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더 핑크의 하나님의 주권 연구(13) 유기와 하나님의 주권(3)

(4) 하나님의 예정과 유기에 대한 반론과 변증
(79호에서 계속) 이제 문제는 “하나님이 그분의 말씀에서 주신 계시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이다.
믿음은 오랜 탐구와 연구에서 나오지 않고 어린아이 같은 마음에서 나온다. 유기(遺棄) 교리를 이해하려면 어린아이 같은 마음이 필요하다.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하리니”(롬 9:19) 이것이 이 시대에 제기되는 유기에 대한 반론이다. 여기서 문제는 이것으로 보인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에 달렸고 하나님의 뜻이 취소될 수 없다면, 하나님이 주권자로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면, 하나님은 자비를 베풀고 싶은 자에게 자비를 베푸실 수 있다면, 하나님은 자신이 그렇게 하기로 선택한 자에게 자비를 베푸는 대신에 벌을 내리실 수 있다면, 왜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다 자비를 베푸시지 않으시는가?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시면 모든 사람을 순종하게 하실 수 있고 아무도 비난받지 않게 하실 수 있지 않겠는가?
사도 바울은 제기되는 이 같은 반론의 전제에 대해서는 이견(異見)이 없었다. 바울은 하나님이 허물하지(책망하지) 않으신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인간에게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더 나아가 바울은 “하나님은 자신이 원하시는 자를 긍휼히 대하시거나 엄하게 대하신다는 제 말을 오해하셨습니다.”라며 반론에 대해 교묘하게 발뺌하려 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첫째, 당신은 이런 반론을 제기할 권리가 없습니다. 둘째, 당신은 이런 반론을 제기할 이유가 없습니다.” 즉 반론은 전혀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것이다. 반론 제기는 창조자 하나님을 모욕하는 행위이며 하나님이 하신 일을 불평하고 반대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하리니”(롬 9:19) 이 구절의 분명한 의미를 오해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이 말이 어떻게 다른 뜻일 수 있겠는가? 바울의 물음이 다음과 같은 뜻 외에 다른 뜻일 수 없다. “하나님은 자신이 원하는 자에게 ‘긍휼’을 베풀고 자신이 원하는 자를 ‘완악’하게 하신다는 게 사실이라면 인간의 책임은 어떻게 되는가?”
이 반론에 대해 ‘그러면’이라는 단어에 주목하라.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묻기를) 그러면…” 바울은 마음에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이 같은 분명한 물음을 던진다. 주목하라. 바울은 ‘하나님의 주권’ 교리가 바로 이런 반론을 불러일으킬 걸 이미 알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나의 이 글이 적어도 몇몇 사람에게서 이와 똑같은 반론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면 이유는 분명히 둘 중 하나다. 로마서 9장이 가르치는 ‘하나님의 주권’ 교리를 내가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이거나 그가 인간의 본성이 바뀌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19절 나머지 부분을 살펴보자. 사도 바울은 같은 반론을 조금 다른 형태로 다시 제기하는데 그것은 그 의미를 오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누가 그(하나님) 뜻을 대적하느냐?”
여기서 논의되는 핵심 주제는 하나님의 뜻(하나님의 주권적인 방법)과 관련된 게 분명하다. 이것은 우리가 17,18절에 관해 논했던 말이 옳았음을 확인해 준다. 즉 이것은 단순히 형벌로서의 완악하게 하심 즉 먼저 진리를 거부했기에 일어나는 완악하게 하심이 아니라 실제 경험적으로 완악하게 하심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타락하고 죄악 된 피조물을 완악하게 하시는 이유는 단 하나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이다. 바울이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라고 묻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러한 반론에 대한 답은 무엇인가?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고 말하겠느냐?”(롬 9:20) 사도 바울은 반론 제기가 무가치하다고 말하지 않고 대신에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의 불경(不敬)을 꾸짖는다. 바울은 그에게 상기시킨다. 그는 단지 인간이요 피조물이기에 그가 하나님께 반문하는 것은 참으로 무례하며 불경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하나 더 상기시킨다. 그는 지음을 받은 존재에 지나지 않기에 그를 지으신 분에게 항의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고 신성모독이라는 것이다.
