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주권

아더 핑크의 하나님의 주권 연구(6)

아더 핑크의 하나님의 주권 연구(6) 구원과 하나님의 주권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15,16)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욘 2:9) 그러나 하나님은 모두 다 구원하지는 않으신다. 하나님은 왜 인류를 모두 다 구원하시지 않는가? 하나님은 인류의 일부만 구원하신다. 하나님이 인류의 일부만 구원하신다면 왜 나머지는 구원하지 않으시는가? 이들의 죄가 너무 크고 너무 타락했기 때문인가?          

아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하나님은 죄인의 괴수(魁首)까지 구원하셨다. 그러므로 죄가 너무 크다는 이유로 구원에서 제외되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모두 다 구원하지 않으시는가? 어떤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할 만큼 완악하기 때문인가?

아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돌 같은 자들도 구원하신다. “내가 (중략)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겔 11:19) 어떤 사람들은 너무나 완고(頑固)하고 강퍅(剛愎)하며 완악(頑惡)해서 하나님이 이들을 자신에게 돌아오게 하실 수 없기 때문인가? 이 물음에 답하기 전에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자.          

친구여! 그대는 악인의 꾀를 따르고 죄인의 길에 서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아(시 1:1 참조) 그들과 더불어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나이다.”(눅 19:14)라고 했던 적이 전혀 없는가? 그대는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그리스도께) 오기를 원하지 아니했던’(요 5:40) 때가 전혀 없는가? 그대는 하나님에게 “우리를 떠나소서! 우리가 주의 도리 알기를 바라지 아니하나이다. 전능자가 누구이기에 우리가 섬기며 우리가 그에게 기도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욥 21:14,15)고 말하는 자들에게 가세했던 적이 전혀 없는가? 부끄럽지만 그대는 자신에게도 이런 때가 있었다고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 모든 게 달라졌는가? 무엇이 오만과 자만으로 똘똘 뭉쳤던 그대를 겸손한 사람으로 바꿔 놓았는가? 무엇이 그대를 하나님의 원수에서 하나님의 연인(戀人)으로 바꿔놓았는가? 무엇이 그대를 불법의 사람에서 순종의 사람으로 바꿔놓았는가? 무엇이 그대를 미움의 대상에서 칭찬의 대상으로 바꿔놓았는가? 성령으로 난 사람은 의심할 여지없이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고전 15:10)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똑같이 배반(背叛)한 사람들 중에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있는 까닭은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도 아니며 하나님이 그들을 강제로 굴복시키려 하지 않으셨기 때문도 아니다. 하나님은 그대의 고집을 누그러뜨리고 그대의 마음을 얻으셨다. 그대의 도덕적 책임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그렇게 하셨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못하시겠는가? 틀림없이 그렇게 하실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악인들을 구원하지 못하시는 까닭은 하나님께서 그리 하시도록 이들이 허락지 않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면서 악인들의 태도를 변명하려하고 이들의 최종 운명에 의문을 품는 것이야말로 완전히 앞뒤가안 맞고 비논리적인 것이다. 그대는 “제가 그리스도를 저의 구주로 영접하길 원했던(willing) 때가 있었다.”라고 말하는가? 그런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대가 그리스도를 영접하길 원하게(willing)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시 110:3, 빌 2:13 참조)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모든 죄인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길 원하게(willing) 하지 않으시는가? 하나님은 주권적이시며 자기 뜻대로 행하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처음에 했던 질문으로 돌아가자. 왜 모든 사람이 특히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지는 못하는가? 대다수의 사람이 믿기를 거부(拒否)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여전히 그대의 주장인가? 대다수의 사람이 믿기를 거부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의 한 면일 뿐이다. 이것은 인간 쪽에서 볼 때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 쪽도 있으며 하나님 쪽이 강조되어야한다. 그러지 않으면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빼앗기시게 되는 것이다.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사람이 믿기를 거부하기 때문이고 구원받는 것은 사람이 믿었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왜 어떤 사람들은 믿는가? 무엇이 이들로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가? 이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똑똑해 구원의 필요성을 더 빨리 깨닫기 때문인가? 절대로 아니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고전 4:7) 

바로 하나님 그분이 친히 선택자(選擇者)와 불택자(不擇者)를 나누신다.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에 관해 이렇게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그 참되신 분을 알 수 있도록 우리에게 이해력을 주신 것을 우리는 압니다.”(요일 5:20, 표준새번역 개정판)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며(엡 2:8),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다.(살후 3:2) 그러므로 우리는 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믿음의 선물을 다 주시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구원의 은혜를 누구에게 베푸시는가?

