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더 핑크의 하나님의 주권 연구(12) 유기와 하나님의 주권(2)
아더 핑크의 하나님의 주권 연구(12) 유기와 하나님의 주권(2)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하셨으니(롬 9:17)
(78호에서 계속) 로마서 9장은 하나님의 주권교리(主權敎理)와 이것이 택자와 불택자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다룬다. 여기서는 이 주제에 밀접하게 관련된 부분만 살펴보겠다. 바로 로마서 9:17이다.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은 13,14절과 연결된다. 14절은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라고 묻는다. 그리고 17절에서 사도 바울은 ‘없다’는 주장에 대한 답변을 계속한다. 이 구절에 대한 칼빈의 주석을 살펴보겠다.
“여기서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한다. 첫째, (애굽 왕) 바로는 멸망하기로 예정되었는데 이것은 과거의 일부이지만 여전히 감춰진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둘째, 바로의 멸망은 하나님의 이름을 알리는 데 목적이 있었다. 많은 해석자가 이 구절의 분명한 의미를 수정하려고 이 구절을 왜곡한다. 그러나 우리는 ‘내가 너희를 세웠다.’ 또는 ‘휘저었다.’라는 말이 히브리어로는 ‘내가 지명했다.’라는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이에 비춰볼 때 하나님은 바로의 완악한 거역(拒逆)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려는 자신을 막지 못하리라는 것을 보여주기로 계획하셨던 것 같다. 이것은 또 하나님이 바로의 격분(激忿)을 미리 아셨으며 이것을 계획하고 준비해 두셨다는 것도 보여준다. 게다가 하나님은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는 보다 놀라운 증거를 최종적으로 제시하려고 환경을 세밀하게 준비해 두셨다.”
바울이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라고 옮긴 히브리어 단어의 의미로 칼빈은 ‘내가 지명했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는 점에 주목하라. 또 이 구절의 가르침과 논증이 이 단어에 달렸으므로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를 더 지적해야 한다.
(2) 하나님은 바로가 멸망에 이르도록 예정
사도 바울의 출애굽기 9:16의 인용은 당시에 일반적으로 사용되었고 자신이 가장 빈번히 인용하던 70인역(히브리어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에서 상당히 벗어났다는 사실이다. 70인역에는 “이 때문에 네가 지금까지 보존되었다.”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부분을 “바로 이 목적을 위해 내가 너를 세웠노라.”라고 옮겼다. 이제 인간과 그의 창조자 사이에 벌어진 큰 논쟁을 요약해서 보여주는 구체적인 예 곧 바로의 경우를 자세히 살펴보겠다.
“내가 손을 펴서 돌림병으로 너와 네 백성을 쳤더라면 네가 세상에서 끊어졌을 것이나 내가 너를 세웠음은 나의 능력을 네게 보이고 내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려 하였음이니라.”(출 9:15,16)
이 구절에 대해 다음 몇 가지를 말할 수 있다.
첫째, 출애굽기 14-15장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보여준다.
바로가 ‘끊어졌다.’ 그를 끊으신 분은 하나님이셨다. 바로가 늙어서 병들었거나 쇠약해서 끊어진 게 아니었고 사고로 끊어진 것도 아니었다. 하나님이 그의 심판을 통해 바로를 직접 끊으셨다.
둘째, 하나님이 바로를 세우신 목적은 단지 하나님의 또 다른 목적을 위해 그를 ‘끊기’ 위해서였던 게 분명하다.
신약성경의 용어로 표현하면 ‘멸하시기’ 위해서였다. 하나님은 계획 없이 일하시지 않는다. 바로를 태어나게 하실 때, 바로가 유아기와 소년기를 무사히 지나게 하실 때, 바로를 애굽의 왕으로 세우실 때 하나님에게는 한 가지 목적이 있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목적이었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하신 말씀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하나님은 모세를 애굽으로 보내셨다. 그리고 바로에게 여호와의 백성이 광야로 사흘 길을 들어가 그분께 제사하게 허락하라고 요구하게 하셨다. 모세가 떠나기 전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애굽으로 돌아가거든 내가 네 손에 준 이적을 바로 앞에서 다행하라. 그러나 내가 그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즉 그가 백성을 보내 주지 아니하리니”(출 4:21)
게다가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은 이보다 오래전에 선포되었다. 4백 년 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 지며….”(창 15:13,14) 이 말씀으로 볼 때 하나님의 계획은 바로가 태어나기 오래전에 세워졌던 게 분명하다.(구약성경에 한 나라와 그 나라의 왕은 동일시 된다.)
셋째, 하나님이 바로를 어떻게 다루셨는지 살펴보면 애굽 왕은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이라는 게 분명해진다.
