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 예배는 어떤 것인가?
예배갱신과 장로교신학

시작하는 말
오늘날 예배 갱신(更新)에 대한 소리가 높다. 그러나 과연 예배를 어떻게 드려야 하며, 어떻게 갱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사람들마다 견해가 다르다. 어떤 이들은 성례전을 강화해야 한다고 하고, 어떤 이들은 현대의 시대 흐름에 맞춰 열린 예배를 주장하며, 또 어떤 이들은 ‘떠오르는 예배’ 등을 말한다. 이처럼 예배 갱신을 많이 말하지만 그 내용은 각각 다르며 교회마다 드리는 예배 형태도 다르다.
그러면 예배는 자기가 좋아하는 대로 드려도 되는 것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교회가 하나님을 바로 예배하는 것은 생명만큼 중요하다. 우리는 그 실례를 아벨과 가인의 제사에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예배를 바로 드리는 개인과 민족은 흥하고 발전하며 예배를 잘못하면 망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형식적으로 하나님을 잘못 예배함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되었다. 마음에 없는 형식적 예배, 삶의 변화도 사랑의 실천도 없는 도리어 악을 행하며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은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마 12:7, 호 6:6)고 하시며 거부하셨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는가? 물론 성경에는 모범적인 예배 방법이나 순서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 따라서 우리는 꼭 어떤 예배순서나 예배 형태만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구체적인 예배의 형태나 순서는 시대마다 민족마다 다를 수 있으며 각 교회가 처한 환경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렇지만 모든 교회가 생명처럼 지켜야 할 예배의 기본적인 원칙은 분명히 있다. 이 원칙을 벗어나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때 그 예배는 잘못된 예배가 된다.
그렇다면 올바른 예배는 무엇이며 교회가 나아가야 할 예배 갱신의 올바른 방향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성경에서 찾아야 한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예배의 기본 원리를 우리가 바로 이해함으로써 예배 갱신의 올바른 방향을 잡을 수 있다. 그러면 이제 한국교회가 나아가야 할 예배 갱신의 방향에 대해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몇 가지 생각해 보기로 하겠다.
I. 말씀 중심의 예배
예배는 무엇보다도 ‘하나님 말씀’이 예배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 이것은 종교개혁자들이 목숨을 건 투쟁 끝에 쟁취한 귀한 성경적 예배원리이다. 곧 중세교회의 예배가 성례전(聖禮典) 중심의 의식적(儀式的)인 예배로 변질되었을 때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 말씀’을 예배의 중심으로 돌려놓았다. 참 교회표지 중 하나인 ‘성례전의 올바른 거행’도 하나님 말씀의 토대가 없으면 한낱 인간적 의식(儀式)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성찬의 의미가 무엇인지, 떡과 잔의 의미가 무엇인지, 예수님의 죽음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우리가 어떤 자세로 성찬에 임해야 하는지에 대해 ‘하나님 말씀’에 기초한 설명이 없다면 그 모든 상징적 행위들은 그저 미신적(迷信的) 행위가 되고 만다. 이런 성찬은 성도의 믿음과 상관이 없고 생활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는 하나의 종교 행위에 불과하게 된다. 우리는 이것을 과거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례전에서 분명히 보았다. 따라서 올바른 예배란 설교와 성찬을 포함해서 모든 순서가 ‘하나님 말씀’에 기초해야 하며 ‘하나님 말씀’이 그 중심이어야 한다.
이것은 또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예배이다. 예수님은 예배에 대한 사마리아 여인의 질문에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4)고 가르치셨다. 여기서 ‘신령과 진령으로’라는 번역은 모호하다. 정확하게 번역하면 ‘영과 참으로’ 또는 ‘성령과 진리 안에서’가 된다. 여기서 ‘진리’란 ‘하나님 말씀’을 의미한다.(요 17:17)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이 바로 드러나고 말씀이 바로 증거 되는 예배가 참된 예배이다. 예수님이 곧 진리이므로 다르게 말하면 예수님이 그 중심에 있고 예수님이 바로 증거 되는 예배가 참된 예배이다.(요 14:6, 5:39) 따라서 이것이 예배 갱신의 올바른 방향이라고 말할 수 있다.
2. 성령이 역사하시는 예배
예배 갱신의 또 다른 중요한 방향은 성령이 역사하시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위에서 예수님의 말씀에서 본 것처럼 우리의 예배는 ‘성령과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여기에 ‘성령’이 먼저 나오는데 이것은 ‘성령 안에서’ 또는 ‘성령으로’ 드리는 예배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이 된다. 성령으로 드리는 예배란 구약시대의 가시적인 상징물들(짐승, 곡식, 기름 등)로 드리는 의식적(儀式的)인 예배가 아니라 성령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예배를 말한다.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영적 존재이시므로 영이신 성령 안에서 성령으로 드리는 예배라야 참된 예배가 된다. 그러므로 모든 상징과 의식(儀式)은 다 성령이 역사하는 도구로써만 그 의미가 있다.
