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주권

아더 핑크의 하나님의 주권 연구(8) 구원과 하나님의 주권

아더 핑크의 하나님의 주권 연구(8) 구원과 하나님의 주권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 10:27-29) 

Ⅱ. 구원과 성자 하나님의 주권(1)

그리스도께서 누구를 위해 죽으셨는가?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죽음에 내어주신 데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논쟁할 필요가 전혀 없다. 아무도 이것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성자 하나님이 생명을 버리실 때 그분의 마음에 분명한 계획이 있었다. 이것 또한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세상의 시작부터 그의 모든 역사가 하나님께 알려졌느니라.”(행 15:18, 한글 킹제임스)라는 말씀과 같다.  

그렇다면 성부 하나님의 목적과 성자 하나님의 계획은 무엇이었는가? 그 대답은 이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위해 죽으셨다. 이러한 가르침이 다시 말해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택하신 자들만 구원하기로 하셨다는 가르침(하나님의 선택 또는 예정)이 지금까지 많은 논쟁의 대상이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잘 안다. 성경의 큰 진리 중에 숱한 논쟁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 있었는가?

우리는 또한 복 된 주님과 그분이 하신 일과 관련된 것은 무엇이든 최고로 경이(驚異)롭게 다뤄야 하며 우리의 모든 주장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분명하게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정한다. 우리는 율법과 언약을 우리 신앙의 근거(根據)로 삼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누구를 위해 죽으셨는가?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피를 흘리심으로써 누구를 구속하기로 계획하셨는가? 주 예수께서 십자가로 향하실 때 그분의 마음에 확실한 목적이 있었다.  

그분에게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면 그 목적은 틀림없이 제한적(制限的)이었다. 그분의 목적은 그분의 승리에서 절대적으로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분명한 목적에 온 인류가 포함되었다면 온 인류가 구원받을 게 확실하다. 많은 사람이 이런 필연적 결론을 피하려고 그리스도 이전에는 분명한 결정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단지 구원을 온 인류에게 조건적(條件的)으로 제시했을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구약성경의 약속들이 성자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육신이 되시기도 전에 성부께서 성자에게 주신 약속들이 이와 같은 그릇된 가르침을 반박한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의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중략)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사 53:10,11) 

여기서 잠시 멈추고 물어보라. 만약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의 구원을 미리 결정하지 않으셨고 따라서 확실한 것이 없었다면 어떻게 성경이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씨를 보게 되며 (중략)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고 예언할 수 있었겠는가? 어떤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와 구주로 영접하리라는 분명한 계획이 없었다면 어떻게 성경이 그리스도께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사 53:11)라고 확실하게 예언할 수 있었겠는가?

이와는 반대로 주 예수께서 분명히 모든 사람의 구원을 바라셨다고 단언하는 것은 모든 것을 아시는 성자 하나님이 실패할 줄 알면서도 계획에 참여하셨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지적 존재라면 절대로 이런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대안은 하나밖에 없다.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해 미리 결정된 목적을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택하신 자들만을 위해 죽으셨다.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목적은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주신 모든 자의 구원을 확실히 하시기 위해서였다.”  

또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목적은 단지 죄 용서를 가능하게 하기 위한 것 뿐만이 아니라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애기’(히 9:26) 위해서였다. 그렇다면 누구의 ‘죄’를 ‘없애기’ 위해서였는가? 성경은 택하신 자들의 죄 곧 하나님의 백성인 ‘세상’의 죄를 없애기 위해서였다고 분명하게 말한다.(요 1:29 참조) 

1. 하나님 목적이 일반적임을 보여주는 원리들

(1) 구원에 이르도록 작정한 아버지의 영원한 선택을 토대로 그리스도의 피는 오직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의 죄를 덮는다.

성경에 따르면 주님은 육체가 되시기 전에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중략)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히 10:7)라고 말씀하셨으며, 육체로 계실 때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요 6:38)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도록 처음부터 선택하셨다면 예수님은 선택된 자들 외에 더 찾지 않으실 것이다. 우리가 알듯이 아들의 뜻과 아버지의 뜻은 완전히 일치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지 우리만의 결론이 아니라 말씀의 가르침과 정확히 일치한다. 주님은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주신 자들‘을 거듭 말씀하셨으며 이들에게 큰 관심을 표현하셨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중략)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 6:37,39) 그리고 주님은 또 이렇게 기도하셨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중략)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중략)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요 17:1-2,6,24) 

