 수필, 작문) 이거나 단순한 인간의 주장을 발표하는 종교적 연설(演說)에 불과하다. 설교자가 성경을 모른다거나 설교의 원천을 성경에 충실히 두지 않을 때 그 설교는 위험한 신비주의(神秘主義)나 광신주의(狂信主義)로 흘러갈 수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설교는 성경에서 말씀하신 그 말씀과 성경에서 성취하신 그 은혜를 성경에 있는 그대로 전달해야 한다.
이 점은 구약의 선지자들에게서 분명히 드러난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단순한 성경 해석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말씀을 어떤 인간의 수식이나 가감이 없이 그대로 선포해야만 했다. 구약성경은 끊임없는 선지자들의 이 같은 말씀선포 사역을 소개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그 백성과 자손들에게 가르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신약성경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된다. 따라서 초대교회 사도들의 설교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초점이 모아졌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모든 성경의 응답이며 진수라는 사실을 증거 하였고 십자가에 매달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는 우리의 주와 그리스도가 된다는 사실을 증거 했다. 그리고 십자가를 통한 죄인들의 회개, 죄 용서, 하나님의 은총을 설교했다.
신구약 성경을 살펴본 결과는 설교가 하나님을 향해 인간이 무엇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하나님이 인간을 향해 무엇을 어떻게 하셨다는 메시지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준다. 즉 설교는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말이 아니라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에 관한 인간의 생각이나 인간의 말을 구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떻게 구속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지를 인간에게 알리는 것을 주 임무로 삼았다.
그 결과 하나님은 선지자들의 설교에서 언제나 주체이셨지 결코 그 대상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설교자들은 그들의 삶 전체가 하나님의 장중에 사로잡혀 그 주인의 뜻대로 말씀을 전하고 행동해야만 했었다. 이 같은 사실들을 고려해 볼 때 설교자는 무엇보다 항상 성경을 친근히 하고 성경 전체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성경은 영혼의 양식이며, 만나며, 꿀이다. 그것은 또한 황금이다. 그리고 검이며, 불이며, 씨앗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그 자신과 진리를 펴신 유일한 커뮤니케이션이며, 진리와 빛과 능력의 가장 고귀하고 거룩한 원천이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성경을 벗어나 설교해야 할 이유가 없다. 성경은 설교의 영원한 근원이요 다함이 없는 샘이다. 여기에 설교가 성경적이어야만 하는 양보할 수 없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출처 / 월간 목양, 예배와 설교 클리닉(대표 나상만 목사) (주) 본 기사는 본지 편집에 맞춰 원문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