자신이 친히 택한 자들에게 베푸신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8) 성경에 ‘하나님이택하신 자들의 믿음’(딛 1:1)이란 말이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은혜를 편파적(偏頗的)으로 베푸시는가? 만약 이것을 불의하다고 하면 하나님이 이렇게 하실 권리가 없는가? 약속된 품삯을 받았는데도 못마땅해 하며 선한 주인에게 불평했던 포도원 일꾼들처럼 지금도 이렇게 하나님께 불평하는 자들이 있는가? 있다면, 그분의 말씀이 적절한 대답이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마 20:15) 하나님은 자연(自然) 영역에서든 영적(靈的) 영역에서든 선물을 주권적으로 나눠주신다. 개괄적인 고찰은 이 정도로 끝내고 이제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Ⅰ. 구원과 성부 하나님의 주귄(1)

성경에서 인간의 운명을 결정(決定)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구절이 로마서 9장에 나온다. 여기서는 로마서 9장 전체를 살펴보는 대신 로마서 9:21-23만 간략히 살펴보겠다.  

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22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23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이 구절은 타락한 인간을 진흙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택자(擇者와 불택자(不擇者) 간에 아무 차이도 없음을 보여준다. 둘 다 똑같은 진흙덩이다. 모든 인간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말하는 에베소서 2:3도 이 진리를 뒷받침한다. 간단히 말해 모든 인간의 운명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결정된다. 이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우리 운명이 우리 손에 달렸다면 우리 모두는 예외 없이 결국 불 못에 떨어질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로마서 9:21-23은 하나님이 인간의 영원한 처소를 나누신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어떤 그릇은 ‘귀히 쓸 그릇’으로 빚어지는 반면에 어떤 그릇은 ‘천히 쓸 그릇’으로 빚어지기 때문이며, 어떤 그릇은 벌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인 반면에 어떤 그릇은 영광을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 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교만한 자에게는 토기장이의 손에 들린 진흙처럼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고 믿는 게 매우 굴욕적(屈辱的)이다. 우리도 여기에 동의한다. 그러나 성경이 정확히 이렇게 말한다. 지금은 자랑과 지적 교만과 인간 숭배가 만연한 시대다. 이런 시대에 토기장이가 자신의 그릇을 자신을 위해 만든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해야 한다.  

인간이 나서서 자기 뜻을 고집하고 자신을 지으신 분과 다툰다고 하자. 그런다고 하늘 토기장이 손에 들린 진흙덩이라는 사실이 바뀌지 않는다. 하나님은 자신의 그릇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 자신의 뜻에 따라 빚으신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자신의 피조물을 다루실 때 공의(公義)로우시며 의(義)를 행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하나님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자신의 계획대로 행하실 권리가 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신이 원하는 바를 행하실 권리가 있을 뿐 아니라 이 권리를 직접 행사하신다.

이것은 예정(豫定)의 은혜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난다.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전에 하나님은 하나의 선택(選擇)을, 하나의 선정(選定)을, 하나의 택정(擇定)을 하셨다. 시공(時空)을 초월하시는 전지(全知)하신 그분의 눈앞에 아담의 모든 후손이 있기 전에 하나님은 특정한 민족을 택하여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롬 8:29) 예정(豫定)하셨으며 이들이 영생에 이르도록 작정(作定)하셨다. 많은 성경 구절이 이 복된 진리를 보여준다. 그중에 일곱 구절을 살펴보겠다.

(1) 사도행전 13:48

48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作定) 된 자는 다 믿더라.

이 구절의 예리한 날을 무디게 하고 분명한 의미를 피하기 위해 인간의 온갖 교묘한 기술이 다 동원되었다. 그러나 분명하게도 이 모든 시도가 헛수고였다. 왜냐하면 확신컨대 그 무엇도 이러한 구절과 인간의 자연스런 생각을 조화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作定) 된 자는 다 믿더라.” 이 구절은 네 가지를 가르쳐준다.

  • 믿음은 하나님의 작정(作定)의 원인(原因)이 아니라 결과(結果)다.
  • 오직 제한(制限) 된 수(數)에게만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되었다. 만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예외 없이 작정하셨다면 ‘작정’이라는 말이 무의미하여 필요 없기 때문이다.
  • 하나님의 ‘작정’은 단지 땅에서 축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영생(永生) 이다. 단지 섬김을 위한 작정이 아니라 구원(救援) 그 자체를 위한 작정이다.
  • 작정(作定) 된 자는 ‘다’이다. 빠지거나 더함이 없이 아주 틀림없이 ‘다’ 믿을 것이다.            