한국교회의 예배 갱신의 핵심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본다. 예배의 형태와 순서는 다를 수 있지만 그 핵심과 기본 방향은 거룩한 영,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예배 가운데 충만히 임재하시고 주관하시는 예배가 되어야 할 것이다. 성령께서 예배 인도자, 설교자, 예배 자들 마음을 충만하게 주장하셔서 모두 다 성령에 감동되고 은혜 받는 예배가 되는 것이 예배 갱신의 올바른 방향이다. 그러므로 모든 예배 순서가 성령의 역사를 환영하고 성령이 기뻐하시는 예배가 되도록 해야 한다.
성령의 역사라고 할 때 그것은 말씀과 분리된 독자적인 역사를 의미하지 않는다. 한국교회는 성령의 역사라고 하면 ‘하나님 말씀’과 분리(分離) 된 다분히 감정적이고 체험적이고 열정적인 것만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참된 성령의 역사는 ‘하나님 말씀’과 함께 하고 말씀을 드러내고 말씀이 역사하도록 하는 것이다. 성령이 곧 진리의 영이시며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기 때문이다.(요 14:17, 16:13)
이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신 예수님의 말씀 속에 이미 표현되어 있다. 곧 ‘성령과 진리 안에서’라는 말에서 전치사 ‘엔’(en)은 한 번밖에 사용되지 않음으로 인해 ‘성령과 진리’가 하나의 전치사로 묶여져 있다. 따라서 ‘성령과 진리’는 따로 분리된 별개의 것이 아니라 밀접히 관련된 하나임을 보여 준다. 즉 ‘성령과 말씀’은 각기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연결되어 하나로 역사함을 말한다. 그러므로 성령이 강하게 역사하는 곳에 하나님 말씀이 힘 있게 증거 되며, 또한 말씀이 잘 준비되고 올바르게 전파되는 곳에 성령이 강력하게 역사함을 알 수 있다.
이 같이 성령과 말씀이 역사하는 곳에 은혜가 있으며 마음의 감동이 있게 된다. 성령과 말씀이 아닌 다른 것들로는 아무리 해도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없다. 아무리 화려한 가운을 입고 촛불을 많이 켜고 성찬식을 장엄하고 근사하게 거행한다 해도 거기에 ‘하나님 말씀’이 없고 ‘성령의 역사’가 없다면 참된 마음의 감동이 없으며 진리의 깨우침도 없고 따라서 심령의 변화나 생활의 개혁도 없다.
이 사실은 지난 2천년의 기독교역사가 누누이 보여주는 바이다. 곧 로마 가톨릭교회, 그리스정교회, 러시아정교회에서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소외된 채 아무리 성찬식과 의식을 강조해도 거기에는 참 은혜의 역사가 없으며 말씀에 따른 생활의 변화가 없다. 오직 하나님 말씀을 강조하고 힘써 전파한 개신교에서만 그 중에서도 특히 말씀 중심의 예배와 생활을 회복한 개혁교회와 장로교회 안에서 생활과 사회와 문화 전반에 걸쳐 긍정적 변화가 있었음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 시간이 흐름에 따라 ‘말씀’에 대한 강조는 차차 합리주의적 경향으로 흐르게 되었으며 무미건조하고 지루한 논리 중심의 설교가 중심이 되는 예배로 전락하게 된 경우가 많이 있음을 보게 된다. 현재 미국과 유럽의 전통적인 개신교회는 예배의 생동감을 상실하고 지루하고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으며 그래서 예배 갱신의 실천이 시급히 필요함을 보게 된다.
그리하여 여러 가지 현대적인 요소들을 도입하는 교회들이 늘어가고 있는 이 때에 그에 대해 다 말할 수는 없지만 그 갱신의 올바른 방향은 이런 저런 예배 순서들의 변경이나 새로운 예배 형태의 도입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를 통한 예배의 생동감과 역동성의 회복이라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서는 오히려 예배순서를 단순화하고 기도를 힘써야 한다. 초대 교회 성도들처럼 합심하여 간절히 기도함으로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있을 때 참된 예배 갱신이 이루어질 것이다.
3. 찬양과 감사가 넘치는 예배
성령의 역사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찬양과 감사다. 이것은 성령 충만의 결과 또는 부수적인 현상으로 나타난다.(엡 5:18-21) 이것은 또한 말씀 충만의 결과 또는 부수적인 현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골 3:16,17) 따라서 ‘성령 충만’과 ‘말씀 충만’은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함께 역사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성령과 말씀’이 강력하게 역사할 때 ‘찬송과 감사’가 따르게 되는데 우리의 예배에 있어서 찬송과 감사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이다. 찬송과 감사는 구원받은 성도들의 마땅히 해야 할 바이며 성도의 전 생활을 지배하는 원리이기도 하다. ‘성령과 말씀’이 우리를 지배할 때에 우리의 영혼이 나타내는 자연스런 반응도 ‘찬송과 감사’다.
