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갈빈주의 강연(4) 칼빈주의와 학문(상)
요약, 갈빈주의 강연(4)
칼빈주의와 학문(상)- Summary, Abraham Kuyper’s Lectures on Calvinism –

1. 학문에 대한 사랑
네 번째 강연은 칼빈주의와 학문의 연관에 집중하고자 한다. 한 강연에 이 무거운 주제를 모두 담을 수 없기 때문에 네 가지 요점만 고찰하려고 한다.
- 칼빈주의는 학문에 대한 사랑을 장려했다.
- 칼빈주의는 학문을 본래 영역에 회복시켰다.
- 칼빈주의는 학문을 자연스럽지 못한 속박에서 건져주었다.
- 빈주의는 학문적 갈등에 대한 해결책을 제공했다.
(1) 학문의 정의(正意)
먼저 왜 칼빈주의가 학문에 대한 사랑을 장려(獎勵)하지 않을 수 없었는지 설명해야 하는데 내가 칼빈주의 ‘예정교리’를 학문 계발(啓發)을 위한 가장 강력한 동기로 지적하는 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그러나 오해를 막기 위해 우선 학문(學文)의 뜻을 설명해 보겠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학문은 전체 인간의 학문을 말하는 것이며 특별히 단순한 경험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경험에 의해 지각(知覺)한 구체적 현상에서 ‘보편적 법칙’(眞理)을 발견하고 그것으로 현상의 전체배열을 지배하는 사상에 도달할 때에 비로소 특정 분야의 개별학문이 된다. 또 이 개별학문 즉 몇몇 특정학문의 주제는 하나의 항목으로 모이고 이론이나 가설을 통해 하나의 원리의 지배하에 놓여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런 온갖 결과들을 하나의 유기적(有機的) 전체로 엮어내면서 인간의 학문을 이룬다.
(2) 하나님의 예정과 작정
그렇다면 하나님의 예정(豫定, Predestination)에 대한 칼빈주의 신념이 학문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어떻게 입증할 것인가? 우리가 이 점을 이해하려면 개인적 ‘예정’에서 일반적 ‘작정’(作定)으로 돌아가야 한다. 칼빈주의 예정에 대한 신념은 하나님의 ‘작정’(作定, Decrees)이 우리 개인생활 속으로 침투한 것이다. 하나님의 예정교의(豫定敎義, Doctrine of Predestination)는 하나님의 뜻의 통일성(統一性)과 그 활동의 확실성(確實性)에 대해 이생과 내생에 기꺼이 처신하겠다는 우리의 고백이다.
예정(豫定)에 대한 이 개인적인 고백을 하나님의 작정(作定)에서 보면 모든 사물(事物) 즉 우주 전체의 존재(存在)와 과정(過程)이 하나의 법칙(法則)과 질서(秩序)에 순종하며 자연과 역사(歷史)에 그 계획을 이행하시는 하나님의 불변의 뜻이 있다는 것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다.
이 같은 하나님의 작정에 대한 신념은 우리의 지성(知性)에 하나의 전(全) 포괄적 통일성이라는 개념을 심어주고 모든 것을 지배하는 하나의 원리(原理)를 수용하도록 만든다. 즉 우리는 우주만물의 모든 것을 다스리는 불변의 진리로서(자연법칙) 안정성과 질서가 틀림없이 존재한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우주(宇宙)는 마구 던져 쌓여진 돌무더기가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 엄밀하게 일관된 방식으로 세워져 있는 기념건물이다.
우리가 이 관점을 버리게 되면 자연(自然)에 대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어떤 식으로 일이 발생할지, 모든 세계는 언제나 불확실해진다. 그리고 변덕(變德)과 우연(偶然)에 관심을 갖게 되며 아무것도 의지할 수 없고 상호 연관도 없고 발전도 연속성도 없다. 이런 조건에서 학문은 어떻게 되겠는가? 인간생활에 대한 연구는 모호하고 불확실해지며 역사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없게 된다. 즉 모든 것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역사는 사라진다.
