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강좌

어떤 몸으로 부활 하는가?

알기 쉬운 평신도신학(2)
어떤 몸으로 부활 하는가?

사람의 몸은 죽어 흙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마침내는 썩어서 없어진다. 하지만 주님의 재림 때에는 죽었던 모든 사람의 몸이 다시 살아난다. 최후의 심판을 받기 위해서이다. 성경에는 나사로, 유두고, 회장당의 딸, 수넴 여인이나 나인성 과부의 아들 등에서 보는 것처럼,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난 기록들이 자주 등장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무덤에서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주님의 재림 때에 있을 부활은 그들의 부활과 다르다. 그 때에는 일부 소수의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다 부활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는 죽는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장차 어떠한 몸으로 부활을 할 것인가, 또 그 때에 있을 최후 심판의 상황은 어떠할 것인가에 대해서 살펴보자.

1. 죽은 자의 부활
(1) 부활의 증거
1
한번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이미 분해되어 없어져 버린 몸이 어떻게 다시 결합되어질 수 있을까. 우리는 이러한 생각 때문에,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게 되기가 쉽다. 그러나 성경은 여러 곳에서 죽은 자의 부활을 분명하게 말씀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죽은 자 가운데에서도 능히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자기 아들을 제물로 바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히 11:19) 이러한 믿음은 선지자들의 믿음이기도 했다. 이사야 선지자는“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라. 땅이 죽은 자를 내어놓으리로다.”라고 말했다.(사 26:19) 또 에스겔 선지자는“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한 즉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고 했다.(겔 37:13)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의 부활을 여러 차례 말씀했다. 예수님께서는 믿기를 거절하고 자기를 핍박하는 유대인들에게 이르시기를, 하나님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기에, 심판에 이르지 아니 할 것이며,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고 하셨다. 그리고 곧 이어서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자가 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올 것이라고 말씀했다.(요 5:29) 또 오빠의 죽음으로 슬픔에 잠겨 있던 마르다에게‘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이라고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소망으로 위로를 받게 하셨다.(요 11:25)

사도 바울은 죽은 자의 부활을 조금도 의심의 여지가 없는 분명한 사실로 받아들였다. 그 증거는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잘 나타난다. 고린도전서 15장은 그 전체가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부활장(復活章)이라고 한다. 사도 바울은 죽은 자의 부활을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관하여 설명했다. 그리스도께서는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부활도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파하는 것도 거짓이 될 것이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도 헛것일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확실한 사실인 것처럼, 죽은 자들의 부활도 역시 확실하다는 것을 강조하여 말하기 위한 방법이다.

2
사도 바울은 죽은 자의 부활을 땅에 뿌려지는 씨앗에 비유하여 설명했다. 땅에 떨어진 씨앗은 죽는다. 그러나 그 씨앗은 다시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나 열매를 맺는다. 이처럼 사람은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산다고 했다.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산다고 했다.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산다고 했다.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산다고 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제시하신 것과 비슷한 예를 다른 경우들에서도 발견할 수가 있다. 곤충은 얼핏 보면 죽는 것 같아 보이나, 전혀 다른 모습의 생명체로 탈바꿈하여 살아간다. 겨울에 보는 나무나 풀은 아주 죽은 것 같으나, 새봄에는 다시 새싹을 틔운다. 그믐이 되어 없어졌던 달은 또다시 보름달로 차오른다. 그러므로 이 모든 증거들을 통해서, 우리는 죽은 자의 부활을 분명한 사실로 믿는다. 그리고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니다.”라고 고백을 한다.

(2) 부활체

우리는 부활한 이후의 몸을 흔히 부활체라고 부른다. 그러면 부활체는 어떠한 상태일까. 지금의 몸 그대로일까, 아니면 지금과는 전혀 새로운 모습일까, 성경은 부활체에 이 두 가지의 특성이 다 있을 것을 가르친다.

1) 부활체는 지금의 몸과 동일하다.

모든 사람들이 다 부활을 한다고 하여, 그 부활한 몸까지 누가 누구인지를 알아볼 수 없도록 모두가 똑같은 상태로 되는 것은 아니다. 부활체는 붕어빵 기계에서 똑같은 빵을 계속해서 찍어내는 것과는 다르다. 사람의 몸은 부활을 한 이후에도, 이 땅에서 살았을 때와 동일한 각자의 고유하고 독특한 특성들을 그대로 유지한다. 그래서 각 사람마다 그가 누구인지에 대한 구별이 충분히 가능하다. 죽은 나사로와 아브라함에게 서로를 알아 볼 수 있는 구분이 있었음이 이를 입증해주고 있다.

우리는 죽음을 대할 때마다 이별의 슬픔을 경험한다. 그러나 우리는 장차 부활을 한 이후에, 각기 다른 특성들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그들을 다시 만나보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성도들은 이러한 부활을 기대한다. 그러기에 성도는 죽음의 이별 앞에서도 마르다 처럼 소망 중에 위로를 받는다.

2) 그러나 부활체는 지금의 몸과 다르다.

부활체의 인격의 주체는 죽기 이전의 주체를 그대로 유지한다. 그러나 그 상태는 지금의 몸과 다르다. 왜냐하면 부활체는 신령한 몸으로 변화가 되어지기 때문이다.(고전 15:44) 부활체가 지금의 몸과 다른 점은 다음과 같다. 부활체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부활체는 질병에 시달리는 일이 없다. 썩어지거나 죽지도 않는다. 또 부활체는 이 땅에서와 같은 방식의 사회생활을 계속하지 않는다. 그래서 시집이나 장가를 가지 않는다. 혈연관계에 구애를 받지도 않는다. 우리는 부활한 이후에도, 이 땅에서의 부모나 자녀, 주인이나 종 또는 친구나 이웃들을 분명하게 알아 볼 것이다. 그러나 그런 관계가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땅에서의 인간관계는 더 이상 지속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3) 예수님의 부활체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 부활체가 어떠한 것인지에 대한 암시를 받을 수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운명 전의 몸과 동일하면서도 다른 점이 있었다. 예수님은 운명하기 이전의 모습 그대로 부활을 하셨다. 그리고 바로 그 몸으로 제자들과 이야기를 하시고, 음식을 잡수셨다. 제자들은 그 모습을 그들의 눈과 손으로 분명하게 확인했다. 사람들도 이처럼 각자의 고유한 특성을 지닌 부활체를 가질 것이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에는 큰 변화가 있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잠긴 문을 통과하셨다.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시기도 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토록 변화된 모습 때문에, 무덤을 찾았던 여인들이나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예수님을 몰라보기까지 했다.

(3) 부활의 대상

죽은 자의 부활에는 의인과 악인의 구별이 없다. 죽은 모든 사람들은 선악간의 예외 없이 다 부활하게 된다. 그러나 부활을 하게 되는 목적과 그 이후 상태는 구별이 있다. 의인은 부활을 한 이후에 영생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악인은 영벌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의인과 악인의 부활을 각각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이라는 다른 명칭으로 구별하여 부르셨다.“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8, 29) 사람들 중에는 부활에 이르지 않는 예외가 있다.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살아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는 몸의 부활이 없다. 그들은 죽음을 통과하지 않고, 살아 있는 그대로 주의 재림을 맞이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몸은 주님의 재림 때에 홀연히 변화를 하게 된다. 그래서 죽었다가 부활한 자들의 부활체와 똑같은 상태가 된다.(*) 글쓴 이 / 박일민 교수(칼빈대학교 조직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