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단상

오늘의 한국교회 정황에서 보는 21세기의 종교개혁

“나는 성경과 정상적인 이성에 의하여 조정되지 않는 한 내가 말한 어느 것도 철회하지 않겠다. 내가 여기에 서있나이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1521년 4월 16일 보름스에 소환 된 마르틴 루터가 왕과 제후들과 추기경들 앞에서 외친 말)

종교개혁의 역사적 원인과 그 과정에 대해 수없이 많은 이야기가 회자 되어 왔다. 물론 이를 더 탐구하는 일은 지속이 돼야 할 일이다. 그러나 이와 함께 중요한 일은 오늘 우리의 정황에서 종교개혁을 되돌아보는 일이다.

21세기 한국교회의 정황 가운데서 종교개혁을 돌아볼 때 우리는 과연 무슨 생각을 해야 하고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 글에서는 이런 관심을 가지고 21세기 초 한국교회의 한 가운데서 16세기 종교개혁을 살펴보려고 한다. 이 일이 특히 의미 있는 건 수년 전부터 16세기 그때 그곳의 정황과 현재 한국교회의 정황이 겹치는 듯한 느낌을 많은 사람이 받고 그런 지적을 여러 번 해 오고 있기 때문이다.

  1. 한국교회의 부패와 타락상

이런 문제를 생각할 때 사람들의 의식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교회의 부패 현상이다. 16세기 종교개혁 전야에 대해서나 21세기 한국교회와 관련해서도 너무 많이 언급돼왔기에 이제는 진부해진 교회의 부패 현상에 대한 지적은 그때나 지금이나 주로 교회 공동체의 중심적 인물들을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때도 교회의 대표적 인물들 가운데 상당수가 그리고 대표 기관들이 심각한 부패 현상을 드러내었고 또 지금도 그런 부패성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종교개혁 전야의 ‘교회의 부패상’은 오늘날 로마가톨릭교회 대부분 사람도 인정하는 것인데 그에 못지않은 오늘날 한국교회의 부패성이 상당수 교단의 교단장 선거 과정에서 또 교단 지도자들의 사생활에서 교회와 관련한 행위에서 드러나고 있다. 각 교단만이 아니라 소위 교단 연합기관들이 얼마나 이상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 나타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그 심각성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많은 이단도 기존의 교단이나 연합 단체의 이 같은 부패상을 이용해서 자신들이 이단이 아니라는 면죄부를 얻으려고 하고 또 부패의 고리를 통해서 이런 일에 도움을 주는 인사들이 많다는 것은 교회 부패의 문제가 종교개혁 전야에 비할 바가 아니라는 것을 더 깊이 생각하게 한다. 문제는 대부분 교인은 이런 문제에 대한 의식이 없는 경우가 많고 또 관심이 있다고 해도 이 문제를 어찌 해결할 수는 없다는 무력감에 빠져 있다는 데 있다.

큰 교단의 금권선거 문제나 비상식적인 정황과 문제들이 드러날 때마다 과연 그런 것들이 고쳐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성도들이 몇이나 될지 생각해 보라. 큰 연합기관의 참으로 몰상식한 행동들 앞에서 그것이 고쳐질 수 있다고 확신하는 분들이 얼마나 있을는지 생각해 보라. 문제는 교회 안에 이런저런 문제가 많다는 것 정도가 아니라 그것을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고치려고 하는 소위 자정 능력을 교회 공동체가 거의 상실하여 여력이 남아 있지 않다는 데에 있다.

중세 때에는 주님께서 주님의 놀라운 주권으로 종교개혁을 일으켜 주셨다. 주님의 교회는 주님의 통치 아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시대에도 그런 주님과 주님의 역사와 능력을 믿어야 한다.