(3) 만물의 통일성, 안정성, 질서
이 시대에 이루어진 학문의 발전은 칼빈주의가 고백하는 하나님의 작정(作定)의 통일성(統一性)과 안정성(安定性)을 증명한다. 인간생활에 나타나는 사물들의 불변(不變)의 질서는 거의 수학적인 증명으로 입증되고 있다. 그러므로 학문은 우연(偶然)과 변덕(變德)의 제물이 될 수 없다. 학문 전체의 발전은 불변의 질서에 따라 하나의 고정된 계획(하나님의 작정)을 지향하며 하나의 원리에서 존재하고 발전하는 우주를 가정한다.
하나님의 작정에 대한 칼빈주의 신념은 모든 존재하는 사물을 고정된 규례 즉 하나님 안에 하나의 최고 의지(意志, 뜻)에 종속시킨다. 또 모든 존재하는 사물의 원인을 이미 수립되어 있는 계획으로 향하게 한다. 따라서 칼빈주의자는 모든 사물이 전체 창조와 전체 역사의 한 유기적 프로그램을 형성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하나님의 작정’에서 자연법의 토대(土臺)와 기원(起源)을 찾듯이 모든 도덕법과 영적법칙의 확고한 토대와 기원 역시 하나님의 작정에서 발견한다. 영적법칙과 자연법은 모두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존재한다. 그 안에서 하나님의 경륜은 하나님의 영원하고 전(全) 포괄적인 계획의 완성을 성취하며 그를 위해 하나의 높은 질서를 함께 형성한다.
이 같이 사물의 통일성(統一性)과 안정성(安定性)과 질서(秩序)를 개인적으로는 하나님의 예정(豫定)으로 믿으며 우주적으로는 하나님의 작정(作定)의 경륜(經綸, Economy)으로 믿는 것이 칼빈주의 신념이다. 따라서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학문에 대한 사랑을 일깨우고 힘 있게 그 사랑을 장려할 수밖에 없다.
또한 이 사물의 통일성과 안정성과 질서에 대한 깊은 확신이 없이는 학문은 단순한 추측을 넘어설 수 없다. 오직 우주의 유기적 상호 연관에 대한 믿음이 있을 때에 학문이 구체적 현상에 대한 경험적 탐구에서 일반적인 것으로 상승하며, 일반적인 것에서 그것을 규정하는 법칙으로 상승하며, 그 법칙에서 전체를 지배하는 원리로 상승할 수 있다. 모든 고등학문의 절대적이며 필수적인 자료들은 이러한 믿음에서만 우리 손에 쥐어질 수 있다.
(4) 하나님의 작정의 경륜에 대한 확신
칼빈주의는 조롱(嘲弄)과 모욕(侮辱)을 받으면서도 우리의 전체 생활이 하나님이 친히 세우신 통일성과 안정성과 질서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굳건한 고집을 포기하지 않았다. 칼빈주의적 세계관은 통찰(洞察)의 통일성, 지식(知識)의 확고함, 질서(秩序)를 요구한다. 그리고 이 명백한 필요 때문에 지식에 대한 갈망이 되살아났다.
하나님의 작정의 경륜(經綸, Economy)에 대한 확신을 무디게 만들었던 반(半) 펠라기우스주의와 맞설 당시 그 시대의 일반 서민들에게 새겨져 있던 세계관과 인생관의 통일성이야말로 우연(偶然)과 변덕(變德)에 자신을 맡기지 않는 학문적인 특징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2. 구원 : 우주전체의 회복
칼빈주의가 학문에 대한 사랑을 장려(獎勵)했다는 첫 번째 요점에 이어 이제 두 번째로 칼빈주의가 학문을 본래의 영역을 회복(回復)시켰다는 것을 고찰(考察)하려고 한다. 다시 말해 칼빈주의는 영적인 것을 놓치지 않으면서 동시에 우주론을 회복시켰다. 십자가에서 창조로 돌아가도록 장려하는 그 일반적인 원리와 일반은총(一般恩寵) 교의(敎義)를 살펴보자.
