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초대교회사

요약 초대교회사(10) 3세기 기독교사상 확립

요약 초대교회사(10) 3세기 기독교사상 확립

제10장 알렉산드리아 신학

“율법이 히브리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蒙學先生, schoolmaster)이듯이 철학은 헬라인들을 그리스도에게도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다. 따라서 철학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함을 향한 길을 열어주는 하나의 준비이다.” – Clement of Alexandria

칼타고(Carthago)가 로마제국의 서부에서 로마 다음의 제2의도시가 된 것처럼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는 동방에서 로마 다음의 도시가 되었다. 알렉산드리아는 정치와 경제면에서 칼타고와 쌍벽을 이루었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서로 달랐다. 일반적으로 평가해서 칼타고는 로마 적인 특성을 지녔고 알렉산드리아는 헬라적인 특성을 지녔다.  

주전 200년부터 주후 300년까지 알렉산드리아는 헬라 세계의 지적(知的) 문화적 중심지였다. 약 50만의 인구를 가진 상업의 중심지 알렉산드리아에는 많은 유대인이 살고 있었으며 이집트 전체를 합친다면 유대인의 총수는 약 100만에 육박했다.

알렉산드리아는 헬라적인 특성이 강했지만 유대인의 중요한 중심지이기도 했으며 이곳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은 헬라파 유대인들로 종교와 삶의 방식에서 헬라사상과 관습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이 때문에 알렉산드리아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은 전형적인 헬라파 유대인으로 역사에 알려졌으며 이들에 의해 이곳에서 히브리어 구약성경이 주전 250년경헬라어 구약성경인 70인경(the Septuagint)이 번역되었다. 알렉산드리아 교회는 플라톤주의 경향을 반영하는 유명한 기독교 지도자들을 배출했는데 그중에 클레멘트와 오리겐은 대표적 인물이다.      

Clement(150-215)

(1)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로 역사에 널이 알려진 티투스 플라비우스 클레멘트(Titus Flavius Clemens, 150-215)는 2세기 말엽부터 3세기 초엽까지 활동하며 알렉산드리아 신학의 정초(定礎)를 놓았다.

스토아 철학에서 회심한 판태누스(Pantaenus, 120-216)는 저스틴(Justine Martyr, 100-165)이 로마에서 운영하고 있던 것과 유사한 최초의 기독교학교를 알렉산드리아에 설립했다. 교회사가 유세비우스(Eusebius of Caesarea, 260-340)에 의하면 클레멘트는 팬태누스를 만나 제자가 되어 그와 함께 성경연구에 전념했다. 그 시기는 대략 주후 180년경으로 추측된다.

클레멘트는 자신의 사상을 집약한 ‘강요’(綱要, Institutions)에서 판태투스를 스승이라고 칭할 만큼 높이 평가하고 있다. 판태누스가 죽자 클레멘트가 그를 계승했고 그의 지도력 아래 그 학교는 유명한 학교가 되었다. 이 학교는 교육받은 헬라 지식층에 복음을 전파하여 그들을 기독교인으로 개종시키는 창구역할을 했다.

  ⓵ 클레멘트의 작품

그의 대표적인 저서는 ‘스트로마타’(Stromateis, The Miscellanies)라는 8권으로 된 책이다. 또 다른 대표적인 클레멘트의 저서는 ‘교사’(Paedagogus)라는 제목의 8권의 저서가 있다. 그 외에 ‘헬라인에의 권고’(Protrepticus: The Exhortation th the Greek), ‘회심에의 권고’(An Exhortation to Conversion), ‘부자가 구원받는다면?’ ‘교회법’(Ecclesiastical Canon)등이 있다.

