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단상

아름다운 세습도 있다

후임목사 세습에 대해

아름다운 세습도 있다

몇 년 전 기독교방송을 보며 깊은 감동과 도전을 받은 사건이 있었다. 남해(南海)의 한 작은 섬에 있는 어느 미자립(未自立) 교회 이야기였다. 담임 목사님이 은퇴하실 나이가 되어 몇 년 동안 후임을 찾는 광고를 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작은 섬에 있는 미자립 교회 후임을 구한다는 광고에 반응하는 목사는 아무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은퇴를 앞둔 그 목사님은 먼 도시(都市)에서 목회를 잘 하고 있던 아들 목사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하고 아들에게 간청하여 자기 아들을 자신이 섬기던 섬마을 교회의 후임 목사로 세웠다. 이런 모습이 내 눈에는 아버지 목사님이나 아들 목사나 모두 훌륭해 보였다. 그리고 “아, 이런 것이 아름다운 세습(世襲)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선교지에서 아버지의 사역(事役)을 이어가는 아름다운 세습도 보았다. 안일한 삶을 뒤로하고 열악한 환경의 선교지로 돌아온 자녀들도 만나보았다. 부와 명예를 내려놓고 스스로 역경과 고난의 길을 걷고 있는 2세 선교사들의 모습에서 나는 아름다운 세습을 본다. 반면 최근 어느 대형교회의 세습 문제는 세간에 큰 이슈가 되어 교인들 뿐 아니라 불신자들에게도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리고 바람직하지 않은 잘못 된 세습의 대명사가 되어 버렸다. 추한 세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세습이 불의하고 그릇된 것인가? 바르고 바람직한 세습은 없는 것인가? 세습 자체가 불의한 것인가? 아니다. 세습 가운데는 아름답고 바람직한 세습도 있고 추하고 거부해야 할 세습도 있다. 바른 동기와 목적과 바른 방법을 통한 세습은 아름답다. 단지 세속적인 동기와 목적을 갖고 편법과 불법이 동원된 세습은 추하다.

따라서 하나님의 교회를 위한 순수한 동기에서 비롯된 세습이나, 교회나 교단이 정한 적법한 절차를 통한 세습을 거부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목회적인 소양(素養)이나 역량(力量)이 부족한 자녀가 아버지의 부당한 정치적 개입이나 압력으로 말미암아 후임으로 선정되는 일은 피해야 하지만 목회적인 소양과 역량이 잘 갖추어진 자녀가 교인들의 요구와  교회법에 적법한 과정을 통해 후임으로 선정한 일을 정죄할 수는 없다.

후임목사 선택권이 교인들에게 있는 한 후임목사 선택에 외부인(外部人)들이 관여할 바는 아니라고 본다. 후임목사 선택 과정이 적법하지 않은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다면 노회(老會)가 나서서 교정해 주면 된다. 그러므로 총회, 노회, 지(支) 교회의 법에 따라 적법하게 후임을 정했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누구를 정했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될 수는 없다.

후임 목사 선택과 결정은 지(支) 교회의 공동의회가 최종적인 권한을 갖고 결정할 일이다. 객관적으로 목회자의 자녀가 타 지원자들보다 더 훌륭한 목회적인 소양과 자질을 가지고 있다면 지(支) 교회는 당연히 그 자녀를 후임으로 삼고 싶을 것이고 공동의회를 거처 그 자녀를 후임 목사로 삼을 수 있는 권한이 있다. 따라서 지(支) 교회가 적법한 방법과 절차를 걸쳐 선임한 후임 목사가 누가되든지 이러한 선정 결과에 대해 외부인들이 관여하거나 비난할 권한은 없다고 본다.  

한국 사회와 교회에 대형교회가 미치는 영향이 큰 것은 사실이다. 대형교회일수록 순수한 기독교적 가치가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희생과 봉사를 통한 섬김의 모델이 되어야 한다. 교회는 돈과 권력과 명예를 추구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공동체임을 보여주어야 한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권력욕과 명예욕에 함몰 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반성하는 기회로 삼았으면 좋겠다.

생각해 보면 우리 역시 이런 세속적 가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대형교회 세습에는 많은 흥미와 관심을 가지면서도 미자립 교회나 선교지의 세습에는 무관심(無關心)한 우리의 태도에는 분명 문제가 있다. 대형교회 후임에는 지나칠 정도로 관심을 보이면서도 작은 교회 후임에는 외면한 우리의 태도를 반성해 본다. 세습할 자녀조차 없는 미자립 교회 목회자들의 안타까운 심정과 세습할 자녀가 선교지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선교사들의 심정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았으면 좋겠다. 세상 모든 세습이 다 추한 것은 아니다. 고난과 역경을 물려주고 물려받는 아름다운 세습도 있다. 하루속히 한국교회가 추한 세습은 다 사라지고 아름답고 바른 세습만 있기를 바란다.(*) 글쓴 이 / 김학유 교수(한동신학대학원대학교 선교신학)  출처, ‘합신은 말한다’, vol. 33-3, 2018년 9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