(1) 자연과 은혜를 분열시키는 이원론
사람들은 기독교가 본질적으로 구원론적이라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이 ‘구원(救援)’의 문제는 영원(永遠)의 빛을 보지 못하고 내세(來世)와는 상관없이 이 땅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이해될 수 없다. 그래서 현세(現世)와 내세(來世) 이 두 요소가 죄인(罪人)과 성인(聖人), 현세적인 것과 영원한 것, 지상적 생활과 천상적 생활로 나타나는 곳에서는 그들의 상호연관을 보지 못하고 서로를 왜곡할 위험이 있다. 내가 고백하건대 (중세) 기독교 세계는 이 오류를 벗어나지 못했으며 중생(重生)에 대한 이원론적(二元論的) 개념은 자연(自然)과 은혜(恩惠)를 분열(分裂)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이 이원론적 개념은 천상적(天上的) 사물만 너무 집중적으로 명상(冥想)하므로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대해 마땅한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 영원한 것에 대한 배타적(排他的) 사랑 때문에 현세적 의무(義務)를 이루지 못했고 영혼만 보살폈기 때문에 몸에 대한 관심을 게을리 했다. 이 편협(偏狹) 되고 부조화(不調和)의 개념은 결국 창조주 하나님을 배제하고 오직 그리스도만 신비적(神秘的)으로 숭배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그리스도는 구주(救主)로만 인식되고 그의 창조적 우주론의 의의(意義)는 사라졌다.
(2)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
하지만 이 같은 이원론(二元論)은 성경이 결코 찬성하지 않는다.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를 가리켜 ‘만물(萬物)을 만드시고(創造) 사람의 생명이신 영원하신 말씀’(요 1:1-4, 요일 1:1,2)이라고 했고, 바울도 “만물(萬物)이 그리스도로 인해 지음을 받고(創造) 존재한다.”(롬 11:36)고 증거 한다. 또 바울은 구속(救贖) 사역의 목적이 각 죄인의 구원에 국한되지 않고 세상의 구속(救贖)으로 하늘과 땅의 모든 사물이 유기적으로 연합되는 것이라고 증거 한다.(엡 1:10, 골 1:20) 그리스도는 땅의 중생(重生) 만을 말씀하지 않고 우주의 새롭게 됨도 말씀하셨고(마 19:28), 바울은 “피조물(被造物)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롬 8:19)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서 들은 찬송은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께 모든 존귀와 찬송과 감사를 돌리는 것이었다. 요한계시록은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는 출발점으로 돌아간다. 성경에 예시(豫示)되어 있는 미래의 최종적 산물은 구원받은 영혼들의 영적 존재뿐만 아니라 ‘전체우주의 회복’이다. 그 때 하나님은 새 하늘과 새 땅에 있는 모든 것에 모든 것이 되실 것이다.
(3)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의 구원(救援)은 너무나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榮光)의 중요성에 비할 수 없다. 하나님의 엄위(嚴威)를 계시(啓示)하신 창조세계는 그분의 손으로 직접 만드신 것이다. 비록 죄로 인해 훼손되기는 했지만 (그리스도로 인해) 회복(回復)의 길이 열리고 회복에 관한 훨씬 더 영광스러운 계시에 합당하게 되었다. 이 회복은 처음 창조된 것의 구원이며 계속 구원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중보(中保)의 은혜는 우리가 영원히 찬송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이 중보직(中保職)도 결국 아버지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나라의 광채가 아무리 장엄하다 해도 결국 그리스도는 그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돌리실 것이다.
이로써 칼빈주의는 세상에 대한 경멸(輕蔑)과 현세적인 것에 대한 무시(無視)와 우주적인 사물에 대한 평가절하(平價切下)를 단번에 종식(終熄)시킨다. 우리의 우주적 생활은 영원한 것을 희생시켜 그 가치를 회복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손으로 하신 일과 하나님의 속성(屬性)에 대한 계시로서 그분의 능력으로 그 가치를 회복하신 것이다.
(3) 하나님을 아는 방법 : 성경과 자연
칼빈주의 신앙고백이 하나님을 아는 두 방도 즉 ‘성경’과 ‘자연’을 말하는 것을 들을 가치가 있다. 칼빈은 많은 신학자들의 경향과는 달리 자연을 단순히 신앙의 부속(付屬)되는 항목으로 대하지 않았다. 그는 성경을 안경에 비유하여 우리가 이 안경으로 ‘자연의 책’에 하나님이 손으로 기록하신 하나님의 생각을 다시 해독(解讀)할 수 있게 한다고 보았다. 이로 인해 자연에 전념하는 자가 헛되고 어리석은 일들을 추구하면서 그 능력을 허비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모든 두려운 우려가 사라졌다.