이제 이 구절을 마무리하기 전에 꼭 지적해야 할 게 있다. 이 구절의 마지막 부분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는 논의되는 주제가 정확히 무엇인지 분명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문맥에 비춰볼 때 ‘이같이’의 핵심은 무엇인가? 이 단어는 앞 구절과 연결된다. 따라서 이삭의 장자인 에서의 예와 연결하면 “어찌 나를 미움의 대상으로 지으셨습니까?”라는 뜻이며 바로의 예와 연결하면 “어찌 그저 완악하게 하시려고 나를 지으셨습니까?”라는 뜻이다. 이 물음이 다른 의미일 수 있겠는가? 이 구절 전체의 목적은 하나님이 다음 두 부류의 사람들을 다루실 때 나타나는 그분의 주권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 그분이 사랑하는 자들 : 귀하게 쓸 그릇과 긍휼의 그릇
- 그분이 미워하고 완악하게 하는 자들 : 천히 쓸 그릇과 진노의 그릇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롬 9:21-23)
이 구절에서 사도 바울은 19절에서 제기된 반론에 답한다. 먼저 이렇게 묻는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여기서 21절에 ‘권한’(power)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와 22절의 ‘능력’(power)으로 번역된 단어는 다르다. 22절의 ‘능력’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힘’(might)을 의미할 뿐이다. 그러나 21절에서 ‘권한’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토기장이의 권리나 절대적 특권을 가리킨다.
사실 똑같은 헬라어 단어가 요한복음 1:12에도 나온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power)를 주셨으니” 잘 알듯이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리나 특권을 의미한다. 개정역은 요한복음 1:12과 로마서 9:21 두 곳 모두에서 ‘right’(권리)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21절)
앞 절에 비춰볼 때 여기서 토기장이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게 확실하다. 바울은 이렇게 묻는다.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그런 다음 은유법으로 묻는다.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그런데 간혹 토기장이가 어떤 건 귀한 목적이 아닌 것에 사용될 그릇들을 만드는 게 분명하지만 그러함에도 그가 모든 그릇이 어딘가에 유용하게 사용되도록 계획했다고 주장함으로써 이 절의 의미를 제거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 구절은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덜 귀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라고 말하지 않는다. ‘천히 쓰도록’ 만들어진 그릇들을 말한다. 물론 유기된 자들의 멸망이 애굽의 바로의 경우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드높일 것이기에 하나님의 지혜가 완전히 입증될 것이다. 어떻게 입증되는지는 22절에서 살펴보겠다.
19절에 두 질문이 나온다.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바울은 이 두 질문에 세 가지로 대답한다.
- 20절 : 바울은 피조물은 창조자를 판단할 권리가 없다고 말한다.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바울은 하나님의 뜻이 완전무결하다는 데 절대로 의문을 제기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무엇이든 틀림없이 옳다.
- 21절 : 바울은 창조자에게는 자기 피조물을 자신의 눈에 적합한 대로 배치할 권한이 있다고 선언한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여기서 ‘권한’(power)이라는 헬라어는 엑소우시아(exousia) 인데 22절에서 ‘능력’(power)으로 번역된 단어와 다른 단어이다.
- 22절 : ‘능력’으로 번역된 단어는 ‘두아톤’(duaton)이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 만들 권한이 없느냐?”에서 ‘권한’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도덕적 권리(moral right)를 의미한다. 바울은 단순히 하나님의 ‘순수 실행 능력’(raw power to perform)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이것이 의도된 의미라면 우리는 19절의 본래 질문으로 되돌아가기 때문이다.
- 22,23절 : 하나님이 자신의 피조물을 서로 다르게 대하시는 세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그의 진노를 보이시기 위해서이며, 그의 능력을 알게 하기 위해서이며,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기 위해서이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하나님은 이렇게 하실 도덕적 권리가 있다. 그분은 창조자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이 권리를 행사하시는가? 그렇다. 13절과 17절이 분명하게 보여준다.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13절)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바로)를 세웠으니”(17절) 하나님은 각 사람을 다르게 대하신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자비를 베푸시고 어떤 사람들은 완악하게 하신다. 또 하나님이 어떤 사람으로는 귀히 쓸 그릇을 어떤 사람으로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신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는 이유를 두 번째 말한다.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롬 9:22)
22절과 23절에서 바울은 먼저 ‘진노의 그릇’을 언급한 후 ‘긍휼의 그릇’을 언급한다. 왜 그런가? 이 질문의 답이 아주 중요하다. 바울이 이런 순서로 말하는 이유는 19절과 관련된 것이 ‘진노의 그릇’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은 ‘천히 쓸 그릇’을 만드시는 두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첫째, 그의 진노를 보이시기 위해서이고, 둘째, 그의 능력을 알게 하기(알리기) 위해서다. 두 이유 모두 바로의 경우에 분명히 나타난다.
