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우리 마음이 뜨거운가?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를 통해 보는 언제 우리 마음이 뜨거운가?

1. 말씀을 통해 양심의 가책을 느낄 때
<본문 : 누가복음 24:13-35> 엠마오로 돌아가던 두 제자는 그리스도의 책망을 받고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25절에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를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라고 제자들을 책망하셨다. 사람이 죄를 깨달을 때 가슴이 뜨끔해진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앙(不信仰)은 가장 큰 죄인데(요 16:9) 사람들이 이 죄에 대한 의식(儀式)을 갖기만 하면 큰 죄감(罪感)을 느낄 것이다.
사람들은 보통 큰 것을 느끼지 못한다. 공이 굴러가는 것은 잘 느끼면서도 지구의 도는 것은 느끼지 못한다. 예수님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불신앙을 꾸짖으시니 그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껴 그 마음들이 마치 불을 품은 것 같았다.(눅 24:25,32)
2. 말씀을 통해 새 소망을 갖게 될 때
두 제자는 주께서 살아나셨다는 말을 듣고 새 소망으로 그 마음이 불타올랐다. 26절에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라고 하셨다. 여기 ‘할 것이 아니냐!’란 말은 헬라어로 ‘욱키 에데이’(οὐχὶ ἔδει)이다. 이는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게 하는 필연성’(必然性, divine necessity)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의 부활 소망을 제자들에게 뜨겁게 해주는 것이다.
제자들이 본래부터 그리스도의 부활 소망이 있었더라면 새삼스레 마음이 뜨거워질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이때까지 슬픔에 잠겼다가(눅 24:17,21) 주님의 풀어주시는 말씀을 듣고 이 소망의 위로를 받으니 이는 마치 밤중에 어둠 속을 헤매던 자에게 햇빛처럼 반가웠고 잃었던 보배를 되찾게 된 자의 가슴처럼 뜨거워졌다.
이스라엘의 구속자(救贖者)로 바라던 사랑의 대상(눅 24:21)이 죽어버린 줄 알았는데 이제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망을 가지는 그들의 가슴이 어찌 뜨겁지 않았으랴! 약혼자는 그 신랑 이야기만 들어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뜨거움을 느낀다. 그 신랑이 죽은 줄 알았다가 어디에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들을 때 그의 마음이 얼마나 뜨거워지랴!
3. 주님이 해석해 주시는 말씀을 들을 때
제자들은 예수님의 자세한 성경 해석으로 인해 ‘부활 진리’의 확신(確信)을 갖게되고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다. 사람이 확신이 생기면 마음이 움직여지며 뜨거워지는 법이다. 사도행전 18:5에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렸다는 것이 그와 같은 것이며, 예레미야 20:7-9에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으려고 할 때 중심에 불붙는 것 같았다는 것도 그런 것이다.
예수님은 진리 자체이시며 성경 말씀의 창작자(創作者)이시므로 힘이 있다. 그러므로 산상보훈(山上寶訓)을 주신 다음에도 사람들이 “그 가르치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다.”고 했다.(마 7:29) 주님의 말씀은 사람들이 듣는 때마다 마음에 뜨거움을 일으켰다. 말씀에 의한 주님의 현림(現臨. 말씀을 통해 임하심)의 역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뜨겁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 본문 32절은 “주님이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라고 하였으니 마음 뜨거워진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부활하신 메시아 로 알아본 증표(證票)이다.
4. 말씀을 새롭게 깨닫게 될 때
우리는 두 제자가 말씀을 새롭게 깨달은 새로운 성경관(聖經觀)으로 인해 그들 마음이 뜨거워진 것을 알 수 있다. 본문 27절의 ‘모든 선지자’라는 말씀과 ‘모든 성경’이란 말씀을 보니 예수께서 부활에 대한 예언(豫言)을 성경의 한두 구절만 인용(引用)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마음에는 성경의 전부가 부활에 대한 예언이었다. “나는 (중략)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출 3:6)는 구약의 말씀을 주님이 부활에 대한 예언으로 해석(마 22:32)하실 때 듣던 무리가 다 주님의 이 같은 성경 해석에 대단히 놀랐다고 했다.(마 22:33)
5.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말씀을 들을 때
그리스도의 부활(復活)은 인류 역사에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인류 구원의 대사건’인 고로 이 진리를 듣는 자들의 마음이 뜨거워진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부활 사건은 천지(天地)를 새롭게 하는 것이다. 죽은 자들을 다시 살리는 사건이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온 천하에 변혁(變革)을 일으킨다. 이것은 불과 같은 진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리는 무엇이나 다 이런 중대성(重大性)을 띤 것이다. 누가복음 12:49에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라고 하셨다. 이것은 그의 전하실 복음의 말씀이 세상을 뒤집어엎을 중대성을 띤 것임을 가리킨다.
6. 사망의 세계에서 생명의 세계를 바라볼 때
두 제자의 심령이 생명 세계를 사모하여 갈망했던 고로 부활의 주님을 만나 생명의 세계를 바라보게 될 때 그들 마음이 뜨거워졌다. 그들은 부활의 진리를 깨달은 후에 사망 세계에서 생명 세계를 바라보게 되었다. 그들의 마음은 이제부터 ‘영광에 들어감’(눅 24:26)에 대하여 바라보며 갈망(渴望)하게 되었다. 그러나 실상은 그것이 주님께서 그들을 부활하신 ‘주님의 영광’으로 끌고 들어가려 하신 것이다.
부활 후 그가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가도 될 수 있는 대로 그들을 뗘나려 하시고 다시 나타나셨다가 그 자취를 감추신 이 모두가 다 그들의 마음을 간절하게 만들어주시려는 것이었다. 28절 “저희의 가는 촌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 같이”하셨다는 그것이 그렇고 31절에 “저희 눈이 밝아서 그인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라고 한 것도 그의 제자들을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로 이끌어 가시려는 운동이었다.
왜냐면 그들은 이제부터 보이지 않는 예수를 믿어야 하며 보이지 않는 예수를 사랑하며 사모(思慕)해야 하기 때문이다. 새장에 갇힌 새가 바깥세상 공중(空中)을 내다보고 얼마나 사모하며 안타까워하는가? 그와 같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부활하신 주님이 주시는 그 영원한 생명 세계를 향하여 간절히 사모할 때에 그들 마음이 뜨거워 견딜 수가 없었고 이 소망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엠마오로 향하던 두 제자는 절망의 발걸음을 되돌려 예루살렘을 향해 달려갔다.(*) 글쓴 이 / (고) 정암 박윤선 목사, 출처 / 박윤선 목사 저, ‘설교집 영생의 원천’(서울, 영음사) 1977년 pp.113-115. 원제 : 엠마오로가는 두 제자의 마음이 뜨거워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