  1. 무관심, 무력증, 불신앙 현상

그런데 종교개혁 전야에도 그랬던 것처럼 오늘날 대부분 성도는 이러한 문제에 무관심하고 그 해결에 대해서는 무력증을 나타내고 있다. 그 근본 이유는 형식적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며 예배에 참여는 하나 실질적으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앙의 태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질적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으니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도 믿지 않고 하나님이 가르치시는 말씀에도 무관심한 것이다. 그래서 나타나는 것이 소위 좁은 의미의 종교적인 것을 지나치게 축소하고, 그것에 집중하고, 그런 좁은 의미의 종교적인 것과 일상생활을 상당히 절연시키고 살아가는 것이다.

한국에서 새벽기도회를 가장 열심히 한다고 하는 교회들의 성도들이 과연 한국교회의 문제나 우리 사회문제에 대해 어떤 관심과 판단을 하고 있는지 보라! 기도회에 열심히 참여하고 새벽에 모여 기도한다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 일에 가장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우리 한국교회 전체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가장 분별력 있는 판단으로 하나님 앞에 이런 문제를 주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해결해 주시도록 기도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조금 과장해서 표현한다면 그런 기도회가 많아질수록 사람들의 건전 하고 성경적 판단이 점점 없어지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이런 일이 계속되면 우리가 지금도 느끼고 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예배와 기도회 등 종교적 집회에 사람들이 잘 참여하지 않는 일들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성도들의 교회 문제에 대한 무관심, 해결책에 대한 무력감 그리고 그 배후의 불신앙의 문제에서 나오는 것이다. 깊이 있게 살펴보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교회 공동체의 대부분 사람도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있으니 그것이야말로 종교개혁이 필요하다는 증거가 아닌가?

  1. 진정 하나님과 성경을 믿고 있는가?

우리는 이 중요한 질문을 자기 스스로 물어야 한다. “우리는 과연 하나님을 진짜 믿고 있는가?” 어처구니없는 질문이지만 참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에 근거해서 자신들의 모든 문제에 대한 최종적 판단해야 옳다. 여기에 종교개혁의 필요성이 있었다. 물론 이것은 성경 이외의 것은 전혀 살펴보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에 유념해야 한다.

우리는 이 세상 모든 것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 다른 모든 것과 함께 당대 교회의 모든 문제도 다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하나님을 의존하면서 이런저런 방법으로 해결할 방법이 무엇인지도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최종적 대답은 항상 성경이 이 문제에 대해서 과연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을 믿지 않는 것은 참으로 심각한 문제이다.

종교개혁 전야의 교회는 상당수의 성도가 열심은 있었지만 그들의 열심이 성경을 따른 것이 아니었다. 그 당시의 교회는 아주 이상한 가르침을 베풀어 성경을 잘 보호하기 위해서인지 성도들이 성경을 읽고 생각할 수 없도록 했으니 그것이 참으로 반어적(ironical)인 상황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은 성서공회와 여러 출판사가 성경을 열심히 찍어 내고 있으나 성도들이 실질적으로 성경을 존귀하게 여기고 배우려하고 있는지 있는지는 의문인 상황이다.

(1) 공식적으로 성경을 다 믿지 않는 사조가 문제이다.
오늘날 신학계에서는 성경을 문자 그대로 다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마치 신학을 하는 사람이 아닌 것 같은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 이미 오래 전이라는 것을 우리는 심각하게 문제 삼아야 한다. 성경은 우리가 그 내용을 판단하고 비평하기 위해 주어진 책이 아니라 그 성경이 우리의 생각과 사상과 감정과 삶을 평가하고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 주어진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the Word of God)이다. 그러므로 우리 시대에 필요한 일은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받아들이는 일이다.

하나님을 믿으며 예수를 믿는 일은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일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선배들이 처음부터 강조해 왔던 이 말이 우리 시대처럼 절실한 시대는 없다고 할 수 있다. 우리교회 공동체가 과연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있는지를 참으로 진지하게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라. 그렇지 않다면 우리 교회는 종교개혁의 대상이 되는 교회인 것이다. 이와 연관해서 가장 반어적인 것은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않는 교회나 사람들이 오늘날의 종교개혁을 말하는 상황이다. 그러므로 미혹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2) 신앙고백대로 성경을 대하고 있는지 물어야 한다.