클레멘트의 작품들 가운데 두드러진 것은 특별히 성육신(成肉身)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초점을 맞춘 3개의 작품으로 클레멘트의 진리 인 식론을 그대로 반영한다. 이것들은 ‘회심에의 권고’(Exhortation to Conversion), ‘교사’(Tutor) 그리고 미완성 작품 ‘잡문집’(Miscellanies) 등이 있다. 그의 첫 작품인 ‘회심에의 권고’는 기독교 변증학의 전통을 잇는 것으로 어떻게 로고스가 처음 우리를 회심(回心)시켰는가를 성명한다. ‘교사’는 기독교 교리의 체계적인 강해를 담고 있으며 어떻게 로고스가 우리를 교화(敎化)시키는가를 다룬다. ‘잡문집’은 로고스가 어떻게 우리의 지식(知識)을 완전케 하여 참 지식(true gnosis)에 이르게 하는 가를 설명한다.

   ⓶ 클레멘트의 철학과 이성(理性)

클레멘트의 신학을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출발점은 그가 기독교 진리와 희랍 철학의 진리 사이에 연속성(連續性)이 있다고 주장했다는 사실이다. 이점에서 클레멘트가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적 기풍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으며, 저스틴과 아테나고라스(Athenagoras, 133?–190?)의 전통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담대하게 기독교와 헬라 철학의 연합을 추구했다. 그것은 로고스가 진리의 원천으로 헬라인들의 철학과 기독교인들의 진리 둘 모두의 저자라고 이해했기 때문이다.  

클레멘트는 “철학도 진리 탐구의 존재로서 진리를 이해하는데 기여한다.”고 확신했다.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이 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의 역할을 하였듯이 헬라인들에게는 철학이 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Paidagogos)인 것이다.

클레멘트는 헬라인들이 철학을 통해 습득한 시작은 기독교인의 신앙을 심오하게 만드는데 사용될 수 있으며 그러한 지식을 소유한 이들이야 말로 진정한 지식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완전히 알 수 있다고 믿었다. 결국 클레멘트가 강조하려고 하는 바는 신앙이란 지식의 토대(土臺)위에 세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지식과 신앙의 관계’는 ‘이성(理性)과 신앙과의 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클레멘트는 ‘신앙과 이성’이 떨어져 기능을 발휘 할 수 없다고 보았다. “믿음의 시발자(始發者)로서 이성(理性)은 믿음보다 우선된다.”는 것이다. 신앙으로만 만족하고 이성을 사용하지 않는 자는 젖으로만 만족하는 어린 아이와 같다고 말한다. 이런 로고스 중심의 사상은 클레멘트의 성경해석, 신관, 역사관에 깊이 반영되어 있다.

  ⓷ 클레멘트의 성경해석과 신(神) 이해

클레멘트의 성경해석은 ‘문자적 해석’과 ‘우화적 해석’으로 대별된다. 그는 성경의 ‘문자적 해석’을 첫 번째 의미로 보고 ‘우화적 해석’을 두 번째 즉 진보된 의미로 이해했다.      

클레멘트의 신관(神觀) 역시 알렉산드리아의 전통을 반영한다. 그는 플라톤(Plato, BC427-347)의 영향을 따라 신(神)을 부정적인 개념으로 이해하여 “하나님은 속성(屬性)이 없으시고 본질(本質)의 범주를 넘어 계시며 하나님은 정의(定意)를 내릴 수 없는 분이므로 무엇이라고 직접적으로 말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클레멘트는 단순히 플라톤의 신관을 답습하기 보다는 성경의 삼위일체(三位一體) 신관과 조화시키려고 했다.

   ⓸ 클레멘트와 역사 이해

클레멘트는 현대적 의미의 역사관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역사의 구심점을 그리스도의 성육신에서 찾았다는 점에서 그의 역사해석은 의의(意義)가 있다. 역사의 주체이며 모든 지식과 피조물의 근원인 로고스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육신하셨다는 것이다. 이 성육신은 하나의 역사의 정점(頂點)이며 헬라와 유대 역사를 한 점에 모으는 전환점이다.