로마서 9:22의 한 부분은 따로 살펴봐야 한다. 그것은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KJV)이라는 부분이다. 진노의 그릇들이 스스로 자신을 멸하기에 합당하게 만든다는 것이 일반적인 가르침이다. 다시 말해 이들은 자신의 사악함을 통해 자신을 하나님의 진노를 위해 준비한다(합당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따라서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이란 표현은 하나님이 이들을 멸하기에 합당하게 하실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왜냐면 진노의 그릇들은 자신의 사악함을 통해 스스로 멸하기에 합당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주 제기되는 주장이다. ‘멸하기’라는 단어를 단순히 형벌(刑罰)의 의미로 받아들이면 이것은 옳은 주장이다. 불택(不擇) 자들은 자신의 형벌을 준비한다. 왜냐면 모두가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면 본문이 말하는 게 이것인가? 분명히 아니다. 11-13절로 돌아가 보자. 에서가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미움 대상에 합당한 자로 만들었는가? 아니면 태어나기 전에도 미움을 받았는가? 바로가 자기 자신을 멸하기에 합당한 자로 만들었는가? 아니면 재앙이 애굽에 내리기 오래전에 하나님이 그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는가?
로마서 9장 22절은 21절과 이어지는 게 분명하며 21절은 20절에서 제기된 물음에 대한 답변의 일부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사용된 은유(隱喩)를 끝까지 추적해 보면 진노의 그릇을 멸하기로 준비하는 분은 하나님이 분명하다.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 이렇게 하시는가? 자신의 객관적이며 미리 계획된 결정을 통해서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하시는가?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여기 제시된 사도의 답변을 종합해 보면 택하심과 버리심 양쪽 모두에서 하나님의 광대한 목적은 인간 창조에서 다른 모든 것보다도 뛰어난 바로 그것 자신의 영광이다.”(Robert Haldane, 1762-1842) “또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롬 9:23) 이러한 23절에서 주목해야 할 핵심은 ‘긍휼의 그릇’은 영광을 받기로 예비 되었다는 것이다.
22절은 ‘진노의 그릇’이 멸하기로 미리 준비되었다고 하지 않는다. 이를 토대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불택자들 멸하기로 영원 전에 작정하셨던 게 아니라 불택자들이 시간 속에서 스스로 무자격자가 되었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이러한 결론은 문맥에 맞지 않는다.
21절로 돌아가 여기 사용된 은유를 보면 ‘진흙’은 타락한 인간 표현에 적절한 물질이다. 진흙은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바울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처리를 타락에 비춰 논의하면서 ‘진노의 그릇’들이 본래 멸하기로 준비되었다 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진노의 그릇들이 생명을 잃고 상징적인 ‘진흙’이 된 것은 타락 후였기 때문이었다.
앞의 결론이 틀렸음을 증명하기 위해 진노의 그릇들이 멸하기에 합당한 게 아니라는 데 주목하라. 만약 진노의 그릇들이 자신의 사악함을 통해 자신을 준비했다면 ‘합당한’이라는 단어가 사용될 것이다. 그러나 본문은 진노의 그릇들이 멸하기로 ‘준비된’이라고 말하는데 문맥에 비춰볼 때 이것은 창조자께서 진노의 그릇들이 멸망에 이르도록 미리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다는 뜻이 분명하다. 이 구절에 대한 칼빈의 말을 인용해 보자.
“멸망에 이르도록 ‘준비된’ 그릇들이 있다. 다시 말해 멸망에 이르게 버려지도록 정하신 그릇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진노의 그릇들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이들이 빚어지는 목적은 하나님의 징벌과 진노의 예가 되기 위해서다. 바울은 22절에서 타락한 자들은 멸망에 이르도록 준비된 그릇들이라고 말했으나 23절에서는 하나님이 영광을 위해 택자들을 준비하셨다고 말한다. 그렇더라도 양쪽 모두 하나님의 비밀한 계획과 관계가 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게 아니라면 바울은 유기된 자들이 멸망에 이르도록 자신을 버리거나 준비한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이들이 태어나기 전에 이들의 운명이 정해졌다는 암시를 준다.”우리는 칼빈의 요약에 완전히 동의한다. 로마서 9:22은 진노의 그릇들이 자신을 멸망에 이르도록 ‘준비’했다고 말하지 않으며 이들이 멸하기에 ‘적합’하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대신에 이들이 멸하기로 ‘준비된’다고 말한다. (멸망에 이르도록 준비되어 있다.) 문맥은 이들의 멸망을 ‘준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의 객관적이며 미리 계획된 결정에 따라 이렇게 하신다.(*) 글쓴 이 / Arthur Walkington Pink 출처 / ‘아더 핑크의 하나님의 주권’ 지은이 아더 핑크, 옮긴이 전의우(서울, 요단출판사, 2014.) < 다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