아버지께서 아들의 형상을 닮도록 하나님의 백성을 미리 정하신 때는 세상이 창조되기 전이었으며 주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성취된 이유는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2) 속죄의 성격은 하나님의 목적이 오직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에게만 적용되었음을 확인해 준다.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을 크게 두 관점에서 살펴볼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관점과 인간의 관점이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진노(震怒)를 풀었고 하나님의 공의(公義)와 거룩을 만족하게 했다. 그리고 인간의 관점으로 보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대속(代贖) 곧 죄 없는 자가 죄 있는 자를 대신하고 의로운 자가 불의한 자를 대신하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한 사람이 여러 사람을 정확히 대신하며 그 사람이 자원하여 고난받게 하려면 미리 합의가 이뤄져야 한다.

대속자와 그의 고난을 통해 노(怒)를 푸는 자 사이에 그의 대속 행위가 구체적으로 누구를 위하는지에 대해 완전한 합의가 이뤄져야 한다. 대속자가 누구의 죄를 담당하며 누구의 법적 책임이 면제되는지 양쪽 다 알아야 한다. 더 나아가 입법자가 거래를 받아들이면 대속자가 대신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사면(赦免)되어야 한다. 내가 빚을 졌으나 도저히 갚을 길이 없는데 누군가 나서서 내 빚을 완전히 갚고 그 증거로 영수증을 받았다면 법적으로 채권자는 내게 더 이상에 아무 권리가 없다.

주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을 대속(代贖)의 제물(祭物)로 주셨다. 그리고 사흘 후에 열린 무덤이 증명하듯이 하나님은 이 대속물을 완전히 받아들이셨다. 그렇다면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이것은 누구를 위한 대속물(代贖物)이었는가? 그가 온 인류를 위한 대속물이셨다면 모든 사람의 빚이 청산되었다. 그리스도께서 나무에 달려 자신의 몸으로 예외 없이 모든 인간의 죄를 담당하셨다면 인간 중 아무도 멸망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아담의 모든 후손을 위해 저주를 받은 바 되셨다면 이제 아무도 ‘정죄 아래’ 있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중으로 요구하지 못하신다. 나의 피 흘린 보증인(그리스도)에게 요구하시고 또 죄인인 내게 요구하지는 못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예외 없이 온 인류의 빚을 갚으신 게 아니었다. 어떤 자들은 ‘감옥에 던져질’ (벧전 3:19 참조) 것이며,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마 5:26), 한 푼도 남김없이 다 갚기란 절대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예외 없이 지구상에 태어난 온 인류의 죄를 담당하신 게 아니다. 성경이 어떤 사람들은 ‘너희 (자신의) 죄 가운데서 죽겠고’(요 8:21) 이들의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요 9:41)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담의 모든 후손을 위해 ‘저주를 받은 바 되신’게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사람들에게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라!”(마 25:41)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똑같이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고, 그리스도께서 온 인류의 대속물과 보증이 되셨다고, 그리스도께서 온 인류를 위해 온 인류를 대신해 고난받으셨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직접 저주를 겪고 있는 자들을 위해 저주를 받으셨다고, 이 순간 지옥에서 너무나 고통스러워 눈을 치켜뜨는 많은 자를 위해 형벌을 받으셨다고, 영원한 고통 속에서 죄값(죄값은 죽음이다)을 치를 많은 자를 위해 속전(대속물)을 치르셨다.”고 말하는 것이다.(George S. Bishop)

(3) 주님의 제사장직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은 속죄의 범위가 제한적임을 보여준다.

지금 그리스도께서는 대제사장으로서 중보(仲保) 하신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는 누구를 위해 중보 하시는가? 온 인류를 위해서인가 아니면 오직 그분의 백성만을 위해서인가? 신약성경은 이 질문에 빛처럼 분명하게 대답한다. 우리 구주께서 하늘에 들어가셨고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신다.”(히 9:24) 다시 말해 ‘하늘의 부르심에 참여한 자들’(히 3:1 KJV)을 위해 하나님 앞에 나타나신다. 성경은 또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그리도께서는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히 7:25) 

이것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모형과 일치 한다. 아론은 희생제물을 죽인 후 하나님의 백성의 대표자로서 그들을 대신해 지성소에 들어갔다. 그의 흉배(胸褙)에는 이스라엘 지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하나님 앞에 나아갔다. 이러한 개념은 요한복음 17:9에 나오는 주님의 기도와 일치한다.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 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또 로마서 8:33,34은 이렇게 말한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라고 물은 후 이렇게 대답한다.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특히 그리스도의 죽음과 중보 사역이 택하신 자들과 어떻게 직접 연결되는지 주목하라.