   ⓹ 클레멘트 사상 요약

클레멘트의 성경해석, 신론, 역사관의 구심점은 로고스이다. 결론적으로 클레멘트의 신학의 핵심은 현대적인 용어를 빌린다면 기독론이라고 할 수 있고 초대교회적인 의미로 표현한다면 로고스론이다.

이 로고스론은 헬라철학과 성경을 연결하는 교량이며 역사는 전체적으로 통일시켜주는 원리이고 또한 신구약을 총체적으로 연결시켜주는 근본원리이다. 헬라적 특징과 성경적 특징이 분명한 구분이 없이 한데 어울려 마치 현대판 종교다원주의를 제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레멘트의 사고 속에서는 헬라철학의 중요성을 무시하지 않으면서 기독교의 유일성을 제창하려는 내면적인 노력이 엿보인다.

정확히 표현한다면 클레멘트는 기독교 진리를 축으로 하여 헬라 철학을 끌어들여 조화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이런 클레멘트의 기독교 사상의 방법론은 오리겐(Origen, 185-254)의 신학의 원형(原形)이 되었다.

Origen(185-254)

(2) 오리겐(Origen, 185-254)

3세기 초반 기독교계에 혜성 같이 떠올라 정통(正統)과 이단(異端) 양측으로부터 끊임없는 비판과 찬사를 동시에 받았던 한 인물이 바로 오리게네스 아다만티우스(Oregenes Adamantius, 185-254, Alexandria)였다.

터툴리안이 서방신학의 선구자였다면 오리겐은 명실 공히 동방신학의 전통을 세워놓은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60평생 이단들과 로마 당국에 맞서 신앙을 변호하였으며 기독교 교육가로 활약하였고 유대인 사회를 향해 기독교를 증언했으며 교회 내에서는 영적 지도자로 일했다. 많은 사람에게 존경받았으나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의 저술과 사상은 역사 속에서 수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큰 영향과 영감을 주어왔다. 클레멘트의 사상이 알렉산드리아 신학의 초석(礎石)이 되었다면 오리겐의 신학과 사상은 알렉산드리아 신학의 골격(骨格)이 되었던 것이다.    

   ⓵ 오리겐의 성장 배경

오리겐은 기독교가정에서 신앙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세베루스 로마 황제(Lucius Septimius Severus, 145-211)가 교회를 박해할 때 오리겐의 아버지 레오니데스(Leonides)가 순교했다. 당시 어린소년에 불과했던 오리겐의 영혼은 순교에 대한 열망에 강력하게 사로잡혀 있었다.

놀라운 지성적 역량과 비범한 경건에 힘입어 오리겐은 18세에 데메트리우스 감독의 지명을 받아 알렉산드리아의 세례 지원자(catechumens) 학교를 관리했다. 오리겐은 모든 신자들에게서 훌륭한 명성을 얻었다.

오리겐은 엄격하고 금욕적이며 극도의 빈고한 생활을 하였는데 이는 친구들마저 놀라게 했다. 이처럼 오리겐의 금욕주의(禁慾主義) 성품은 그의 생활 전반을 지배했다. 열성적인 금욕생활과 더불어 신비주의(神秘主義)는 오리겐의 신앙생활의 한 근본 요소였다. 이 오리겐의 신비주의는 무분별한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는 성경에 뿌리를 둔 것이다. 오리겐의 금욕주의와 신비주의의 삶은 그의 교육활동, 설교, 논술 특히 저술 작업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오리겐의 명성을 더해 주었다.

   ⓶ 명성을 더해가는 오리겐

오리겐의 명성이 알렉산드리아를 넘어 외부 세계에 널리 알려지면서 개인적으로 오리겐의 가르침을 받으려는 사람들까지 생겨났다. 그러나 오리겐이 긍정적인 평가만 받은 것은 아니었다.    

