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단상

오늘 성경 읽었습니까?

종교개혁자들이 묻습니다. 오늘 성경 읽었습니까?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의 종교재판에서 자기 나라말로 성경을 번역하여 보급한 죄로 화형 선고를 받고 화형당하는 종교개혁자들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은 종교개혁자들의 대표적인 구호였다. 타락한 중세교회를 하나님 말씀으로 개혁하자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중세시대에는 정말 성경이 뒷전에 밀려나 있었는가? 사실은 결단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중세교회는 제국(帝國) 정부의 후원 아래 성경을 필사(筆寫)하고 보존하는 일에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15세기 중엽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 1398?-1468)에 의해 활판(活版)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까지 성경은 주로 양피지(羊皮紙, parchment or vellum)라 불리는 짐승 가죽에 필사(筆寫)되었다. 한 권의 성경을 만들기 위해서는 300여 마리 양이나 수십 마리의 송아지가 희생되었다. 가죽은 매우 정교한 과정을 거쳐 종이처럼 사용할 수 있는 양피지로 만들어졌다.

성경 필사(筆寫)는 주로 수도원의 조용한 장소에서 잘 훈련받은 학자들이 오랜 기간에 했는데 화재로 인한 손실이나 실수를 최소화하기 위해 매우 엄격한 여러 가지 규칙들을 지켰다. 이렇게 만들어진 성경 한 권 값은 그러면 얼마나 되었을까?

1520년대에 필사본(筆寫本) 성경이 약 360페니히의 가격으로 거래되었는데 이것은 당시 노동자의 1년 치 임금(賃金)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현재로 환산하면 몇만 달러에 해당 – 편집자) 그런데 구텐베르크의 활판 인쇄로 인쇄된 독일어 성경이 나오자 필사본보다 최소 1/20로 값이 낮아졌다고 하니 과거 성경이 얼마나 값비싼 책이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 후 800년경 알퀸(Alcuin of York, 735-804)이라는 궁정 학자가 프랑크 왕국의 황제였던 샬르망 대제(Charlemagne or Charles the Great, 742-814)에게 헌정(獻呈)한 성경의 경우 각 장의 첫 페이지는 다양한 그림으로 채색되어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림글자들은 모두 금이나 은을 녹인 용액에 색을 입인 후 도금(鍍金)해서 만든 것이었다. 이 같은 도금 성경은 성경 제작비가 엄청 비싸 성경은 그야말로 ‘보물 중의 보물’이었다.

문제는 이렇게 만들어진 성경은 말 그대로 너무 귀해 사람들이 감히 손때 묻혀가며 읽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읽기 위한 성경이 아니라 그냥 모셔놓고 바라만 보는 숭배 대상이 되었다.

또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 성경은 라틴어(Latin language)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지식층이 아닌 사람은 성경을 읽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 로마 가톨릭이 라틴어 성경을 고집한 이유는 그것이 교회의 통일성을 가시적(可視的)으로 보여주기 때문이었다. 라틴어는 민족과 문화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교회의 보펀성(普遍性)과 통일성(統一性)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여기에 함정이 있다. 정작 다수(多數)의 예배자는 라틴어를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로마 가톨릭교회는 교인들에게 안심하라고 했다. 왜냐면 모든 성도는 그저 교회와 전통의 성경해석을 믿고 따르기만 하면 안전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정말로 안전했을까?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들이 보기에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경은 원문을 오역(誤譯)하거나 의도적으로 왜곡(歪曲)한 부분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기 때문에 대다수 종교개혁 선구자들은 원문 성경을 자기 나라 사람들이 읽을 수 있는 자기 나라말로 정확하게 번역하는 것이야말로 교회 개혁을 위한 최우선의 과제라고 확신했다. 이처럼 각 나라의 종교개혁 운동이 성경 번역과 더불어 시작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한편 이 같은 각국 성경 번역에 위협을 느낀 로마 가톨릭교회는 라틴어 성경 이외의 모든 번역본 성경을 불법화했다. 심지어는 평신도가 자국어 성경을 읽고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성경을 아예 금서(禁書) 목록에 포함 시켰다.(교황 그레고리 9세, 평신도 성경 소유와 번역 금지)  로마 가톨릭교회가 ‘오직 불가타 성경!’의 논리로 종교개혁자들과 그들의 선구자들이 부르짖은 ‘오직 성경!’에 맞대응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때 물론 진리의 편에 서는 것은 철저한 희생을 요구했다. 영국이 종교개혁을 한 국가가 되기 전까지 위클리프(John Wycliffe, 1330-1384)를 따르던 수많은 사람이 그가 번역한 복음서를 배포하며 설교운동을 하다가 붙잡혀 고문을 당하고 화형(火刑)당했다.

프랑스 리용(Lyon)의 부유한 상인이었다가 성경적 교회개혁자가 된 왈도(Peter Waldo, 1140-1218)를 따르는 무리는 수 세기에 걸쳐 유럽 곳곳에서 혹독한 박해를 받았다. 왈도와 위클리프의 뒤를 이어 등장한 후스(Jan Hus, 1369-1415)와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 1452-1498) 역시 성경 말씀에 근거한 교회 개혁을 설교하다가 붙잡혀 화형당했다.

이쯤 되면 왜 루터(Martin Luther, 1483-1546), 츠빙글리(Ulrich Zwingli, 1484-1531), 칼빈(John Calvin, 1509-1564) 등의 후대 종교개혁자들이 보름스(Worms, City in Germany)에 있는 네 명의 개혁자들을 자신들의 선배로 삼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이들 역시 성경을 번역(飜譯)하여 모든 사람이 성경을 읽을 수 있게 하는 것을 개혁의 최우선 과제로 삼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종교개혁의 ‘오직 성경!’이라는 원리는 성경 번역, 전파, 읽기에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걸었던 참 신자들의 피 묻은 구호였다. 오늘 우리에게 성경을 전해주기 위해 이렇게 생명을 바쳐 헌신했던 종교개혁자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당신은 오늘 성경 읽었습니까?” 이 물음에 대한 오늘 당신의 대답은 무엇인가?(*) 글쓴 이 / 안상혁 교수(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역사신학), 연세대학교 B.A.,사학, 서울대학교대학원 M.A.,서양사,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M.Div., Yale University(Divinity / S.T.M.,교회사,  Calvin Theological Seminary(Ph.D., 역사신학, 출처 : 계간 ‘합신은 말한다’ vol. 32-1. 2017. pp.6-7, ㈜ 이 글은 본지의 편집 형식에 맞도록 재편집한 것입니다.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