찰스 스펄전(Charles Haddon Spurgeon, 1834-1892)은 이 구절에 대해 주목할 만한 말을 했다.

“사람들은 이 구절이 예정(豫定)을 말하지 않는다고 증명하려 애썼으나 그들은 본문을 분명히 왜곡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들을 공박(攻駁)하는 데 시간을 허비하지 않겠습니다. 본문은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본문을 왜곡하지 않겠습니다. 그 대신에 모든 사람의 믿음을 하나님의 은혜로 돌림으로써 그 은혜를 자랑하겠습니다. 믿으려는 마음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영생을 얻으려는 마음이 있다면 모든 경우에 이 마음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이런 마음을 주시는 게 옳다면 그분이 이런 마음을 의도적으로 주시는 게 잘못입니까? 여러분은 그분이 이런 마음을 우연히 주시길 원합니까? 그분이 오늘 은혜를 주기로 목적하시는 게 옳다면 그분이 그것을 오늘 전에 그분은 변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영원 전에 목적하시는 것도 옳습니다.”

(2) 로마서 11:5,6

5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6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이 구절 첫머리의 ‘그런즉’이라는 접속사는 바로 앞 4절의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라는 구절을 가리킨다. ‘남겨두었다.’라는 단어에 특히 주목하라. 엘리야 시대에 하나님이 우상숭배에 빠지지 않게 보존하시고 참 하나님을 알도록 인도하신 사람은 7천 명에 불과했다. 작은 수였다. 보존되고 비췸을 얻은 이 작은 그룹에 이들이 포함된 이유는 이들이 잘나서가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특별한 능력과 섭리 때문이었다. 하나님이 이런 방법으로 이들을 ‘남겨 두셨으니’ 이들이야말로 큰 복을 받았다.

사도 바울은 이 사건을 근거로 엘리야시대에 ‘하나님이 남겨두신’ ‘남은 자’가 있었듯이 이 시대에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다고 기록했다. 여기서 바울은 택하심의 원인을 그 근원(根源)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나님이 이 특별한 남은 자를 선택하신 까닭은 이들이 장차보일 믿음의 행위를 미리 아셨기 때문이 아니었다. 우리가 이것을 아는 까닭은 선한 행위에 대한 예지(豫知)에 근거한 선택은 궁극적으로 ‘행위’에 근거한 선택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선택이 ‘행위’에 근거한 선택이었다면 은혜로 이루어진 선택이 아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듯이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은혜와 행위가 서로 반대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은혜와 행위는 공통점이 전혀 없으며 물과 기름처럼 서로 섞이지 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을 택하신 까닭은 이들에게서 내적인 선(善)을 미리 보셨거나 이들이 행할 공로(功勞)를 미리 아셨기 때문이라는 주장은 완전히 무너진다.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결과인 무조건적(無條件的) 선택(選擇)을 의미한다. 한 마디로 이것은 절대 이유가 없는 선택이다. 인간 쪽의 전조(前兆)와 전혀 무관한 선택이다.(*) 글쓴 이 / Arthur Walkington Pink 출처 / ‘아더 핑크의 하나님의 주권’ 지은이 아더 핑크, 옮긴이 전의우(서울, 요단출판사, 2014.) < 다음속 >  

하나님의 작정(作定)

정의 : 하나님의 작정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장차 일어날 모든 사건들을 그의 기쁘신 뜻대로 미리 정하시는 그의 영원한 목적이다. 주의 : 이 정의는 시공(時空)의 제한을 받는 인간의 관점에서 정의한 것이다. 시공의 제한을 받지 않는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과거도 미래도 없고 오직 현재(現在)만 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작정과 예정의 차이 : 하나님의 작정(作定)은 우주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보편 계획이고(엡 1:11, 행 17:24,26), 예정(豫定)은 하나님의 인간 구원(救援)에 관련 된 하나님의 특별계획이다.(롬 9:1-18)  

하나님의 작정의 특성 : 1) 신적 지혜에 기초한다. 2) 영원적이다. 3) 불변적이다. 4) 효과적이다. 5) 절대적이며 무조건적이다. 6) 보편적(포괄적)이다. 7) 죄에 대해 허용적이다. 출처 / ‘Charts of Systematic Theology’ (기독교문서선교회, 2010. p.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