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교회의 참된 일치

종교개혁당시 종교개혁 진영은 로마가톨릭으로부터 교회를 분리시키는 분리주의 자들이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교회 속성이 하나 됨 즉 통일성(統一性)인데 종교개혁은 교회의 통일성을 파괴한다는 비판이었다. 이 비판에서 종교개혁자들은 교회 분리주의자가 되고 만다. 이에 대해 종교개혁자들은 무엇이라고 대답했을까? 개혁교회의 기초를 놓은 칼빈과 함께 교회의 일치(一致)와 분리(分離)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 한다.
먼저 생각할 것은 칼빈이 그 누구보다도 교회 일치를 위해 많은 노력과 수고를 했다는 점이다. 그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이 제네바의 칼빈과 취리히의 불링거가 성만찬에 대한 일치선언 즉 취리히 협의서(協議書, Consensus Tigurinus)일 것이다. 제네바에 있던 칼빈은 이 협의를 위해서 거의 300Km가 되는 취리히를 세 번 이상 왕복했다. 이런 일화들 때문에 왜 칼빈처럼 교회의 하나 됨을 이루지 못하느냐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칼빈의 다른 면도 보아야 한다.
칼번은 로마가톨릭교회와는 연합할 생각이 전혀 없었으며 루터교회와도 처음에 여러 시도했지만 결국 하나가 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교회의 하나 됨을 위해 많은 수고를 아끼지 않은 그가 왜 하나를 이루지 못했을까? ‘기독교강요’ 4권에서 교회일치에 대한 칼빈의 생각을 만날 수 있다. 칼빈은 교회의 하나 됨을 위한 두 고리 즉 ‘건전한 교리의 일치’(敎理一致)와 ‘형제애’(兄弟愛)를 말한다.
‘건전한 교리’와 관련해서 이단자들은 거짓 교리로 믿음의 순전함을 부패시키기 때문에 그들과 하나 될 수 없다. 다른 편에서 ‘형제애’가 없는 분리주의자들은 믿음의 동질성 안에 있는 연합의 고리를 깨트린다.
칼빈은 ‘건전한 교리의 일치’와 ‘형제애’를 ‘믿음의 일치’라는 말로 묶는다. “사랑의 연합은 믿음의 일치에 달려있다.” 그래서 칼빈은 ‘믿음의 일치’가 하나 됨의 시작이며 목적이고 유일한 잣대라고 한다. 칼빈은 이렇게 말한다. “따라서 우리에게 교회의 일치가 명해질 때마다 믿음의 일치기 확보되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곧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이 하나가 될 때 역시 우리 뜻도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좋은 뜻으로 서로에게 연결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칼빈에게 있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 안에서 하나가 된다는 뜻이다. “주님의 말씀 밖에서 만들어진 것은 불경건한 자들의 행위를 나타내는 것이지 신자들의 일치가 아닙니다.” 이렇게 개혁신학에는 교회의 통일성이라는 속성과 더불어 말씀이라는 교회의 표지(標識)에 따른 참된 교회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교회의 하나 됨에 있어서 참된 교회에 대한 고민을 함께하지 않는다면 종교개혁의 역사는 교회분리의 역사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런데 개혁교회가 참된 교회라는 개념을 통해 교리와 생활의 순수함의 정도의 차이를 드러낸 것은 사실이지만 주의할 것은 참 교회와 거짓 교회를 구분하는 말씀의 표지가 있다 해도 이 세상에는 절대적으로 완전한 참 교회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 교회의 표지(標識)가 되는 말씀 앞에서 온전하지 못한 우리는 겸손할 뿐이요 스스로를 개혁할 뿐이다.
칼빈은 참으로 교회 일치의 신학자였다. 우리는 교회 일치를 위한 칼빈의 노고를 너무 쉽게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그는 주의 말씀이 가르치는 교리의 순수성을 확보하면서 동시에 형제애로 하나 됨을 실현하는 길을 찾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럼에도 이것이 우리의 분명한 과제임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다.(*) 글쓴 이 / 이남규 교수(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