우리 교회는 참으로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고 하는 소위 한국의 보수적 교단들에 속한 교회들은 우리가 과연 성경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대로 참으로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하고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성경을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긴다면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을 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판단할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 주변에서 나타나는 모든 부패와 관련된 문제들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점점 사라지기 시작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은혜의 방도(media gratiae)로서 작용하고 있다면 우리는 점점 주님이 요구하시는 그런 삶을 향해 나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고 고백하는 한국의 소위 보수적인 교단들이 더 많은 부패의 문제를 제공하고 있는 것은 우리 입으로 고백하는 신앙고백과는 달리 성경을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고 있지 않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우리들은 더 깊이 반성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다고 말하는 것과 일치하는 모습을 보아야만 한다. 우리 시대에 필요한 일은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진정 믿는 일이다. 이를 진정으로 믿는 성경적 교회를 종교개혁적인 교회요 참 교회라고 하여 왔다.

  1. 진정 성경적 교회인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는 것은 그저 구호가 아니고 먼저 우리의 교회를 그 말씀을 따라 변혁하고 그 결과로 우리의 삶을 그 말씀을 따라 변혁시켜 이 세상에 말씀에 의해 변혁된 공동체를 드러내도록 하는 것이다. 과거에도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항상 그렇게 해 왔다. 오늘 우리의 과제도 역시 이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곧 성경에 근거한 교회개혁과 우리의 삶의 개혁에서 나오는 우리 사회의 개혁이 바로 그렇다.

이런 성경적 교회 참된 교회는 먼저 신앙고백의 내용 즉 믿는 믿음의 내용이 오직 성경에 근거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믿는 것 가운데서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내용을 모두 배제해야만 한다. 그것이 올바른 신앙운동이다. 열심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저 열심히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비성경적인 열심을 제거하고 믿는 믿음의 내용을 철저히 성경적으로 해나가야 한다.

종교개혁 전야에 성도들이 연옥을 믿고, 교황 제도를 믿고, 마리아를 믿고, 묵주기도의 공력을 믿고, 성호를 긋는 것과 성수의 효과를 믿고, 십자가와 수많은 상의 효험을 믿었던 것을 ‘오직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해서 일소해 버린 것과 같은 일이 우리의 신앙의 내용에 대해서도 일어나야 한다. 우리가 믿는다고 하는 것 가운데서 성경적이지 않은 것들은 반드시 제거돼야 한다.

오늘날 새로운 사도 즉 신사도가 있다고 하거나 오늘날도 성경 이외의 특별계시가 계속된다고 하는 등의 생각 등이 사라져야 한다. 신사도 운동과 관련된 사람들만이 아니라 그런 주장이 나타날 수 있는 분위기가 사라져야만 한다. 참으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오직 성경에서 가르친 걸 믿는다는 분위기가 형성되어야 한다.

성경 이외의 임사(臨死) 체험이나 다른 종교적 체험을 믿으려고 하는 것도 극복되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고귀한 종교적 체험도 성경의 가르침에 복종시켜야 한다. 오직 성경만이 우리들의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또 인간의 구원이 하나님과 인간이 협력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하던 반(半) 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적인 비성경적인 생각이 오늘날 교회 안에 다시 들어오거나 나타나지 않도록 하는 일에 그 무엇보다도 힘써야 한다.

십자가 구속을 중요시하면서도 인간이 은혜받은 후에 그 은혜에 근거해서 힘쓰는 것의 공로가 고려되어 온전한 구원이 일어난다고 하는 로마가톨릭교회의 주장이 16세기에 비성경적인 것으로 선언된 건 그때만의 문제가 아니다. 오늘날도 이와 비슷한 신인(神人) 협력주의 구원의 주장은 모두 비성경적인 것으로 선언되어 바른 교회 안에서 제거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성경에 근거한 이신칭의 바른 가르침이 교회를 주도해야 한다.