그런 우려와는 반대로 칼빈은 하나님을 위해 우리의 관심이 자연과 창조의 생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파악했다. 그렇기 때문에 인본주의(人本主義)가 이 세상의 생활로 영원한 것을 대신하려고 노력하는 만큼 모든 칼빈주의 자들은 인본주의에 반대했다. 그러나 인본주의자가 세속생활을 적절히 인정(認定)할 것을 주장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만큼 칼빈주의자는 그의 동맹이었다.
3. 죄를 억제하는 일반은총
이제 하나님의 일반은총(一般恩寵) 교의(敎義)를 살펴보자. 이는 먼저 제시했던 일반적 원리의 결과이지만 그 결과는 그 일반적 원리를 죄(罪)에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데서 생겼다.
죄(罪)는 우리에게 해결될 수 없는 수수께끼를 던진다. 만일 우리가 죄(罪)를 하나님께 대적(對敵)하여 영원한 저주(咀呪)에 이르는 것으로 본다면 죄인(罪人)을 ‘선한 일이라고는 전혀 할 수 없고 죄만 지을 수밖에 없는 자’로 보게 되고 필연적으로 모든 불신자와 중생하지 못한 자는 마치 불의(不義)하고 불쾌한 사람으로만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경험과 다르다. 불신세계(不信世界)에도 선(善)과 의(義)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사실 죄로 인한 전적부패(全的腐敗)라는 교의(敎義)가 언제나 우리의 경험과 부합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정반대로 이런 경험에서 출발하면 기독교적 신앙고백은 땅에 떨어지고 만다. 그렇게 되면 인간 본성(本性)을 선(善)하고 부패하지 않은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의 중생(重生)이 전혀 불필요한 것이 된다.
(1) 로마 가톨릭교회의 잘못된 교리
이런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어떤 사람은 불신자의 덕을 ‘찬란한 악덕(惡德)’이라고 한다. 반대로 어떤 이는 신자의 죄를 옛 아담에게 돌림으로 책임을 모면하려 한다. 그리고 로마 가톨릭은 ‘순수한 자연적인 것’(pura naturalia)이라는 유명한 교리로 좀 더 나은 탈출구를 찾으려 했다.
로마 가톨릭주의자들은 삶의 두 영역이 존재하는데 순전히 인간적인 ‘지상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보다 높은 ‘천상적인 것’이 있다고 가르쳤다. 이 이론에 따르면 아담은 하나님에 의해 두 영역(領域)에 대한 준비를 잘 갖추었다. 그래서 타락으로 ‘천상적인 것’은 잃었지만 지상 생활을 위한 ‘자연적 능력’은 거의 손상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로마 가톨릭은 이렇게 타락한 사람이 자연적인 생활에서 탁월(卓越)함을 보이는 이유를 설명한다. 바로 이런 인간론 위에 로마 가톨릭이 서 있다.
이 같은 로마 가톨릭의 체계에는 두 가지가 잘못되었다. 하나는 성경적 ‘죄 개념’이 빠져 있고 또 하나는 그 죄의 개념이 도달하는 인간 죄성(罪性)의 심각함을 간과(看過)한 오류이다. 이것은 그릇된 이원론이다. 이 그릇 된 교의(敎義)에 따르면 성직자는 독신(獨身)으로 지상적 유대를 끊고 평신도보다 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며, 또 지상적 소유를 버리고 자신의 의지를 희생하는 수도사는 윤리적으로 볼 때 성직자보다 좀 더 높은 위치(位置)에 선다.