유세비우스의 동시대 인물이며 오리겐의 비평가였던 포르피리(Porphyry, 232?-304?)는 오리겐이 헬라철학과 야만인(유대인)들의 말을 혼합시켜 놓았다고 불만을 털어 놓았다. 불만의 요지는 헬라인인 오리겐이 헬라문학을 공부했으면서도 이 야만인(유대인)들의 건방진 말에 현혹되어 자신의 학문의 업적을 야만인들에게 양도했다는 것이다.

이런 오리겐에 대한 비평은 객관성을 상실한 듯하다. 유세비우스도 인정하듯 오리겐이 헬라사상과 기독교를 조화시키려고 한 것도 아니지만 헬라사상과 기독교를 무질서하게 혼합시킨 것은 더욱 아니었다.

   ⓷ 팔레스틴에서의 작품 활동

오리겐의 연구열은 대단했던 것 같다. 유세비우스의 증언에 의하면 오리겐은 그의 생애에 무려 6,000여권이라는 상상을 초월하는 다량의 책을 저술했다.      

   ⓸ 제1원리와 콘트라 셀수스

‘제1원리에 관하여’(De Principus)는 오리겐의 작품 중에서 가장 뛰어난 신학서이다. 이것은 오리겐의 잘 훈련된 신학적 머리와 헬라풍의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 속에는 신론, 창조, 타락, 인간론, 윤리학, 성경의 역할과 성경의 해석 원리, 자유의지, 부활 등 기독교의 가장 기본적인 문제들을 다룬 제반 단락이 들어있다.

제1권에서는 삼위 하나님과 영적 존재들, 제2권에서는 물질적 세계, 인간과 인간의 영혼, 제3권에는 자유의지, 악마와의 투쟁, 선의 궁극적 승리, 제4권에서는 성경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 오리겐은 ‘하나의 연관성 있는 교리 체계를 구성하기를 원하는 자’가 기초적 원리로 삼을 원리들을 제1원리에서 이렇게 집약한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만물을 창조하시고 질서를 주시고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을 때 우주를 존재케 하셨다.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바와 같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동정녀(童貞女) 마리아에게 잉태하사 참으로 인간이 되셨다. 그리고 참으로 고난당하셨고 참으로 죽으셨다. 그는 부활하신 후 제자들과 함께 하시다 하늘로 올리우셨다. 성령께서는 그 존귀(尊貴)와 영광(榮光)과 권세(權勢)에 있어 아버지와 아들과 연합되어 있으시다.

그리고 인간이 이 세상을 떠난 후에 반드시 심판이 있으며 성도들은 영광스러운 몸으로 다시 부활할 것이다. 모든 인간의 영혼은 자유의지(自由意志)를 가지고 있으며 이들 악한 세력들은 죄악으로 영혼을 무겁게 하여 떨어뜨리려고 힘쓰기 때문에 믿는 영혼들은 그 같은 세력으로부터 자유로워 지기위해 노력해야 한다.”

영혼 기원(起源)에 관하여는 오리겐이 분명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선재설(先在說)을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오리겐에게 그리스도는 역사의 중심이자 구약성경 이해의 열쇠이며 구약의 율법과 의식을 대신하는 존재였다. 때문에 구약에 대한 문자적 접근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오리겐이 볼 때 구약성경의 사건들과 인물들과 규범들은 사실상 그리스도를 예표(豫表)하는 것이었다.

오리겐의 사상을 찾아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작품은 ‘콘트라 셀수스’(Contra Celsus)이다. 이것은 오리겐의 동시대에 살았던 이교도 비평가인 셀수스에 대항하여 기독교를 변호한 글이다. 셀수스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교회를 비평하였다.        