성도들이 이런 문제에 무관심하고 그저 은혜만 된다면 어떤 것이나 다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개혁의 대상이다. 사실 이 문제는 우리 시대의 가장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이므로 이 시대 역시 참으로 종교개혁이 필요한 시대임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럴 때 주변의 생각들이나 신학들 가운데서 비성경적인 모든 것을 비성경적이라고 말하고 극복되어야 할 것으로 여기고 그렇게 하는 일이 나타나야 한다.

그리고 우리들의 예배가 과연 성경적인지를 점검해야 한다. 종교개혁은 무엇보다 먼저 예배의 개혁으로 나타났다. 종교개혁적 예배는 진공 상태에서 시작했던 것이 아니라 로마가톨릭교회 예배의 개념과 순서 중에서 비성경적 것들을 배제하고 성경적으로 새롭게 하여 성경적 예배를 드리려는 것이었다. 예배가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를 피 없는 형태도 다시 드린다(represent)고 생각하는 로마가톨릭교회적 예배 개념을 성경이 비추어 개혁한 것이 바로 종교개혁적 예배였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신약의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祭事)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제거되어야 한다.

예배당을 ‘성전’(聖殿)이라 하는 것이나 예배당 앞부분을 ‘제단’(祭壇)이라고 하거나 예배 인도자를 어떤 의미에서라도 ‘제사장’(祭司長) 또는 ‘사제’(司祭)라고 하는 등 이와 관련된 모든 잘못된 의식과 용어조차도 제거되어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예배순서 가운데 비성경적인 것이 들어 온 것이 있다면 그것을 제거하려고 해야 한다. 우리는 오직 신약성경이 가르친 예배의 요소들만을 가지고 삼위일체 하나님께 성자의 십자가 공로에 근거하여 성령님 안에서 예배해야 한다. 이것이 진리 안에서 그리고 성령 안에서 행하는 성경적 예배이다.

각 교회 공동체는 우리들이 하는 예배가 진정 성경적 예배인지를 면밀하게 검토해야 한다. 그런 고려 없이 그저 은혜스런 순서가 있어서 은혜만 있으면 된다는 더구나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로 우리가 종교적 만족을 얻을 수 있으면 된다는 태도가 계속되어 간다면 우리의 열심히 하는 예배가 개혁의 대상이 되는 것임을 유념해야 한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종교개혁 전야에 눈물을 흘리면서 미사(missa)에 참여하던 많은 사람이 있음을 생각해 본다면 이것이 과연 무슨 말인지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5. 우리 의식은 성경적인가?

이와 관련하여 더 많은 말을 해야 할 것이다. 우리들의 일상생활이 과연 성경의 가르침에 비추어 영위되는가? 그리하여 우리가 속해 있는 사회와 문화가 그런 성경적인 변혁을 경험해 가는가 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종교개혁의 결과로 우리 일상의 삶을 변혁시키고 문화를 변혁시킨 예는 우리들의 모범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말하는 종교는 그저 좁은 의미의 종교적인 것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고, 개혁자들의 후예들이 항상 강조대로 삶 전체가 종교요(life is religion) 우리 신앙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것을 이렇게 만드는 우리의 의식이다. 그러므로 핵심은 “우리가 과연 성경적 종교개혁적 의식을 갖고 있는가?”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과연 모든 일에 성경적인 의식을 갖고 있는가?”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 그 성경에서 배운 대로 “우리가 항상 하나님 앞에 있다(coram deo)는 의식을 갖고 있는가?” “항상 하나님 주권을 온전히 의식하면서 사는가?”하는 것이다. 이런 성경적 의식이 우리에게 충만히 있을 때만이 우리가 앞서 이야기한 모든 개혁 그런 문제의 해결이 있을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문제는 항상 말씀 앞에서의 나 자신이 문제이고, 나의 문제이고, 나의 개혁이다. 성령님께 의존해서 그리고 성경에 근거해서 나 자신이 이런 성경적 의식에 충일함을 향해 나갈 때만 문제의 근원적 해결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개인주의가 아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홀로 서서 주님 뜻대로 해나가려는 수많은 성도의 교제(cummunio sanctorum)를 우리는 그 과정에서 누려가기 때문이다.(*) 글쓴 이 / 이승구 교수(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