바로는 애굽 왕좌에 앉아 통치권을 행사했으며 세상에서 가장 강한 나라의 지도자였다. 당시 바로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명령할 왕은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하나님은 도덕적으로 타락한 이 통치자를 그 누구도 손대지 못할 높은 곳에 세우셨다. 이것은 그의 최종 운명을 위해 그를 준비시키는 자연스럽고 필수적인 단계였다. 이것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 16:18)는 하나님의 말씀을 놀랍게 성취한다.
또 하나의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매우 중요하고 의미가 깊다. 하나님이 바로를 견제했을 법한 유일한 억제 수단을 단호히 제거하셨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바로에게 무제한의 권력을 주셨다. 그리고 그를 법과 영향과 지배를 완전히 초월하는 자리에 앉히셨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은 모세를 바로 앞에서 즉 애굽에서 제거하셨다. 모세는 애굽의 지혜에 능통했으며 바로의 궁정에서 자랐다. 이런 모세를 왕 가까이에 남아 있게 하셨다면 그의 영향력이 바로의 악을 틀림없이 견제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이 모세를 미디안으로 보내신 이유 가운데 하나인 게 분명하다. 바로가 가장 악했던 시기는 모세가 없을 때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모세의 영향력을 제거함으로써 바로에게 무제한의 기회를 주셨다. 다시 말해 바로가 자신을 죄로 채우고 그가 받아 마땅하나 그에게 예정된 멸망에 이르도록 자신을 멸망으로 떨어뜨릴 무제한의 기회를 주셨다는 것이다.
넷째, 하나님은 자신이 선언하셨듯이(출 4:21 참조)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하셨다.
이것은 성경의 선언과 완전히 일치한다.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느니라.”(잠 16:1)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웃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잠 21:1) 다른 모든 왕처럼 바로의 마음도 하나님의 손에 있었으며, 하나님은 바로의 마음을 어느 쪽으로든지 임의로(하나님의 뜻대로) 돌릴 권리와 능력이 있으셨다.
이 경우 하나님은 바로의 마음을 선(善)을 거스르는 쪽으로 돌리길 원하셨다. 하나님은 바로의 마음을 완악(頑惡)하게 하심으로써 바로가 마침내 멸망할 때까지 모세의 요구 곧 이스라엘을 보내라는 요구를 거부하게 하셨다.
다섯째, 하나님이 바로를 이렇게 대하신 건 하나님 책임이 아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자신의 말이다. 바로는 자신에게 불리하고 하나님께 유리하게 진술을 했다. 출애굽기 9:15,16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바로를 세운 목적을 그에게 말씀하신다. 그리고 27절에서 바로는 이렇게 말한다. “이번은 내가 범죄(犯罪) 하였노라. 여호와는 의로우시고 나와 나의 백성은 악하도다.”
바로가 이 말을 한 시점에 주목하라. 하나님이 자신을 세우신 목적은 자신을 끊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안 이후였다. 하나님이 바로에게 재앙을 내리신 이후였으며 바로가 스스로 마음을 완악하게 한 이후였다. 이 무렵 바로는 심판을 위해 거의 완전히 익어 있었다. 그리고 바로는 자신이 ‘범죄했다’는 것과 ‘하나님이 의로우시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다음으로 우리에게는 모세의 증언이 있다. 모세는 바로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 처음부터 들어 알고 있었다. 모세는 하나님이 바로를 어떻게 다루셨는지 증언했다. 모세는 바로를 향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보았다. 모세는 바로가 홍해에서 끊어지는 것을 보았다. 이때 모세의 마음이 어떠했겠는가? 부당하다고 외쳤는가? 하나님이 불의하다며 감히 그분을 비난했는가?
전혀 그러지 않았다. 대신 모세는 이렇게 말했다. “여호와여 신(神) 중에 주와 같은 자가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으로 영광스러우며 찬송할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가 누구니이까?”(출 15:11) 모세는 이스라엘의 대적이 홍해에서 ‘끊어지는’ 것을 보면서 복수심이 일어났는가? 아니다. 그러나 이 부분에 관한 모든 의심을 제거하기 위해 하늘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고통스러운 심판을 목격한 후에 함께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부르는 장면을 살펴보자.
이들은 이렇게 노래한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계 15:3) 이것이 하나님이 바로를 다루신 방식의 정당성을 완전하게 최종적으로 입증해 준다. 하늘의 성도들이 함께 모세의 노래를 부르면서 바로와 그 군대를 멸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이렇게 하신 하나님은 불의하신 게 아니라 의롭고 참되시다고 선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 땅의 심판자께서 진노의 그릇인 바로를 창조하시고 멸하신 것은 옳았다고 믿어야 한다.