그러나 찬양이 ‘성령과 말씀’의 역사와는 상관없이 따로 진행될 때 그것은 도리어 성령의 역사를 방해하고 은혜 받는 데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행해지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과는 상관없이 다분히 감정적이고 열광적인 찬양, 인위적으로 감동을 자아내기 위해 동원되는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들은 도리어 성령의 역사를 방해하며 참된 은혜를 빼앗아 갈 수 있다.
참된 찬양은 구원의 감격에 젖은 성도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찬양이어야 하며, 자기가 즐기기 위한 것이나 자신의 감정을 위한 것(스트레스 해소)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골 3:16) 이를 위해서는 하나님의 구원 사실에 대한 감사가 있어야 하며 먼저 구원의 은혜를 선포하는 ‘하나님 말씀’이 있어야 한다. 단순히 자기의 감정을 만족시키기 위한 찬양이나 인위적인 찬양이 아니다.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합당한 찬양은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에 대한 감사의 성격을 띠어야 한다. 그리고 거룩한 성도의 삶이 따라야 한다. 또한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에 합당한 상태가 되도록 안정시키고 준비시키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지나친 타악기 중심의 악기 구성을 지양하고 현악기와 관악기를 골고루 사용하도록 해야 하며 예배에 합당한 곡을 잘 선정하도록 해야 한다.
4. 진실한 기도가 있는 예배
기도는 빼놓을 수 없는 예배요소다. 기도는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이며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는 통로다. 따라서 기도는 성령과 말씀이 역사하는 예배를 위한 준비로서 중요할 뿐 아니라 예배 순서 중에서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개신교에서의 기도는 로마 가톨릭에서의 기도와 달리 예수님의 이름으로 직접 하나님께 나아가는 기도이며 또한 성직자들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기도하는 것이다.
그런데 전통적으로 서구와 한국의 장로교회에서는 이 기도에 있어서 회중은 수동적으로 참여하는 순서가 되고 말았다. 물론 예배가 질서 없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목사나 장로의 대표기도 형태가 필요하기는 하나 회중의 참여가 전혀 없는 목사나 장로만의 기도는 또 다시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직자 중심주의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염려된다.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는 모든 회중의 기도 참여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현재 한국교회의 예배 시 참회기도와 사죄 선언은 여기서 다 논할 수 없지만 다분히 형식적으로 흐르고 의식화될 위험성이 크다. 그리고 죄 사함에 대해서도 그릇된 인식을 심어줄 위험성이 크다. 물론 참회 기도까지는 괜찮다고 생각되지만 사죄 선언은 부작용이 크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필자의 견해로는 장로의 대표기도를 살리되 예배 중의 대표기도는 간결하게 하도록 하고 설교 후나 예배 끝나기 전에 온 회중이 합심해서 기도하는 순서도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각 교회가 처한 형편에 따라 적절하게 질서 있게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5. 삶 전체로 드리는 예배
신약시대의 예배의 또 다른 중요한 점은 우리의 예배는 단지 예배 시간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성도의 삶 전체가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고 말한다. 즉 주일에 드리는 공적인 예배만이 우리의 드릴 예배가 아니라 한 주간의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거룩한 산제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우리가 강조해야 할 아주 중요한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주일 공적인 예배를 잘 드리고 은혜를 많이 받았다 할지라도 한 주간의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바르지 못하다면 그런 사람의 예배를 하나님은 기뻐 받지 않으신다. 생활과 분리된 예배가 계속되면 하나님은 도리어 그런 사람에게 벌을 내리시고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수도 있다.