더 나아가 기둥을 오르며 모든 지상적인 것과 단절된 주상(柱上, 기둥 위) 고행자(苦行者)나 지하 동굴에서 틀어박히는 좀 더 조용한 고행자는 최고의 완전에 도달한다. 그리고 교회가 찬성하지 않고 돌보지 않는 것은 모두 저급(低級)한 것으로 간주(看做) 된다. 그런 입장이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지상적 사물의 영역을 연구하도록 권하지 않음은 분명하다. 그 결과는 천상적 영역에 속하는 연구와 명상(冥想) 외에는 이상(理想, ideal)의 성소(聖所)를 방어하던 자들을 유혹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2) 인간의 전적타락과 하나님의 일반은총
칼빈주의는 이런 개념에 원칙적으로 반대했다. 한편으로는 ‘전적타락’이라는 죄 개념으로 또 한 편으로는 ‘일반은총’ 교의로 타락한 사람 안에 있는 선한 것을 설명했다. 즉 억제(抑制)되지 않고 구속(拘束)되지 않은 죄(罪)는 그대로 두면 곧 홍수 이전 시대에 보였던 것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인간생활이 완전한 타락에 이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손으로 만드신 것이 완전히 전멸(全滅)하지 않도록 죄를 억제(抑制)하시는데 이것이 ‘일반은총’이다. 하나님은 이로써 개인의 생활과 전체 인류의 생활과 자연의 생활에 개입하셨다.
하지만 죄의 본성(本性)은 이 ‘일반은총’의 은혜로 죽지 않으며 이 은혜는 영원한 생명으로 구원(救援)하지 못한다. 그러나 야생(野生) 짐승을 길들이듯이 하나님은 ‘일반은총’을 통해 사람 안에서 죄의 활동을 억제하시되 부분적으로는 그 세력을 부수심으로써 또 부분적으로는 사람의 악한 영을 길들이심으로써 또 그의 나라와 가정을 교화시키심으로써 억제하신다. 그래서 중생하지 못한 죄인도 사랑스럽고 힘이 넘치는 많은 것으로 매력을 갖게 된다. 하지만 죄의 본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3) 악한 세상에서 선한 길을 내 주시는 하나님
우리는 악(惡)이 표면에 드러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을 심각하게 부패하지 않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렇게 된 데는 ‘일반은총’으로 심각하게 번지지 않도록 막으시는 하나님께 그 덕을 돌린다. 하나님의 ‘일반은총’은 거친 물결을 가로질러 반대편으로 안전하게 도착하도록 나룻배를 이끄는 줄과 같다. 하나님은 이처럼 악(惡)을 억제하신다. 이렇게 악(惡)한 세상에서 선(善)한 길로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칼빈주의자는 우리의 죄악 된 본성을 비난하는 일에 결코 게으르지 않지만 우리를 질서 정연한 사회에서 살게 하시고 개인적으로 두려운 죄에 빠지지 않도록 도우시는 하나님을 찬송하며 감사한다. 그리고 인류에게 감추어져 있는 모든 재능을 드러나게 하시고 일상적인 절차에 따라 인류의 역사를 발전시키시며 지상 교회가 발 디딜 자리를 확보해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
(4) 창조질서에 새겨진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탐구
그리스도인은 교회뿐 아니라 이 세상도 하나님께 속하며 이 둘을 통해서 ‘최고의 경영자와 건축가의 걸작’을 탐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추구하는 칼빈주의자는 잠시라도 다른 학문을 저급하다고 여기면서 불신자에게 맡기고 자신은 신학과 명상에만 전념하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의 모든 창조 작품에서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기며 모든 지적 능력을 다하여 천상적인 사물뿐 아니라 지상적 사물도 연구한다. 그리하여 자연과 인간 산업의 생산물과 인류의 생활에서 또 사회학과 인류의 역사에서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발견하고 하나님의 ‘일반은총’을 보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을 늘 기억한다.
인류역사는 중앙(中央)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두고 진행하는 일관된 과정임이 분명하다. 이 과정은 모든 국가가 나름대로의 사명을 가지고 진행하는 과정이며 그 과정에 대한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복의 원천이 될 것이다. 주위의 자연생활이나 인간생활의 모든 것이 탐구할 만한 대상이 되어 그로써 가시적(可視的) 현상과 불가시적(不可視的) 작용으로 나타나는 전체 우주의 영광에 새로운 빛이 비치게 할 것이다.
물론 이 입장을 따르는 철저한 학문적 지식의 과정이 종종 교만에 이르며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도 있다. 그렇다 해도 가장 심오한 탐구자가 스스로 하나님 앞에 범죄 한 죄인으로 여기고 세상일에 대한 찬란한 깨달음이 오직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고 여길 수 있는 것은 이 영광스러운 ‘일반은총 교의’ 덕분이다.(*) 요약 / 편집 : 나쥬니, 출처 http://www.nazuni.pe.kr/faith/books/calvinism/lifesystem.ph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