이같이 바로의 경우는 유기교리(遺棄敎理)의 원리를 확립하고 예증한다. 하나님은 실제로 바로가 멸망에 이르도록 예정(豫定)하셨다. 그렇다면 그분이 자기 아들의 형상을 본받도록 예정하지 않으신 모든 자가 영벌에 이르도록 예정하셨다고 결론 내리는 게 정당하다.
(3) 하나님의 예정과 유기는 하나님의 주권
사도 바울은 바로의 운명에서 이런 결론을 분명하게 도출한다. 왜냐면 로마서 9장에서 바울은 바로를 세우신 하나님의 목적을 말한 후에 이어서 ‘그런즉’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바로의 경우를 소개한 목적은 ‘유기교리’가 ‘선택교리’의 당연한 결과임을 증명하기 위해서다. 결론적으로 바로를 빚으실 때 하나님은 공의나 불의를 나타내신 게 아니라 자신의 순수한 주권(主權)을 나타내셨을 뿐이다.
토기장이가 주권적으로 질그릇을 빚듯이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도덕적 행위자들을 빚으신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흘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롬 9:18) 여기서 ‘그런즉’이라는 접속사는 바울이 앞의 세 절에서 말한 내용을 근거로 일반적인 결론을 도출한다. 바울은 이런 구절을 토대로 하나님이 야곱을 사랑하시고 에서를 미워하신 것은 불의(不義)가 아니라고 말하며 특히 하나님이 바로를 다루시는 경우에서 실증된 원리를 보여준다.
모든 것이 창조자의 주권적인 뜻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분은 어떤 사람은 사랑하시고 어떤 사람은 미워하신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자비를 베푸시고 어떤 사람은 완악하게 하시는데 그 무엇과도 관계없이 오직 자신의 주권적인 뜻에 따라 하신다.
앞 구절에서 육신의 생각에 가장 큰 혐오감을 주는 부분은 완악하게 하심 즉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이 부분에서 진리에 물을 탄다. 가장 일반적인 잘못된 견해는 이것을 형벌로서의 완악하게 하심으로만 보는 것이다.(다시 말해 먼저 하나님을 거부한 자들이 하나님에게 거부당한다는 것이다.)
이 해석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로마서 1:19-26과 같은 구절을 근거로 제시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알되’ 그분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 자들을 ‘내버려 두셨다’.(롬 1:21,24절) 이들은 데살로니가후서 2:10-12도 근거로 제시한다. 그러나 ‘완악하게 하다’라는 단어가 이 두 구절에 없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게다가 로마서 9:18은 형벌로서의 완악하게 하심을 말하지도 않는다. 사도 바울은 이미 하나님의 진리에 등을 돌린 자들을 말하고 있지 않다.
그 대신에 바울은 하나님의 주권을 다루고 있는데 하나님의 주권은 하나님이 자기가 뜻하는 자들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데서만 나타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가 뜻하는 자들을 완악하게 하시는 데서도 나타난다. 바울은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자를’(그분이 뜻하는 자들을) 완악하게 하신다고 말할 뿐 ‘그분의 진리를 거부한 모두를’ 완악하게 하신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구절은 바로에 관한 언급에 곧바로 이어지는데 이런 사실이 이 구절의 의미를 명확히 해준다.
사람들이 지금까지 그럴듯한 해석을 붙이려 했으나 바로의 경우가 무엇을 말하는지는 아주 분명하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롬 9:18) 하나님이 주권적이고 계획적으로 – 그리고 형벌로서 완악하게 하심과는 다르게 – 죄인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신다는 것을 확인해 주는 구절은 이것만이 아니다. 다음 말씀에 주목하라.
“이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이르되 ‘주여! 우리에게서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나이까?’하였더라. 그들이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렸으되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하었음이더라.”(요 12:37-40)(*) 글쓴 이 / Arthur Walkington Pink 출처 / ‘아더 핑크의 하나님의 주권’ 지은이 아더 핑크, 옮긴이 전의우(서울, 요단출판사, 2014.) < 다음에 계속 >
예정(豫定, predestination) – 인류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논하는 교리이다. 선택(選擇)으로도 알려져 있다. 개혁신학자 중 혹 선택된 이들을 예정하시는 하나님의 능동적인 의지와 선택되지 않은 이들을 지나치시는(遺棄) 그분의 수동적인 행위 사이를 서로 구분한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종종 ‘이중예정’ (double predestination)이라 불리는 대등한 행위를 강조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선택된 이들의 구원(救援)과 그렇지 않은 이들의 파멸(遺棄) 모두를 능동적으로 작정하심을 의미한다. 대부분 개혁신학자는 목회적인 관점에서 예정을 논하면서 이 교리를 ‘구원의 확신’과 ‘순종의 책임’에 연관 짓는 방식을 택한다. 따라서 전도를 포기하거나 ‘도덕폐기론’을 장려하는 것은 이 교리의 필연적인 귀결도 또 정당한 귀결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