따라서 참된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전함으로 말미암아 성도의 삶에 변화가 있도록 촉구하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인지 가르쳐 주고 그런 삶을 살도록 촉구하는 내용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성도들에게 어느 정도 부담을 주는 설교가 있어야 한다. 물론 그와 동시에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내용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삶의 변화에 대한 촉구가 없이 그저 의식(儀式) 자체에 중점을 두는 예배, 예배의식 그 자체로서 모든 것이 끝나는 예배는 올바른 예배가 아니며 하나의 일반적인 종교 의식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그런 예배를 싫어하시며 미워하신다.(말 1:10)
6. 사랑과 교제가 있는 예배
하나님께 드리는 참된 예배는 사람들 사이에 참된 사랑과 교제가 수반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고 하셨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꼭 우리가 예배드리다가 라도 돌아가라는 의미나 또는 예배보다도 형제간의 화목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의 드리는 예배가 형제간의 화목을 수반하는 예배가 되어야 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즉 우리의 예배와 우리의 삶이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마 22:37-40, 요일 4:21)
또한 참된 예배는 예배 자들 사이에 ‘교제’(交際, Koinonia)가 있어야 한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을 뿐만 아니라 또한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었다.”(행 2:42)고 했다. 또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였다.”(행 2:44) 또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다.”(행 2:46)
따라서 성도의 신앙생활에서 ‘교제’는 중요한 요소임을 알 수 있는데 초대교회 성도들은 주로 ‘떡을 떼는 것을 통하여’ 교제를 실천했다. 참된 예배는 하나님과의 화목뿐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화목도 가져오는 것인데 이를 위한 구체적인 실천이 성도들이 예배 후에 또는 예배 전이나 또는 적당한 시점에 떡을 떼는 것을 통해 나타났다. 여기서 ‘떡을 뗀다’는 것은 식사를 함께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 단지 조그만 떡 한 조각이나 작은 포도주 한 잔을 나누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7. 교회 의식(儀式) 강조의 문제점
오늘날 예배 갱신이라고 하면 대개 외적인 의식(儀式)을 강조하거나 말씀의 충분한 뒷받침이 없는 형식적 성례전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것이 과연 종교개혁 정신에 맞는 것인지, 성경의 가르침에 맞는 것인지는 의문스럽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과연 예배가 활성화되고 교회가 부흥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어떤 이들은 매 주일마다 성찬식을 거행하는 것이 예배 갱신의 올바른 방향이라고 주장하지만 과연 그런 것이 올바른 방향이 될 수 있을지는 생각 해 볼 일이다.
첫째, 그렇게 하면 예배 시간이 길어지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어렵다. 현대인들은 무엇보다도 예배시간이 길어지는 것을 싫어하며 오래 인내하기를 힘들어 한다. 따라서 매 주일마다 성찬식을 거행하면 지루해서 초신 자들이 교회를 많이 이탈하게 될 것이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설교를 짧게 하면 결국 말씀의 약화를 가져오게 되며 결국 로마 가톨릭교회가 걸었던 길로 되돌아가게 된다.
둘째, 성찬식의 떡과 포도주는 상징이며 그것들을 나누는 것도 상징이기 때문에 그런 상징적인 행위들을 매주 반복하면 성도들 중 다수는 지루함을 느끼게 될 것이며 예배를 하나의 의식적인 행위로 인식하게 될 위험성이 크다. 이런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이 지배하는 생동감이 있는 신약적인 예배와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셋째, 성찬식의 빈번한 거행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초대교회로 돌아가는 것이고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초대교회의 성찬식은 실제로 온 교인이 모여서 함께 식사하는 것이었다. 예배 후나 또는 예배 전에 함께 모여서 실제로 배부르도록 먹는 공동식사였다. 따라서 ‘애찬’의 성격이 강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만약 오늘날 우리가 초대교회로 돌아가려면 단지 상징적인 빵 한 조각이나 작은 포도주 한 잔이 아니라 실제로 다 함께 식사를 해야 한다. 이것이 예수님이 행하신 유월절 식사였고 초대교회가 행한 떡을 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교회 중에 과연 예배 중에 성찬식 때 실제로 식사를 나누는 교회가 있는가? 초대교회의 성찬과 애찬에 대해서는 우리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오늘날 우리가 초대교회를 본받는다면 차라리 예배 후에 온 교인이 함께 모여 주의 이름으로 기도한 후에 ‘애찬’을 나누는 것이 훨씬 더 가깝다고 생각된다. 그렇게 할 때에 성도들 사이에 참된 교제가 있게 되고 예배의 정신에도 합당하게 될 것이다.
물론 예수님이 세우신 성찬은 대단히 중요하다. 필자가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형식적이 성찬이 되지 않도록 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굳이 성찬의 적당한 횟수를 묻는다면 필자는 한국교회가 전통적으로 지켜온 것처럼 1년에 2회 정도나 네덜란드 개혁교회가 행하는 것처럼 1년에 4회 시행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한국교회의 예배 갱신과 관련해서 생각해 볼 때 오히려 매 주일마다 예배 후에 애찬을 나누는 것이 초대교회로 돌아가는 것에 가까우며 또한 성도의 화목과 교제라는 신약적인 예배의 정신에도 부합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결론적으로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성경적인 참된 예배의 대원칙은 외적인 의식(儀式)이나 형식(形式)에 있지 않고(물론 의식과 형식이 전혀 불필요 하다는 뜻이 아니다.) ‘성령과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영적 예배여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글쓴 이 / 변종길 교수(고려신학대학원, 신약학, 서울대학교 B.A., 고려신학대학원 M. Div., 화란 캄펜개혁교회신학대학원 Drs., 화란 캄펜개혁교회신학대학원 Th.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