상(賞)과 간구 둘 다 동일(同一)한 사람들의 유익을 위한 게 분명하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중보가 ‘온 세상을 위한’게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만을 위한 것이라면 그리스도의 죽음도 오직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만을 위한 것이라는 뜻이다. 더 나아가 주 예수의 죽음과 부활과 승귀(昇貴)와 중보 때문에 그 누구도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을 조금도 ‘참소’(讒訴, charge)하지 못한다.

이런 사실에 비춰 다음 물음을 생각해 보라. 만약 그리스도의 죽음이 모두에게 적용된다면 믿지 않는 자들이 ‘정죄 아래’(요 3:18 참조) 있는데 어떻게 그분의 죽음이 ‘참소’를 막는 안전장치일 수 있겠는가?

(4) 그리스도의 죽음이 효력을 미칠 제한 된 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결정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육체로 나타나신 하나님이다. 이 사실에 필연적으로 이어지는 추론(推論)이 있다. 하나님은 목적하신 일을 틀림없이 이루신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자신이 값 주고 사신 것을 소유하시며 자신이 마음에 두신 것을 획득하신다. 예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능력과 권세를 가지셨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그분의 뜻을 거역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렇게 말할지 모르겠다. “원칙적으로야 그렇겠죠.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 능력을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왜냐면 그분은 절대로 아무에게도 그분을 자신의 주요 구주로 영접하라고 강요(强要)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이 한편 참이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거짓이다.

죄인의 구원은 하나님의 능력의 문제다. 죄인은 본질상 하나님과 원수지간이며 그의 안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 외에 아무것도 이 관계를 극복하지 못한다. 그래서 주님은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요 6:44)라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타고난 원수 관계를 극복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인간으로 그리스도께 나아오게 한다. 왜 그런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원수 관계가 너무 깊어 인간은 이 관계를 도저히 스스로 극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들어가시지 못할 만큼 굳게 닫힌 마음이 있는가? 있다고 대답하면 그분의 전능하심을 부정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이것은 개인이 원하느냐 원하지 않느냐의 음의 문제가 아니다. 본성적으로 모든 인간은 (그리스도께 나오길)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 그리스도께 나오길 원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그 사람의 마음과 의지(意志)에 작용한 결과인 것이다. 이런 하나님의 능력이 인간이 타고난 내면의 끈질긴 ‘적개심’을 무너뜨린다.    

성경 기록대로다.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중략) 즐거이(Willing, 자진해서) 헌신하니”(시 110:3) 그리스도께서 (구원받길) 원하지 않는(unwilling) 자들은 주님이 구원하지 못하신다고 말한다면 하늘과 땅의 모든 능력과 권세가 그분에게 있음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책임(또는 자유의지)을 부정하지 않고는 자기 능력을 행사하지 못하신다는 말은 완전히 틀린 말이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능력을 이미 행사하셨으며 자신에게 나온 자들로 원하게(willing, 자진해서 나오게) 하셨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누군가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다른 사람들에게 꼭같이 못하실 이유가 있는가? 하나님은 한 죄인의 마음을 자신에게로 돌이키실 수 있다. 그렇다면 다른 죄인들의 마음도 그렇게 하시지 못할 이유가 있는가?” 많은 사람이 이렇게 말한다. “어떤 사람이 구원받지 못하는 까닭은 하나님이 자신을 구원하시도록 그가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말은 하나님이 전능하시지 못하다며 그분을 비난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의심하는 것이다.

만일 주 예수께서 온 인류의 구원을 작정하시고 바라며 목적하셨다면 온 인류가 다 구원받을 것이다. 다시 말해 온 인류가 구원받든지 아니면 그리스도께서 자기 목적을 성취할 능력이 부족하든지 둘 중 하나다. 그리스도의 능력을 조금이라도 의심했다면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는 예언은 절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런 말은 또 구주의 신성(神性)을 공격하는 것이기도 하다. 실패한 구주는 하나님일 수 없기 때문이다.    62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이것을 기억해야 한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4-9)(*) 글쓴 이 / Arthur Walkington Pink 출처 / ‘아더 핑크의 하나님의 주권’ 지은이 아더 핑크, 옮긴이 전의우(서울, 요단출판사, 2014.) < 다음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