  • 기독교인들은 교리를 헬라 철학에서 얻지 않고 야만인인 유대인들에게서 얻었다.
  • 이적(異蹟)은 참으로 기적(奇蹟)이 아니라 단지 마술(魔術)일 뿐이다.
  • 기독교 교리는 비합리적(非合理的)이다.
  • 마리아는 간음(姦淫)한 여인이며 로마 병사와 불륜 관계에서 태어난  아이가 바로 예수다.(이에 대하여 오리겐은 만일 예수께서 그런 가정환경 출신이라면 간음을 반대하는 가르침을 설파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⓹ 오리겐의 신관(神觀)

오리겐의 신론(神論) 특히 삼위일체(三位一體)에 대한 가장 두드러진 공헌중의 하나는 ‘성자와 성부의 관계’에 대한 가르침이다. 오리겐은 성자를 성부와 같이 영원한 분으로 보았다. 오리겐의 성자의 영원 전 나심은 후에 삼위일체 정립에 중요한 기여를 하게 된다. 그러나 오리겐은 아들이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영원하시다고 보았지만 주저하지 않고 아들을 ‘제2의 하나님’(second God)이라고 부름으로써 성자와 성부가 다르며 성자가 아버지에게 종속(從屬)된다고 보았다.

Athanasius(296-373)

(3) 오리겐 이후 알렉산드리아 신학

알렉산드리아 신학은 그 성격상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296-373)를 중심으로 그 이전(以前)과 이후(以後)로 대별(對別)할 수 있다. 둘 사이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은 지난 1세기 동안 역사신학계에 큰 논란이 되어 왔다.

둘 사이에는 어느 정도 구분이 된다. 예를 들면 초기 알렉산드리아 신학자들은 형이상학적 ‘그리스도의 의미’에 대한 탐구에 관심이 있었지만 후기 알렉산드리아 신학자들은 ‘삼위신’(三位神)과 ‘성육신’에 관심이 있었다. 후기 알렉산드리아 신학자들은 ‘삼위신’과 ‘성육신’에 그 관심을 집중했고 그 의미에 대해서는 저들의 선배들이 이미 탐구한 것 이상 나가지 못했다.      

이런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에는 연속성이 존재하는데 바로 그것이 ‘신화교리’(神化敎理)이다. 플라톤 사상의 영향을 받은 클레멘트는 인간의 신화(神化)를 믿었으며 이런 ‘신화교리’는 후기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대변자인 아타나시우스 사상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즉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 인성(人性)이 신성(神性)인 로고스와 연합함으로써 불사(不死)의 존재가 된다는 것이 알렉산드리아 신학의 핵심이다.

이런 면에서 알렉산드리아 신학은 전기 후기를 막론하고 로고스 사상을 축으로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로고스가 성육신하심으로 불사(不死)의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은 로고스에 참여(參與)하는 모든 인간도 역시 그로 말미암아 불사(不死)의 존재(存在)로 새로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아타나시우스가 강조한 로고스의 성육신에 근거한 인간의 신화교리를 시릴에게서도 그대로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알렉산드리아 신학 속에서 흐르고 있는 기독론 사상의 맥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알렉산드리아 신학은 그 중심이 로고스 사상이며 그 로고스 사상은 또 구원론의 핵심을 구성한다.따라서 아타나시우스를 중심으로 그 이전과 이후를 구분하는 것은 어느 정도 긍정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본질적으로 오리겐 이전의 알렉산드리아 신학과 그이후의 알렉산드리아 신학은 연속성이 더 강하다. 로고스께서 사람이 되신 것은 우리에게서 죽음을 제거하시기 위해 불가시적(不可視的) 존재가 가시적(可視的) 존재로 나타나신 생명이요, 빛이요, 아버지의 로고스요, 우주의 통치자요 그리고 왕이시다. 아타나시우스에게 이 로고스는 성부와 동질(同質)이시다.(*) 글쓴 이 / 박용규 교수(총신신대원, 교회사, 성균관대학교(B.A.)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M.Div.) Western Evangelical Seminaryl(M.A.)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Th.M.)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Ph.D.) 출처 / ‘초대교회사’ 박용규 저, 총신대출판사 <다음에 계속>